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5화 (105/152)

[연재]황정허무검(105)

자시(子時)중반

찰린호의 가장자리에 정박한 선상에서 은성은 조용히 사방을 관조하고 있었다. 달빛은 무심히 일렁이는 물살 에 잘게 부서지고 호수변의 무성한 갈대잎들이 속살을 부딪히며 속삭이는 밀어도 출렁이는 물살따라 귓전에 밀려왔다 속절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극(唐克)에서 출발한 이십여척의 선박중 쌍두곤의 공격을 벗어난 아홉척의 배들은 한데 모여 수비 진세를 유지한채 조용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야간 경비를 서는 날카로운 눈빛들조차 시간의 흐름을 망각할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가슴속에 불안감이 스며들 정도로 너무나도 조용한 밤 말이다.

배가 찰린호에 도착한후 보무당이 머무는 선박으로 복귀한 은성은 명상에 잠겼다가 왠지 좋지 않은 예감에 선 실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심안을 더 깊이 운용하여도 불안해 할만한 요인을 발견할수 없었다. 호수속에 위치한 유령왕도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심령으로 전해왔다.

청해성은 중원을 중심으로 곤방(坤方)에 위치해 있었다. 음기가 넘쳐나고 생이 사하는 접경에 있어 귀기조차 감돌기 때문에 술사들은 이곳 어느 곳에 귀문관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은성이 태어난 해동이 진방(震方)에 위치해 만물이 태동하고 해뜨는 나라로 일컬어지는 것에 비하면 음울하고 귀기로운 지역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호수위로 부드러이 스쳐가는 밤 바람속에도 왠지 모를 음유로운 기가 서 려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한점 없는 하늘에 은하수가 곱게 펼쳐져 있었다. 은하수 고운 물결이 은빛으로 반 짝이며 밤하늘을 수놓고...

"..."

무엇을 보았는가?

은하수에 빠져든 듯한 은성의 표정이 조금씩 경직되어져 갔다. 야조(夜鳥)런가 ..., 밤하늘로 다가오는 형체 들이 있었다. 뾰족한 가오리연과 비슷한 기구를 타고 야풍을 가르며 무림맹의 선박들이 정박한 곳으로 소리없 이 다가오는 무리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호수위로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속에 함유된 음유로운 기가 간간히 끊겨져 있음이 느껴져 왔다.

호수 밑으로도 위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유령왕의 경고에 심안을 강화하자 살기는 실리어 있지 않았지만 멀리 에서부터 물속으로 은밀하게 접근해오는 인영들이 포착되어졌다.

"캬캬캬! 물고기가 따로 없군. 어때! 도움이 필요하느냐?"

몇일동안 심심했었는지 유령왕의 목소리는 조금은 들떠 있었다.

인간을 유령왕에게 맡겨 두기는 싫었지만 상황이 매우 다급했다. 하늘위와 물속으로 접근하는 적수들도 만만 치 않아 보였지만 바람속에 흘러든 적수들은 심안에도 잘 잡히지 않는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그중의 한명은 심안에도 거의 잡히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흔적만을 남기울 정도였다.

"물속으로 오는 자들을 막으시오. 살수는 사용하지 말고 재주껏 말이오."

물속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유령왕이 지연시켜 놓는다면 물밖의 상황을 처리한 후 대처하려는 은성의 생각이었 다. 하지만 실망한 듯한 목소리로 연이어 들려오는 유령왕의 심령어(心靈語)에 은성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 다.

"알았다. 그런데 물밑 지저를 파고 접근하는 놈은 어떡하느냐? 겁만 주어서 도망갈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예..!"

유령왕의 말에 깜짝 놀란 은성이 심안을 최대로 강화시켜 호수 밑바닥 지저를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매우 은밀히 접근해 오는 자가 있었다. 단 한명 뿐이지만 매우 위험스러워 보이는 자였다. 접근하는 방식조차도 쉬 이 이해가 가지 않는 존재였다. 지저로 미세한 흔적밖에 남기지 않으며 이처럼 은밀히 접근할 실력이면 수중 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그냥 허공으로 접근해도 눈치챌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터인데 하필 지저로 접근하다 니... 다른 무리들과 같은 부류가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실력행사를 해도 무방하지만 가급적 사로잡으시오!"

