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19)
경공 속도를 증가시켜 앞으로 나아갔지만 협곡에는 적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화린기와 당문의 무서움에 두려움을 모르던 현천교도들 조차 담이 오그라든 것 같았다.
하지만 당기독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몰려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격전에서 일 천여명 이상이 죽었지만 아직도 오륙천명이 더 남아 있었다.
이백여명이 죽은 정파 무림에 비해 인명 피해가 훨씬 많았지만 아직도 그들의 전력은 아군 이상이었다. 게다 가 뒤쪽에는 아군과 전력이 비등할 것이라는 현천교의 정예 고수 이천여명이 몰려오고 있다고 하였다.
마음이 다급해지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내기를 응축시켰다가 폭발시키듯이 휘돌리는 당문의 특이한 독문 신법 비폭투영(飛爆投影)이 예리하니 바람을 갈랐다. 오십여장 넘어 출구가 보이자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당기독의 신형이 더욱 빨라져 갔다.
군웅들이 오늘을 추억한다면 당문이 선봉이었음을 기억하게 되리라.....
그런데 이 무슨 소리런가?
"뿌우우우우..."
갑자기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내공이 운용되어졌으나 평범한 뿔나팔 소리였다. 하지만 왠지 모를 섬찟함에 몸서리 쳐질 정도로 기분나쁜 소리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더니 급속도로 온몸 가득히 퍼져 갔다.
아무런 소리도 아닐 것이다...애써 자위(自慰)하며 눈을 드니 출구는 사십장도 넘지 않은 것 같았다. 불안을 삭히려는 듯 속도를 높여가는 당기독의 눈가에 희망과 불안이 겹쳐지고 있었다.
무림맹 천무원의 천무당 소속인 청무대는 맨 후미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이백여 대원들이 일사분란 하였다. 그런데 대원들의 위치가 달리면서 계속적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청무대의 두뇌라 할수 있는 제갈기가 제안한 공작진미진(孔雀振尾陣)은 대원들이 생각해도 현 상황에서는 최적의 병진(兵陣)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주력하면서도 작은 변화로 진에 활력을 주고 위험이 닥쳤을때 청무대원들중 무공이 고 강한 고수들이 순간적으로 뒤쪽으로 이동 가능한 진인 것이다. 게다가 상황에 따라 다른 진으로 변화가 쉬웠 다. 가장 후미를 담당하였기에 제대로 된 격전 한번 없었지만 협곡을 통과하고자 했던 시간이 벌써 넘어섰음 을 느꼈는지 모두들 초조해하고 있었다.
갑자기 들려오는 뿔나팔 소리는 초조감을 더욱 부채질 하였다.
뿔나팔 소리가 멈춰질때쯤 일행들의 초조감은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멀리서 십여명의 무리가 가공할 속도로 달려오고 있음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군웅들도 달려가고 있었지만 수가 많고 부상자도 많아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금새 따라잡힐 것이다.
"삼륜윤회진(三輪輪廻陣)을 펼쳐라!"
달려드는 적들의 숫자 및 기세를 파악한 제갈기가 큰 소리로 외쳤다.
'휘리릭,휙'
적들이 달려오는 속도도 빨랐지만 청무대원들이 진을 변형시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적들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에는 삼십여명씩 삼중의 원을 여섯 개나 만들어 적과 대치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특이한 진이었다. 십명이 한조로 원을 만들고 세조가 중첩되어 하나의 진을 만들었는데 세 개의 원이 중첩되 고 걸쳐지고 길게 늘어지는 등 합세와 보조 그리고 분산이 자유자재로운 진이었다. 좁은 협곡에서 가장 이상 적인 진일 것 같았다. 게다가 뒤쪽에는 동일한 진이 다섯 개나 추가로 대기하고 있었다.
청무대원들이 펼친 진보다 더욱 특이한 것은 달려온 현천교의 고수들이었다. 열명에 불과했는데 열명 각자의 무기가 모두 달랐다. 검,도,창,극,륜,봉,선,곤,삭을 들었는데 나머지 한명은 암기의 고수 같았다.
