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10화 (110/152)
  • [연재]황정허무검(110)

    모산파의 장문인 주진인은 진(陣)을 바라보며 난감해 하고 있었다.

    진법을 보호하기 위한 안개나 위장은 없었지만 진 안으로 들어갈 별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천지를 가로 막은 듯이 투명한 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진 내부의 전경조차도 희미하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꿈이지 착각인지 진 내부의 전경이 시시각각 변화되고 있었다. 한치 앞도 안보일 빽빽한 밀림이 사라 지고 사막이 나타나는가 하면 갑자기 드넓은 바다로 변해 파도가 몰아치고 또다시 괴이망측한 바위들이 즐비 한 험산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느 곳을 뚫고 들어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무림맹의 보무당주는 물론이고 바로 뒤쪽의 모산파 제자 두명까지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술법쪽에 재주가 많은 제자들이었지만 진법에 대해서는 전 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뒤로 이장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칠십여 명의 보무당원들도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작정 뚫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생문(生門)이 하나라면 사문(死門)은 열도 넘을 것인데 사문에 들면 십중팔구는 죽음으로 직결될 것이다. 문 상의 설명대로라면 생문을 찾아 들어가도 진을 파해하고 무사히 살아나올 사람이 전무하거나 있더라도 그 수 가 많지 않을 터인데 시도도 못해보고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뒤쪽의 보무당원들을 바라보니 지금 맡겨진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은 하 고 있었지만 두려움이나 공포에 젖은 눈빛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잘된 일일수도 있었지만 이들도 알 권리 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던 모르던 죽을 확률이 높겠지만 알고 죽으면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몸을 돌려 보무당원들을 바라보면서 주진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껏 많은 진법들을 겪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진법은 여러분들이 지금껏 경험했었던 진 법들에 비해 수십배 위험하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저도 한번도 보지 못하였고 문상조차도 자신할 수 없는 진법입니다. 밀교의 진법에 술법이 가미되어 위험성이 상상키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뿐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이 친구처럼 텅 비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하나같이 머리를 박박 밀고 기름을 바른 듯한 무리중 한명이 옆 동 료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을 하고 있었다. 흑룡강성에서 온 철두파(鐵頭派)의 외문 고수들이었다. 진지하 니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태평하게 농담을 하는 것을 보니 머리가 텅비긴 텅빈 모양이었다.

    "현천교 극락조단의 고수들이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는 진법입니다. 제가 그동안 무림맹 보무당의 명성을 셀 수 없이 들어왔습니다만 앞으로는 들을 수 없을까봐서 지금 제 가슴이 새카맣게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주진인은 절대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전에 주절거렸던 빡빡이는 나서기를 무 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하! 걱정마십시오. 주진인께서 돌아가시면 보무당이 큰 공을 세울때마다 옆에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 주진 인 묘에서 낭독하도록 시키겠습니다."

    말을 하고는 또다시 껄껄 웃었는데 하나같이 철두파의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진인도 억지 쓴 웃음 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 저 혼자만 죽어 눈앞의 절진이 파해될 수 있다면 무림의 홍복이니 웃으며 죽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기우가 사실이라면 저는 물론이고 여러분들 중에서도 성한 몸으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입 니다. 쉽게 생각하고 안이하게 대처하면 진속에서 전멸할 것입니다."

    주진인의 말이 끝나자 마자 철두파의 무리들이 있는 곳에서 '탁' 하니 큰 소리가 들려왔다. 나서기쟁이가 동 료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치면서 나는 소리였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맞은 동료의 머리통에 붉은 손바닥 자욱이 선명이 찍혀져 있었다.

    "젠장!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 두시지요. 마교와의 전쟁시 지옥보다도 더 험한 난관을 헤치고 살아남은 보무 당원 들이오. 극락조단인지 꼬랑지단인지는 몰라도 우리들이 나서면 꼬리를 말고 도망갈 것이니 걱정말고 이 만 진 안으로 들어갑시다. 시간이 급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말이 통하지가 않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진법을 일별하고는 다시 보무당원들을 바라보면서 주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진법의 입구조차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어찌해야 되는지는 문상이 지시해 준 것이 있지만 진법안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으니 난감할 지경입니다."

    주진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무력은 보무당에서 책임지고 진법과 술법은 자신이 조력하여 대처하도록 믿고 자신을 딸려보내준 것인데 여러 사람의 기대를 처음부터 무너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원의 진세는 음양과 오행을 알고 사 상과 팔괘를 이해하면 어느정도는 진세의 성질과 변화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눈앞의 진세는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밀교측 진세라 역리(易理)가 바뀌고 조화(調和)속에서 부조화(不調和)를 추구하다 보니 중원의 진세 와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처럼 감조차 잡기 어려운 것은 술법이 가미되면서 또 다른 변화를 주었기 때문 일 것 같았다.