유령왕에게 심어를 보내며 은성의 신형이 바람처럼 꺼져 들어갔다. 하늘위로 접근하는 적수들은 두렵지 않았 지만 허공중으로 스며든 세명의 잔영이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장소는 검후가 타고 있는 수뇌부들의 선박이었다.

"캬캬캬! 걱정마라. 본왕을 믿고 배위에나 신경써라!"

심안과 동시에 묵귀영을 펼치는 은성의 귓가에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였다. 몇일 동안의 피곤함이 몰려와 깊은 잠에 들었던 만취개가 꿈자리에서 개에게 물리기라도 하였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깊은 잠을 깨우고도 남을 정도로 귓가에 선명히 들려오는 전음지성 때문이었다.

[살수들이 침투했습니다.] 라는 전음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낮에 자신을 치료해준 은성이 발한 전음인것도 같았다. 일어나자 마자 내기를 끌어올 리며 주변을 경계하는데 또 한번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이미 세명의 살수가 배안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수중으로 또 다른 살수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도대체 경비무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세명의 살수가 침투하였고 하늘위로도 쳐들어오고 있다는데 아무런 경보음조차 발하지 않다니...

의아해 하면서도 주변 경계에 총력을 기울이던 만취개의 눈에 이채가 띄어졌다. 같은 선실에서 자고 있던 십 여명의 고수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 자신과 같이 사방을 경계하며 선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만 전음을 발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동시에 열명에게 전음을 발했다는 말인데.., 실전된 천음곡(天音谷)의 비기라도 익혔는지...?

그런데 의문을 가지고 선실 밖으로 나간 만취개는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십여개의 선실에서 고수들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십여개의 선실에서 자고있던 백여명의 고수에게 동시에 전음을, 그것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정도로 선명하게...만취개가 잠에서 덜 깬 듯이 고개를 부르르 흔들었다.

설사 천음곡의 비기를 얻었다고 하여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수중이라 했는데 도대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던 만취개가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서서히 키우기 시작하였 다. 하늘 저쪽에서 무엇인가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비무사들이 경보음을 발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자신이 전음을 들었을 정도의 시간에는 경비무사들이 아니라 자신이 경비를 섰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의 거리에서 접근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성의 무위는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거리에 있는 하늘 저편의 동태를 파악하고 더군다나 수중으로 접근하는 적까지도 파악하 여 경고하다니... 입이 딱 벌어질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놀라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무언가 시급한 대 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게다가 은성의 말대로라면 이배 어딘가에는 세명의 살수들이 숨을 죽이며 은잠하고 있는 것이다.

백련곡의 살수들중 무패의 신화를 달성한 십련(十蓮)중의 서열 사위인 사호(四號)는 오늘의 작전에 필승의 자 신이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관여하여 시행된 임무는 총 구십구건 이었다. 그 모든 임무를 단 한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히 성사시킨 자신이었다.

이번의 임무는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철저하고 완벽한 작전 계획은 물론이고 작 전에 투입된 고수들의 실력이 그 어떤 임무보다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자신 한명에게만 임무를 주어도 성공 가능성이 오할을 넘을 터인데 이만한 고수들이 투입되고 작전조차 완벽하다면 영광된 백번째 임무 성공 여부 는 물어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제길..."

하지만 사호는 초반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수행한 구 십구번의 임무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말이다.

곡주께서 지시한 명령은 단 한가지였다.

