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26화 (126/152)
  • [연재]황정허무검(126)

    하얀 섬광이 밤하늘을 유성처럼 가로지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폭음으로 천지간을 떨쳐 울렸다. 별빛이 쏟아 져 내리는가? 붉은 빛과 자줏빛이 번쩍인후 사방으로 부서져 튀어 나갔다. 잠시 주춤한 하얀 도복이 또다시 흰 섬광으로 허공중에 잔영을 흩뿌리자 야천이 자주색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묵빛보다 시커먼 어둠은 자줏빛만 토해 내는게 아니었다. 어둠을 불사르듯 시뻘건 혈홍의 빛이 지옥에 서 솟구치듯 불쑥불쑥 튀어 나오면 자주빛 야천이 핏물을 토해내며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터져 나오 는 또 다른 폭음.

    "콰르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거대한 굉음속에 자주빛이 일시에 스러져 갔다.

    위기를 느꼈는가?

    백색 섬광 뒤쪽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짙은 자주빛 광채가 허공 가득한 붉은 기운속으로 파고들더니 순식간에 홍광을 산산히 헤집어 놓았다.

    "자하선기..."

    소요진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공을 덮은 홍광은 사라졌지만 자주빛 광채가 야천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사악한 독사의 혓바닥 같이 날 름거리는 홍광도 어느새 훨씬 짙어져 있었다. 짙은 어둠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명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도 모르게 단단히 말아 쥔 주먹 안쪽에서 땀이 돋아 나옴을 느낀 소요진인이 초조한 듯 허리춤에 걸린 애검의 검병(劍柄)을 만지작거렸다.

    "진정..인간의 경지를 벗어났구려? 풍령자께서 무림에 출도하면 적수가 없을줄 알았는데....."

    무림 최고 기인인 삼천진인조차 조금은 암울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선배님과 삼매진인께서 적시에 도착해 주셔서 천만다행입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문상이 응답을 하다가 뒷말을 채 잇지 못하였다.

    자광과 홍광이 엎치락 뒤치락 하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광이 조금 밀리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 래도 전에 청령전을 침입한 괴인은 소문이 부족했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또다른 괴인일지도 모른다. 처음에 청령전을 침입한 괴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괴인 말이다.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정당한 대결은 아닌가 싶네. 아무래도 상대방의 몸에는 둔신의 술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술법이....."

    정파 최고의 술사로 불리우는 삼천진인 이었다. 상대방이 둔신의 술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말하자 주변 수뇌부들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현천교에는 극락조단 이라고 배교와 밀교의 술법을 익힌 술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은 부족한 편이지만 몇십명이 모여 역량을 집중하여 술법을 펼치면 천번지복의 위력이 있습니다. 협사들이 곤륜까지 오 면서 당한 대부분의 피해도 그들의 술법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삼매진인과 상대하는 괴인의 둔신 술법도 그들 술사들의 소행인 것 같습니다."

    몇십명의 술사들이 심기를 집중하여 펼친 술법이라서 혼자서 해제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 래도 내면에는 상황이 어렵더라도 대책을 마련해 주십사는 간절함이 깃들여진 말이었다. 그런데 문상의 염원 은 다른 곳에서 먼저 풀려지고 있었다.

    붉은 주작이 조각된 작은 봉을 치켜든 주진인이 품속에서 한웅큼의 부적을 꺼내들더니 주작봉(朱雀棒) 위쪽에 서 부적을 든 한손을 비벼 대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부적뭉치가 작은 가루가 되어 손아래로 떨구어졌다.

    떨어지던 부적 가루가 주작의 조금 벌려진 주둥이를 넘어서면 미세한 불꽃으로 피어 올랐다.

    생명의 불꽃이런가?

    떨어져 내리던 미세한 불꽃이 그 밝음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올라 은하수처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은하수의 끝은 자주빛과 붉은빛이 드넓은 허공이 좁다고 마구 뒤얽히고 있는 격전지로 이어졌다.

    "대단한 기물이로군! 하찮은 추화술(追火術)이 저토록 신묘한 묘용을 발휘하게 만들다니..."

