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25화 (125/152)
  • [연재]황정허무검(125)

    금아의 말대로 현천교도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서 격전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끔씩 검광이 번뜩이고 뇌성벽력이 터지는지 우렁찬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희미하니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 는 가운데 드디어 적의 포위망을 벗어났는지 야천(夜天)을 꿰뚫으며 자색기운이 떨쳐져 나왔다. 자색 기운 주 변에는 돌풍이 일고 어스름조차 휘어 돌고 있었다.

    잠깐 동안 정적이 찾아 들었다. 어둠이 짙어 자세한 상황을 알수 없었으나 심안이 발달된 은성만은 예외였다.

    축지법이라도 익혔는지 순식간에 허공을 점하고 공간을 단축하는 자색 폭풍우 속에 두명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허공중에 몸을 거의 띄우다 시피하며 달려온 두사람은 어느새 검후가 펼쳐놓은 사살배회진(邪殺徘徊陣) 안으 로 접어들고 있었다. 마인이나 사파의 인물일까?

    아니었다.

    살진이 빠져든 적을 덮어씌우듯 포위하여 사악(邪惡)한 기운을 가진 적들만 골라 살상한다는 사살배회진을 파 죽지세로 지나쳐 오는데도 아무런 제지가 없는 걸로 봐서는 정파의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현천교도들로 둘러싸인 사지(死地)를 뚫고 왔는데도 아직도 기력이 남았는지 초절정의 신법을 펼치고 있다면 그들의 정체는 더욱더 압축되어질수 있었다.

    바로 애타게 기다리던 각파의 초극고수들인 것이다.

    '스스스스스'

    어둠속에서 불쑥 생겨난 듯 자색 안개가 수뇌부들 앞에 성기어지더니 조금씩 희미해지며 그 안에서 두명이 모 습을 드러냈다. 선풍도골의 도인 한명과 봉두난발에 거지꼴을 한 도인이었다. 선풍도골의 도인의 정체는 바로 밝혀졌다.

    "오셨는지요. 뇌호(雷虎)의 울부짖음이 들리기에 사백님인줄 알았습니다. 삼십년 청정을 어지럽혀 면목 없습 니다."

    염치없음을 사과하며 앞으로 나서 머리를 조아리는 이가 무당파의 장문인인 구양진인 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무공은 물론 술법으로 하늘의 천신조차 청해 부릴수 있다는 삼천진인(三天眞人)이 분명 하였다.

    그에 비해 옆에 있는 거지꼴의 도인은 알아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육십여세 정도나 되었을까?

    삼천진인 보다도 조금 더 젊어 보였지만 알아주는 이 없으니 그냥 뻘쭉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삼천진인을 알 아본 수뇌부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인사를 드리는데도 공명에 일체의 관심이 없는지 시선을 들어 무심히 밤하 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복만 걸치지 않았다면 거지로 착각하고 만취개가 족보를 캐물었을 수도 있었으나 분명 거지는 아니었다.

    행색이 초라하고 전혀 꾸밈이 없었으나 거지들의 행동원칙인 방임(放任)이 아니라 대도들에게서나 은연중 흘 러나오는 무위(無爲)가 절로 풍겨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상(武相)은 어디에 계시는가?"

    삼천진인이 무림 맹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별전에 계시온데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같이 오신분은 어느 선배 고인이신지?"

    "글쎄.....선배께서 정체를 밝히시기 꺼려하시는 것 같으니 내가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네. 장문인이 보낸 전서구에 상황이 무척이나 심각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되어 있길레 풍령곡(風靈谷)에까지 가서 간신히 모셔왔 는데 괜한 노파심이었는지 모르겠네."

    삼천진인의 눈빛은 무당 장문인인 구양진인을 향해 있었다.

    오늘 현천교의 무리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뚫고 오느라고 힘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천교의 전력이 장문 인이 강조했던 것 보다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책이 담겨진 눈빛이었다. 구양진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변명을 하려고 나서기 전 먼저 입을 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무림맹의 문상이었다.

    "혹시 화산의 삼매진인(三梅眞人)이 아니신지요?"

    문상의 물음에 괴도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하늘을 주시하는 괴도인보다도 삼천진인이 더 욱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문상을 만나본 적이 없으니 백우선을 들고 묘한 웃음을 짓는, 허멀건 얼굴을 한 자가 환제갈이라 불리는 무림 맹 최고 지낭임을 알수 없는 삼천진인 이었다.

    "문상! 저희 화산파에는 삼매진인이라 불리는 도인이 없습니다. 화산 출신이 아닙니다."

    삼천진인과 거의 동시에 화산 장문인 소요진인이 급히 나서며 한 말이었다.

    "문상? 아니 그럼 이 서생이....?"

