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7화 (107/152)

[연재]황정허무검(107)

아침 일찍부터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은 은성은 수뇌부들이 거하는 배의 선창에 좌정한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말석에 해당하는 자리였지만 무림을 대표하는 수뇌부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 에 은성이 정식으로 참석하는 의미 깊은 자리였다.

무림 각대문파의 장로급 고수들조차 참석할 수 없는데 획기적인 대우인 셈이다.

회의는 매우 침중한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었다. 곤륜의 참극을 보고 받은 직후인지라 회의를 주관하는 맹주의 안색과 목소리는 어둡고 침울하였다.

"어젯밤 우리가 살수들과 싸우던 시각에 곤륜파의 청령전에 괴인이 침입했습니다. 단 한명의 괴인에 의해 난 공불락(難攻不落)이라는 청령전이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답니다."

"..."

무림맹주의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무계할 정도였다. 참석한 수뇌부들은 아침부터 무슨 농담이냐 는 표정으로 맹주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모두들 농담이기를 바랐지만 맹주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였다.

"청령전을 지키던 오백여 곤륜 무인중 삼백여명이 죽고 선발로 출발하여 머물던 무림맹의 삼백여 적무대원중 일백여명이 죽었습니다... 단 한명의 괴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

연이어진 맹주의 말에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믿을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는 불가능한 것이다.

"괴..괴인이 사람이었다는 말입니까?"

모산파의 주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은 그것조차 불분명합니다. 곤륜파 도인들의 술법으로 형체가 잠시 드러났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 었답니다. 하지만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이기어검조차 육장으로 튕겨내며 모습조차 눈에 보이지 않으 니 인간이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맹주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말도 안된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진실된 정보가 아니며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등 선실내에 웅성거림이 높아져 갔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무림맹주가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은성은 무림맹주의 말을 진솔하게 받아 들이고 있었다.

무림속에 보이지 않는 또다른 무림이 존재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느꼈 던 세 가닥 기운은 물론이고 그가 소림사에서 처치한 천축의 괴인 정도만 되어도 곤륜파에 침입했다는 괴인의 실력에 못지 않을 것이다.

소림사 괴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축 백대산인중 십위권 안에 있는 십대산인에 비해서는 오히려 부족한 경지 이고 말이다.

"배교의 층층무상공(層層無常功)일지도 모릅니다."

선실내의 혼란함은 문상이 조용히 내뱉은 말에 의해 금시에 평정되어졌다. 내공이 담기지도 않았는데 참으로 묘한 마력이 담긴 문상의 목소리였다. 어둠속에 한줄기 빛처럼 모두가 빠짐없이 들을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상! 배교의 층층무상공 이라면 십여년전 마교와의 접전시 출현하여 배교 교주와 함께 사라져간 무 공입니다. 배교 교주의 무공을 일시에 상승시켰던 마공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배교 교주에게 최후의 죽음을 내렸던 종남의 태을선인이었다.

배교 교주는 십여년전 마교가 물러가고 형세가 불리하자 술법으로 몸을 감추고 정파의 심장부까지 침투하여 금단의 술수를 부리려고 하였다. 술수가 완성되기도 전에 발각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배교 교주 그리고 그와 동행한 세명의 배교 술사들의 능력은 지금도 태을선인의 꿈에 가끔 나타나서 베갯머리를 땀에 적 셔놓곤 할 정도였다.

완벽한 천라지망에 갇혀 신출귀몰한 술수조차 무용지물이 되자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층층무상 공이었다. 괴기무비(怪奇無比)한 공격으로 정파인들의 혼을 빼놓던 세명의 부하들이 한자리에서 숨을 거둔 이 후로 갑자기 내력이 급상승된 배교 교주에 의해 천라지망을 펼치던 정파 무인들이 숱하게 죽어갔다.

뒤를 쫒던 태을 선인이 몸서리칠 정도로 잔인한 수법들이었다. 시신이 눈을 떠 공격하고 옆의 동료가 실성한 듯 갑자기 칼을 들이미는 것은 두려움도 아니었다. 어둠이 형상을 갖춰 숨통을 조여오고 길가에 하늘거리던 여린 풀잎이 느닷없이 날카로운 도기를 흩뿌렸다.

상상할수도 없는 괴기스런 공격에 하마터면 천라지망이 뚫릴 뻔 하였지만 아쉽게도 배교 교주의 운은 거기까 지가 한계였다. 마지막 기력을 다하며 몸을 날린곳을 종남의 태을선인이 선점한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다.

