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30)
임원영 2004-06-03 01:30:32, 조회 : 793, 추천 : 7
시선을 돌려 저 멀리로 사라지는 마지막 괴인을 바라보던 은성의 신형이 바람인양 흩어져 형체를 감추었다.
묵귀영의 신법을 발휘하여도 따라 잡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괴인의 정체를 밝혀 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굳이 전속력을 낼 필요는 없었다.
괴인과 같은 가공스런 무위를 지닌 존재들이 몇 명이 있는지에 따라 무림맹에서 수립할 전략과 전술이 달라질 터이었다.
추적이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인 듯 은성의 신형은 쉴사이 없이 좌우로 허깨비처럼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허공중에 허상조차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
동방파의 덕수 진인이 천부경에서 깨달음을 얻어 창시한 보법인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은 만상을 제압하는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불경(佛經)에 부처님이 일보를 내딛으면 산천이 진동하고 험산심수(險山深水)의 괴수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는 구절과 결부시켜 창안하였지만 다소 상상력이 가미된 무공이었다.
그런데 천부경의 깨달음이 덕수진인에 비해 훨씬 높아진 지금 일시무시일의 위력은 초식을 창시한 덕수진인의 상상 이상으로 배가되어 있었다.
문상에게서 타격을 받은 후이지만 경천동지할 위력을 가진 괴인을 꼼싹달싹 할수 없게 만들 정도로 일시무시일의 위력은 개세적이 되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절정의 경지에 이른 일시무시일의 보법에 비하면 무당파의 일자혜검(一字慧劍)은 아직 완벽치 못한 미완의 무공이었다.
하지만 일시무시일에 구속된 괴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무공이었다.
우주삼라만상의 태동과 소멸의 무궁한 조화와 힘이 깃든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태극이 음양으로 분화되듯이 거역할수 없는 조화속 극살지기속에 지상 천국이 아닌 아수라 지옥으로 영원히 사라져 갈 수밖에 없었다.
무상에게서 훔쳐 배운 무형검 또한 진실로 감탄스러운 무공이었다.
송문고검의 검날 뒤에 무형시(無形矢)를 숨겨 비검술로 쏘아 보냈는데 괴인의 철통같은 호신강기를 종이장처럼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아직은 화후가 부족하여 무형시를 되돌려 받을수는 없었지만 공전절후의 위력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으로 괴인의 뒤를 따르던 은성은 괴인이 현천교의 무리가 몰려있는 곤륜지로 근처의 작은 야산으로 빨리듯이 스며든후 심안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자 다소 당황스러워 했다.
심안에서 갑자기 사라지다니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빽빽하게 우거진 숲속으로 숨는다고 하여도, 심지어 땅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도 심안에서 갑작스레 사라질수는 없는 것이다.
강력한 진법속에 숨어들어도 이처럼 갑작스레.....
'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은성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무림맹에서 겪었던 결계(結界)가 떠 올랐던 것이다.
심안이 아닌 영안이 뻗혀져 나오는 신비지처.....
심안으로 바라볼수 없고 가진바 무공으로도 파괴할수 없었기에 아직도 의문으로 점철된 괴이한 건물.....
그곳에도 결계가 펼쳐져 있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역시 예상대로였다.
작은 야산속에 거대한 규모로 결계가 펼쳐져 있었다.
이들의 음모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수 없었다.
신법을 극대화시켜 감시자의 눈을 속일수도 있었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 은성이 상의속에 간직한 부적 뭉치중 한 장을 뽑아들었다.
사숙인 구천진인이 전해준 육합천서에 수록된 둔신법(遁身法)을 펼치는데 사용되는 부적이었다.
내기를 담아 부적을 머리 위쪽으로 살짝 던져 올린 은성이 동북쪽을 향해 왼손으로 뇌결(雷訣)을 짚은후 둔신법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아처중앙(我處中央), 태을사자(太乙使者).... 급급여(急急如) 태을진인율령(太乙眞人律令)"
주문을 외운후 뇌결을 짚던 손가락으로 머리 위쪽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부적을 가르키자 손가락 끝에서 선홍의 피 한방울이 뻗어나가 부적에 닿았다.
순간, 핏방울이 부적속으로 빨리듯이 스며들며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손바닥 넓이 밖에 안 되는 부적이 삽시간에 주욱 늘어나더니 커다란 보자기로 화해 은성의 전신을 덮어버린 것이다.