    삼천진인이 나직이 중얼거릴때 주진인이 펼쳐낸 작은 불티들이 허공중에서 어설프게나마 형상을 이루었다. 풍 령자와 생사의 결투를 벌이느라 빗살처럼 이동하는 괴인에게 불티 수십개가 달라붙는데 성공한 것이다. 몇만 개의 불티들중 수십개밖에 달라 붙을 수 없을 정도로 괴인의 움직임은 종잡을 수 없이 변화막측하고 빨랐지만 근방을 뒤덮은 불티들은 자꾸만 괴인의 몸을 뒤덮어 갔다.

    불꽃 조각들로 뒤덮인 화영(火影)이랄까.....

    잠시 멈추어 모습을 드러낸 괴인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 아니라서 다행이 지만 너무나 가공할 신법에 또다시 괴인은 붉은 잔영만을 남기우고 허공중에 종적이 묘연해졌다. 자주빛과 붉 은빛 야천에 이제는 백영과 화영이 아른거리며 휘돌았다.

    '슈슈슈슉..파가각'

    검과 장이 부딪히는 소리인가?

    육안으로 구분키 힘드니 감각에 의존해야만 허공의 결투를 감상할 터인데 감각은커녕 상상에 의존해야 할 것 같았다. 화영의 잔상을 따라 자주빛 검광이 짙게 채색되는가 싶더니 반대로 백광이 홍광속에 파묻혀 군협들의 눈에 초조감을 더하게 했다.

    '콰드드득'

    십여장 상공에서 부딪혀 흘러나온 기파로 인해 폭풍우에 휩쓸리듯 대지의 나무들이 부러져 나갔다.

    '위위위위위잉'

    피칠한 듯 검붉은 대기가 사시나무 떨 듯 울렁거리더니 한줄기 화영을 토해냈다.

    화영은 군협들이 몰려있는 방향으로 내뻗치고 있었다. 괴인이 풍령자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한후 군웅들을 향 해 몰아쳐오고 있는 것이다. 배교의 절대 마공인 층층무상공으로 인해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괴인에게 분수도 모르고 무작정 덤벼 든다면 용기가 아니고 만용이라 불리울 것이다.

    그렇지만 실력이 떨어진다고 무조건 굴종(屈從)한다면 무사라 불리울 자격이 없다.

    '진정한 무사란 때에 따라 죽음도 불사할줄 알아야 한다'

    협객행을 꿈꾸는 무인이라면 한번쯤 깊이 음미해본 구절이었다.

    '하아앗!'

    군웅들 중에서 제일 먼저 솟구쳐 오른 자색 그림자.....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천이었다. 솟구쳐 오르는 모용천의 앞쪽에는 언제 방출했는지 백색 섬광 두줄기가 화 영쪽으로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백색 섬광 뒤쪽으로 느긋하게 뒤따르는 녹색의 검..바로 모용세가의 장문지검인 유심초(有心草)였다. 덮쳐오는 화영을 향해 쏘아져 나간 백색 섬광이 혈광에 빨려들 듯 부딪혀 갔 다. 하지만 어이없이 튕겨져 나가 버렸다. 괴인의 속도를 조금 늦추었을 뿐이었다.

    그사이 괴인과 유심초의 간격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매우 유약해 보이고 속도조차 느리게 날아가는 유심초.... 그러나 백색 섬광인 무심도 두자루를 간단히 튕겨내 버린 괴인의 신형이 왠일인지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던져낸 나무 막대처럼 힘없이 날아가고 있는 유심초 때문에 말이다.

    화영(火影)이 날아오는 속도가 늦추어지는 것에 비례하여 화영에서 뿜어지는 홍광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자 유심초가 괴이한 비명을 질러댔다.

    "캬아아악!"

    괴성을 질러대던 유심초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한쪽으로 비켜서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괴인의 측면에서 다시금 덮쳐가고 있었다. 허공에 떠있다 낙옆처럼 서서히 내려앉고 있는 모용천의 내기가 다시 이어졌는가?

    먼저 튕겨져 나갔던 백색의 도광 두개도 또다시 괴인에게로 덮쳐들었다.

    이기어검의 수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간신히 떨쳐 놓았던 삼매진인이 자주빛 광채를 이끌고 무서운 기 세로 어둠을 제끼고 날아오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네가닥의 공세가 홍광을 파고들어 화영속으로 짓쳐들어 가는 것이 군웅들의 시야에 목 격되어졌다.

    '아무리 무적의 괴인이라도 이번에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군웅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꽈과과쾅..퍼펑....."

