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8화 (108/152)

[연재]황정허무검(108)

"오라버니, 내공이 높아지면 이기어검 조차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은성과 같이 사이좋게 배의 난간에 기댄채 호수 저 멀리를 보던 검후가 느닷없이 던진 물음이었다. 멀리 가물 거리는 수평선에 두눈의 초점을 맞추다가 곤륜파 청령전에 침입했다는 괴인의 무공경지에 대해 의문이 든 것 같았다.

"글쎄,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

검후에게 설명해줄 말들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던 은성이 다정한 눈빛으로 검후를 바라보았다. 바 람에 흩날리는 검후의 머릿결이 무척이나 고혹적이었다.

"검에 검강을 주입하고 신검합일되어 날린 검을 의지로써 조정하는 것을 이기어검 이라고 부르지만 이기어검 을 펼칠 줄 안다고 다 같은 이기어검은 아니잖아. 갓 태어난 아기가 주먹을 쥐었다고 권법을 펼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말을 하면서 은성이 검후의 허리춤에 메어진 빙검 여래혼을 잡고 검의 호수(護手)를 살짝 살짝 들어 올리자 검집과 미세한 틈이 벌어지며 차디찬 한광이 번뜩였다. 내공을 주입하지 않아도 빙한지기가 뿜어져 나오는 보 타문의 장문지보 다웠다.

"이기어검을 펼치는 사람이 익힌 내공에 따라 검에 주입된 검강의 특성이 다르고 내공수위에 따라 검강의 길 이와 위력도 다르며 검의 빠르기나 변화 무쌍함이 수련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내공이 높다고 이기어검을 경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렇지만 이번 곤륜파에 침입한 괴인은 육장(肉掌)만으로도 가볍게 이기어검을 튕겨냈다고 하잖아요..."

검후가 걱정하는 것을 은성이 모를 리가 없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검후의 이기어검으로는 괴인과 대적할 수 없었다. 예리함이 화룡검에 필적하는 빙검 여래혼으로 이기어검을 펼친다 하여도 말이다.

"만약에..."

불연 듯 은성의 가슴에 한줄기 불안감이 피어 올라왔다. 자신이 항상 검후 옆에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자신이 검후 곁에 있을 때에는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막아 줄 자신감이 있지만 만약 곁에 없을때 곤륜파에 침입한 괴인정도의 고수가 나타나 검후를 공격한다면...

불안감은 차디찬 한기가 되어 은성의 등뒤에 식은 땀으로 돋아 나왔다. 눈을 들어 옆을 바라보니 조금은 걱정 스런 표정의 검후가 정이 가득한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듯 사랑스러운 검후인데...

은성이 말없이 손을 뻗어 검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따뜻하였다. 그냥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풍요롭고 아늑하며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의 샘물이 온천수처럼 솟아나와 온몸을 돌면서 온기를 더 해 주고 있었다.

검후를 만난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은성의 마음속에 검후는 이세상 전부보다도 더 큰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매!..."

은성이 정감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검후가 아기 사 슴처럼 크고 초롱한 눈동자로 은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

하지만 더 이상 은성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마주친 눈동자 사이로 사랑이 보여지고 있었다. 정감 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리고 입가에 부드러이 드리워진 환한 미소로 대답하는 사랑이었다. 작은 가슴이 쉼 없 이 콩닥이는 소리가 남에게 들킬까 두려우면서도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지순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이 었다.

마음 가득히 피어오르는 행복함을 차마 감당할수 없었던지 검후가 두눈을 감고 은성의 한쪽 어깨에 살며시 고 개를 기대었다. 사랑에 도취되어 꿈을 꾸는 듯이 입가에는 미소가 어리어지고 있었다. 그런 검후의 귓가에 속 삭이듯 은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매, 나는 참 복이 많은 것 같아. 남들은 한가지도 받기 힘든 천복(天福)을 무려 세가지나 받았으니까... 그중 가장 큰 복은 바로 하매를 만난 것이야. 이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하매를 만난 것을 보니 우리 조상 님들의 음덕(陰德)이 모두 나에게로 몰렸는가봐."

은성이 검후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이 속삭이자 꿈꾸는 듯한 검후의 미소가 더욱 짙어져 갔다. 그리고 은성의 손을 잡고 있는 손가락에도 힘이 더해져 갔다.

