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27화 (127/152)

연재]황정허무검(127)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이미 제 모습을 거의 감춘 괴인을 다시 보이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해 보였다.

입을 다물어 결주(結珠: 침이 구슬 맺히듯 앞뒤로 이어짐)하고 눈을 감고 존념한후 동향하여 4태제(太帝)에게 읍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구기(九氣)가 청천(靑天)에 있고 원시(元始)에 상정(上情)이 있으니 황로존신(皇老尊神)께서는 삼광(三光:해,달,별)이 밝게 비치고 태선(胎仙)이 온누리에 가득하여 제령(帝靈: 옥황상제의 영)을 얻을수 있도록 도와주소 서.'

빌기를 마치자 삼천진인의 몸에서 성스러운 광채가 피어 올랐다. 눈을 번쩍 뜨고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가리 키자 손가락 끝에서 히끗한 무엇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허공중으로 꺼져들어가 버렸다.

태미영서(太微靈書)에서 익힌 섭혼(攝魂)하여 귀매(鬼魅)를 부리는 법술 이었다.

법술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까?

마지막 불티조차 태워 없앤후 어둠의 일부인양 종적이 완전히 사라진 괴인이 히끗한 안개처럼 형상을 보이는 가 싶더니 그대로 백인(白人)으로 화해 정체를 확연히 드러내었다. 어찌된 일인지 백광은 어둠속에서도 선명 히 부각되어지고 있었다.

"화르르륵"

괴인의 몸에서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홍광..... 그러나 백광은 사라지지 않았다.

초극의 내공으로도 몸 바깥을 뒤덮은 희끗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자 괴인이 다소 당황해 하였다. 기회는 이때 다 싶었는지 풍령자와 유심초의 공세도 갑자기 기운을 더하였다.

'쉬리릿, 피윳'

난데없이 들려오는 소성..... 칠흑같은 어둠을 섬전처럼 가르는 것은 금룡각의 묵사풍이 쏘아낸 묵시(墨矢)였 다.

'피릿..핏..쾅'

연달아 날린 세 개의 묵시중 두개는 쳐냈지만 유심초를 경계하느라 마지막 한개는 호신강기에 의존해야 하는 괴인이었다.

'큭'

처음으로 들려온 낮은 비명소리.....

그러나 중대한 타격을 입힌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동작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금새 원래 속도로 환원되어 백상 잔상으로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조금은 불리하다는 판단이 들었는가?

괴인이 유심초와 풍령자의 공세에 갑자기 초강세로 반격을 가하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방향을 틀어 청령 전 쪽으로 몸을 날렸다. 충분히 도망갈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청령전 쪽으로 날아가다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백룡이 어둠을 가르는 듯 긴 꼬리를 끌며 낮게 날아가는 괴인의 뒤를 풍령자와 유 심초가 여전히 뒤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십장여나 뒤쳐져 있었다.

청령전을 넘는다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문상의 안색이 창백하니 변화되어졌다. 청령전을 넘어 저 멀리에, 아홉 봉우리 저 멀리에 곤륜 본전인 자소전(紫小殿)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초극고수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데 괴인이 자소전에 침입한다면..... 두 번째 참상이 재현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막아야만 하였다.

하지만 벌써 청령전을 넘고 별각을...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던 문상이 안색조차 변 화시켰었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안색을 편후 평소 문상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느긋하고 여 유로운 모습이었다.

야천을 가르는 백룡처럼 별각의 상부를 지나가던 괴인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처박힌 것은 그 직후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괴사인 것이다. 심지어 괴인의 뒤를 바짝 따르던 풍령자조차 상황 파악이 안된 듯 허공에서 성급 히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유심초만이 기회다 싶었는지 괴인을 향해 섬광처럼 쏘아져 갔다.

하지만 괴인은 멀쩡한 듯 싶었다.

괴인의 등 뒤를 유심초가 꿰뚫으려는 찰나 갑자기 괴인의 등 뒤에서 홍광이 번쩍이며 솟구쳐 오르더니 녹색의 유심초를 감싸듯 사로잡아 버렸다.

'크아아아!'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죄어오는 홍광을 벗어나기 위해 유심초가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을 쳐댔지 만 조금 역부족인 것 같았다. 풍령자의 검강지기가 이기어검으로 펼쳐지며 도와준 덕분에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는데 크게 데인 듯 허공중에 멤돌며 눈치만 보았다.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한 것 같았다.

혈살기(血殺氣)를 뿜어내 풍령자조차 물러나게 한 괴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었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땅으 로 곤두박질 쳤을까?

