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22화 (122/152)
  • [연재]황정허무검(122)

    다음날 아침 일찍 무당파의 진허가 누워있는 방문 안으로 들어선 은성은 건강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는 환자를 볼 수 있었다.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몸은 완치된 사람처럼 생기가 흘렀다. 이틀 전 다 죽어가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은성이 들어서자 침상에서 내려와 걸음조차 걸으며 손수 차(茶)까지 끓여서 대접 해 주었다.

    "이대협! 사제에게 이대협의 수고를 들었습니다. 저를 이렇게나마 완치시키신 것만 하여도 기적이나 다를 바 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진허였다.

    설사 죽음이 닥치더라도 일만의 가능성이 있다면 내공을 회복하고자 하는 내심이었지만 치료도중 자칫하면 은 성조차도 위험할 수 있다니 차마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허의 심중을 파악한 듯 은성이 미소로써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도우님의 관상을 보니 앞으로도 백여년은 더 사실 것 같습니다. 예서 그칠 운명이 절대 아닙니다. 저 또한 천운이 많이 따라주고 있으니 오늘 시술은 무사히 마쳐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심전심이랄까? 은성의 여유로운 미소에 진허의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가 피어났다.

    "하하! 맞습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절대로 저를 이렇게 빨리 데리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사부님 께서 묘강의 독림(毒林)에 가셨다가 야수같은 생활을 하던 어린 저를 만나 인연이라며 데려다 이제야 사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은혜를 갚기도 전에 끌고 간다면 염제라 해도 제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진허가 묘강의 독림 출신이라는 말을 듣던 은성의 눈빛이 잠시 이채를 발했지만 순식간에 담담해져 버렸다.

    독룡고가 진허의 몸에 깃들게 된 원인을 조금은 예측할수 있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었고 이미 깃들게 되었는 데 굳이 원인을 밝혀낼 필요까지는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다 마신 은성이 웃으며 눈짓을 하자 진허가 역시나 미소로 답하며 침상으로 올라갔다. 생을 달관한 듯이 여유로운 미소였지만 눈빛에 이는 한줄기 긴장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진허의 혼혈을 짚 고 어제처럼 피독주가 든 목곽을 서탁위로 이동시킨 은성이 잠시 마음을 고르는가 싶더니 드디어 최후의 시술 을 시전하기 시작하였다.

    은성의 심기가 일자 진허의 몸이 두자 높이로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은성의 신형도 같은 높이로 떠올랐다.

    잠시후 진허의 몸통에 걸쳐진 의복들이 하나씩 벗겨졌다.

    오늘은 진수기를 진허의 단전으로 주입시킬 필요는 없었다. 독룡고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독룡고가 조 금씩 안달이 나도록 유도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태극진기를 두껍게 말아 독룡고가 든 진허의 단전을 감싸 주었다. 독룡고가 성급히 발광할 수 없도록 단전과 가까운 곳에는 태극진기가 감싸고 있었지만 태극진기 사이 에는 독과 상극인 진화기(眞火氣)로 충만되어진 상태였다.

    어제 심안으로 파악된 대로라면 독룡고는 진허의 단전에서 진기가 유입되는 곳과 진기가 빠져나가는 곳에 각 각 주둥이와 항문을 대고 진기를 조절해주고 있었다. 단전에 진기가 많아지면 빨아들이고 경락에 휘도는 진기 가 많아져 단전에 진기가 모자라면 진기를 보충해 주었지만 중상으로 경락이 막혀 진기가 흐르지 않으면 단전 에 남은 진기를 거둬 들이는 특이한 습성을 가진 영물이 독룡고였다.