'무림맹 문상 척살'

무공도 모르는 백면서생 하나 처치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무림에서 난다긴다 하는 절정고수들이 호 위하고 있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현천교에서 은둔진결을 넘겨 받은 이후 백련곡은 예전의 백련곡이 아니었 다. 설사 옥황상제의 목이라도 소리없이 따올 정도로 잠행과 은잠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발각되어졌는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던 고수들이 일제히 선실 밖으로 뛰쳐 나오는 것이었다. 만약 내기를 건다면 자신들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목숨조차 걸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발각되어진 것도 같았다.

'...'

소리없이 잠행하여 문상만 척살하고 바람처럼 빠져 나가려는 일단계 계획은 실패한 것 같았다. 이단계 계획은 공중으로 날아오는 백련곡의 일반 살수들과의 연합 전술이었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선박 위에서는 일대 혼란 이 벌어질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하여 문상을 척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는 않은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공중에서 접근하는 백련곡의 형제들이 공격하기도 전에 이들이 눈치채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에기랄..."

다시 한번 속으로 욕이 튀어 나왔다. 그렇지만 이단계 계획이 실패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 이들은 자신들 세명이 배안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허공에서 공격해오는 백 련곡의 형제들이 많이 다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심기가 다소 불편해졌던 것이다.

살수란 단 한번의 기회만 필요한 법이다. 상대에게서 바늘만한 빈틈이라도 발견된다면 무정한 살검은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 한번의 완벽한 기회를 위해서는 조금더 공격하기 좋은 위치로 이동하여야 할 것 같았다.

이동하는 시점은 허공에서 첫 번째 공격이 쇄도해오는 그 순간이 가장 좋을 것이다. 모든 긴장감이 허공으로 쏠려있을 순간이기 때문이다.

'허걱 ...!'

자신의 가슴으로 날아오는 하얀 수영(手影)...

정체가 발각된 것 같았다. 도저히 믿을수 없었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일단 피하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피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은 분명히 하나였지만 손바닥 하나에 팔방이 가로 막혀져 있었 다. 어느 곳으로 피해도 하얀 장세를 피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퍼펑!"

살수에게 전해지는 구명절기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펼치고서야 간신히 장세를 벗어났지만 은잠지술이 풀려져 버렸다. 그런데 장세를 벗어낫다는 생각은 그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 자신은 내상을 입어 운기조차 힘든 데 하얀 수영은 여전히 가슴에서 반자 이내에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상대방의 모습이 보여졌다. 자색옷을 입은 젊은 무인이었다. 언뜻 '강호 인명록'을 떠올린 사호는 상대방이 모용세가의 가주인 고고일검(孤高一劍) 모용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용세가의 특기가 검법이 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처럼 가공할 장공이라니...

가슴에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하여 한자 넓이로 가슴이 뚫리우고 심장이 바스라지며 뱃전에 널브러지는 순간에 도 사호는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죽어가는 순간 사호의 눈에 보여졌던 것은 모용천의 하얀 장심뿐만이 아니었다. 십련중 여섯번째 서열인 육호가 문상곁에 있는 무림맹주와 격전을 벌이는 모습이 살짝 비추어졌다.

은잠지술이 발각되었다면 육호는 무림맹주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호의 눈빛이 암담한 것만은 아니었다. 백련곡의 살수들중 서열 이위인 이호(二號)는 자신들과는 차 원이 다른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단계 작전이 실패하여도 또 다른 작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단계와 삼단계의 작전이 시행된다면 이호가 임무에 실패할 확률은 전무할 것이었다. 억울하지만 완전히 억울하지만은 않은 죽음이라 자위하면서 사호는 눈을 부릅뜬채 생을 마감했다.

백련곡의 살수인 사호의 죽음과 비슷한 시각에 공중에서 날아오는 살수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유성의 기세로 덤벼들었지만 충분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인지 위력이 반감된 공세였다. 방향 이 자유자재로 조정되는 삼각의 큰 연처럼 생긴 기구에 탄 오십여명의 살수들의 공격 방법은 기기묘묘하였다.

독수리처럼 내리꽂혀 공격을 가하고는 순식간에 상승기류를 타고 솟구쳐 오르는 살수도 있었으며 화살처럼 빠 른 기구 자체로 위력적인 공격을 가하고는 자신도 뛰어내려 죽자사자 덤벼드는 살수도 있었다.