부적이 덮여지는 머리부분부터 은성의 모습이 점차적으로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은성의 신발 부위까지 덮어가자 허공중에 인적은 사라지고 완전한 고요만이 흘렀다.
잠시후 둔신법을 펼친 은성의 신형이 결계주변을 휘돌았다.
묵귀영의 신법으로 유령왕처럼 은밀히 이동하며 면밀히 관찰하였지만 결계중에 약해보이는 부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괴인이 스며들어간 부위가 있을 터이고 그 부분은 약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괜한 시간만 소모시킨 것이다.
결계속으로 은밀히 침입할수 있는 방법이 없자 은성은 또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았다.
결계속의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결계의 강도를 측정해 보고자 함이었다.
결계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적들이 눈치챌 것을 저어한 은성이 손가락 끝으로 바늘보다도 더 가는 무형검을 만들어 내었다.
심기를 집중시켜 무형검의 위력을 증가시킨 은성이 무형검을 어검의 방법으로 쏘아보내자 무형검이 빛과 같은 속도로 결계속을 파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다행히 결계가 무형검을 막아낼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사실만을 인지할수 있었을 뿐이었다.
무형검이 파고든 바늘구멍은 순식간에 메꾸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태극진기로 동방파의 구명지공인 미륵지(彌勒指)를 시전하여 보았다.
'쉬익..텅!'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미륵지에 명중된 결계 부위가 격한 진동을 보였지만 강한 반탄력만 느낄수 있었을 뿐이었다.
'휘리릭..휘익'
잠시후 결계 외곽의 여러 곳에서 하얀 그림자들이 날 듯이 달려왔다.
그리고 주변이 백영으로 넘쳐나도록 이잡듯이 수색을 한후 일각여 지나서야 흩어져 갔다.
결계 안쪽에서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일각여나 헛수고한 백영들이 물러나자 결계 상부 백여장 허공의 대기가 잠시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였다.
결계 위쪽에 멈추어선 은성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결계는 침입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아주 작은 부위로 무형검을 집중시켜 쏘아보내서야 간신히 뚫을수 있을뿐 일반적인 장세나 검공으로는 파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음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결계를 그냥 지나쳐 돌아갈수는 없었다.
일자혜검을 전력으로 펼친다면....!
하지만 모험이었다.
아직은 미완의 무공이고 만약에 간신히 성공하여 결계의 일각을 무너트린다고 하여도 이만한 위력의 결계를 펼친 존재들과의 승부를 자신할수조차 없었다.
둔신법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자신의 존재가 들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여유를 가지고 최적의 대처방안을 강구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이 가라앉고 심령이 고요해지자 대처방안이 술술 떠올랐다.
우선 심안을 극도로 발휘하여 결계 내부를 살펴 보았다.
심안을 발휘하여도 결계 내부의 전경을 바라볼수 없었지만 심기를 모두 심안 발휘에 운용하자 희미하게나마 결계 가장자리의 전경이 심안속에 보여지고 있었다.
결계 가장자리 쪽에는 일장간격으로 현천교의 술사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 이들의 법력이 한데로 집중되어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기와 중단전에 간직된 내단의 태극진기를 총동원 하였지만 결계 안쪽의 상황을 선명히 바라볼수는 없었다.
다만 결계 중심쪽에 역시 현천교의 술사로 짐작되는 몇백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어렴풋이 살펴볼수 있었을 뿐이었다.
극도로 집중하여 심기를 발휘한 때문인지 잠시 어지럼증을 느낀 은성이 심기를 거두어 들여 심신을 추스렸다.
일다경도 안되어 정상으로 회복되자 이번에는 심안을 운용한채로 결계의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결계 주변을 돌던 은성이 멈춘 곳은 곤륜파의 청령전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그곳에 서서히 내려앉은 은성이 다시금 심기를 집중시켜 심안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결계 내부와 같은 강력한 방어막이 없었기 때문인지 은성의 심안은 전혀 거침이 없었다.
은성이 결계 주변을 돌며 발견한 것은 땅속으로 흐르는 거대한 기운이었다.
심안보다는 훨씬 불순한 기운이었지만 장강대하처럼 엄청난 기세를 담고 땅 밑으로 노호탕탕 흘러가는 기운은 은성조차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 기운이 청령전이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술법으로 수백명의 진기를 법력(法力)화하여 만들어낸 잡스러운 법기(法氣)이다 보니 은성의 심기가 슬쩍 섞이어 들어감을 알수는 없었으리라.....