    몸안에 간직한 진기를 숙주가 간직한 진기와 일치되도록 자유자재로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 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숙주의 몸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성이 금수환이록(禽獸幻異錄)에 적힌 독룡고의 특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치료방법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았다. 은성이 생각한 것은 자신의 단전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단전으로 독룡고가 진허에게서 흡수 한 진기는 물론 독룡고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진기들을 거꾸로 흡수하겠다는 의도였다. 그후에 독룡고를 제 거하고 자신의 단전에 흡수된 진기를 진허에게 전이해주는 실로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물론 그전에 자신의 하단전에 간직된 태극진기는 모두 중단전의 내단으로 되돌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진허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킨 은성이 중단전에서 방출된 태극진기로 진허의 내기를 조정하여 서서히 장심 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비록 처음에 가졌던 내공의 일할 정도만이 남아 있지 않았 지만 한시진이나 소요시켜 흡수할 정도로 매우 조심스러운 운기였다.

    이 모두가 진허의 단전안에 머물고 있는 독룡고를 염두에 둔 때문이었다.

    누군가 내공을 흡취해 가는 것을 독룡고가 알아차린다면 숙주 몸안에서의 자연스러운 진기 조절을 제쳐두고 그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흡취자의 내공조차 깡그리 흡수할려고 날뛸것이 분명하였다. 분노가 폭 출되면 절대극독(絶對劇毒)을 내뿜을 수도 있었다.

    반각도 안 걸릴 일을 은성이 한시진 동안이나 조심스럽게 진행시키는 원인이었다.

    단전속에 진기가 텅 비었는데도 불구하고 진기가 빠져나가는 출구 방향 경락이 계속해서 진기를 요구해오자 아니나 다를까 독룡고의 몸에서 진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진허의 몸에서 빨아들여 은성의 단전 에 차곡차곡 쌓여져 가는 진기와 똑같은 특성을 가진 진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허의 경락속에서 요구하는 진기의 량이 많아져 갔지만 너무나 조심스레 늘려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독룡고는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펼치면 팔방을 덮을 만큼 막대하여도 뭉치면 콩알만해 진다는 것이 내가 진기였다. 비록 손가락 크기 만한 독룡고 였지만 뿜어져 나오는 진기의 양은 한이 없었다.

    벌써 은성이 흡취한 진기만 해도 진허가 처음에 보유한 내가진기의 두배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도 흘러나오는 진기는 멈춤이 없었다.

    '흠칫'

    돌연 은성의 눈썹이 움찔거려졌다. 진허의 명문혈로 물밀 듯이 밀려 나오던 진기가 또다른 흡력에 의해 진허 의 독맥을 타고 위쪽으로 이동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빠져 나가는 진기에 견디다 못한 독룡고가 진기의 출구쪽을 향해 흡력을 발해 진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강한지 임맥의 끝에 연결된 독 룡고의 입쪽으로 독맥의 중간 아래 부분에 위치한 명문혈로 통하는 진기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정도로는 은성이 발휘하는 흡력을 거스릴 수는 없었다. 진기의 출구쪽으로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였 지만 진기가 흘러들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몸에 내재된 진기만 거침없이 빠져 나가자 이제야 사태를 눈치챘 는지 독룡고가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임맥과 연결된 입을 떼어내 독맥과 연결된 부위로 옮겨 빠져 나가는 진기는 물론 흡취당했던 진기를 역류시켜 빨아내기 위하여 분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상대의 능력이 너무 강해서 일까?

    역류되기는 커녕 계속해서 목숨처럼 소중한 진기만 탈취되어지고 있었다. 빠져 나가는 진기를 막으려고 힘을 써 보았지만 그것조차도 신통치 못했다. 이미 가진 진기의 대부분을 잃어 기력이 부족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할수없이 주둥이로 진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을 덮은 이후에야 가까스로 진기의 이탈을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조치된 방법이었다. 이미 가진 진기의 칠팔할이 사라진 것 같았다. 몇백년 적공(積功)이 물 거품처럼 사라져 가다니... 화가 치밀어 오른 독룡고가 진허의 단전안에서 지랄 발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잃었던 진기를 보충하라는 천지신명의 뜻인가?

    단전안으로 스며들어와 조금씩 다가오는 진기들이 있었다. 순정하고 영묘로운 기운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 는 셈이었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도록 유도한후 한꺼번에 강력한 흡입력으로 빨아 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 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부림치던 신형도 가만히 고정하는 것이 좋았다.