원인을 몰라 자세히 괴인을 살피던 풍령자의 안색이 미세하니 변화되었다. 조금전 괴인의 등뒤 명문혈쪽에 상 처 자국이 있었는데 일어선 괴인의 앞부분 동일한 위치에도 비슷한 상처자국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명 문혈을 벗어났지만 무언가가 괴인의 몸통을 앞뒤로 관통해 나간 것 같았다. 입가에 조차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경상은 아닐것이다.

그런데도 괴인은 별 타격이 없는지 여전히 가공무쌍할 무위를 발하고 있으니 그 경지가..... 게다가 이기어검 조차 튕겨내고 검강조차 호신강기로 막아낼 경천동지할 위력을 지닌 괴인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풍령자가 놀라움을 추스릴 시간적 여유는 결코 오지 않았다.

성난 기세로 강기가 베인 장풍을 날려 별각(別閣)을 일격에 날려버린 괴인의 가공할 무위에 입술을 앙다물었 는데 평지처럼 폐허가 되어버린 별각의 잔해속에서 서서히 걸어나오고 있는 인영(人影)을 보며 또다시 놀라야 만 했기 때문이다. 폭풍처럼 휘몰린 장세에 처참히 짓뭉개진 폐허속에서 인영이 무사하다는 것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폐허속에서 빠져 나오는 인영이 허공답보의 절세 신법으로 서서히 공중으로 걸어나오고 있음에 놀란 것도 아니었다. 평지를 걷듯 한발 한발 유유히 걸어나오는 인영의 오른손에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가는 백광이 어린 검의 모습..... 분명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형검의 경지였기 때문이다.

내기를 형상화 하여 검을 만들고 형상은 물론이고 길이조절까지 자유자재로우며 금강석을 무우 자르듯 할수 있다는 무인들이 꿈속에서조차 바라는 전설적인 경지.....

무림인중 무형검에 성취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무림맹의 전대 맹주조차 극진히 존대했 다는 무림맹의 무상(武相)이었다. 무너진 별각속에서 나온 인영이 무상임을 확인한 풍령자가 허공에서 미끄러 지듯 지상으로 내려섰다.

아무리 괴인의 무공이 강하다고 하여도 무형검을 완성한 무상에게는 대적키 힘들 것임을 예상한 것이다. 분위 기가 심각해짐을 느꼈는지, 아니면 아직도 기회만을 노리는지 유심초도 허공중에 정지한채로 상황을 주시하고 만 있었다.

'슷'

일보씩 조용히 내딛던 무상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허공중에 생겨나는 그림자이런가?

언제 다가들었는지 백색의 무형검이 괴인의 신형을 날카롭게 갈랐다. 무공이 약한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알 아차릴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빠름이었다. 신법에는 자신이 있었는지 괴인의 신형이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 다. 하지만 무형검을 떨칠수 있을 정도로 빠른 것은 아니었다.

'팟..피릿'

무형검에 스친 괴인의 피부가 날카롭게 갈라지며 허공으로 핏방울을 혈화(血花)로써 피워 올렸다. 괴인의 무 공경지는 초식을 넘어서 있었다. 초식으로 무공을 발휘하는 경지를 넘어 순간순간 새로운 초식을 창조하고 변 초가 자유자재로운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혈살기가 폭죽처럼 피어 오르고 권강(拳剛)에 장강(掌剛), 가끔씩 장환(掌環)조차 쏟아내며 무상을 핍박하였 지만 공세보다는 수세가 대부분이었다. 손바닥 너머로 한꺼번에 수십가닥으로 꽃송이처럼 피워져 뿜어낸 장환 이 하늘을 가로막는 방패처럼 일순간 넓게 퍼진 무형검의 검막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스러져 버리고 층층무상 공(層層無常功)으로 강력하게 둘러친 호신강막이 맥없이 찟겨져 나가며 등판에 깊고 긴 상처가 생겼다.

혈살기를 수형(手形)으로 만들어 공간을 휘돌려 변화막측이 펼쳐낸 공세도 갑자기 몇가닥으로 늘어난 무형검 에 걸려 처참히 찟겨 나가고 기사회생의 술수인 축공술(縮空術)조차도 갑자기 주욱 늘어난 무형검에는 속수무 책이었다.

무상과 대결을 하는 짧은 사이에 괴인의 몸이 급속도로 혈인으로 변해갔다.

단 한명이서 청령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공포의 괴물이 무상에게 상대조차 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죽었어야 할 괴인이 치명상을 모면하고 아직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형검의 경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대적할 상대가 아님을 인정한 것일까?