암기공격이 대다수였는데 하나같이 치명적인 암기들이었다. 어떤 살수는 허공에서 몸을 날려 기구에서 기구로 옮겨 다니면서 공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 대다수인 군웅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천당가의 장문인처럼 암기의 제황이 랄수 있는 사람까지 승선하고 있었다. 반각도 안되어 오십여기의 기구중 이십여기가 주인을 잃고 말았다. 그 들에 비해서는 무림맹측 고수들의 피해는 미미한 편이었다.

하지만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은 무림맹측 군웅들만이 아니었다. 어둠속에 숨어 절호의 기회가 도래된 것을 확인하고 필사의 일격을 준비하는 백련곡의 살수 이호도 있었다. 눈앞에서 사호와 육호의 죽음을 목격한 이호였다. 백련곡에서 파악한 정보보다도 무림맹주와 모용가주의 무공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순간 이었다. 절정고수의 수준을 넘어 초절정 고수의 경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여도 완벽히 자신을 숨길 자신이 있는 이호였다. 공중에서의 공격이 이처럼 진행되었으면 지금쯤 수중에서의 공격이 가세되어야 하는데 왠일인지 수중에서의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보다 완벽한 기 회를 잡기 위해 이중 삼중 계획한 작전인데 무엇 때문인지 계속해서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살수에게 완벽한 기회는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조건이 아니었다. 초절정의 살수는 불가능한 조건에서 도 완전한 기회를 만들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로 초절정의 살수였다. 외부 조건도 매 우 좋은 편이었다.

잠행백변(潛行百變)이란 보법은 대낮에 군웅들 사이를 걸어가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살수계의 전설 적인 신법이었다. 그리고 무루겁(無淚劫)이라는 무공은 설사 무림맹주와 대적한다 하여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혼세마공이었다. 살수행중 우연히 얻은 무공으로 백련곡에서도 모르는 그 자신만의 비밀 무공이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백련곡 십대 살수인 십련중 서열 이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비장의 술 수가 있었다. 바로 혈광분신술(血光分身術) 이었다. 혈광분신술은 한꺼번에 두명의 분신을 만들어 낼수 있었 다. 비록 숨한번 들이쉬고 내쉴동안 밖에 운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일반분신술과 혈광분신술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일반 분신술로 만들어낸 분신은 검기나 검광에 당하면 삿된 기 운이 흐트러지며 소멸되어지지만 혈광 분신술로 만들어진 분신들은 혈광을 발하면서 굉음과 함께 폭발하였다.

분신을 제거한 사람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 머무는 사람 모두 깜짝 놀라면서 백이면 백 공격의 틈을 내보이게 되는 것이다.

잠행백변은 역시 신묘한 보법이었다. 문상에게서 반장의 거리까지 다가갔는데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공격 의 맥을 살리기에 최적이라고 판단되는 시점은 본능이 알려 주었다. 수많은 살수행중 단 한번의 실수도 없었 던 본능이었다.

순간적으로 혈광분신술이 발휘되고 두개의 혈영이 자신의 측면과 정반대 방향에서 각각 생성되어짐과 동시에 문상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자신의 모습은 잠행백변으로 아직도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붉은 혈영들은 허공중 에서 갑자기 나타난 듯 불시에 생성되어진후 문상에게 덮쳐들고 있는 것이다. 문상곁에 있는 무림맹주와 검후 라고 추측되는 소녀가 눈부신 동작으로 혈영을 막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호는 또 한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이어 굉음이 터지며 허공중에 붉은 혈화가 터져 나오는 순간 문상에게 살수를 발휘하면서 성공 이후의 탈주 계획을 떠올렸다. 그런데 절세마공인 무루겁으로 살수를 막 발휘하려던 이호는 갑자기 닥쳐든 섬뜩한 기운에 전율할듯한 공포속에 빠져들어 버렸다.

