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33화 (133/152)
  • [연재]황정허무검(133)

    임원영   2004-06-09 21:36:53, 조회 : 839, 추천 : 9

    아쉽지만 그걸 걱정할 틈이 없었다.

    결계를 파괴하고 삼백여명의 술사들이 죽어 없어졌으나 결계안에 갇힌 이상 무시무시한 법기에 대항할 방법부터 걱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유령왕조차 피하지 못한 법기를 무슨 방법으로.....

    '아!'

    어느새 이동한 것일까?

    진드기처럼 달라 붙던 괴인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은성이 파괴했던 결계의 구멍 부위로 몰려가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다.

    빠져 나가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신세.....

    독안에 든 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허공으로 분출되는 법기는 그 공격 방법이 신출귀몰 할 정도였다.

    혈화(血花)를 피어올려 그 자취를 드러냈던 유령왕에 비해 둔신법으로 모습을 감춘후 소리없이 이동하는 은성을 따라 잡을수 없자 법기가 수십가닥으로 분사되어 허공중으로 뻗혀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가닥으로 분사된 법기들이 난측하니 휘어지고 꺾어지며 허공을 헤집었다.

    아무리 묵귀영의 신법이라도 감당할수 없을 것 같았다.

    팔백여명의 술사들중 삼백여명이 줄어 있었지만 그 위력은 여전히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묵귀영에 이형환위를 펼치던 은성이 잘게 분화된 법기 한 자락을 맞고 휘청이자 드디어 자취를 찾았다는 듯이 사방에서 법기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잘게 분화되어 호신공이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충격에 일시지간 몸이 둔해짐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절세 신법인 묵귀영으로도 계속해서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사슴같이 고운 눈동자로 방긋 웃는 검후의 모습이었다.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수 없는 나만의 연인...

    험악한 상황임에도 문득 은성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검후와의 달콤한 기억을 추억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한 듯 허공중에 멈춰선 은성의 눈에 갑자기 이채가 뜨여졌다.

    생과 죽음조차 달관한 듯한 표정에 생기가 반짝인 것도 순간이었다.

    마지막 생의 의지를 불태우듯 전신에 남은 심기를 모조리 끌어모아 전력으로 묵귀영을 발휘함은 초인적인 의지 그 이상이었다.

    필사(必死)의 상황속에 갑자기 나타난 단 한가닥의 생로(生路).....

    그리고 남은 한 가닥의 생로를 넓히기 위한 마지막 도박.....

    묵귀영의 수법을 발휘하던 은성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벽력같은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타핫!"

    최후의 진력까지 끌어모아 단 한번의 외침을 토해내고서 장렬히 산화하고자 하는 최후의 발악인것도 같았다.

    해동 계룡산에서 인면오공의 절대살음인 귀곡성을 듣고 나름대로 연구한 음공으로 만취개가 전설의 천음곡에 비견하기도 했던 무공이었다.

    음파가 터져 나오고 몇가닥의 법기가 은성의 몸에 격중당한 것은 찰나적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그 찰나적인 순간속에서 누구도 예측치 못한 가공할 사태가 벌어져 버렸다.

    결계 안에서 곤륜산으로 법기를 쏘아 보냈던 하부 구멍에서 눈부신 청광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우르릉, 꽝, 쩌저적, 쿠쿵!"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소리런가?

    천번지복의 굉음과 뒤섞인 광채속에서 그토록 견고하던 결계가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청광의 존재를 누구도 예측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삶의 미련이 희미해지는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심안을 운용하던 은성이 미리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끝없이 들려오는 비명과 굉음속에서 일시지간 시간이 멈춘 듯한 적멸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지막 생의 몸부림을 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파괴와 죽음이 난무하는 공간속을 무의식인 듯 신법을 펼쳐 화룡검을 집어들고 사라지는 핏빛 인영이었다.

    피에 절어 둔신의 술조차도 별무소용이었지만 아직도 기력이 남았는지 신법은 눈부실 지경이었다.

    아니, 생의 마지막을 지탱해주는 최후의 잠력을 쥐어짜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수라장 같은 아비규환의 장내에서 여섯명의 괴인이 정신을 차렸을 시에는 이미 은성은 그림자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은성은 무의식적으로 최후의 진력을 내쏟으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적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관심밖의 일이었다.

    내 자신의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의식할수 없는 망아의 경지로 그냥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수백가닥으로 분화되어 위력이 약화되어 있었지만 결계를 벗어나기까지 몇 번이나 법기에 타격을 받았는지 기억조차 어려웠다.

    몸이 망신창이가 되었는지 성한 곳이 없었으며 진기마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며 최후의 잠재지기마저 폭출시켜 내달렸다.

    눈에 익숙한 전경이 보이고 마침내 목적한 장소에 이르자 그대로 멈추어 선채 굳어져 버렸다.

    최후의 잠력마저 모두 소진해 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안심이라는 듯이 입가에 미소까지 띄운채 쓰러져가는 은성을 받쳐주는 부드러운 섬섬옥수(纖纖玉手)가 있었다.

    검후의 따스한 손길이었다.

    느닷없이 달려온 은성을 적으로 오인한 무림맹의 군웅들이 뒤따라 들어왔다가 검후의 당부로 돌아가 경계 근무에 임했다.