[두번째 천복은 해동에서 자운곡 선인의 안배로 천지자연의 원리가 함축되어져 있는 천부경(天符經)을 얻은 일이야. 나의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어진 것은 사실 천부경 때문이야.]

천기누설(天機漏泄)이라는 말이 있다.

자운곡에서 선인의 안배로 천부경을 얻은 후 지금껏 은성은 천부경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선친은 물론 스승님에게 까지 일언반구 내비치지 않은 것은 동방파 조사님과의 약속 이전에 천서를 그에게 내 보인 천신(天神)들에 대한 당연한 도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성이 검후에게 천부경을 언급한 것은 천부 경 안의 내용까지도 가르쳐 줄 용의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검후는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존재감을 넘어서 이제는 그 자신과도 바꿀 수 없는 일심동체의 인연임을 하늘에 고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검후는 은성이 언급한 천부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속삭이는 소리조차 불안한지 혜광심 어처럼 심령으로 뜻을 전하는 은성의 신중함에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복은 우리집에 대대로 내려오는 허무경(虛無經)이라는 무공서야. 비록 천부경에는 미치지 못 하지만 심오하기 이를데 없어서 천부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어.]

허무경은 은성이 익힌 내공의 근간이 되는 무공이었다.

태극의 속성인 음양을 근본으로 하여 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허무경은 태극의 본체인 오행을 수련하여 다 시 태극으로 귀원하는 천지자연에 순화되고 동응하는 신묘로운 운기법이었다.

만류귀종이라고 어떠한 방법으로 내공을 익혀도 궁극에 가서는 조화지경에 이를수는 있지만 음양을 근본으로 익히는 운기법에 비해서는 성취속도나 효과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운기법인 것이다. 은성의 내공이 일취월장한 이유였다.

이제는 허무경에서 내공의 궁극이라 일컫는 태극진기를 완성하고 천부경의 깨달음으로 심기조차 자유자재로운 은성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신묘롭고 성취가 빠른 허무경이라도 지금의 검후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 를 바가 없었다. 지금껏 쌓아온 내공을 폐기하고 새로이 오행진기를 익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성도 검후에게 허무경을 익히도록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천부경을 통해 천지간의 이치 및 무공의 오의에 깊은 성취가 있는 은성은 태극의 속성인 음양의 이치에 따른 내공운행이라도 온전하게 태극에 귀원시켜 조화지경에 이르도록 도와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후에게 천부경을 가르쳐서 검후가 깨달음을 얻도록 유도하여야 했다.

깨달음은 억지로 가르친다고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은 언제나 눈앞에 있지만 인연이 안되면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조건이 성숙되어져야만이 비로소 볼 수가 있었다.

그것도 그 자신이 고뇌한 깊이만큼만 잠깐 보여진다. 그 짧은 순간에 재빨리 깨달음을 낚아채지 않으면 다시 금 깊은 심연속으로 빠져 들어가 처음보다 몇배나 더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이 또한 깨달음이다.

그렇게 본다면 천부경은 천지간의 으뜸가는 보물이었다. 천부경속에는 천지간에 제일가는 깨달음이 숨겨져 있 었기 때문이다. 비록 절대 진리가 갑자기 깨달아 지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깨달음이 모여 궁극의 벽을 허물 조건이 되면 일순간에 깨달아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은성은 검후에게 직접 깨달음을 전해줄 수는 없어도 좀더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마음의 밭을 갈아줄 자신이 있었다. 어쨌든 검후의 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러 곤륜파에 침입한 괴인과 상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서는 천지지비(天地之秘)인 천부경을 전수해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은성의 어깨에 기댄 검후의 뇌속으로 깊숙이 각인되어 지는 글자들이 있었다. 천지간의 비밀이 전부 담겨져 있는 천부경 팔십일자였다. 굳이 검후에게 천부경이라고 설명하지도 그리고 절대로 누출하지 말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지만 은성은 일만의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믿음이 없다면 전해줄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검후가 기댄채로 깊은 심상속에 빠져들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은성은 사고(思考)를 멈추지 않고 있었 다. 비록 금접이 검후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부족하였다. 검후의 내공이 조화지경에 이르기 까지는 유령왕에게 암중으로 검후를 보호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내공을 잃는다면 조금 잃는 것이지만 검후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만큼 검후는 은성에게 소중 한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덮이고 있었지만 은성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검후가 진상(眞想)에 서 깨어나지 않는한 미동조차 없을 은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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