불시에 닥치는 공격에 술법을 발휘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최후의 잠력까지 동원하여 버텨 보았지만 종남의 현천건강기(玄天乾綱氣)는 정파에서도 알아주는 최상의 무공 이었다. 육신이 터져 나가고 허공중에 비명소리가 울렸다가 스러지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태을 진인은 아직 도 그날 죽음의 순간에 배교 교주의 입가에 드러나던 흉측한 미소가 꿈에 나타나곤 할 정도였다.

"선인께서 한가지 간과하신 것이 있습니다. 층층무상공은 무공이 아님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타인의 내공 을 일시지간 빌려 사용하는 금단의 술법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빌린 내공은 사라지지만 일반 고수가 절 세고수의 내공을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는 악마적인 술법입니다."

"단전에 담을 수 있는 내공은 절대적으로 무인의 역량에 비례합니다. 설마 일반 고수가 절세고수의 내공을 무 리없이 받아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태을진인은 개구리의 뱃속에 바람을 많이 불어 넣어도 황소만해질수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말하고 있었다. 어 느 정도 까지는 커질수 있지만 한계 이상이면 터져 버리는 것이다. 자신있게 주장하였지만 태을 진인은 여유 로운 미소를 짓는 문상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문상이었기 때문이다.

"선인의 말씀대로 일시에 내공을 증폭시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층층무상공을 익힌 고수들이 모여 서서히 내공을 늘려가면서 단전을 키우고 단련시켜가는 방 법이 있습니다. 하루사이에 두배의 내공을 늘리지는 않겠지만 꾸준한 수련으로 일년사이에 두배나 세배씩 늘 려가며 단전과 경락을 단련시켜 나간다면 몇 년 사이에 절세 고수의 내공을 받아들여도 자유자재로 활용 가능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방법이..."

짧은 경악성과 함께 선실속이 깊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침묵속에서 다시금 문상의 목소리가 울려나왔 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천교의 무공은 배교의 무공과는 그 근본이 다릅니다. 사악한 술수와 기묘한 술법에 의 존하여 내공이 약한 배교인들에 비해 현천교의 축을 이루는 것은 도가의 현문 정종 무공입니다. 같은 층층무 상공이라도 배교도들이 펼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취가 빠르고 높을 것입니다. 만약 현천교의 수뇌부에서 층층무상공을 익혔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젯밤 곤륜을 침입했다는 괴인처럼 절대무적의 고수 다수 를 상대할 각오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문상! 대책이 없겠는지요?"

무림맹주의 더욱더 침통해져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참극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이기어검조차 육장으로 튕겨내며 하늘 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면 자신의 경지를 몇배나 뛰어넘은 상대 불가능한 고수였다. 자칫하면 정파 무림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릴수도 있는 중차대한 위기가 닥쳐왔음을 무림맹주는 피부 깊숙이 느낄 수가 있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속의 횃불이런가? 문상의 나직한 목소리가 두려움과 암울함에 잠겨있는 선실내로 조용히 울려 퍼졌다.

"어떤 방법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을 대표하여 맹주가 다급히 물었다.

"첫번째 방법은 천년의 전설이 깃든 '신선부(神仙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신선부(神仙府)'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한번쯤 들었을 이야기였다. 천외천(天外天)에 존재하며 불사의 신선들이 살고 인간계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무림 종말이 다가오면 현신하여 무림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지못할 이야기...

그리고 천하를 떨쳐울릴 무공을 지니고 있으나 천년지약(千年之約)에 묶여 자중하면서 생활하지만 신선부의 선인이 출현하면 그들과 함께 무림 평화를 수호할 전설적인 삼대가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지만 이들중 이런 허황된 이야기들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문상의 입에서 신선부라는 명칭이 나오자 흠칫 놀라는 검후 한사람을 빼고는 말이다.

"아니, 문상! 정녕 신선부가 현존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성질 급한 만취개가 무슨 증거라도 있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보의 바다라는 개방에서 '신선부'라는 전설을 그냥 방치하였을 리가 없었다. 만취개는 물론이고 그 윗대 몇십명의 방주들이 끈질기게 추적하여 왔던 전설 이었다.

그러나 신선부는 신기루였다. 전설만이 허공중에 둥둥 떠 있고 실체는 물론 실증될만한 증거도 전혀 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개방에서도 그냥 전설 뿐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 천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천중(天中)에 혈기가 어려 무림이 겁난에 빠져들 조짐이 보여 망연자실 하였었는데 천년동안 숨죽이던 자미성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음이 목격되었습니다. 자미성은 천년전 신선부 가 출현할적에 가장 환한 빛을 내뿜다가 사라져간 구원지성(救援之星) 입니다."

