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12)
"알겠습니다."
종이학이 움직이자 군웅들도 서둘러 길을 나섰다. 대오에 변화가 있다면 은성이 제일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황야는 그리 길지는 않아 보였다. 심안을 가중 시켜도 별다른 위험성조차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러나 소리없는 위험은 발 밑에서부터 감지되어져 왔다. 단단하던 대지가 물렁이는 듯 희미한 족적을 남기더 니 신발조차 집어 삼키려는 듯 서서히 출렁이고 있었다.
"내공을 돋워 몸을 가볍게 하십시오!"
이상한 낌새를 제일 먼저 감지한 은성이 군웅들에게 소리칠 때에는 대지의 출렁거림이 확연히 느껴지기 시작 하였다. 보무당 무인들은 거의다 고절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신법은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에 든 고수도 많았으며 초상비(草上飛)의 경공은 대부분 펼칠 수가 있었다. 해동역사처럼 외공에만 치중한 고수도 간혹 있 지만 말이다.
출렁거림은 순식간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켰다. 조용한 바다에 해일이 덮치는 기세런가?
은성의 앞쪽 저멀리에서 황야가 물결처럼 일어나더니 파도처럼 큰 구릉을 만들어 밀려 들어왔다. 그런데 거대 한 흙덩이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뒤쪽의 구릉들이 앞쪽의 구릉을 타고 넘으며 순식간에 덩치를 불리웠 기 때문이다. 작은 동산만한 크기로 불어난 흙의 파도가 하늘을 덮을 만한 기세로 보무당원들에게 덮쳐 내려 왔다.
인력으로는 도저히 항거불가능한 위압적인 기세였다. 각자가 호신강기를 발휘하며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지만 주진인의 세 제자등 무공이 약한 사람들은 두눈을 뜬채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진인이 손에든 주작봉을 휘둘러 세 제자의 앞쪽에 불의 장막을 피워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힘없이 주작봉을 내려트렸다.
토극화(土克火)라 소용없는 행동인 것이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늘빛조차 차단한 흙더미들을 바라보던 주진인은 아직도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 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장여 앞까지 다가온 괴물같은 흙더미를 향해 도강을 운용한 현철도를 휘두르 는 보무당주와 장풍을 날리려는 자세를 취한 은성이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죽음 이 덮쳐 오는데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삶을 도모하는 두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두 사람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으련만 경공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피하지 않고 죽음조차 무릅쓰고 있었다.
진정한 협객들인 것이다. 급히 제자들에게 달려들어 주작봉에 염력을 집중하자 주작봉에서 일장여나 되는 주 작이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주진인과 함께 둥글게 모인 모산파 문인들을 거대한 날개로 감싸 안았다.
무공의 호신강기에 비견되는 호신법술이었다. 하지만 저만한 크기의 흙덩이속에 묻힌다면 살아날 가망성은 매 우 희박했다. 그래도 시도를 안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그것은 또한 자신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협객 들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였다.
"꽈과과과광..."
하늘이 부서져 내리는 굉음은 흙덩이가 대지를 덮쳐 모든 것을 멸살시키는 굉음이리라...조금 더 버티겠지만 조만간 주작이 찌부러질 것이고 엄청난 압력으로 누르는 흙덩이에 자신과 세 제자들은 압사당할 것이다. 자신 은 죽어도 억울함이 덜하겠지만 모산파의 기둥들인 세 제자의 죽음은 진정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모산파 제자들 중에서도 특출난 제자들이었다. 무림의 협사들과 친분을 도모하고 실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곤륜행에 참가시키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법 안으로까지 데리고 왔는데 지켜주지도 못하고 이토록 허 망하게... 만감이 교차돼오는 주진인 이었다.
어!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버티다 못한 붉은 주작이 괴로워할 것이고 그 고통은 자신에게 전이 되어 자신도 고통스러워져야 하는데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이다.
"우와! 대단하다."
"뭐..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철두파의 떠벌이들이 지껄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냥 환각이었다는 말인가?
영력을 발휘해 호신법술을 해체한 주진인이 믿을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환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보무당원 들이 위치한 양쪽으로 거대한 동산 두 개가 새로이 생겨난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덮쳐들던 거대한 흙덩이 들이 갑자기 양쪽으로 나뉘어 공격했을까?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보무당주나 이대협이 동산만한 흙덩이를 무공으로 두쪽 냈다는 말인가?