특색이 다른 고수들이니 각자 무위대로 공격해올 것이라 판단했지만 아니었다.
청무대의 삼륜 윤회진과 충돌한 열명의 고수는 별모양의 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무대의 세가닥 원이 종횡 무진하며 하늘을 뒤덮는 그물이었다면 그들의 별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밤하늘을 가르는 한줄기 유성이었 다. 수축되면 그물망 사이로 통과되고 확대되면 그물보다도 더욱 넓은 그리고 몸에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불태 우는 성난 불새같은, 폭발하기 직전의 신성(新星)이었다.
청무대주인 남궁혼은 그들과 맞서 첫번째 진을 지휘하고 있었다. 열명의 청무대원이 일제히 검기를 날리자 검 기가 파도처럼 나아갔다. 바짝 다가선 또 다른 원에서는 넘실거리는 물결 모양으로 사방을 벽으로 감싸듯 하 며 검기를 뿌려댔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또다른 열명의 청무대원이 검에 검기를 잔뜩 응축시킨채 진의 앞쪽으 로 내달았다. 적의 진에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발견되면 응축된 검기가 집중되어 쏟아져 나가리라.....
그러나 밤낮을 잊고서 수련한 진이였건만 상대가 너무 강한 것 같았다.
적의 회전하는 기세에 휩쓸린 검세가 한쪽으로 쏠리더니 허공중으로 사라져 가고 너울거리며 쏘아져간 검기도 유성속에서 망울져 나오는 기세에 부딪힌후 허망하니 흩어져 갔다. 앞으로 나선 청무대원들의 검에서 검기가 채 뿜어져 나가기도 전에 갑자기 크게 확산된 유성속에서 청무대를 향해 암기가 날고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공격했던 또 다른 열명이 뛰어올라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몇 명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남궁혼이 검강을 날려 적의 기세를 누그러트려서야 간신히 원상 회복 되었지만 잔뜩 웅크린 모양을 하던 적들 이 갑자기 반대로 회전을 하며 또 다른 열명에게 덮쳐 들었다. 수없이 연습한 대로 공격당한 청무대원들의 검 이 천지인 삼재를 동시에 방어하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적들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성의 모양을 하던 적들이 갑자기 쫘악 늘어지며 칠성진의 모양으로 바뀌면서 예기치 못한 공세를 가한 것이 다. 심상치 않은 적의 변화에 다른 두개의 원이 형세를 가까스로 유지하며 달려 들었지만 북두성에서 찬란한 성휘가 피어오른 이후였다.
암기와 검 그리고 혈겸을 든 고수가 뒤를 받혀주자 뛰쳐나간 일곱 고수의 손끝에서 뻗혀나간 강기들이 순간적 으로 움찔한 청무대원 사이로 스며들어간후 몇 줄기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한 남궁혼이 진에서 빠져나 와 제왕검법 최후의 절초인 제왕현신(帝王現身)을 펼쳐 세명의 고수들에게 덮쳐 들어갔지만 이들은 어느새 유 성의 진을 다시 회복해 가고 있었다.
진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지금이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검에 내력을 더욱 강화 시키며 남궁혼이 필사의 각오로 제왕현신의 초식을 펼쳐내었다.
그런데 이럴수가....적도 세명이 뛰쳐나오며 휘두른 강기에 남궁혼의 검강이 맥없이 밀려나 버렸다.
진의 무궁무진한 효력 때문일까?
