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29)
심안을 운용하자 일시에 장내 상황이 파악되어졌다.
또다시 삼천진인의 술법에 당한 듯 선명한 백색 형상을 띤 괴인 한명이 무상의 무형검에 맞서 막상막하의 승 부를 벌이고 있었다. 속도나 위력면에서 초저녁에 왔던 괴인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무상의 무형검이 천변만화하며 괴인을 몰아쳐갔지만 검붉은 혈살기로 강기의 폭풍을 일으키는 괴인의 위력도 이에 못지 않았다. 신법도 어찌나 빠른지 백색으로 빛나는 신형이 홍광속에 숨어 시력으로는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다.
경천동지의 대결이 벌어지는 주변 이십장은 그 무엇도 남아나지 않았다.
둘의 무위를 비교컨대 쉽사리 승부가 날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정작 위험한 곳은 다른 장소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은성은 심안으로 두명의 괴인이 더 있음을 알수 있 었다. 한명은 풍령자와 유심초 게다가 삼천진인까지 합세하여 허공중에서 난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직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마지막 한명이 문제였다. 마땅히 상대할 고수가 없는 마지막 괴인은 우리를 벗어난 야수처럼 종횡무진 광분하고 있었다. 벌써 백여명 이상의 시체가 즐비하니 쓰러져 있었으며 청령전과 부속 건물등도 이 괴인에 의해 대부분 부서진 상태였다.
괴인의 신형이 번뜩이면 어둠속에 검붉은 혈화가 어김없이 피어 올랐다. 일수에 십여명 이상이 죽어 나자빠지 기도 하였다.
그런데 괴인이 두려워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에 견제를 받는 듯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이 여실하였다. 하지만 이미 피맛을 보아서인지 광기가 쉽사리 제어되지는 않았다. 눈앞에 십여명의 고수들이 몰 려있는 것을 발견하자 신형을 폭출시키면서 붉은 장심을 내뻗었다. 장심에서는 아침 이슬인양 백여개의 붉은 장환이 서리서리 엉기어져 있었다.
그런데 장환을 방출하려는 순간 또다시 호신강기가 뒤틀릴 정도로 강한 충격파가 옆구리를 관통해왔다. 조금 만 더 강했다면 호신강기가 파괴되어졌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한 충격파였다. 괴인이 주춤거리더니 휘청이며 가까스로 땅에 내려섰다.
무당파의 삼천진인에게 동료중 한명의 은신술이 파해된후 극도로 조심하여 아직은 은신술이 제 역할을 유지하 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괴인은 차가운 눈빛 하나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 눈빛을 접하자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암중에 자신을 공격한 놈이 분명한 것 같았다. 푸른색 학창 의를 입고 손에는 백우선을 든 것으로 보아 무림맹에서 문상이라 불리는.....
문상이라니!
믿지 못할 상황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살펴 보았지만 역시나 문상이었다. 무공(武功)의 무(武)자도 모른다는 백면서생으로 알려진 문상이 자신의 호신강기를 위협할 정도의 고수라니.....
하늘조차 놀라 나자빠질 비사가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견제만 하였을 수도 있었다. 자신보다 몇배나 고수일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견제한 수법이라는 것이.. 결코 무공이랄 수가 없었다. 말로만 듣던 초능력..염력(念力)을 사 용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귀명자가 말한 절대초인은 문상의 또다른 모습이 분명할 터이었다. 절대적 지혜에 능력의 한계조차 짐작할수 없는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 할 존재였다. 오늘 출전한 동료 두명과 함께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반드시 죽여 야 할 존재이었다. 결심을 굳히고 서서히 몸을 띠우던 괴인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홱 돌리었다.
"....."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쓴 웃음을 지었다. 뒤통수가 따가와 또다른 절대 초인이 있는가 싶어 고개를 돌렸 는데 많이 봐줘도 약관이 안돼 보이는 젊은이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상 때문에 너무 긴장돼 있었던것 같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웃음으로 긴장을 완화하려던 괴인의 안색이 왠일인지 또다시 굳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땅에 떨어진 것을 줍기라도 한 듯 몸에 어울리지 않는 피묻은 송문고검을 든 약관의 젊은이가 은신술로 모습 을 감춘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둘러싼 대기가 술법에라도 걸린 듯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가 굳어져 가는지 자신의 몸이 옭죄어 가는지 쉽게 판단이 들지는 않았지만 원인은 쉽게 알수 있었다.
앞쪽에서 걸어오는 젊은이의 보법 때문이었다. 일보 일보 내딛을 때마다 대기가 비명을 지르고 지반이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걸음을 멈춰 오장여 앞에 멈추어 섰을 때에는 하늘이 내려앉아 머리를 누르는 듯, 그리고 대 지의 음신이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듯 발걸음조차 쉽사리 옮기지 못할 것 같았다.
내공을 운기하였는데 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태산이라도 일격에 부서트릴수 있을 것 같은 도도한 흐름 이 용트림하듯 꿈틀대고 있었다. 내기를 조절하여 호신강기를 몇겹 더 치고서 눈앞을 보니 약관의 젊은이가 왼쪽으로 비켜든 송문고검을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동시켜가고 있었다.
