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17화 (117/152)

[연재]황정허무검(117)

"알겠네. 그러고 보니 자네 조부와 검을 겨룬지도 벌써 삼십오년이 지났군 그래. 아쉽게도 반초 차이로 패했 지만.... 이번에는 다를걸세."

말을 마친 노인이 고색이 완연한 검집을 서서히 빼자 검날이 드러나고 요요로운 혈광이 뻗혀져 나왔다. 그런 데 빼어든 검은 매우 특이한 형상이었다. 손잡이 근처 검날 양측으로 구멍이 뚫리고 수정같은 고리가 꿰어져 있었던 것이다. 붉은 검신에 검붉은 수정 고리..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검은 아니었다.

"혈마교(血魔敎)의 제혼검(制魂劍) 이군요. 혈마교는 이백년 전에 멸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노인장은 혈마교 의 후인이십니까?"

"허허! 눈썰미가 대단하군 그래. 역시 모용가의 피는 특별하구만. 자네 말대로 이검이 바로 혈마교의 최대 보 물인 제혼검이네. 자네 조부에게 패한 뒤로 십년동안이나 찾아 헤멘 끝에 간신히 발견했지. 혈마교라? 극악한 놈들이지. 하지만 더 이상 무림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네. 내 이검을 얻기 위해 모조리 황천으로 보내 버렸으 니까 말이네."

노인의 말로 미루어 보면 혈마교의 후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정체가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확 실한 것이 있었다. 노인이 모용세가에 원한을 가지고 있고 지금 도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노인이 말을 마칠 즈음 노인의 수중에 있던 제혼검이 작은 떨림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긴장된 눈빛으로 바라보던 모용천이 급히 전음을 날렸다.

[속히 후방으로 후퇴하게. 그리고 모두에게 내공을 운용하여 청각을 보호하라 이르게. 급하네.]

다급한 어조로 전음을 날리는 모용천의 수중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작은 단도 두개가 들려져 있었다. 도신이 설백으로 흰 작은 단도들이었다. 작은 단도에 불과한데 이를 본 노인의 안면 근육이 잘게 떨렸다.

모용천의 뒤쪽에 있던 젊은 무인들이 뒤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노인의 시선은 모용천과 눈싸움이라 도 벌이고 있는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바람도 없는데 모용천의 자색 옷자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제혼검의 움 직임이 커지면서 주변에 요괴로운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따그르르르 촤라라락 딸랑, 떠더덩 촤락 따그릉.'

제혼검에 달린 아홉 개의 수정 고리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음정도 제각각이고 박자 도 다른 시끄러운 소음으로 무척이나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였다. 제혼검의 움직임이 거세지자 괴기로운 소음 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모용천과 노인의 사이에 있던 모래 먼지들이 어지러이 흩날리고 멀리서 날아다 니던 산새들이 서둘러 숲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제혼검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괴악한 소리가 더욱더 높아지고 풀포기조차 뿌리채 뽑혀 허공중에서 이리저리 난무하더니 산산조각이 나 터져 나갔다.

제혼검이 큰 진동과 함께 이장여 높이로 서서히 솟아 오르자 이와 보조를 맞추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것 이 있었다. 모용천이 등뒤에 매고 있던 유심초(有心草)라는 검이었다. 제혼검과 똑같은 속도로 솟구쳐 오르더 니 제혼검이 멈추자 덩달아 유심초도 허공중에 멈추었다.

초록색 검날이 햇빛에 반짝일뿐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검이었다.

괴악한 소음으로 사람의 심기를 자극하고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제혼검 주위로는 혈강이 어른거리지만 유심초 주위로는 옅은 녹광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갑자기 제혼검 주위로 뿜어져 나오는 혈광이 몇배나 짙어지면서 제혼검의 형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혈광이 차츰 넓은 범위로 확산되어져 가자 모용천과 노인의 주변에 있던 흙덩이들이 솟구쳐 오르고 작은 돌 조각들도 하늘로 튕겨져 나갔다.

사방이 혈광에 유린된 듯 미친 듯한 혼잡속에서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존재들이 있었다. 모용천과 노인이었 다. 서로의 눈빛에 서로가 얽매인 듯 꼼짝없이 마주보고 있었지만 둘다 허공으로 두자나 떠올라 있었다.

모용천의 손이 조금 치켜져 올라가자 노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모용천의 손이 올라가는 것은 멈추어졌지 만 그의 손바닥 위로 계속하여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수중에서 백광을 발하던 작은 단도 두개였다.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올라가는 백광을 보며 허공에 가득한 혈광이 몇배나 짙어졌지만 이에 상관 없다는 듯이 백광은 떠오르고 있었다.

혈광이 짙어지자 땅속의 흙들이 튀어나와 그들의 발밑으로 일장반이나 되는 큰 구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혈광 과 흙먼지 속에 떠오른 백광이 아주 느린 속도로 노인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가자 노인이 입술을 악무는 것 같 더니 순식간에 상황이 돌변하여 버렸다. 공중에서 요괴가 울부짖는 듯한 요악한 비명소리와 함께 뇌전같은 속 도로 혈광이 모용천에게로 뻗혀져 내려간 것이다. 그러자 제혼검과 대치하고 있던 유심초도 녹색 섬광으로 변 해 혈광에게로 날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기에 갑갑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던 두자루 백광이 유성처럼 쏘아져 나갔다.

"꺄르르르르르."

그토록 불협화음을 내던 아홉 개의 수정 고리들이 부딪혀 심장이 멎고 뇌가 흔들릴듯한 귀곡성으로 울부짖자 멀리서 구경하던 무림맹의 군웅들 몇 명이 귀를 틀어막고 땅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살인적인 마음(魔音)이 아닐 수 없었다.

