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11화 (111/152)
  • [연재]황정허무검(111)

    그렇다고 일상적인 풍경도 아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백색이었다. 흙과 바위도 백색이고 풀과 나무도 백색 이었다. 심지어는 바위틈새를 비집고 피어있는 작은 꽃조차도 백색이었다.

    고개를 드니 백색 하늘에서 따사로운 양광이 흘러 나왔다. 눈알이 빙빙 돌 것 같은 어지러움에 고개를 숙였지 만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였다. 문득 진안에 들면 어찌해야 될지 문상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주진인의 말이 떠오른 군웅들은 자연스레 시선을 주진인에게로 돌렸다.

    주진인은 발로 괴강(魁?)이라는 두 글자를 밟고 왼손은 뇌인(雷印)을 쥐고 오른손은 작은 막대로 검결(劍訣)한뒤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정령정령(精靈精靈) 주작령현신(朱雀靈現身) ..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그러자 주진인의 손에 들린 작은 막대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작은 막대의 표면에 세겨진 붉은 주작이 막대에서 튀어나오듯 허공에 형상화 되더니 석자정도 크기로 커졌다.

    그리고는 날개를 퍼득여 공중을 짧게 한바퀴 선회한후 다시 주진인의 앞에 멈추었다. 날개를 퍼득일 때마다 깃털끝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라 스러지고 있었다.

    "봉인을 폐쇄하니 수호령이 되어라!"

    큰 목소리로 외침과 함께 주진인의 손을 떠난 부적 몇장이 붉은 주작에게 딸려드는가 싶더니 불꽃에 타 사그 라 들었다. 그러자 부적을 맞은 주작이 갑자기 양날개를 접어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그 형상 그대로 주진인의 손에 든 막대로 다시 쭈욱 빨려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한자 정도 길이의 막대 표면에 세겨진 주작 문양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작게 축소되었지만 제 모습을 간직한채 막대끝에 연결되어 달라붙어 있었다. 단조로운 막대 형태에서 붉은 주작이 조각된 두자 길이의 봉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한자 길이의 붉은 주작은 금새라도 불꽃을 토해낼 듯 생동감이 있었다.

    "야! 저거 뭐하는 짓이냐?"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리였지만 주진인의 청력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글쎄, 어느곳으로 가야할지 저 새가 알려줄 것 같은 분위기 아니냐?"

    굳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철두파의 무리들일 것이다.

    '바보같은 놈들'

    수호령이라는 말도 이해 못하는 멍충이들이 어떻게 무공의 고수가 되어 보무당원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철두파라고 머리통만 단련하다 보니 고수가 되어갈수록 머리가 굳어 멍청해졌을까?

    일리있는 추측이었다.

    속으로 실소를 지으면서 품속에 손을 넣어 부적을 꺼내든 주진인이 또다시 주문을 외웠다. 처음에 자신을 보 호해줄 주작령을 불러내기 위해 외웠던 주문보다는 훨씬 길고 복잡한 주문이었다.

    "천두단정(千頭丹頂) 만세장춘(萬歲長春) .. 삼산구후선생율령섭 (三山九侯先生律令攝)"

    주문이 끝나자 주진인의 손에든 네모난 부적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주진인의 손을 떠나 공중 으로 치솟아 오른후 부적 혼자서 이리저리 접히더니 잠시후 종이학(紙鶴) 한 마리로 변화 되었다.

    주진인이 부린 술법은 관학정상(關鶴呈祥)이라는 술법으로 하늘의 선학(仙鶴)을 불러 재앙을 물리치고 길을 인도받는 고차원의 법술이었다. 주문을 외우면서 심령을 집중하여 진세안을 흐르는 미묘한 기세를 감지하여 역으로 따라가라고 부탁하였으니 진세의 핵심축을 찾아가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문상에게 진세를 움직이는 흐름이 있을 것이니 그 흐름의 원천지를 역 추적하면 진세를 파해할수 있는 장소에 당도할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술법이었다. 종이학은 공중에서 멤돌며 방향을 정하는가 싶더니 한쪽을 향해 서서히 날아갔다.

    이를 본 주진인이 앞에 선채로 보무당원들에게 말했다.

    "선학이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마시고 따라 오기 바 랍니다."

    별다른 이견이 있을리 없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정한 대오를 유지한채 종이학이 날아가는 속도에 맞 춰 따라가고 있었다.

    "젠장, 시간도 없다는데 저놈의 잡새는 왜그리 늦게 가는거야!"

    다만 투덜거리는 소리는 군웅들 틈에서 흘러 나왔다.

