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6화 (106/152)

[연재]황정허무검(106)

무림맹 적무대주 혜초(慧超)

소림 장문인 혜원 대사의 사제로 젊은 시절부터 칠대 금강으로 무명(武名)을 드높이던 인물이었다. 부리부리 한 두눈에 우락부락한 생김새가 수염만 기르면 영락없이 산도적같이 생긴 외모 때문에 소달마라는 별칭도 있 었다. 소림 칠대 금강 출신이며 무림맹 최고 무력을 가진 적무대의 실질적인 수장이니 만큼 엄청난 위력의 무 공들을 수없이 익혔으리라 생각 되어지지만 실상 정반대였다.

그가 익힌 무공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육합권(六合拳) 이었다. 천지와 사방의 여섯 방위를 막아내며 공격할수 있다는 소림 외가 권법으로 소림 입문 제자에게 가장 먼저 가리키는 무공이었다. 너무 단 순하여 대부분 반나절이면 익힐 수 있었으며 진즉에 밖으로 유출되어 졌지만 강호의 하류 잡배들조차도 한번 익힌 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무공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이 깊은 소림사에서 입문제자에게 반드시 가르치는 무공이었다. 소림 무공의 시조이며 육 합권의 창시자인 달마대사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적무대주인 혜초의 일대기는 소림사의 무승들에게 신화가 되어 회자되고 있었다. 입문 동기들과 함께 육합권을 배운후 아직도 부족함이 많 다면서 그보다 수준이 높은 나한권을 배우기를 거부한 것이 시초였다.

동기들은 소림오권을 익히고 아라한 신권을 수련하고 있었지만 그의 외고집은 육합권을 떠나지를 못하였고 그 의 고집을 꺽기 위해 감내할수 없을 정도의 벌칙을 주었던 권법 사부들도 마침내 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년이 지나 그의 동기생들이 모여 자유 대련을 하면서 그를 다시보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자유대련의 최종 우승자가 오로지 육합권만을 펼칠수 있는 혜초가 되었던 것이다.

육합권을 수련하면서도 동기생들이 익히는 권법을 항시 예의 주시해 보던 혜초가 단순한 육합권으로도 심오하 고 복잡한 무공들을 상대할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무술 격언에 권련백편(拳練百遍), 신법자현(身法自現), 권련천편(拳練千遍), 기리자현(其理自見)이라는 말이 있었다. 권법을 백번 익히면 신법이 저절로 드러나고 권법을 천번 익히면 그 이치가 저절로 나타난다는 말이었다. 천번을 익히면 권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하물며 만번을 익히면 그경지가 어떠한지는 능히 미루어 짐작할수도 있을 것이 었다.

그렇다고 혜초가 육합권을 변형시켜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상승의 권법들에 담긴 권리(拳理)를 육합권 속에 녹여 들여갔기 때문에 육합권의 초식 자체는 그대로였다. 수많은 수련과 연구를 통해서 진정한 육합권으 로 되살아나고 있을 뿐이었다. 자유 대련에서 우승한 그를 보는 주변의 눈빛은 더 이상 천덕꾸러기를 보는 듯 하던 어제의 눈빛이 아니었다.

소림의 전설이 되고 나중에 소림 칠대 금강에 뽑히면서 강호에 위명이 진동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그의 무공은 육합권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는 무공이 육합권 뿐인 것은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소림에 있는 대다수 의 무공을 거의 알고 있었으며 초식을 익힌 무공 종류만도 수백여가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수련하는 무공은 육합권 뿐이었다. 보고 듣고 배울수 있는 모든 무공이 육합권속에 녹아 들어갔 으니 이제는 육합권이라 할수도 없겠지만 면면이 이어지는 그 투로는 그가 어린나이에 머리를 박박 밀고 소림 에 들어와 처음으로 배운 육합권에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었다.

하수들의 안목으로 그가 펼치는 무공을 본다면 절대 육합권이라 할 수는 없을 터이었다. 일권을 내뻗으면 주 변 삼장여 공기가 파열되고 눈앞에 놓인 삼라만상이 자지러지며 형체를 잃게 만드는 육합권은 더 이상 육합권 이 아닐 테니까 말이다.

곤륜산은 아득하고 웅장하면서도 수려한 경관이 도처에 널린 천험의 영산(靈山)이었다. 게다가 곤륜파가 위치 한 지형은 좌우와 뒤쪽으로 원숭이는커녕 새조차 오를수 없는 만길 낭떠러지이며 앞쪽으로는 하늘을 가르는 아홉 봉우리들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아홉 봉우리중 제일 앞쪽에 위치한 산에는 곤륜 본전인 자소전(紫小殿) 보다도 규모가 광대한 청령전(靑靈殿)이 산허리에 걸쳐 길게 위치하고 있었다. 청령전은 주위로 수려한 봉우리가 신장(神將)인양 지키고 서 있으며 그 사이로 깊은 골짜기와 시내가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하늘을 뒤덮는 고요하고 청아한 도관이었다.