뚫지 못할 강철판을 두드린 듯 가슴속 진기마저 '턱'하니 막혀오자 남궁혼이 공격을 포기하고 남은 기력을 모 아 간신히 뒤로 물러나왔다. 남궁혼이 지휘하는 진에 인명피해가 생기고 힘이 부친 것을 간파한 두 번째 진이 격전지로 뛰어들어 한시름을 놓을수 있었지만 너무나도 강한 적들의 무위에 남궁혼의 눈빛은 자꾸만 처연해지 고 있었다. 두 번째 진은 반각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열세(劣勢)이었다. 다섯 개의 삼륜진이 바뀌기까지 무려 이십여명의 희생자가 발생되었다. 희생자가 발생되어 도 진세의 유연함으로 쉽게 대처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을 구축한 적들의 무위가 너무나 고강하였다. 한명 한명이 절정의 고수였던 것이다.
이십여명 이상의 청무대원들이 죽었지만 적들은 단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삼륜윤회 진이 파괴되는 속도가 빨라져 갔다. 무공뿐만이 아니고 진에 대한 지식조차 해박한 적수들인 것이다.
또다시 두명의 청무대원이 죽어 나뒹구는 것을 바라보는 제갈기가 입술을 악다물더니 뒤쪽으로 밀려난 청무대 주 남궁혼에게 전음을 날리었다.
[대주, 현천교의 직속 호위대 놈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상대가 아닙니다.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현천교주가 가까이 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아닐 것입니다.총 오십오명의 호위대중 가장 말단에 위치한 십절기(十絶技)의 임무는 교주가 방문할 장소를 미리 도착하여 피로 정화하는 것이라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갈기의 전음중 제일 마지막은 나직하였으나 절규에 찬 목소리였다. 현천교의 호위대는 열개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지금 이처럼 막강한 위력으로 청무대를 도륙하고 있는 열명의 무리가 그중 가장 무력이 약하다고 알 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천교의 직속 호위대라고 하여도 절대로....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청무대에 대한 자긍심이 워낙 강한 남궁혼이였지만 전음을 보내는 짧은 시간에 또다시 두명의 청무대원이 피 를 토하며 꼬꾸라지자 어쩔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강기조차 사용하는 적수들이었지만 적이 두명뿐 이라면 자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명이라면 승부를 예측할 수 없고 말이다.
하지만 구룡의 위치에 든 자신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무위를 가진 고수 열명이 변화를 파악하기조차 어 려운 진세로 신출귀몰 공격하니 수비에 치중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삼륜윤회진도 신묘하기 이를데 없는 진이었다.
그러나 청무대원 각각의 무공이 적수들에 비하여 너무나 뒤떨어졌다. 지원을 요청할려고 해도 난감하기는 마 찬가지였다. 십절기라고 불리우는 엄청난 고수들을 상대하려면 그보다 무공이 강한 고수들을 불러와야 하는데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은 대부분 앞쪽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원들이 죽어가는데 대원들을 책임진 대주로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을 솟구쳐 협곡 사이를 번갈아 밟으며 앞으로 막 나아가던 제갈혼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무언가 그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사람이었을까? 아닐 것이었다.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였다.
"청무대주! 뒤쪽은 제가 맡겠으니 대원들을 이끌고 먼저 가십시오."
귀에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무슨 말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남궁혼의 표정이 급격히 변화되어졌다. 눈은 부릅떠지고 입술이 조금씩 벌어져 갔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분명하였다.
밤하늘 별빛 사이로 피어나는 일광(日光)이런가?
어둠을 몰아내는 아침 햇살이 서광처럼 밤하늘 별빛을 사그라트리고 있었다. 일시에 닥쳐온 열자루 무기들이 사상 금나술 속에 엉켜들고 좁은 틈새조차 없었건만 광막으로 천지를 눈멀게 한후 묵귀영을 발휘하자 한줄기 연기가 되어 유성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패엽만장의 초식이 펼쳐지자 장강(掌剛)이 허공을 광영으로 물들이고 수강(手剛)으로 펼쳐낸 무진중의 일격에 유성이 두조각으로 갈라져 버렸다. 분분히 흩어졌다가 십방으로 휘몰아치며 안에 갇힌 모든 것을 멸살시킬듯 한 십종의 강기도 패엽건곤 한수에 처참히 깨져 버렸고 부러지며 상처난 육신으로 이를 앙다물며 날린 비장의 절초도 허깨비처럼 종적이 사라지는 묵귀영 신법에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뒤돌아 격전장을 바라보며 몸을 날리던 청무대원들의 눈빛은 꿈을 꾸듯 환희와 감탄에 젖어가고 있었으며 꽉 쥔 주먹은 자신들도 모르게 힘이 더해져 갔다.