기세를 높여 공세를 취하는척 혈살기를 배가하던 괴인이 갑자기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진짜로 도 망가려는지 이번에는 현천교의 무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쉽게 보내줄 무상이 아니었다. 괴인에게 공포 스러운 존재로 처절히 각인된 무형검이 무상의 손을 떠나 괴인에게 짓쳐들고 있는 것이다.

이기어검의 수법일까?

아니었다. 이기어검 보다도 몇배나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이기어검 보다도 몇배나 강한 파괴력이었다.

'파팟'

이기어검조차도 튕겨내던 괴인의 호신기공이 맥없이 터져나가 버렸다. 괴인의 몸을 가르고 허공을 날던 백광 이 크게 멤돌아 무상에게 회귀한 것은 잠깐이었다. 그사이 허공에서 혈화가 피어오르고 혈화 밑으로 어깨죽지 까지 뭉텅이로 베어진 괴인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내려왔다.

저멀리 어깨 한쪽이 크게 도려져 나간 괴인이 최후의 여력으로 도망을 치고 그 뒤를 유심초가 따르며 괴롭히 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저 정도 중상이면 마음이 흐트러져 내기가 불완전해지게 될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유심초의 재물로 화할 터이고 말이다.

하지만 괴인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토록 심한 중상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혈살기로 홍광을 발해 유심초 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할수없이 모용천은 유심초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유심초를 불러서 등 뒤에 꽂은 모용천이 존경의 눈빛으로 무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무형검은 무상의 몸속으 로 빨려들어간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호홉을 고르고 있는 무상을 보니 안색이 조금은 창백해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홉이 길어질수록 안색은 빠르게 정상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역시나 무상이라는 생각을 하는 모용천의 눈빛은 상반된 두가지가 엉키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설적인 무공 을 완성한 무인을 대하는 존경의 눈빛과 무상을 뛰어넘어 모용세가의 위업을 높이고 강호에 길이 남을 영웅으 로 후세에 남고자 하는 강한 욕망의 눈빛이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유심초가 조금 더 성장하고 자신이 익힌 모용세가 미완의 내공심법 역혼신 명공(易魂新命功)이 절정에 이른다면 충분히 가능한 현실인 것이다.

갑자기 모용천의 움켜쥔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은 한층 더 환한 빛을 뿜어내었다. 피를 밟으며 커가는 강호의 무협이지만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

한편 무상과 괴인의 대결이 절정에 이르러갈 무렵 은성은 왠지 섬뜩한 느낌에 눈을 감고 심안을 극대화 하였 다. 시력으로는 한 방향밖에 바라볼수 없지만 심안으로는 팔방을 관찰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이의 시선이 무상과 괴인의 대결로 쏠려있는 와중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 곳은 검후가 현천교의 습격을 막기위해 설치해 놓은 사살배회진(邪殺徘徊陣) 안쪽이었다.

어둠속에서 괴기한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 올라가고 먹구름인양 하늘쪽에서 다가온 기운이 스르르 내려앉아 합 쳐지더니 진법 바로 위쪽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주변의 검은 기운을 모조리 빨아들여 흡수하더니 한층 어둡고 음한 기운이 되어 진 안쪽으로 솜처럼 부드러이 내려 앉았다. 소음하나 일지 않고 부드럽게 진행되는 소리없는 음모였다.

무언가 기분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어 졌지만 어떤 대응을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관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진속에 가라앉은 검은 기운은 땅속으로 파고 들었는지 지상에 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은성은 그 기운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땅속으로 스며든 기운은 지하에서 몰려오고 있 는 또 다른 기운을 받아들여 한층 더 위력이 증가되어져 가고 있었다. 괴인이 무상에게 당해 쫒겨가고 반각도 되기전..... 아직 선채로 내기를 가다듬고 있는 무상이 눈을 뜨기도 전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무상의 눈이 번쩍 뜨여지는 동시에 거대한 굉음이 청령전 부근의 대지를 뒤흔들었다.

'꽈르르르르르릉'

지진이 난 것 같았다. 청령전도 부르르 위태롭게 진동하고 대지가 넘실대며 흔들거렸다.

지금껏 경천동지의 대결을 바라보던 무림인들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발에 내기를 돋우었다. 하지만 검후가 설치한 '사살배회진'이 폭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발바닥이 지상에서 살짝 뜨여진 채로 여 전히 심안을 운용하고 있는 은성을 제외하고는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