하지만 오늘밤 청령전을 뒤덮고 있는 것은 초조하면서도 긴장에 휩싸인 암울한 기운이었다.

청령전을 둘러싼 곳곳에는 곤륜파의 고수들과 적무대원들이 밤낮으로 물샐틈없이 수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 기서 반리만 벗어나면 현천교와 현천교에 복속한 사파의 무리가 살기에 찬 눈빛으로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몇 번 간헐적으로 싸움이 붙었고 그때마다 현천교의 무리들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채 물러났지만 아직 본격적 인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문상이 적무대를 선발로 출발시킨 것은 탁월한 판단이었던 것 같았다. 하루만 늦었어도 쉽사리 청령전에 들어 올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적무대의 능력이 높다 하지만 곤륜파로 들어오는 입구에 산재된 수 천명의 현천교도들을 쉽게 통과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현천교도들에게 장악되어 있지만 곤륜천문(崑 崙天門)이라는 험관만 수비하면 곤륜산 입성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들끓는 번뇌를 애써 삭이며 적무대주가 청령전의 앞쪽 광장에 위치된 분수옆을 지나칠 때였다. 갑자기 음습한 기운 하나가 허공으로 그를 스쳐 날아갔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생각할수도 있었지만 분명히 아니 었다.

등줄기에 오싹하니 돋아 오르는 소름은 복마승 혜초에게는 평생 처음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분수에서 솟아오 르는 물줄기가 산산히 부서져 허공중에 흩어지며 밤안개로 스러져서가 아니었다. 생전 결단코 느껴본적이 없 는 거대한 공포가 무겁게 그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꽈과과과광!'

공포가 시현되고 있음인가?

혜초의 눈에 청령전의 중앙에 놓인 삼층 전각이 한쪽부터 터져나가듯 부서지는 광경이 목격되고 있었다. 그리 고 잠자다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듯한 처참한 비명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무엇이란 말인가?

내공을 돋워 사태가 발생되는 건물로 신법을 발휘하는 혜초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의문이었다.

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건물은 검은 마룡의 흔적인양 긴 그림자를 동반한채 쉴새없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건물내에 잠들어 있던 고수들이 급히 빠져나와 건물밖 광장에 몰려 들었지만 모두들 공격하고 있는 적의 정체 를 발견하지 못해 우왕좌왕 헤메돌고 있었다. 화산이 폭발하는 듯 거대한 규모로 청령전의 삼층건물이 반토막 으로 줄어드는 와중에 적의 정체를 발견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날아간 수많은 고수들의 비명소리까지 겹쳐져 고요한 청령전은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돌변해 있었다.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무공의 고수인 적무대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건물이 부서지는 양상을 보면 허공중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믿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광장에 있는 곤륜파의 고수들중 몇 명의 손에서 건물이 가장 처참히 부서지는 밤하늘로 서기처럼 넓게 뻗혀져 나간 붉은 광휘속에 적의 모습이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인간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슬쩍 손을 한번 휘 두른 것 뿐인데 무형의 기운이 뻗어나와 거대한 전각의 한 모퉁이를 가루처럼 잘게 부숴트리고 있었다.

오늘 곤륜파가 당하게 될 가장 처참한 참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몇 곤륜의 술사들이 힘을 모아 귀신 이나 마귀등 초현실적인 존재나 부적으로 형체를 가린 존재들을 볼수 있는 현현지술(顯顯之術)을 발휘하여 적 의 정체는 알아낼수 있었지만 적의 분노를 사고 만 것이다.

'크와와와악!'

도저히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 판단할수 없는 미친듯한 괴성을 질러대며 괴인이 광장에 모여든 곤륜파와 적무 대의 무인들에게 덮쳐 내려왔다. 현현지술을 펼치던 술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곳을 중심으로 물살처럼 피보라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괴인의 대략적인 위치 추정은 가능하였다. 지옥의 불길처럼 살육의 피보라가 터져 나오는 곳의 허공일 테니까 말이다. 인세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었다. 인간의 목숨이 보잘 것 없는 벌레의 목숨처럼 허무하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자신이 도저히 상대할수 없을 정도의 존재인 것은 확실하지만 복마승 혜초의 붉은 심장은 분노에 터져 나갈 듯 펄럭이고 있었다.