    가까이에 있던 무인들이 귀를 막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전경.....

    두눈을 다시뜨고 바라 보아야 하는가?

    죽음을 피할수 없으리라 생각되던 괴인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

    이기어검으로 쏘아져 나간 무정도 두자루는 또다시 힘을 잃고 맥없이 추락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열이라도 받 쳤는지 섬찟한 괴음을 토하며 달려드는 유심초와 자하선기로 화산파의 절정검술을 펼치는 풍령자의 협공속에 괴인이 고전하고 있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하매! 승부가 어떻게 날것 같아?"

    은성이 나지막히 속삭이는 소리였다.

    "...., 이기어검 조차 통하지 않는다더니 소문이 사실이네요. 괴인이 전설의 금강지체에 근접한 호신지공을 익힌 것 같아요."

    결론은 없이 괴인에 대한 두려움과 감탄 뿐이었다. 아마 검후는 괴인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를 대비해서인지 조용히 내기(內氣)를 끌어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삼매진인께서도 삼극지도(三極之道)를 깨우치신 고수이시잖아! 상대방이 형체를 보이지 않아도 능히 존재를 느끼고 형상을 그려내시는 경지에 이르신 분이라 일대일로 붙어도 몇백초 이내에는 승부를 결하기 어 려울 것 같은데..... 게다가 지금은 모용장문께서 날리신 이상한 검까지 돕고 있고 말이야."

    유심초는 은성조차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철로 만든 검이 분명한데 살아 있는 듯 괴악한 소리를 질러댐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조종 없이 스스로의 의지 로 억척같이 달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귀신이라도 붙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엄청난 능력을 가진 귀신이 분명할 것이었다. 자존심이 세고 승부욕과 고집이 남다를 터이고 말이다.

    "오라버니 말씀을 들으니 승부를 예측키가 더욱 어렵네요. 오라버니! 그런데 저 괴인이 왜 도망치지 않고 버 티고 있는 거예요?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정체가 발각되었고 저번처럼 일방적인 우세도 아닌데 말 이에요?"

    검후도 은성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이 못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검후의 지적에 몇몇 사람이 흠찟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내 려 사방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낌새도 발견할수 없었는지 다시금 시선을 하늘로 돌리었다. 청각은 여 전히 은성과 검후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두가지로 나뉘어 생각할 수 있겠지. 괴인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쳐들어 왔지만 아직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회귀를 늦추는 경우와 괴인에게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어진 틈을 노려 현천교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경우 말이야. 두가지를 동시에 진행할수도 있고 말이야."

    삼천진인도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은성의 말이 끝날 즈음 삼천진인의 시선은 은성과 검후에게로 쏠려 있었다. 위험하고 다급한 상황속에서도 냉 철하니 상황을 파악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는 젊은이들이 대견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괴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저번처럼 무차별적인 도살은 아니겠지요?"

    검후의 질문에 은성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글쎄, 아마도 우리측 전력을 탐색키 위해 온 것 같아. 좀전에 삼매진인에게 타격을 가했을때 연이어 몰아치 지 않고 이쪽으로 날아온 것과 삼매진인과 모용장문의 협공을 견뎌낼 무위를 지녔음에도 억지로 초반에 밀리 는 듯한 흉내를 냈으니 말이야. 잘봐! 이제는 조금 불리한 것 같으니까 주진인이 술법으로 날리신 불꽃을 조 금씩 떨구어놓고 있잖아."

    은성의 말대로 괴인의 몸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던 불티들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술수조차 극제할 초극의 내공으로 불티를 태워 날리우고 일부는 밀어내 떨구어 가고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이 몇 개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홍광은 처음 보다도 더 짙어지고 위력이 높아졌으나 화영은 점차 모습을 감추 고 있었던 것이다.

    은성의 예측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어졌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삼천진인이 갑자기 두눈에 의아심을 담았다. 허공 중에 잔상만이 어른거리는 초극고수들의 대결인데 저들 젊은이들은 두눈으로 선명히 본 듯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유로움이 넘치는 표정과 침착한 목소리는 옆에 있는 문상과 비견될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의문이 생겼으나 아쉽게도 다음에 풀어야 할 것 같았다. 허공중에서 벌어지는 격전에 변 화가 생겨 이대로 묵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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