"신선부 말고 다른 방책도 있는지요?"

자미성이 빛을 발한다니 일만의 희망이 생긴듯한 표정으로 맹주가 물었다.

전설의 신선부가 출세하여 혹세무민하는 현천교와 마교를 상대해준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선부를 찾아낼만한 방법이 전혀 없었다. 무림이 혈세에 빠져 종말이 가까워져서 그들이 스스로 무림에 나온 다면 모를까 말이다. 그래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첫번째 방법은 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방법입니다. 신선부는 숨어있는 잠룡이라 일반인은 볼수도 없고 때가 되지 않으면 현세에 나타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천기에 나타난 대로라면 예 상보다 쉽게 찾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선부 말고 또 다른 대안이라면 무림의 은원을 초월하여 세상 끝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을 모셔오는 방법이 있습니다."

"세상 끝에서 살아가시는 분들이라니요?"

"맹주님의 부친이신 전대 무림맹주님처럼 세사를 벗어나신 분들 말입니다. 깨우침과 완전함을 위하여 초연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니 세상일에 관여하시도록 종용하기에는 어려움이 크겠지만 그분들만이 현천교의 층층무상 공에 대등한 결전을 벌이실수 있을 것입니다."

"음..."

무림맹주가 침울한 탄식을 터트렸다.

삼성검문에서 삼성검법 최후의 무공인 제 사초식 사성무극(四星無極)을 익히는 것을 남은 생애 최대의 목표로 삼고 계시는 부친이셨다. 무림맹주직을 자신에게 건네 주시면서 '믿는다' 는 단 한마디만 남기셨을때 자신감 에 넘치는 목소리로 '걱정마십시오' 라고 대답했는데 다시 무림으로 불러들여야 하다니... 죽는 것 만큼이나 하기 싫은 일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림이 살아 남아야 삼성 검문이 존재하고 그 다음에야 효(孝)도 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전대 맹주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문상께서 각 문파의 장문인들과 상의하 여 극진한 대우로 모셔 오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행한 것은 곤륜파에도 절대 경지에 드신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곤륜파가 존망의 위 기에 처했으니 그냥 좌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무상께서도 내일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곤륜 파 청령전에 무상만 계셨어도 그처럼 어이없이 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무상께서도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취개였다.

음양검(陰陽劍)이라 불리우는 무상의 무공경지는 소문만 무성하였지 실제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세수 백 여세를 넘어섰지만 은발에 사십대로 보이는 외모 때문에 내공이 반노환동의 경지에 달했다는 소문과 함께 무 검지도(無劍之道)에 들어섰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 뿐이었다.

하지만 전대 무림맹주 조차도 최상의 대우로 떠 받들어 모셔오던 무림맹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정신적인 버팀 목이라는 것에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도 무상께서 도달한 경지는 추측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중 무상보다 강하다고 자신하시 는 분이 있습니까...? 대도(大道)는 혼잡한 속세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무공이 고강하지만은 않습니다. 참새보다는 삵괭이가 무서운 법입니다."

문상의 비유에 만취개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 거렸다.

맞는 말이었지만 무작정 인정하기에는 왠지 찝찝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공격을 한 다면 가진바 무공의 위력을 몇배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곤륜의 운룡대구식이 괜히 무림일절로 소문난 것 은 아니었다. 아무리 운룡대구식을 대성해도 새처럼 날아다닐 수는 없겠지만 운신의 폭이 넓어진 만큼이나 대 적시 유리하였다.

그렇다고 문상의 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무공이 경지에 들면 무변(無變)이 유변(有變)을 제압하고 유초(有招)가 무초(無招)만 못하기 때문이다. 검강과 이기어검 보다는 무상이 도달했다는 무검지도(無劍之道)가 더 극강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무상이 도착하고 곤륜파와 합세한후 곤륜파의 그...세상 끝에서 살아가신다는 분들만 도와준다면 하늘을 나는 괴인 걱정은 안해도 되는 것입니까?"

"한시름은 놓을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천교에 하늘을 나는 괴인들이 몇 명이나 있을지 알수 없으니 그분 들 말고 각대 문파에 은거해 계신 분들까지 모셔와야 할 것 같습니다. 신선부가 문을 열고 그들의 도움이 있 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그 일은 의지만 가지고는 될 수 없으니 기대할 수 없고 말입니다."

"끙! 신선부 찾는 것은 당연히 우리 개방의 몫이겠네요."