더욱더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었다.
"전력으로 뚫고 나갑시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옆에 있는 거대한 동산들이 출렁이며 덮쳐내려올 듯한 기세를 보이자 은성이 급히 외치 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종이학은 무사한 것 같았다. 일행들이 정지한 틈을 타서 저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경공을 발휘해 속도 를 높이자 위험이 훨씬 줄어들어 버렸다. 일행이 지나온 뒷자리에서 땅을 진동시키는 굉음이 들려오고 앞쪽에 서는 여전히 흙덩이들이 파도를 만들며 밀려왔지만 빠른 속도 때문에 흙파도들이 중첩될 기회가 줄어든 때문 이었다.
해동역사는 금룡각의 무인들이 그리고 모산파의 세 제자들은 주진인과 보무당주 그리고 은성이 한명씩을 데리 고 몸을 날렸다. 일행이 종이학을 따라잡을 즈음해서는 흙파도가 줄고 땅도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뒤를 바라 보자 흙파도는 여전했지만 조금씩 기세가 꺽어지는 것 같았다. 공격할 대상들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술사들이 공세를 멈추었을 것이다.
"이대협! 어떻게 된 일입니까?"
좀전에 거대한 흙더미의 위협에서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글쎄요. 저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단번에 두쪽으로 갈라질줄은 몰랐습니다. 환각에 술법이 겹쳐져 보기 보다는 약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포달랍궁의 궁주인 달라이라마가 들으면 섭섭해할 말이었다. 포달랍궁 최고 무공인 보리패엽장의 패엽건곤(貝 葉乾坤)을 심기를 최대한 운용하여 펼치고는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약해서일 것이라니...
"그래요..?. 어쨌든 천만 다행입니다. 그곳에서 뼈를 묻는줄 알았습니다."
그냥 은성이 말한대로 환각이 겹쳐져 예상보다 약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심사가 편할 것 같았다.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발밑의 흙은 더욱 단단해져서 조금전에는 눈을 씻고 봐도 안보이던 돌맹이들도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그만 돌 을 툭 차자 땅위를 구르는 소리가 아니라 바위돌 위를 구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나무 한그루 없었다. 흙은 안보이고 바닥이 온통 바위뿐이니 나무가 자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앞쪽으로 갈수록 석산(石山) 또한 많아졌다.
"조금씩 진세의 축에 가까워지는 모양입니다."
주진인이 속도가 조금은 빨라진 듯한 종이학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현상이었다. 주진인의 술법 덕분에 진 법 안에서 헤메지 않고 진세의 핵심으로 빠르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꼭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진세의 축에 가까이 갈수록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지금 이곳도 평화로워 보였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반드시 어떤 위험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
깊은 고요속에 큰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법이다. 바람이 불면 폭풍처럼 불어오고 불빛이 번쩍이면 천둥번개처 럼 위압적일 것이다. 긴장된 기색으로 종이학을 따르는데 숨막힐듯한 정적은 의외로 빨리 깨어져 버렸다.
일행의 앞쪽에 놓인 바위가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크게 몸을 떨었다.
"이럴 수가..!"
돌부스러기들이 떨어져 나간 바위는 석인(石人)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검과 방패까지 갖춘 군사의 모습이었다. 석병(石兵)은 한명이 아니었다. 이곳 저곳에서 크고 작은 바위들이 움찔 거리는가 싶더니 석병으 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잠시지간에 일행들을 포위할 정도의 많은 석병들이 만들어졌다. 백여명 이상이나 보였 는데 그 뒤쪽으로도 계속해서 석병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무기도 각양각색이었다. 거대한 석도(石刀)나 석창(石槍)은 물론이고 석궁(石弓)을 든 석병도 보였다.
보무당원 중의 한명이 지풍을 날렸다. 대리국 왕족이라는 단지홍이었다. 지풍을 맞은 석병의 몸에 작은 구멍 이 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거대한 석도를 치켜든채 다가오는 석병의 동작을 조금도 멈추게 하지 못한 것이 다. 미간을 찌푸린 단지홍의 손가락에서 연속적으로 지풍이 뻗어 나갔다. 석도를 치켜든 팔부위에 집중되어졌 는지 석도와 함께 석병의 팔이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뭐 별것도 아니잖아!"