"까강 꽈과과광..쉬리릿 꽝"

혈광과 녹광이 쉴세없이 부딪히는 가운데 모용천의 손을 떠났던 백광 두줄기가 혈광에 잠긴 노인의 몸에 작렬 해 들어갔다.

하지만 호신강기런가? 백광이 튕겨져 나왔다.

그런데 떨어질 것 같은 백광들은 다시금 솟구쳐 오르며 노인의 호신강기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백광은 또다 시 튕겨 나왔지만 충격이 심했는지 노인의 호신강기가 마구 흔들렸다. 백광이 다시금 짓쳐 들어가려는데 녹색 검광과 뒤엉켜있던 혈광이 후퇴하여 노인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백광들을 몰아쳐갔다. 백광들은 혈광을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혈광을 피하느라 미처 노인을 공격 해대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뒤따라온 녹광은 달랐다. 녹색 섬광이 노인의 호신강기로 파고들자 백광을 상대하던 혈광이 급 히 녹색 섬광 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것 같았다. 갑자기 녹색 섬광이 거대해 지더니 그대로 호 신강기 속으로 파고 들어가 버렸다.

녹색 섬광을 뒤따르는 혈광이 갑자기 힘을 잃는 찰나 나머지 백광 두 자루도 노인이 펼친 호신강기를 꿰뚫고 나와 긴 호선을 그리면서 모용천에게로 날아갔다.

승부가 난 것 같았다. 주위를 감싸고 있던 혈광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였다.

"으윽..!"

구덩이 속에 나뒹굴어진 노인은 단전을 파고든 유심초의 손잡이를 두손으로 꽉 붙잡고 있었다. 그의 좌우측 가슴에는 구멍이 뚫린 듯 핏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혈색이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검에는 눈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나 유심초는....."

"잘 알고 있네..... 쿨럭."

노인이 입속으로 한사발이나 되는 핏덩이를 쏟아 내었다. '퉤' 입속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더니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유심초로군.., 혈마교의 제혼검과 구령마혼검법(九鈴魔魂劍法)이면 충분히 상대할수 있을줄 알았는데.. 그런데 자네는 대단하구먼. 자네 조부조차도 무심도는 한자루 밖에 다룰 수 없었는데....웩....."

노인이 또다시 피를 쏟아 내었다. 혈색이 거의 백색으로 변한 것을 보니 삶의 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보였다.

"노인장은 우리 모용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의 머리카락이 검다는 것을 간과하다니 큰 실수 를 한 것 같습니다."

"머..머리카락, 염색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서..설마 모용세가에 대대로 내려온다는 미완의 내공심법인 역혼 신명공(易魂新命功)이 완성되었다는 말인가?"

노인의 희미해진 안광이 잠시 빛을 발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설의 제혼검이 혼을 달라 울부짖는데 어떻게 유심초가 심혼을 유지하고, 무슨 정신으로 제가 무심도를 날릴 수 있었겠습니까?"

"어..어쩐지..... 그건 그렇고 이제는 모용가의 천하가 되겠군 그래. 신공이 완성되고 이 망할 유..유심초도 나를 제물로 삼아 상대키 어려운 괴물이 되었을 테니까 말이네."

노인의 눈빛이 급격히 희미해지자 모용천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노인장이 누구신지는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모용천의 말을 듣던 노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돋았다. 죽기직전 나타난다는 회광반조 현상이었다.

"이미 멸문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이니 알 필요가 없을 것이네. 현천교에는 작은 인연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것도....허헉 헉!"

마지막 말을 미처 하지 못한 듯 부릅뜬 눈으로 노인의 고개가 푹 꺾어져 버렸다. 그러자 노인의 가슴에서 녹 색검이 서서히 빠져 나왔다. 모용천의 앞에까지 검이 다가오자 모용천이 손을 내밀어 검신을 부드러이 쓰다듬 어 주었다.

"검령아! 수고했다."

마치 다정한 친구에게 속삭이는 듯한 말이었다. 검은 기분이 좋은지 나지막이 울어댔다. 녹색의 기운이 조금 더 짙어진 듯 싶었지만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검신을 쓰다듬는 모용천은 아무런 내기도 운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용천이 기를 운용하지도 않는데 검이 허공중에 떠 있다니....괴사가 아닐 수 없었다. 모용천의 손끝이 멈추자 녹색검이 모용천의 어깨위로 스 치듯이 날아올라 검집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한걸음에 뛰어 구덩이를 오르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오룡중 삼성검문의 옥룡 반수석이 감탄스런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룡들도 주변의 처참한 형상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자네였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네. 진허는 괜찮은가?"

치열한 혈전을 방금 전에 끝내놓고 어느새 마음의 평정을 찾았는지 걱정스런 목소리로 동생의 안위를 묻다니. 볼수록 믿음직스런 구룡의 수장이었다.

"다행히 생명을 건졌습니다만 무공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화타나 편작이 소생하지 않고서야....."

반수석이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다니 천만 다행이네."

모용천도 역시나 침통한 목소리였다.

"...."

곤륜천문 안으로 접어든 육룡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기관지학에 일가견이 있는 화산파의 수제자 인 매향검(梅香劍) 여동빈이 가장 앞서 나아가고 있었다. 곤륜천문은 십장 길이밖에 되지 않았으나 육룡이 곤 륜천문의 출구쪽에 가는 시간이 이각여나 걸릴 정도로 조심스런 행보였다. 다행히 별다른 매복이나 기관이 설 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입구를 지키던 노인을 그만큼 믿은 것 같았다.

아니면 곤륜천문을 지나 사백여장에 걸쳐 펼쳐진 곤륜지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놓고 무림맹 군웅들을 유인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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