"부탁드립니다. 저희 무림맹의 암영원과 개방에서 총력을 기울인다면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망할놈의 현천교! 자객이나 보내고 진짜루 귀찮...어!'

의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동냥이나 다니고 유유자적함과 무사태평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개방도들에 게 귀찮은 임무를 맡겨야 하는 현실에 현천교를 탓하던 만취개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은성을 바라보았다.

"이대협! 어제는 어떻게 된 일인가? 이대협이 아니었으면 이쪽도 곤륜파의 청령전처럼 큰 낭패를 당했을텐데 도대체 그들이 침입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만취개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지만 사실 수뇌부 모두가 가진 의문이기도 하였다. 선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 들의 시선이 은성에게로 집중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선상으로 나왔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시선에 부담을 느낀 은성이 간단히 대답하였지만 그 정도 대답에 물러날 만취개가 아니었다.

"아니, 아니,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느냐는 걸세. 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물속에서 접근하는 살 수들의 존재까지 알수는 없었을텐데 말이네. 그리고 혹시 멸절된 천음곡(天音谷)의 진전이라도 얻었는가?"

그냥 얼버무리며 대답할 성질의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 잘났다고 자랑하는 호들갑스러운 은성도 아니었다. 가진 바 재능의 삼푼은 숨겨야 함이 철칙처럼 통용되는 무림의 생리 또한 잘 알고 있는 은성이었다.

"물속에서 익혀야 하는 무공이 있어 제가 수중에서의 기감(氣感)에 남달리 민감한 편입니다. 그리고 천음곡이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음지성 때문이라면 해동에서 기이한 인연으로 도움을 받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냥 물속이 아니라 해저 오백장 깊숙이에서 묵귀영의 경신법을 익혔지만 말이다. 그리고 전음지성 뿐만이 아 니라 소리로 펼칠수 있는 무공에 대한 깨우침은 해동 계룡산에서 인면오공의 귀곡성을 들으며 터득하였었다.

체계적으로 음공을 익힌 것은 아니지만 음공의 활용법과 그 무서움을 절실히 깨달았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하하! 천음곡을 모르다니... 그렇다면 마음삼살(魔音三殺)과 신음일생(神音一生)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 겠구만 그래. 장담컨대 천음곡주가 살아 있다면 곤륜파를 침입했던 괴인과도 능히 자웅을 겨룰수 있었을 것이 네."

만취개의 조금은 과장된 듯한 설명을 들으며 은성은 천음곡에서 멸절되었다는 음공에 대한 호기심이 짙어져 갔다. 특히 신음일생(神音一生)이란 음공은 꼭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멸절되었다고 하니 들을 가망성이 없음 을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방주님의 말씀대로 어제는 이대협께서 큰 공적을 세우셨습니다. 경황중이라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드렸지만 덕분에 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늦었지만 제가 중원 무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겠습니 다."

무림맹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지례를 하며 은성을 치하하자 은성도 급히 일어나 답례를 하였다.

"아닙니다. 사부님과 함께 무림 정의를 지키시는 여러분들을 돕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태어난 곳은 해 동과 중원으로 나뉘어 졌지만 마음은 하나이니 너무 격식을 따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심히 부담됩니다."

은성이 겸양의 말을 끝내자 만취개가 급히 말을 받았다.

"옳습니다. 이대협이 이익을 좆아 우리를 돕는 것은 아니니 한 가족처럼 편히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무림 정의 수호라는 기치아래 모여든 협사들 이십니다. 태생과 국적은 물론이고 방파가 다름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대신 어려울때 해동이 중원을 도왔다는 사실만 가슴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와! 짝짝짝짝짝!"

만취개의 열변이 통해서일까?

선실내에 열화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나왔다. 해동과 중원이 하나가 되는 박수소리이었고 은성의 존재가 수 뇌부들의 가슴속에 깊은 자취를 남기는 박수 소리이기도 하였다.

이른 아침 선실내에서 개최된 회의는 거의 끝자락이 드러나고 있었다. 문상의 작전대로라면 내일 무상이 도착 할때까지는 이곳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무상이 오자마자 바로 출발할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 하고 적의 형세와 정보를 최대한 파악한후 미리 작전을 구상하겠지만 말이다.