흑룡강성에서 온 철두파의 빡빡 고수 한명이 갑자기 뛰어 나갔다. 제일 앞쪽에서 다가오는 석병을 향해서였다.
삼장여로 거리가 단축되어 졌을때 철두파 고수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하며 날아갔다. 지면과 수평이 되어 날아 가고 있었는데 놀라운 속도였다. 위협을 느낀 석병이 돌로 된 방패로 간신히 막아낼 정도였다.
'퍼서석'
하지만 방패는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패 뒤쪽의 석병조차 뒤로 튕겨져 나갔다. 튕겨져 나가는 석병의 앞쪽에는 끊어진 팔 조각과 돌 부스러기들이 비산되어지고 있었다.
"엥!, 뭐야!"
생긴 것 같지 않게 위력적이지 않는 것이다. 동작이 느린 돌인형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두파 의 빡빡이들을 선두로 용기를 얻은 고수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검강은 커녕 검기에도 석병들의 몸은 싹 둑싹둑 잘려져 나가고 있었다.
내력을 실은 권강 한방이면 석도도 부서져 나가고 방패는 바스라져 버렸다. 강철같은 머리통을 앞세우고 붕붕 날아다니는 철두파의 고수들에 걸리면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보무당주의 삼백근 현철도가 한번 휘둘러지자 서너명의 석병이 부서지고 절단되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현묘하고 고절한 무공도 필요 없었다. 그저 어른이 어린애를 데리고 놀 듯 무공 연습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무당원들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석병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죽여도 죽여도 몰려들고 있었다. 파괴돼 땅바닥에 나뒹구는 숫자보다도 새로이 만들어 지는 숫자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제길, 어쩐지..이럴줄 알았어."
철두파의 빡빡이중 한명이 이마에 돋아나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투덜거리는 소리였다. 좀 약하다 했더니 인해 전술인 모양이었다. 여지껏 혼자서 삼십여명이 넘는 석병들을 부서트렸는데 얼마나 더 많은 석병이 남아 있는 지 감조차 잡을수 없었다. 땀을 닦으며 잠시 여유를 보이던 빡빡이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마치 못볼 것을 본듯한 눈빛이었다.
"어..어!, 저건 또 뭐야?"
뒤쪽에서 다가오던 석병들이 합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도 아니고 돌로 된 석병들이 합체하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석병들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 또한 있을수 없는 일이니 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덩치가 커진 석병들을 상대하는 것은 조금 까다로웠다. 왠만한 공격에는 쉽게 쓰러지지도 않았으며 검이나 도 대신에 거대한 방망이나 도끼를 무기로 하여 휘두르는데 스쳐도 중상일 정도로 위력이 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석병은 십여명이 합체되었는지 크기가 일장도 넘었다.
석병들은 이 근처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었다. 앞쪽 옆쪽 사방군데에서 느릿느릿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대지가 석병들로 꽉 들어찰 것 같았다.
"싸움을 중지하고 피합시다. 여기서 힘을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종이학이 저 멀리로 날아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은성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전음을 날렸다.
술사들이 이곳에 기를 전해주는 양이 많아졌는지 아니면 진법의 핵심축이 매우 가까워졌는지 종이학이 날아가 는 속도는 매우 빨라져 있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한 방향으로 곧게 날아가고 있었다.
은성의 전음에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한 보무당원들이 날렵한 신법을 발휘하여 석병들의 공세를 피하며 물러 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석병들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성난 황소처럼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석병들에게 보리패엽장의 패엽만장(貝葉萬掌)이란 초식을 펼치니 십여명의 석병이 일시에 나가 떨어졌다. 탈출로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공을 전력으로 발휘해야 될 것 같았다.
또다시 패엽만장이란 초식을 펼치던 은성의 눈빛에 돌연 긴장이 어리어지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거대한 덩 치의 석인 수십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껏 상대하던 석인들과는 비교할수 없는 덩치였 다. 그런데 은성이 긴장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의 석인들에게서 생기(生氣)가 느끼어 지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석인에게서 생기라니...?
아무리 환상적인 진법에 갇혀 있다고 하여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른다며 다시 한번 심안을 강 화시켜 보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쿵 쿵"
워낙에 덩치가 크다 보니 천천히 뛰어 오는 것 같았는데도 금새 일행들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