해동신룡의 놀랄만한 신위... 어릴적 전설로 듣던 절대영웅의 기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감탄의 기색으로 은성의 행적을 쫓던 청무대원들이 돌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두눈을 부릅떴다.
은성의 놀라운 무위에 일방적으로 당해 전멸 직전에 몰린 십절기들이 최후의 잠력을 끌어 모았는지 은성을 가 운데 두고 몰려 나오는가 싶더니 대지를 찢어 발길듯한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린 것이다.
"퍼버펑....꽈과과광."
유성비야천진 최후의 무공 '성광폭천(星光爆天)'
죽음으로 죽음을 창조한다는 공멸의 저주스런 마공은 일시에 주변을 피의 폭풍으로 뒤덮어 버렸다. 혈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텅빈 공간뿐 남아 눈에 띄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휘스스스스스.'
한줄기 바람이 애처롭게 통곡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혈폭풍으로 정적이 감돌았던 주변의 땅이 갈라지 고 이제야 충격에 반응되어졌는지 협곡이 부서지며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려왔다.
'쿠쿠쿠쿠쿵...와르르르릉'
무너져 내린 바위와 흙더미가 순식간에 삼장여 높이로 협곡을 메꾸어 버렸다.
해동신룡도 죽었단 말인가?
천신같은 무위를 보이던 해동신룡이 허공중으로 산화되어 버렸는지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바람처럼 나 타나 청무대를 죽음속에서 구원해준 우상이 이처럼 허무하니 사라져갈 줄이야.....
"....."
"와아! 살아계시다."
누군가의 외침에 청무대원들의 시선이 일시에 하늘로 향했다.
언제 치솟았다는 말인가? 대지를 휩쓸고 하늘 저멀리 사라져간 피의 폭풍을 타고 하늘로 솟아 올랐었다는 말 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늘 위에서 표표히 떨어져 내리는 인영은 분명 해동신룡이었다. 허공에서 떨 어져 내려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바람을 타듯이 깃털처럼 조용히 내려오고 있었다.
"허공부유공(虛空浮游功)이다! 와! 해동신룡 만세!"
몇몇 청무대원이 고함을 질러댔다. 은성을 바라보는 청무대주 남궁혼의 눈빛은 심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목검문에서 권마황과의 대결을 목격하면서 은성의 무위가 뛰어남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보니 그 당시보다 몇 배나 높아져 있었다.
저 정도라면....구룡의 수장이라는 모용형님보다도.....
남궁혼이 고개를 흔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율 배반일까? 머릿속으로는 강하게 부정하 였지만 눈빛은 은성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허공 부유공 이라니....?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믿어야만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구룡의 권위에 도전... 아니, 넘어서고 있는 해동신룡 이였지만 질시나 미움보다는 왠지 고마움이 더했다.
자신의 청무대를 지켜준 것 때문일까?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볼때부터 왠지 마음에 드는 친구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추혼비접(追魂飛蝶)... 곱디 고운 나비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비는 아니였다.
'쐐애애액'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몸을 피해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 이후부터 노란색 나래를 활 짝 편 나비였다. 노란 날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찔러 들어올때 빛이 휘어진다는 착각이 들어왔다.
휘어드는 햇살이 노란색인가?
빠르기도 하지... 그런데 감탄하던 것도 잠시 왠일인지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왜 이리 몸에 힘이 없는 것일까? 털썩하며 땅에 쓰러져가는 현천교 호위무사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이마에 나비의 날개인지 노란빛이 번뜩였지만 곧이어 붉은 혈색으로 물들여졌다. 보는 순간 혼이 놀라 도망친다는 당문의 비전암기가 또 한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순간이었다.