장난하나? 참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억!....."
그런데 피식 실소를 베어물려던 괴인의 안색이 급격히 변화되어지기 시작하였다. 혼돈(混沌)에서 무극(無極)으로 변화되며 우주가 꽃송이처럼 피어나는가..... 환상처럼 검은 어둠이 혼암의 고요로 다가오더니 서서히 꿈틀거려 질서와 조화로 변화되어지고 있었다. 무극에서 태극이 잉태되어지는 듯 거대한 빛 덩어리가 섬광으 로 폭출되고.....
괴인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차 있었다. 극도의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혈색은 서서히 사 라져 가고 있었다. 허공중에서 번쩍하며 나타난 은성이 땅에 떨어진 검 하나를 주워들었을때 은성은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천천히 걸어 송문고검으로 아무도 없는 허공을 베어갈 때에는 군웅들중 단 한명만이 은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우연인지 근처에 있었던 무당파의 진허였다. 하지만 은성의 앞에 괴인으로 추정되는 인간이 손가락질을 하며 반토막으로 갈라져 가자 몇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졌다.
"해동신룡이 괴인을 처치했다!"
누군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터트리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졌다.
"이럴 수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검강은 커녕 이기어검으로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던 무적의 괴인이 평범한 송 문고검에 두 동강이 나다니.....
은성의 신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서히 허공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완벽한 허공답보(虛空踏步)의 신법이었다. 무상과 풍령자만이 능수능란하게 펼칠 수 있고 삼천진인과 무림맹주조차 전력을 기울여서야 간신 히 펼칠수 있는 절대 신법을 너무도 여유롭게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뒷동산을 산책하는 것 같았다.
은성이 다가서자 허공중에 혈살기로 붉은 홍광을 발해 모습을 감춘 괴인이 당혹스런 표정을 발했다. 절대 초 인을 유인하기 위해 본 실력은 조금 남겨둔채 여유롭게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화산의 무공을 익힌 도인과 기괴한 녹색검은 방어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가끔씩 뛰어 올라와 기괴한 술수로 공격하는 무당의 삼천진인이 갈수록 위협적이었지만 아직은 충분히 버틸만 하였다.
그런데 저 밑에서 서서히 걸어 올라오고 있는 젊은이의 무공이 결코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해동신룡이라 했던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외침대로 동료 한명을 혼자서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주저할 수 없는 결단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유롭게 판단할 시간은 없었다. 저 정도 어린나이로 허공 답보를 펼칠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반노환동한 절대초인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결단이 서자 마자 전 내력을 기울여 뇌전이 무색할 속도로 몸을 날리었다.
힐끗 보니 무상과 대결하던 동료도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눈치챘는지 회피 동작을 하고 있었다. 무형검에 당 했는지 몇군데 커다란 상처자욱이 눈에 띠였다.
"헉..!"
언제 검을 날리었다는 말인가?
밑에서 허공을 밟고 올라오던 젊은이가 들고 있었던 송문고검인 것 같은데.....피할 겨를이 없었지만 실상 큰 위협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층층무상공을 익힌후 가장 자신있는 것이 바로 호신공(護身功)이었기 때문 이다.
몸은 금강불괴지신에 가까워졌으며 겹겹이 쳐진 호신강기는 검강이나 이기어검 조차도 쉽사리 방어해 낼 수가 있었다. 보아하니 낡은 철검을 이기어검도 아니고 비검술의 술법으로 던져낸 것 같았다. 검이 날아오는 속도 는 상상 이상이었지만 검 주변에 강기조차 서려 있지 않으니 열두겹의 호신강기중 한겹조차 뚫지 못할 것 같 았다.
무시하고 신법을 더욱 높이려던 괴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이 하얗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안이하고 자기 모순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토록 평범한 위력이라면 어떻게 이토록 불가사의한 속 도로 섬광처럼 날아올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도망치기를 결심한 것은 해동신룡이라 불리는 자가 혼자서 자 기 동료를 죽였다는 외침 때문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송문고검이 최초의 호신강기에 부딪치고 있다는 찰나적인 감각은 있었지만 다행스럽게 그후로 아무런 느낌이 없자 괴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한숨소리가 뒤로 갈수록 옅어져 가고 있었다.
눈앞으로 붉은 혈화를 피우며 날아가는 것이 송문고검이라면 자신은.....
순간 아릿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넘쳐나던 힘이 급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음이 느껴져 왔다. 단전이 뻥하니 뚫 려져 버린 것 같았다.
'캬오오오!'
재수없는 울부짖음에 녹색검이 뒤통수 쪽으로 파고들고 있음을 알수 있었지만 저항할 힘이 모두 사라진 이후 였다.
'쉬아아악'
괴이한 소리가 난후 눈앞에 목없는 시체가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저것이 설마 나일까?
죽어가는 마당에 쓸데없는 의문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