급류처럼 내달리는 법기에 합류된 심기를 따라 심안도 발휘되어져 가고 있었다.
청령전이 위치한 곤륜산의 첫 번째 봉우리의 초입에 이른 법기(法氣)가 갑자기 지저 깊숙이로 부채살처럼 넓게 퍼져 나아가자 은성의 심기도 기호지세로 퍼져 나아갔다.
심기가 퍼지자 심안이 다소 희미해졌지만 그렇다고 심기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기는 태극진기와는 달리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좁히면 콩알보다도 작지만 길게 늘이면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법기는 청령전이 있는 봉우리를 넘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여섯번째 봉우리에 이르러서야 멈췄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펼쳐진 법술이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이유로 산속 깊숙이 법기를 보내는 것일까?
무엇을 탐색하는 것일까?
알수는 없었지만 이들이 펼친 법기는 이삼일만 지나면 곤륜파의 최대 성지인 자령전이 위치한 아홉 번째 봉우리에 이를수 있을 것 같았다.
곤륜산은 영산으로 유명하고 지기(地氣)가 강성하였다.
실제로 심기를 펼쳐 여섯 번째 봉우리까지 이르는 동안 은성은 곤륜산의 지저에 흐르는 지기의 강대함에 몇 번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곳은 현천교의 무리가 보낸 법기를 다 합친 것보다도 강한 지기가 산맥을 타고 지룡(地龍)인양 내달리고 있었다.
그럴때면 은성의 심기가 숨어든 현천교의 법기조차 지저의 지기를 타고 앞쪽으로 이동하였다.
자령전이 가까워질수록 지기가 강해지고 활발해졌는데 이와 비례하여 법기의 나아가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기중에는 끝간데 없이 깊은 지저속으로 무한정 빨려 들어가는 종류도 있었는데 법기의 일부는 그곳조차 탐색하듯 섞여 들어갔다.
아마도 곤륜산 지저에 펼쳐진 극강한 지기의 분포와 이동 경로를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곤륜산맥의 지저 깊숙이에 위치한 지기(地氣)를 살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여섯 봉우리 전반에 걸쳐서 넓게 퍼져 있는 미미한 흐름의 법기를 한군데로 모아 지상쪽으로 터져 나오도록 시킨다면 방원 삼십장을 초토화 시킬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일격이 끝나면 허공중으로 산화되어 흩어진 법기를 다시 주워 담을수는 없으리라.....
들인 공과 희생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성과가 분명하였다.
지저로 쏘아오는 기운을 느낄수 있는 초절정의 고수들은 빠져나갈 확률이 많을 터이니 말이다.
음모의 냄새는 짙게 풍겼지만 아직은 진의가 확실치 않자 은성도 만사를 잊고 심안으로 곤륜파의 지저에 흐르는 지기의 분포도와 강세를 살펴 기억해 두기 시작하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후 심기를 모아서 지저(地底)로 흡입되듯 빠져 들어가는 강대한 지기를 따라 들어가 보았다.
백장, 이백장..끝이 없었다.
오백여장이나 지하 깊숙이 파고든 지기가 다시 위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야 은성의 심안은 뒤돌아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흩어져 퍼져 나가는 시간은 길었지만 거두어져 한데로 뭉쳐지며 뒤돌아 오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은성에게서 뻗어 나갈때는 결계속에서 뻗어나간 법기를 따라 면밀히 탐색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어졌지만 되돌아 올때에는 법기에 상관없이 은성에게로 직접 날아오면 되기 때문이다.
빛살같은 속도로 날아온 심기를 모두 거두어들인 은성이 눈을 떴을 때에는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무렵이었다.
어제밤 펼친 둔신법이 양력(陽力)을 받아 소멸되어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길게 숨을 한번 들이쉬는가 싶더니 은성이 앉아 있던 대지가 미세하니 흔들렸다.
곤륜지로와 청령전을 이어놓은 허공중에 햇살이 비추어지자 햇살속에서 희미한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비록 잔영밖에 남지 않은 희미한 형상이지만 청령전에 도달할 무렵에는 온전한 형상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천신이 하강하듯 깃털처럼 서서히 내려서는 인영은 다름아닌 은성이었다.
일전에 선보였던 허공부유공(虛空浮游功)이 또다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