    "참나! 아 그럼 처음부터 들어갈 구멍을 못 찼겠다 했으면 우리가 와서 찾아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진인 님은 결혼하셨습니까?"

    "...??!"

    썰렁하니 한마디 던지고 무엇이 좋은지 왁하니 웃음을 터트리며 철두파가 진법 앞으로 다가오자 다른파의 무 인들도 진법 앞으로 다가섰다. 철두파를 선두로 몇몇이 진법 가까이 다가가 안쪽을 검으로 찔러보고 장풍을 날려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겪으로 힘만 빼고 남는게 없었던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이 우물 판다는 말이 있었다. 결국 철두파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 허락도 없이 진법안으로 상반신을 쑤욱 들이밀었다. 하지만 눈한번 깜짝이기도 전에 빠져 나왔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말이다.

    "으아아악, 내 눈..내 눈..."

    얼굴 반쪽이 화염에 불탔는지 처참한 형상으로 익어 있었다. 다행히 빨리 빠져 나와서 나머지 한쪽 눈은 보존 할 수 있었다. 얄미운 주둥이는 하나도 안 다치고 말이다. 한빙공(寒氷功)을 익힌 고수가 재빨리 응급 처치해 주고 있었다.

    철두파가 외문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하여도 내공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장여 정도는 일순간에 날아갈 정 도로 내공 또한 고강하였다. 일반적인 불덩이라면 이처럼 짧은 시간에 이만한 상처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제서야 철두파 무인들의 얼굴에도 신중한 기색이 조금씩 내비치고 있었다.

    이때 사부님과 사숙님 곁에서 진법을 향해 심안을 발휘하던 은성이 주진인 앞으로 나아갔다. 소림사에서 무공 이 천인의 경지에 든 천축국의 마인을 잡아 가두었던 천문금쇄진(天門金鎖陣)의 원리를 배우기 위해 범각대사 에게 칠일동안 진법 공부를 받은 은성이었다.

    중원의 진법원리와 밀교측의 진법 원리가 달라도 만류귀종이라고 그 큰 뿌리는 하나였다. 숱하게 뻗어나가면 그 종류와 변화를 헤아릴수 없지만 모여 거둬들이면 태극으로 귀일(歸一)하는 것이다.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사상팔괘(四象八卦)는 태극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그 모든 변화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기의(氣意)와 변화유무(變化有無)였다. 음기(陰氣)인지 양기(陽氣)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기의(氣意)가 생기인지 사기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변화유무가 중요하였다. 태풍속이라고 모든 곳에 바람이 거센 것은 아니다. 그 속에도 바람 한점 없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은성이 심안을 발휘하면 어둠속에서도 삼백여장 넓이 안에 있는 형상 및 동태를 눈에 보듯이 알 수 있었는데 진법 안쪽으로는 칠장여 깊이까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심기조차 가로막고 있는 것이 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 하였다. 진법의 원리는 모르더라도 진법에 이는 기운만으로도 생문을 찾아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무작정 저곳이 생문이라며 일행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일행들에게 저곳이 생문임을 납득시킬만한 구실이 필요했다.

    "주진인님, 생문을 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은성의 말에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름대로 생각들은 많이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과감히 방법이 있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협! 생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어떤 방법입니까?"

    무림맹주와 문상을 비롯하여 구대문파 오대세가의 장문인들이 이제는 모두 은성을 이대협이라 부르니 주진인 도 이대협이라 호칭한 것이다.

    "간단한 방법입니다. 잘 보십시오."

    말을 마친 은성이 뒤쪽을 향한채 손을 내뻗자 땅위의 풀중에서 여린 잎새를 가진 손바닥 크기의 풀이 뿌리채 흙덩이에 싸여 은성의 손바닥 위로 올라왔다가 부드럽게 은성의 발 아래 놓여졌다.

    잡풀이 무성한 곳에서 같은 종류의 풀만을 뿌리하나 상하지 않고 흙더미까지 포함해 격공섭물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던 보무당의 군웅들에게서 찬탄이 흘러나왔다. 일파의 장로급 고수들인 보무당 고수들에게 격공섭물이 야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은성처럼 정교하고 수월하게 펼칠만한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은성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지간에 삼십여개의 풀을 뿌리채 캐낸 은성이 이번에도 격공섭물의 진기로 풀들을 반장 간격으로 진법 일 장 앞에 늘여 놓았다. 늘여 놓으면서 조화를 부렸는지 풀들은 뿌리가 흙속에 덮여져 있었다. 능력은 놀라웠지 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도깨비 수작을 부리는지...