자신을 호위하는 세명의 당문 고수들 덕분에 당기독은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숙부뻘인 세명은 당문에서 만이 아니라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암기의 고수들이었다. 이들이 보호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짊 어진 초열지옥화린기 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당문을 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쪽에서 또다시 네명의 현천교도가 달려들자 좌측 숙부의 손에서 세털같은 암기들이 수없이 쏘아지며 공간을 가로질렀다.
'으윽, 억!'
작은 단말마 만으로도 충분하였다.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에 발라진 독은 눈을 깜박이는 순간 지옥 문턱으로 들어선다는 지심독정(地深毒瀞) 이었기 때문이다.
뻥 뚫렸던 협곡이 뿔나팔 소리가 들려온 직후부터 적의 그림자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십여장을 달려오면서 열 명의 현천교도가 무작정 뛰어들어 오더니 신중하지 못한 댓가를 처참히 치루었다. 그런데 현천교에서 교도들 을 뽑을때 일차적인 선택조건은 무식함인 것 같았다.
겁이 없다기 보다는 무모해 보였다. 뻔히 죽을 줄을 알면서도 또다시 십여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십여명 정도라면 초열지옥화린의 맛을 보여줘도 될만한 인원이었다. 그런데 화독을 방출하려던 당기독의 눈빛 이 잠시 흔들렸다.
"젠장할....."
무식한 놈들이 아니라 단체로 미친 놈들인 것 같았다. 그 뒤로 몇십명... 아니, 몇백명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십오장만 지나면 출구인데.....
눈두덩을 찌그려트리고 입술을 고집스럽게 다문 당기독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의에 잠겨들었다. 한번 해볼테면 해보자 하는 표정이었다. 비폭투영 신법으로 현천교도들에게 덮치듯 접근해 들어간 당기독의 앞쪽으로 화마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또다시 협곡안을 메아리치기 시작하였다.
당문인들이 편의상 화린기라고 명명하는 초열지옥화린기(焦熱地獄火燐機)의 분사각도를 넓게 퍼지도록 조종하 자 대충 쏘아도 한꺼번에 열명 이상의 적들이 화독에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숫자로 따지면 자신이 무 림맹의 군웅들중 제일 많은 적들을 살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적들의 공격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지는 사람도 자신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던 세명의 숙부가 차례로 죽어 쓰러지고 보강된 당문의 고수 및 무림맹 수 구당의 고수들도 적의 집중 공격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시간이 지연되자 공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화 린기 세대가 한군데로 모여 출로를 열었지만 진군 속도는 생각보다 늦었다.
그만큼 적들은 죽음을 도외시하고 악착같이 방어하고 있었다.
협곡을 빠져나와 문상의 지시로 화살촉 형태의 진을 유지한후 가장자리 쪽으로 무위가 고강한 고수들이 집중 배치되자 그나마 이동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렇다고 오천여 현천교도와 사파인들의 철통같은 수비진이 완전히 허물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당술(地?術)의 고수인가?
땅에 몸을 붙인 상태로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얄밉게 몸을 피하는 사파의 무리 이십여명을 상대하기 위해 화 린기를 보호하던 십여명의 고수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절기를 발휘하였다. 현천교의 호위무사들이 상대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보다 무공이 몇배로 고강하다는 현세화단 고수들조차 몇수에 제거할 무위를 가진 수구당원들 이었다. 당연히 비명소리가 넓게 퍼져 나갔다.
비명은 앞쪽에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린 당문의 고수와 수구 당원들이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적 두명이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적들의 옆에 피에 젖어 나뒹구는 것은 초열지옥화린기였다. 더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 가져 있었다. 호위하는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당기독의 눈가에도 비릿한 살기가 중첩되어져 갔다.