    진기들이 가까이 다가들어 부드러이 신형을 떠 받들 때에도 독룡고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그마한 빈틈조차 남기지 않은채 자신을 둘러싼 진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난데없이 유입되는 진화기에 내부에 간직한 독정지기가 녹아들자 자신이 철저히 속았음을 알 수 있었다.

    몸 바깥을 둘러싼 태극진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몇백년동안 쌓아온 독정지기를 불태우는 진화기는 목구멍안으로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죽음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조차 앗아가기 때문이다.

    은성의 태극진기에 감싸진채 실처럼 가느다란 두께로 변해 진허의 단전을 빠져 나온 독기는 장기를 피해 살갗 을 뚫고 바깥으로 세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바깥에는 어느새 준비되어졌는지 목곽을 뚫고 나온 피독주가 칠 색서기를 발하면서 흘러나오는 독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일각, 이각.. 반시진이나 걸려서야 독룡고가 녹아든 독기가 모두 제거 되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심력이 많이 소모되는 작업이었다.

    독기가 너무 강해 독기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은성의 심기는 총동원되어졌으며 태극진기에 감싸진채 밖 으로 세어져 나오는 독기의 량도 피독주가 흡수 가능하도록 조금씩 뿜어내고서야 간신히 모면한 위기였다.

    이만한 독기가 한꺼번에 공중으로 퍼져 나간다면 청령전 주변은 향후 몇년 동안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대한 고비를 넘긴 은성은 미세하니 뚫린 진허의 단전을 치료해준후 태극진기를 거두어 들이고 단전 속에 고인 진기를 진허의 단전으로 서서히 밀어 넣어 주기 시작하였다. 어제 진허의 경락을 치료해 주면서 내 상으로 막힌 부분은 물론이고 원래부터 막혀 있었던 락맥까지 세세하니 뚫어준 때문인지 진허가 진기를 받아 들이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처음에 보유했던 내공의 세배는 될 정도로 많은 내공이 주입되어 졌지만 독룡고가 닦아 놓았기 때문인지 단전 이 좁지는 않았다. 독룡고 처럼 내기를 응축시킬수 있는 능력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 많은 내기를 진허가 모두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단전만 발달되고 경락과 경맥이 아직 준비가 덜되었기 때문 이다. 다행히 어제 은성이 치유해 주면서 경락을 넓혀준 때문에 보유한 내공의 칠할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력 여하에 따라 팔할도 가능할 수 있고 말이다.

    흉(凶)이 길(吉)로 변해 후에 무당제일검(武當第一劍)이라 불리는 절세적인 고수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치료를 마친 은성은 진허의 혼혈을 푼후 운기조식에만 몰두하도록 지시했다. 독룡고에서 얻은 진기가 무당의 심법으로 축적된 내기와 그 특성이 유사하였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미약하지만 진기안에 내포된 독기를 배출하고 단전안에 유입된 내기를 최대한 진신내력으로 갈무리 하기 위해서는 향후 며칠이 가 장 중요하였다.

    은성의 충고에 따라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간 진허를 뒤로 하고 은성은 방문을 나섰다. 방문 앞에는 구룡중 여덣째인 매향검(梅香劍) 여동빈이 오늘도 변함없이 보위를 서고 있었다.

    "다행히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지금 환자는 운기 조식 중인데 절대로 안정이 필요합니다. 환자가 방 문 밖으로 나서기 전에 누구도 안으로 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정 고맙습니다. 그런데 환자의 식사는?"

    여동빈은 말보다는 어감과 표정으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방문을 한시도 떠나지 않겠다느니....어느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느니....말은 하지 않았지만 꽉 다문 입술과 결연한 눈빛은 충분한 믿음을 주고 있었다.

    "환자가 요청하기 전에는 식사 반입도 금하시기 바랍니다. 적이 쳐들어 오는 위급지경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환자에게 가장 요구시되는 것은 안정과 시간입니다. 앞으로 며칠이 향후 몇 년간의 수련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잘 알겠습니다."

    진허의 성취를 위해 재삼 당부하는 은성을 보며 여동빈이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응답하였다. 자신의 사형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은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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