    하지만 오히려 몰려와 주위를 철통같이 둘러싸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무당의 무인들이었다.

    보무당에 있어서 은성의 존재는 이미 실질적인 맹주 그 이상이었던 것이다.

    은성은 꿈을 꾸고 있었다.

    억겁의 혼암속에서 헤메도는 꿈이었다.

    목적없이 그냥 정처없이 헤메돌 뿐이었다.

    살갗이 찢어질 것 같은 추위와 극심한 허기에 지쳐 꾸부정히 기다시피 걸음을 내딛다가 문득 사방을 살펴보니 자신이 이름모를 험산의 끝자락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밑을 내려다 보니 눈앞이 아득해지고 현기증마저 일어왔다.

    하늘을 바라보니 시커먼 묵운이 한기와 한파를 서리서리 토해내고 있었다.

    몸이 걷잡을수 없이 심하게 떨려오고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몸은 산 위쪽으로 오르려 하고 있었다.

    오를수록 지형은 더욱 험해지고 추위도 몇배나 심해지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찢어진 살갗이 터져 나가고 동상에 걸렸는지 보랏빛 손가락이 퉁퉁부어 오르고 점차 마비가 되어졌다.

    칼날같은 바위에 찢겨져 보랏빛 손가락이 터져나갔지만 피조차 흘러 내리지 않았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물론이고 손과 발조차도 동상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공기가 희박했는지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제는 내려갈수조차 없었다.

    온몸의 고통이 너무 심해 무저갱처럼 검은 아가리를 벌린 절벽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도 싶었다.

    떨어져 내리는 짧은 시간이나마 평안한 안식을 취할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열정이 한가닥 남아 있었다.

    그것은 생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야겠다는 초현실적인 이상도 아니었다.

    그냥 오기였다.

    목적은 알수 없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것 포기할수 없다는 무대포적인 오기였다.

    반신이 마비되어 기어가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죽더라도 저 위에서 죽어야 겠다는 대책없는 오기인 것이다.

    숨한번 몰아쉬는 것이 감각이 사라져 버린 다리를 들어올려 한 발자국 떼어 놓는 것보다 어려웠지만 여기서 쓰러지기는 싫었다.

    하지만 의사와는 무관하게 몸은 차디찬 눈위로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다리를 들어 올릴 힘은 커녕 손을 내뻗을 기력조차 없었다.

    가까스로 머리를 들어올려 앞쪽에 턱을 고정시키고 조금씩 힘을 주었다.

    움직일 것 같지 않았는데도 몸이 조금씩 딸려오는 것도 같았다.

    턱조차도 동상에 걸렸는지 얼얼하여 힘이 들어가지 않자 누워서 등의 근육을 움직이니 미세하지만 움찔거려졌다.

    굼벵이보다 몇배나 느린 전진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을 포기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눈꺼풀을 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을때 비로소 은성의 움직임도 멈추어졌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었다.

    어느새 은성의 몸은 산정상에 이르러 있었다.

    뒤쪽으로는 몸부림치며 올라온 은성의 행보를 대변하듯 움푹 폐인 눈자욱이 처절하니 이어져 있었다.

    산 정상은 의외로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양광(陽光)이 산 저편에서 비스듬이 비추고 있기 때문에 산 정상만은 따스한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간질이는 훈풍속에서 은성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여 보니 꼼지락거려졌다.

    꿈일까? 생시일까?

    분명치 않아 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수 없었다.

    힘겹게 눈을 떠보니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췌해진 검후의 모습이었다.

    많이 울었는지 눈가에 눈물 자욱이 완연한 사랑스런 검후가 눈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손을 내뻗어 검후의 볼을 만져보니 정말로 꿈은 아니었다.

    자신이 무사히 깨어난 것이 그렇게 기뻤는지.....

    검후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망울져가고 있었다.

    "깨어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사부님과 사숙님의 모습이 보였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가만히 검후가 말리었다.

    "오라버니, 더 누워 계셔요. 아직은 안정이 더 필요해요."

    은성의 상체를 지긋이 누른 검후가 손을 옮겨 은성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그리고 은성이 무사히 깨어난 것에 가슴속 깊이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를 드렸다.

    몇 번이나 되뇌였다.

    어젯밤 자시경에 쓰러졌다가 해가 중천에 뜬 지금 깨어났으니 은성이 깨어난 것은 거의 여섯시진 만이었다.

    생각보다는 몇배나 빠른 회복속도였다.

    하지만 눈을 감고 가만히 운기를 하여보던 은성은 크게 당황해 하고 있었다.

    상단전이 폐쇄되어졌는지 심기는커녕 심안조차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중단전의 내단에 갈무리된 태극진기조차 마음대로 운용할수 없었다.

    현천교에서 탈출할 때 너무 무리한 것 같았다.

    심기조차 폐쇄되어 지다니.....

    유령왕을 잃고 심기가 폐쇄당하고 태극진기마저 마음대로 사용할수 없는 처지로 전락되었다니 눈물이 솟아 나올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를 앙다물고 표정을 부드러이 하였다.

    검후와 사부님에게 못난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는 오만 잡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져 가며 번뇌가 끊이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이라 직감한 은성이 마음을 느긋이 풀어 잡생각을 정리시키고는 자기 최면의 수법으로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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