    시간이 흘러가고 꽤 긴 거리를 걸었지만 백색 세계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주변 경치가 너무 단 조롭고 길이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으니 투덜대는 사람들도 지친 듯 입을 다물었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앞으 로 내딛을 뿐이었다. 나무와 숲이 있으니 시냇물 흐르는 소리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올만도 한데 죽 음의 세계인 듯 청각을 자극하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눈을 자극하는 색도 없고 뇌를 자극하는 소리도 없으니 보무당원들은 걸음은 걷고 있었지만 정신은 무료하기 이를데 없었다. 차라리 적이라도 나타나서 죽던 살던 싸움이라도 붙길 바랐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백색의 세계 에서 움직이는 것은 자신들 뿐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니 육체가 피곤한 것은 둘째치고 정신마저도 황폐해져 갔다. 그냥 이렇게 걷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시간 관념이 사라지고 목적의식도 사라지면서 서서 히 자아조차 희미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혼미해진 정신은 환상속으로 침몰되어 그들 모두를 죽음의 나락으 로 인도하고 있었다.

    한편 사부와 사숙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은성도 침묵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군웅들과는 다른 의미의 침묵 이었다. 죽음(死)속에서 삶(生)을 찾기위한 고뇌와 결단의 침묵인 것이다. 처음에 종이학을 따라 걷던 은성은 무언가 계속해서 그의 뇌리를 자극함에 심기로써 황급히 신심(神心)을 보호해 주었다.

    신심이 안정되자 더 이상 뇌리를 불편하게 만들던 기운은 사라져 버렸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이 발동되어졌다.

    심안으로 보무당원들의 행동과 표정을 관찰하고서야 어렴풋이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 아낼 수가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신심이 보호되어 정상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수십배나 느리게 시간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는 반각이 지났는데도 하루정도가 지났으리라 생각되어질 정도로 행동하고 있었다.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삼사일 정도를 아무것도 먹지 않고 광야를 헤메다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발걸음은 흐트러지고 조금 헤 벌어진 입술은 바짝 타들어가 있었다. 이곳에 왜 들어왔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초점조차 흐려진 눈빛으로 허공을 떠가는 종이학을 좆아 발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종이학을 따라가는 것이 그들이 진법안으로 들어온 목표라도 되는 것 같았다.

    시간조차 변화시킬수 있는 진법의 무서움에 황당해하며 심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은성은 또다른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진법안에서 또다른 진법에 빠져들어 있었던 것이다.

    선학이라는 종이학을 믿고 따라가고 있었건만 선학조차도 방향을 잃고 헤메돌고 있었다. 미로속을 지나듯 같 은 길을 반복해서 돌고 있었다. 밀교의 진법에 술법이 가미된 절진이라더니 왠만한 술법은 통하지가 않는 것 이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던 은성이 무슨 결심이 섰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쳐들었다. 군웅들을 바 라보니 이대로라면 이각도 되기전에 정신분열과 내력고갈로 모두 죽어 쓰러질 것 같았다. 벌써부터 입가에 거 품까지 나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진속에 들어온지 반시진도 안되었는데 정말로 공포스러운 진법이 아닐수 없었다. 진에 빠져들면 그냥 방치해 놓아도 한시진안에 미쳐 죽거나 내력이 고갈됐다고 착각하며 지쳐 죽어가는 절진이라니 이 절진을 만든 사람 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지... 몸서리쳐질 정도였다.

    심기를 가중시켜 심안을 확대하자 진세안에 펼쳐진 미로밖의 기세(氣勢)가 심안에 잡혀져 왔다. 그중 생로(生 路)라 판단되는 곳은 세군데가 있었다. 이곳처럼 조용한 기세는 아니었지만 다른곳에 비해서는 사기(邪氣)가 적게 풍겨져 나오는 곳이었다.

    '스팟'

    심기로 호신강기를 펼친 은성이 묵귀영의 신법으로 공간을 격하고 나타난 곳은 세지점중 한곳이었다. 하지만 잘못 찾아든 것 같았다. 사기는 적었지만 비릿한 요기(妖氣)가 넘쳐나고 있었다.

    인간의 육향을 맡았는지 요악한 괴소와 함께 별 괴상한 요괴들이 몰려들자 은성이 급히 처음의 자리로 빠져 나왔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것을 믿을 장소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은성이었다. 감각조차 믿기 어렵다 는 것을 전제로 미로를 탈출할때의 방향과 거리만을 염두에 두었다가 그대로 빠져나와서인지 다행히 보무당원 들이 있는 곳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가 있었다.

    작은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한번 휘젓고는 다시금 은성이 두 번째 장소로 신법을 발휘하였다. 호신강기로 몸 을 보호하였지만 미로와 두 번째 장소를 가로막는 기세가 커서인지 몸에 충격이 느껴져 왔다.

    하지만 이곳은 미로속 세계와 같이 백색의 비정상적인 전경은 아니었다. 괴기로운 기운이나 요괴조차도 보이 지 않고 있었다. 나무 한그루 없고 사방이 흙밖에 보이지 않는 황야였지만 시간도 정상으로 흐르고 있었다.

    '푸스스스'

    유령이 사라지듯 은성의 몸이 공간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렸다.