땅속에 함정을 파고 매복해 있었던지 지당술을 익힌 적도들이 호위 고수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틈을 타고 일시 에 튀어나온 적도들에게 화린기를 사용하던 당문의 고수 한명이 당한 것이다. 화린기를 조정하던 동료가 죽고 동료가 사용하던 화린기마저 분사장치가 고장나 무용지물로 화해 버렸다,
간발의 차로 살수를 피했지만 자신도 죽을 뻔 하였다. 적들의 수비망을 뚫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당기독이 망가져 전혀 필요가 없는 초열지옥화린기를 들어 왼쪽 옆구리에 꼈다.
쓸모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주변의 군웅들은 의아해 하였지만 일일이 간섭할 정도로 한가한 전세는 아니었다.
'이야아압!'
갑자기 당기독이 비명과 함께 미친 황소처럼 앞으로 돌진해 나아갔다. 화독을 퍼부으면서 비폭투영이 최대한 발휘되자 그의 앞쪽이 순간적으로 비었다가 다시금 적도들로 채워졌다.
그의 공격에 놀란 것은 현천교도들만이 아니었다. 초열지옥화린기를 보호하던 당문과 수구당의 고수들까지도 깜짝 놀랐다. 급히 따라붙어 호위해주려 했지만 너무나 돌발적인 행동인지라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리고 무모한 행위였다. 문상이 지시한 진을 벗어나 단독으로 수천의 적과 맞선다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고수라도 반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무모하게 죽음속으로 뛰어드는 당기독을 보며 모두가 성급함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눈빛이 안타까움으로 축축 해지는 사람도 있었다. 당문의 가주인 당제독 이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당기독이 적진속으로 뛰어드는 진정한 이유를 알고있는 단 한 사람 이기도 하였다.
초열지옥화린기의 위력은 역시나 대단하였다. 달려나가며 연속해 쏘아낸 화독에 벌써 오십여명의 적도들이 비 명과 함께 땅에 나뒹글며 발광하다가 끝내 숨을 거뒀다.
하지만 중과부적 이었다. 온몸에 암기가 박히고 비도술과 검기에 중상을 입은 당기독은 더 이상 비폭투영을 발휘할 여력조차 없었다. 머리가 깨졌는지 핏물이 흘러 혈광이 어리는 희미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자 온통 적이었다. 삶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죽음이 닥쳐 왔는데도 당기독의 눈꼬리는 희미하니 웃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는 것 이다. 대단한 고수인 듯 허공중에서 멋들어진 동작으로 몸을 틀며 이장여나 되는 검기를 쏘아낸 고수에 의해 가슴이 크게 벌어져가고 있었지만 당기독의 미소는 그칠줄을 몰랐다.
평범한 미소는 아니었다. 삶을 증오하고 운명을 저주하는 잔인한 미소였다.
'끼륵..팍..찰그락. 스르르르릉.....'
전신에 힘이 빠져 들고 있었지만 혈린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할 최후의 힘은 아껴둔 터였다.
"피..피해라!"
무식한 놈들만 있는줄 알았는데 눈치 빠른 놈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하고 싶어 피할수 있다면 '초열지 옥화린기'에서 '지옥(地獄)'이라는 단어는 붙지 않았을 것이었다.
"화르라라락..쉬악 펑! 퍼버퍼..펑!꽝!"
굉대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꽃이 당독기의 미소를 포함하여 주변 십오장을 한꺼번에 휩쓸었다.
처참지경... 사방으로 비산되는 피와 갈기갈기 조각난 고깃덩이들... 단 한번의 폭발로 이백여명의 현천교들 도만 몰살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전투의욕도 함께 휩쓸고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런가?
가공할 폭발로 걷잡을 수 없이 저하된 사기를 추스릴 시간적 여유도 없이 그들의 기를 또다시 주저앉히는 사 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곤륜산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가 달려나오는 모습이 포착되어졌던 것이다.
곤륜파의 무인들이 분명하였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난전을 거듭하는 전투에 오백여 명이라면 적은 수도 아니었다.