그 분노의 정점에서 혜초의 모습은 허공중으로 뛰어 올라갔다.

붉게 채색된 듯 허공으로 터져 나가는 인육들을 눈물을 머금는 심정으로 즈려 밟으며 혜초의 신형은 하늘높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곤륜의 고수들이 날린 것으로 추정되는 비검과 이기어검들이 빈 허공중에서 멤돌다 힘 을 잃고 속절없이 떨어져 가는 속에서 미묘한 기운의 파장을 느낀 것은 혜초의 깊은 성취 때문에 가능하리라 ...

천룡출운(天龍出雲)

육합권법 중에서도 가장 간단한 초식이었다. 평범하니 권을 수평으로 내지르는 권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 마승 혜초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내지른 권법이 평범하다면 그에게 어찌 적무대주라는 대임을 맡겼겠는가?

일순간 혜초의 주먹과 혜초가 목표한 지점에 이르는 공간이 진공 상태로 빠져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멈추어 버렸다. 대적자가 도가술수인 우보(牛步)에 빠진듯한 환상을 줄 정도로 복마승 혜초의 무공은 절대적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멈추어버린 시간 속에서 오직 혜초가 내지른 산을 가를듯한 권세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권세는 어김없이 공간속에 위치한 괴인의 몸에 작렬하게 되었다. 복마승 혜초는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분노의 잠재력까지 가세시켜 혼신의 힘으로 펼쳐진 권법이었지만 실상 적을 적중시킬 자신은 없었던 적무대 주였다. 그만큼 적의 무공은 가공지경이었고 신법은 예측 불허하였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적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그것도 정통으로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권세를 날린후 땅쪽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적무대주의 표정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타격시 느끼는 감 각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설사 천신이라도 자신의 권세에 격중되면 살아남을수 없을 것이라는 그만의 자부심 이 땅으로 떨어져 내려와 산산히 바스라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크카카카카!'

눈앞으로 날아오는 이기어검을 장난감처럼 쳐서 날려버린 괴인의 괴소(怪笑) 소리는 분명 꿈이 아니라고 말하 고 있었다. 지옥의 악신이 현세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적무대주의 눈에 허공으로 터 져나가는 군웅들의 핏방울이 가득히 담겨져 보이고 있었다.

'피..피.., 시산혈해였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랴 ... 죽음을 불사하고 다시금 몸을 날리던 적무대주는 괴인이 부유하며 떠돌 던 허공중에 정적만이 남아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리고 사라졌다면 왜 사라졌을까?

괴인이 나타난지 일각여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청령전의 고루 거각들은 반이상 파괴되었고 수많은 고수들 도 반이나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일각..아니 반각만 더 지나면 분명코 살아있는 생령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인간이 마신(魔神)과 싸워 이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몰랐지만 마신은 떠나간 것 같았다.

현천교가 있는 동남 방향의 하늘위로 희미하니 떠오른 신호전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현천교가 마신(魔神)을 부릴수 있다면 마교 조차도 현천교에 복속시킬수 있으리라... 수많은 현천교도들을 떼거리로 몰고와 곤륜을 포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신을 부리면 이토록 간단히 청령전을 초 토화 시킬수 있는데 인간의 무공을 익힌 현천교도들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 청령전은 커녕 천신이 보호하고 있다는 곤륜 본전 자소전도 사상누각으로 전락될 터인데 말이다.

오늘밤 단 한명의 괴인이 쳐들어온것 뿐인데 청령전에 있던 오백여 곤륜 도인들과 무림맹의 삼백여 적무대원 들이 입은 피해는 말로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처참지경이었다. 삼백여명의 곤륜도인들과 일백여명의 적무대원 들이 일각의 짧은 시간 동안에 죽거나 사경속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청령원 주변에 넓게 퍼져 경비를 서고 있었던 적무대의 피해가 곤륜도인들에 비해 조금 덜했지만 복마 승 혜초에게는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인원의 손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사기 저하와 공포심에 따른 대원들의 정신분열 증상이었다. 무림맹 적무대원 이라는 자긍심 과 무공의 고수라는 자부심이 일시에 무너지고 도저히 감내할수 없는 공포심에 살아있는 대원들의 눈빛에 생 기가 사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인이 물러갔는데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짐승의 살점처럼 여기저기 널린 인육과 그 사이로 진득이 흐르는 핏 물속에 주저앉아 넋이라도 나간 듯이 멍하니 않아 있는 대원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이다. 하긴 심지가 굳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운해 하던 자신조차 두다리가 후둘거리고 입술이 떨려 오는데 다른 사람들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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