    미로(迷路)속으로 돌아온 은성은 심기를 발휘하여 허공중에 떠 있는 종이학(紙鶴)을 조종하였다. 종이학은 신 기(神氣)에 의해 보호 받고 있는 듯 저항이 심했지만 진세속 술법에 힘이 약화 돼 있었기 때문인지 은성의 심 기가 이끄는 대로 방향을 바꿔 이동하였다. 종이학이 강요되어 이동됨에 주진인이 정신이 든 듯 흐릿한 눈을 치켜 떴지만 그것도 잠시 다른 보무당원들과 같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강시처럼 종이학을 따라 발걸음을 떼었 다.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강대한 기세는 은성 혼자의 몫이었다. 전체 진이 요동치면서 흔들릴 정도로 반발력이 거세져 왔지만 중단전에 남겨진 태극진기와 상단전의 심기를 총동원하여 꿋꿋이 버티는 은성의 기세 를 무너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보무당원이 빠져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은성도 미로속을 빠져 나왔 다.

    미로를 빠져 나오자 군웅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져 갔다. 일주일 정도 시달린 듯한 피폐해진 형상에 서 반시진 정도 시달린 듯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심해서인 지 일각이상이 지나서야 정상적인 눈빛을 찾을 수가 있었다.

    "뭐..뭐야? 내가 살아있기는 한거야?"

    "아야야 ..."

    철두파의 나서기쟁이는 외눈박이가 되어서도 천성을 못버린 것 같았다. 만만한 동료 빡빡이의 볼태기를 잡아 쥐어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긴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전의 위험했던 시간이 이제야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겪어 나가게 될 위험도 예측되어졌다. 처음보다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은 않고 있었지만 모두의 눈 에 긴장된 기색이 띠여졌다. 심지어는 철두파 나서기쟁이의 외눈에도 공포와 긴장이 물씬 묻어 있었다.

    그리고 몇몇 고수들의 눈빛에는 또 다른 것도 담겨져 있었다.

    은성에 대한 감사와 경외지심이었다. 흐릿한 안목이지만 그들을 이곳으로 이끈 은성의 활약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고수들 중에는 보무당주와 주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협! 삶과 죽음이 교차하니 법술만으로는 자신할 수가 없군요. 앞으로 나서서 길을 인도해 주시지요."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어려움에 처하면 능력있는 사람이 두드러져 보이는 법이다.

    진법에 드는 생문을 찾으면서 보인 지혜와 무공은 물론 죽음 직전에 미로에서 군웅들을 구해준 은성의 초인적 인 정신력을 본 주진인이 은성에게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되길 간청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보무당주는 물론 사부와 사숙마저 자신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바란다는 느낌이 들자 어쩔수 없다는 듯 은성이 일행 앞으 로 나아갔다.

    사부와 사숙은 물론 해동의 무인들이 속해있는 보무당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모두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 는 것이다. 은성은 주진인과 보무당주를 넘어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미로를 빠져 나오자 종이학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주진인의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었지만 미로속에서 움직이던 것보다는 훨씬 생기있어 보였다.

    "선학을 이끄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극락조단의 고수들이 절진속에 숨어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중 일부는 진세의 핵심이 되는 자리에서 술법 을 부리며 진세를 조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진세를 조정하다보면 기세의 흐름이 있을 것인데 그 흐름을 뒤따 르는 것입니다. 무림맹의 문상께서 조언해준 방법입니다."

    기세의 흐름이라?

    주진인의 설명을 듣던 은성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현기어린 대처방법이었다. 술법이 가미되지 않은 진법이라면 펼쳐진 이후로 진세의 법칙에만 따라 운용되기 때문에 별 소용이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속에서 술법이 가미되고 시시각각 진을 변화시킨다면 진의 위험성은 몇배로 높아지겠지만 이런 생각 지도 못한 단점이 발생되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수준의 고수들에게는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술 법으로 미묘한 기세를 감지할수 있는 술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주진인을 딸 려 보내준 문상의 능력이 또 한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무공이 높은 절세 고수들도 미묘한 흐름을 감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내기를 보내지 않고 간접적인 법술의 기운을 보낸다면 이를 감지하는 능력은 술사에게 많이 뒤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세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부동의 자세에서 감각을 집중하여야 하는데 언제 적들 의 공세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적지에서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은성처럼 심기를 자유 자재로 사용할수 있는 절세 고수도 진세속에서 심기가 억제당해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 가 없는데 다른 고수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이치라면 좀전에 종이학(紙鶴)이 미로에서 헤메돈 것도 이해가 되었다. 미로만으로도 충분히 침입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면 진속의 술법자들이 자신들이 속한 미로속으로 어떤 기세도 내보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로 밖에서 흘러오는 기세가 없다면 종이학은 미로안에서 발생되는 진법의 기세에만 반응하여 움직였을 것이 다. 헤메도는 것이 당연하였다. 사방을 둘러보고 모두가 정상으로 회복된 것을 확인한 은성은 길을 나설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주진인께서는 지학에게 다시 길을 인도하도록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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