게다가 금방 도착할거라며 뿔나팔로 행차를 알린 정예 고수들이 무슨일이라도 생겼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죽음을 무릅쓰던 용기가 한없이 쪼그라져 버렸다. 이제는 단 한기의 초열지옥화린기 밖에 남지 않았건만 화린 기의 그림자만 보아도 현천교도들은 놀란 눈빛으로 분분히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덕분에 무림맹의 군웅들은 전속력을 내어서 곤륜산 쪽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몸을 날리던 당가주 당제독의 눈가에 뿌연 안개가 맺혀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이라고는 약에 쓸려도 없다는 냉혈한의 눈에 눈물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었다.
화독을 얻으려던 친동생의 죽음을 보상받으려는 듯 미친 듯이 독을 연구하다가 만성지독에 중독되어 어차피 생이 길지 않은 당기독이었다. 절독을 먹어가며 이독제독으로 간신히 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쌓이는 독성으 로 고통이 커지자 자살하려던 것을 말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에 죽으려거든 차라리 당문을 빛내고 죽으라고 윽박지른 사람 또한 자신이었다.
어차피 짧게 질 생명이었다. 그래도 당문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었는데.....당제독의 눈가에 서린 물막이 급기야 이슬로 맺히더니 뒤로 흩날려 사라져 갔다.
한편 현천교주의 호위대중 일부인 십절기를 처치한 은성은 무너진 돌과 흙덩이로 인해 삼장여 높이로 단절된 협곡에서 군웅들과 반대쪽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절기들이 모든 잠력을 끌어내 자신들의 몸을 폭파시킨 최후의 공격을 호신 강막 과 절세적인 묵귀영의 신법으로 하늘높이 솟구쳐 피하면서 뒤쪽에 달려오고 있는 현천교의 정예 고수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정도의 진군 속도라면 따라잡혀 그들과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일각이면 협곡을 빠져 나갈 수도 있었지 만 협곡을 빠져 나갔다고 적이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앞뒤로 협공을 받으면 무림맹쪽이 불리하였다.
자신의 몸 하나를 지킬 자신은 있지만 혼전이 벌어지고 현천교의 정예 고수들마저 싸움에 참가한다면 사부와 사숙 그리고 검후를 한꺼번에 보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검후는 유령왕에게 부탁했으니...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보무당의 모든 무인들이 소중했다. 생각해 보니 그 외에도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
뒤쪽의 정예고수들만 막는다면 굳이 유령왕이 없어도 검후는 안전할 것이다. 방법은 한 가지였다. 현천교의 정예 고수들이 협곡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은성이 반대쪽에 내려선 이유였다.
은성의 가공할 무위에 감탄과 함께 만세조차 외치던 청무대원들이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심안을 높이니 적의 정예 고수 이천여명이 곤륜천문을 막 지나치고 있었다.
좌정한후 검후를 보호하던 유령왕을 부르니 눈깜짝할 새에 은성의 앞에 도착했다.
'두둥실'
형체는 보이지 않고 화룡검만이 공중에 떠 있었다.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지 소중히 품속에 안고 있었다.
[협곡 안으로 무공이 고강한 적들이 들어서고 있는데 그들에게 성찬을 베풀어 주고 싶소. 큼지막한 바위두부 면 좋을 것 같은데 화룡검도 가지셨으니 힘좀 써 보겠습니까?]
유령왕 성격에 거절할 리 없었다.
[켈켈켈! 바위두부라? 알겠다. 그들에게 기막힌 바위두부를 배 터지게 선사해주지 그런데 몇놈이나 오느냐?]
[이천여명은 되는 것 같소.]
[이천명....흐흐흐 최소한 한놈당 열개씩은 줘야겠지....? 그것도 뜨끈뜨근하게 말이야.]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사라졌는지 공중에 걸리어 있던 화룡검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참나! 성질하고는 .....]
은성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심안으로 유령왕의 활약상을 지켜보려던 은성은 포기하고 좌정한채 두둥실 떠올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