    삼천진인이 다소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상을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무림 방방곡곡, 뿐만 아니라 폐관 정진하는 노도사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 같았다. 문상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하던 삼천 진인이 소요진인에게 눈길을 돌리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쯔쯧'

    그리고는 짧게 혀까지 찬후 다시 시선을 문상에게로 돌리었다. 방금전에 물었던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 같았다.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몇가지?"

    갑자기 삼천진인이 문상의 말허리를 잘랐다.

    "몇가지 씩이나 되더란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좋네. 어디 이참에 강호에 퍼진 소문이 사실인지 들어 보겠네."

    삼천진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문상을 직시하였다. 왠만한 고수라도 주눅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가 담겨 져 있었다. 하지만 문상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담담하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먼저 진인께서 말씀하신 풍령곡은 화산의 낙안봉(落雁峯)에 있는 혈사곡의 옛 지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백년 전 마교와 건곤일척의 대결이 벌어지면서 피와 죽음만이 남았다며 혈사곡으로 바뀌어졌지만 그 전만 하더라고 유난히 바람이 많아 풍령곡으로 불리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혈사곡에 사기가 넘치면서 죽음의 계곡으로 불 리며 인적이 끊어진건 사실이지만 화산과 관계가 없는 그 누가 감히 화산파와 지척에 있는 풍령곡에 거할 수 있겠습니까?"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러움 속에 깊은 심기가 담긴 어조로 달변을 토하는 문상에게 작으나마 흥미가 일 었는가? 하늘만 바라보던 괴도인이 고개를 내려 문상을 주시하였다.

    "계속해 보게....."

    그럴듯한 추론이었는지 삼천진인이 문상을 채근하였다.

    "두번째로는 두분이서 이곳에 나타날 때 안개처럼 성기어 있던 자색강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실전된....."

    말을 하기 앞서 문상이 화산 장문 소요진인을 바라보았다. 소요진인은 어느새 문상의 곁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문상의 눈빛을 받은 소요진인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닐 것입니다...설마하니....."

    그렇지만 완전히 자신있어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런 소요진인에게서 시선을 돌린 문상이 현기서린 눈빛으 로 괴도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뒷말을 이었다. 확실하니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하였다.

    "실전된 자하선기(紫霞仙氣)인 것 같습니다."

    문상의 대답이 끝났는데도 괴도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상은 '자하선기'라는 말에 도인의 눈꼬리가 미세하니 말아 올라져 갔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다음도 있나?"

    삼천진인의 목소리였다.

    "문상! 자하선기라니요? 비급이 실전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일백년에 한명씩도 익히지 못한....."

    "조용히 하게!"

    삼천진인이 화산 장문인의 말을 큰 소리로 꾸짖어 막았다. 가끔씩 끼어드는 것이 매우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연배가 낮아도 화산의 장문인인데..... 장내에 급속도로 냉기류가 퍼져나갔다.

    "계속해 보게....."

    바늘 한개 떨어져도 소리가 울릴 것 같은 고요함 속에 삼천진인의 목소리만 들리어왔다.

    "세번째로는 저분이 입고 있는 도복 때문입니다. 화산파의 도인들이 입은 도복과 모양과 색상은 다르지만 분 명 화산파가 위치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림평(桃林坪)에서 만들어진 천 을 사용하였습니다. 의심이 가시거든 직접 천을 비교해 보시지요?"

    쥐죽은 듯 고요함속에 시선 돌아가는 기척만 요란했다.

    "또 있는가?"

    "바지의 밑단을 묶은 매듭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굳이 여러명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가까이에 있는 소요진인만 확인해도 될 일이었다.

    "대단하네... 소문이 과장이 아니라 부족한 것 같군. 하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것을 말하지는 않은 것 같군?"

    문상의 여유로운 표정에 미소가 피어났다. 백우선을 폈다 접으며 신비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로 문상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증거를 추론삼아 화산파의 도인이라는 것은 확인 됐겠지만 어떻게 명호까지 알아냈느냐는 말씀이 십니까?"

    심천진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적으로 진인께서 선배라고 말씀하신 것과 정체를 밝히시기 꺼려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확신이 섰습니다.혈매화(血梅花) 삼매진인 이라면 진인께 선배라고 호칭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테니까요."

    "혈매화!"

    문상의 대답에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고함을 지른 사람은 다름아닌 화산파 장문 소요진인 이었다.

    "저..저분이 혈매화... 진정... 어찌....."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 괴도인에게 다가갔다. 괴도인의 앞에까지 다가선 소요진인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괴도인의 발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괴도인의 눈빛이 순식간에 수십여 차례로 바뀌어 지고 있었다.

    표정조차도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움직이지 않고 순순히 소요진인이 발목의 매듭을 푸는 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감정의 변화를 숨길수 없었음인지 다시금 고개가 하늘로 쳐들려 있었다. 별빛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슬퍼 보이고 있었다.

    괴도인의 발목에 묶여진 매듭을 푸는 소요진인의 몸체가 서서히 떨리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한 모양이었다.