    의아심 가득한 눈초리로 풀잎들을 바라보던 보무당원들 중에서 눈치가 빠른 사람들 순으로 감탄사가 흘러 나 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곧게 하늘로 뻗쳐 있었던 풀잎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놓인 위치에 따라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지 부르르 떨고 있는 풀잎도 있었고 시들어 죽어가는 풀잎도 있었으며 한사코 진법에서 멀어지 려는 듯 반대쪽으로 휘어지는 풀잎도 있었다. 그 많은 풀잎들 중에서 처음의 형태대로 꼿꼿이 하늘을 향한 채 로 오연히 서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설명이 필요 없었다. 인간보다도 초목의 기감(氣感)이 몇백배로 높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기 때 문이다.

    "그럼 이곳만이 유일한 출입구라는 말이네."

    '쉬리릭'

    '카가강'

    성질 급한 보무당원중 한명이 출입구라고 생각된 지점을 향해 검을 휘둘렀는데 원치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재차 검기를 주입하여 휘두르자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에 잘리며 부스러진 돌조각들이 투명한 진법 밖 으로 떨어져 나왔다. 생문(生門)을 거대한 바위로 막아놓은 것 같았다. 이미 심안으로 바위의 존재를 알고 있 던 은성이었다. 검기정도로는 끄덕조차 않을 정도로 바위는 거대했다. 하지만 변방과 해외에서 내노라 하는 고수들이 즐비한 보무당이니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해결할 사람은 많이 있었다.

    보무당주인 독행도 혼원비 또한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였다. 그의 손에 들린 삼백근의 현철도가 묵직한 굉음과 함께 허공을 십자로 갈라놓자 진법을 막고 있던 투명한 막이 찰나지간 찢어져 나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진법 안쪽에 있는 바위가 '쩌적'하니 갈라지는 소리만 남기고 금새 복구되어져 버렸다.

    이장여 두께의 바위를 일도에 갈라놓을 정도면 도강이 펼쳐진 것이다. 독행도 혼원비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 준 일도였지만 바위가 갈라졌다고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생문을 막고 있는 바위를 갈라놓는 것 보 다는 한쪽으로 치워놓을 고수가 절실한 시점인 것이다.

    자신이 나설 기회가 도래했음을 느꼈는지 보무당원중 힘이 가장 센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금룡각의 해 동역사였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생문앞에 선 해동역사가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이완된 근육을 풀어 주었다.

    '뚜둑'

    손을 깍지 끼고 손가락 관절까지 푸는 여유를 보이더니 서서히 옆구리에 찬 천붕추(天崩鎚)를 뽑아들었다. 천 붕추에 연결된 철삭을 잡고 몇바퀴 돌리자 군웅들의 시야에서 천붕추가 사라져 갔다. 사람 머리통만한 철추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내 쏘았는가?

    만년 한철로 만든 철삭이 진법속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안으로 살펴보는 은 성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보무당주에 의해 잘라진 거대한 바위조각 하나가 은성의 심안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진법 내에서 칠장 이상 밀려간 것이다. 거대한 바위가 파괴되어 졌거나 구멍이 뚫렸다면 이처럼 감탄하지 않 았을 것이다. 천붕추 정도의 중병기에 내력을 실어 빠른 속도로 내지른다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동역사가 펼친 수법은 거대한 힘과 빠르기를 추력(?力)으로만 변화시켜 밀어내는 상승의 무공수법이 었다. 해동역사의 무공이 요즈음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씨익'

    스스로도 대견한 듯 만족스런 웃음을 짓더니 몇차례 실력 발휘를 더하자 생문을 가로막고 있던 바위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천붕추 대신에 철삭으로 연결된 자추(子鎚) 유성추로 진법안을 휘저어 보아도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자 그제서야 철삭을 거두고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생문을 발견한 은성과 생문을 가로막던 장애물을 치운 해동역사에게 말없이 눈빛으로 치하한 주진인이 진법 안으로 들어가자 현철도를 뽑아든 보무당주가 호위를 하면서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주진인의 손에 들린 작은 봉만으로는 그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뒤를 모산파의 문인들과 칠십여 보무당원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갔다. 자운검이나 은성처럼 담담한 기색으로 들어서는 사람도 있었지만 잔뜩 긴장한 안색으로 검이나 도를 뽑아든채 들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긴장된 안색으로 진안에 들어온 대다수 고수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주진인이 잔뜩 겁을 주어서 진안에 들자마자 천번지복(天飜地覆)하는 변화가 있을줄 알았는데 너무나 조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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