곤륜파 본전인 자소전(紫小殿)

곤륜파를 첩첩이 가로막은 아홉개 봉우리중 제일 마지막 봉우리에 세워져 있으며 선택된 사람만이 거할 수 있 다는 도가 신비지처 ...그 자소전의 심처에서 곤륜파의 장문인인 운학진인이 십이장로와 함께 수심에 잠겨 있 었다. 무림에서 곤륜상인(崑崙上人)으로 불리우는 운학진인은 속세를 벗어난 것 같은 풍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붉은 동안에 백설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넉넉한 풍채를 가려주는 하얀 도포와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빛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맑은 눈동자에서 볼수 있는 것은 슬픔에 젖어있는 듯한 애처로움 이었다.

"한번만 더 재고해 봅시다. 노신선(老神仙) 님들을 다시금 홍진(紅塵)으로 불러내야 하는지..."

침통한 곤륜 장문인의 목소리에 장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장문인 앞에 앉아 있 는 십이 장로중 제일 앞쪽에 위치한 장로가 단호하니 말을 하였다. 최고 장로인 현청진인 이었다.

"장문인, 속세를 떠나 구름중에 노니시는 분들에게 과거의 연을 강요하여 살생의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부당한 일인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곤륜의 천년사직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곤륜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이미 확고한 결심이 선 듯한 결연한 어조였다.

"... 청령전에 침입했던 괴인의 무공이 쉽게 상대할수 어렵다는 것은 본 장문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 다만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곤륜 장문인은 끝내 미련이 남은 것 같았다.

천망애(天望厓)는 이곳 자소전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높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시사철 안개와 운무에 가려있어 높다란 산봉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적었지만 그 산봉우리가 천망애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적었다. 하물며 그 산봉우리 정상에 신선의 경지에 거의 다다른 반선(半仙)들이 산다는 것은 장로급 이상의 제자들만이 아는 특급 비밀이었다.

사실 장로들과 장문인이 아는 내용도 매우 제한적인 것들 뿐이었다. 천망애에는 세명의 반선들이 도를 닦으며 살고 있는데 이들의 나이는 알수조차 없지만 곤륜파에서 수도하며 도를 깨우친 먼 선배 항렬이라는 것 정도였 다. 그들이 곤륜파에서 도를 닦은 것을 인연으로 추후 곤륜파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반드시 도움을 주겠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였다. 단 한번에 한정하였지만 말이다.

비록 천망애의 세분 선인들이 곤륜파가 위기에 닥치면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곤륜 장문인은 도움을 청 하는데 무척이나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미 반선의 경지에 오르신 분들인데 속세의 은원에 얽매여 도행이 어긋 날까 두려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사소한 일일수도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인간계의 싸움이 선계로 번져가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천계에서 이를 문제 삼고 벌을 내린다면 반선은 물론이고 신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껴갈 방도 가 없는 것이다. 몇백년 적공(積功)이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질수도 있었다.

"냉철하게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청령전의 괴인이 한명 뿐이라면 저희가 충분히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만 그들이 두명, 세명 아니 그 이상이라면 방도가 없습니다. 저희 장로들 전원이 합세해도 막아낸다고 장담할 수 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무림맹과 정파 무인들이 본파를 도와주기 위해 오고 있지만 어젯밤 만행을 저질렀던 괴인과 같은 절대고수를 상대할 고수가 그중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다행히 막아 낸다고 하여도 큰 피해를 당한 후가 될 것입니다. 현천교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장 무섭고 두려운 적수는 마교임을 잊지 않으셨으 리라 믿습니다."

"휴..."

최고 장로인 현청진인의 말을 듣던 운학진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곤륜파의 최고 전력은 자소전에 밀집되어 있었다. 곤륜구봉의 각 봉우리 마다 수많은 도관이 있고 각 도관에는 곤륜파의 도인들이 저마다 무공이나 술법을 익히며 도를 닦고 있었다.

그렇지만 곤륜산의 정기가 자소전이 세워진 아홉 번째 봉우리속에 넘쳐 흘러서인지 아니면 자소전안에 비장된 수많은 무공과 술법서들 때문인지 장문인이 거처하는 자소전을 중심으로 진정으로 강한 고수들이 많이 거처하 고 있었다. 이번 청령전에서 발생한 사태로 곤륜의 인원은 이할이 줄어들어 버렸지만 전력은 일할도 채 줄어 들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청령전에 침입한 괴인을 방치한다면 곤륜문인이 줄어드는 속도가 가속화할 것이다.

전력이 약하다고 방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곤륜의 희망이고 미래 곤륜을 짊어지고 나갈 초석들이 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뿌리가 튼튼해도 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는 고사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운학진인 이었다.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폭풍우를 막아줄 든든한 차단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폭풍우를 막아내면서 차단막 이 찢겨질 위험성이 높더라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