    매듭이 풀리자 바지 가장 밑단을 까 뒤집는 소요진인의 어깨가 격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소요진인이 풀썩 주저 앉아 버렸다. 군웅들의 시선은 소요진인에 의해 까 뒤집혀진 바 지 밑단으로 일시에 몰려 있었다. 그곳에 수줍은 듯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순백의 매화였다. 화산의 문인이라면 반드시 세겨 넣어야 하는 문양이었다.

    "진정.... 사조님이신지요?"

    떨리는 목소리로 억지로 몸을 일으킨 소요진인이 물었다.

    사조님인지 아닌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치 않았다면 이처럼 공손하니 삼배지례를 올리지는 않았 을 터이니 말이다. 절을 하는 소요진인도 그렇지만 괴도인의 때묻은 도복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심적으로 큰 동요가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의도이오? 설마 내가 파..파문제자 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요?"

    애써 태연한 목소리였지만 말끝이 떨리는 것 까지는 통제할수 없었던 모양이다.

    "사조님, 전전대 장문인께서 사조님을 사면시켜 화산파 문적(門籍)에 다시 올려 주라는 유언과 함께 입적하셨 습니다. 사조님께서는 불가항력으로 당하신 일이라며... 비록 화산의 문규가 지엄하지만 지각이 없는 상태에 서 저지른 일이었고 이후 수많은 협행(俠行)으로써 충분히 사죄하였다고....."

    소요진인이 말이 계속될수록 괴도인의 옷자락은 더욱 심하게 떨려지고 있었다.

    "사면되었다는 말인가? 정말 사면되었다는 말인가? ....."

    나직이 중얼거리며 내공으로 눈가에 이는 물막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는 괴도인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회상하는지 두눈을 슬며시 감았다. 삼매진인(三梅眞人)이라 불리우던 당시에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짙은 매화향 세상 가득하고 매화꽃 세송이가 허공중에 수놓이면 천지가 일렁이고 마도는 스러진다'며 정파 군협들이 자신에게 지어준 명호는 화산파의 자랑이기도 하였다.

    화산이 배출해낸 불세출의 기재 ..... 나이 삼십에 자하강기를 방출하고 마교와 싸우면서 이루어낸 숱한 공적 들...

    하지만 악마의 심술이런가..... 화산파 최고의 내공심법인 자하강기를 절정으로 익히기 위해 일반인의 접근이 불허되는 혈사곡에 든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혈사곡 안에서 우연히 발견된 비급 한권..... 모든 무공을 속성으로 익힐수 있다는 극악심법이 수록된 악마지서..... 자하강기를 완성하고 화산파가 생긴 이래로 다섯명 밖에 익히지 못했다는 자하선기(紫霞仙氣)에 도전하여 어느 정도 성취를 얻었건만 끝내 심마에 빠져들어 버린 것이다.

    혈사곡을 빠져 나온지 단 일년.....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일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최악의 시간이었다.

    오직 피와 죽음을 갈구하는 희대의 살인마가 화산의 무공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 피.. 피'

    혈매화(血梅花)라는 명호는 화산파의 치욕이었다.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도주하다 눈을 뜬 곳은 또다시 혈사곡이었 다.  내기가 빠져 나가고 심기가 흐트러져 죽음 일보직전에 간신히 제정신을 찾았 건만 도저히 이대로는 죽을 수가 없었다.

    심마에 들기전 깨달음이 있었던 자하선기 덕분에 간신히 소생하였지만 일년 동안 저지른 만행에 대한 기억조 차도 소생되어졌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기억들이었다. 그의 검은 정파의 무인들, 심지어 화산의 무인들조차 가리지 못했던 것이다.

    일년여의 업보는 그후 이십여년의 적공(積功)으로도 덮어질 수가 없었다.

    이십여년이 흐른후 찾아간 화산파에서 자신이 이미 화산파의 문적에서 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느껴야 했던 그 허탈감..... 가슴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삶의 의미는커녕 생의 의지도 잃어버린채 혈사곡에 칩거한지 또다시 삼십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은 화산에서 떠날 수가 없었다.

    자하선기를 완성하고 화산의 무공을 절정으로 익힌 것도 화산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수 없기 때문이었으며 그 가 혈사곡에 은신하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무당의 심천진인이 찾아왔을 때에도 화산을 위해 죽을수 있는 기회나마 찾고자 함이었다. 화산은 그를 포기했지만 그는 화산을 포기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죽는 그 순간까지도.....

    무슨 기척을 느꼈음인가?

    괴도인의 두눈이 번쩍 뜨여졌다. 두눈 사이로 자색 기운이 폭출되어 졌지만 착각인 듯 일순간 사라졌다.

    '슈르릇'

    환상처럼... 어느새 괴도인의 몸은 허공중으로 떠올라 앞쪽으로 쏘아져 나아갔다.

    '암향표가 어찌.....'

    그 뒤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뇌이는 소요진인의 중얼거림이 꼬리가 되어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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