찰나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찰나적인 순간 너무나 많은 일들이 발생되어져 버렸다. 섬뜩한 기분이 난 것은 다름아닌 한쌍의 눈빛 때문이었다. 무공이 하나도 없다고 알려진 문상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의 두눈을 정확 히 직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주조차도 이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무공도 모르는 문상이 완벽한 은잠지술을 펼친 자신을 빤히 직시하고 있다니... 그리고 더더욱 믿고 싶지 않은 일이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몸안에서 발생되었다.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몸이 산산히 터져 나가고 있 음이 두눈에 투영돼 오고 있었던 것이다.

뇌리에 각인될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스스로 살수계의 초절정 고수라고 자인하는 이호의 너무나 허망하 고 터무니 없는 죽음이었다.

이호의 죽음에 놀란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문상의 주변에 있던 무림맹주와 고수들 모두가 갑자기 허공중 에서 폭발이 일어 눈에 보이지 않던 시체가 연이어 터져 나감에 크게 놀라워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공격해대 고 있던 삼십여명의 살수들도 놀랐지만 가장 크게 못 믿어하는 사람은 바로 문상이었다.

일격을 가하기 일보직전에 누군가가 먼저 살수를 가해 주었던 것이다. 분명 해동신룡이라 불리우는 은성이일 것이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안도의 숨을 몰아 쉬면서 은성의 흔적을 찾던 문상은 은성이 호수속으로 잠입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을 수중으로 돌리자 물속에 거대한 와류가 형성되어져 있음이 느껴졌다. 호수밖의 물살은 평온하기만 한 데 물속은 격류처럼 끓어 오르고 있는 것이다. 격류는 물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호신막처럼 선박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 격류 밖에 이십여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문상이 끝내 발견하지 못한 존재도 있었다. 유령왕과 아직도 지저 깊숙이 은신한채 움직이지 않고 있 는 신비의 인물이었다. 세명의 살수중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살수에게 조사지공 최후의 무공인 일종무종 일(一終無終一)의 수법을 발휘해 처리한 은성은 급히 수중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아직도 허공에서 공격하고 있는 살수들은 큰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묵귀영의 수법을 발휘하 여 수중깊이 내려온 은성은 물속의 상황을 보고는 다소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유령왕의 놀라운 활약에 수중으로 접근하던 살수들이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유령왕은 형체가 없는 물처 럼 녹아내려 형상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유령왕과 심령이 연결된 은성은 유령왕의 자취를 자연스럽게 알수가 있었다. 은성의 심안으로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유령왕의 신법이었다.

비록 물속이라지만 공간을 격하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듯한 빠른 신법으로 이십여명의 살수들 모두를 희롱하며 놀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 와중에서도 여유가 있는 듯 지저에 은신해 있는 존재조차도 경계하며 가끔 그위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살수들 앞에 나타난 유령왕은 물속에서 수룡(水龍)으로 화해 공격하는가 하면 단단한 수막(水膜)이 되어 그들 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살수들이 위치한 주변의 물을 얼음처럼 고형화시켜 겁에 질리게 하는가 하면 순간적으 로 주변의 물을 흡수하여 물속에 빈공간이 생기도록 만들어 물속에서 엉덩방아를 찟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무림에서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백련곡의 살수들이 심심풀이 장난감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에게 홀린 듯이 연이어 발생되는 괴변에 그렇지 않아도 몸을 피할 마음이 굴뚝 같았던 살수들이었다.

은성이 물속으로 들어오고 곧이어 수중으로 살수들이 침투했다는 전음을 들었던 무림 고수들이 잇달아 수중으 로 뛰어들자 전의를 상실하고 일제히 도망을 쳤다.

그들만 줄행랑을 놓는 것이 아니었다. 지저에 은밀히 숨어 있던 존재도 무슨 낌새를 챘는지 처음에 접근했던 경로로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육지에서 경공 고수가 신법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유령왕에게 지저의 존재를 미행하라고 지시를 하려던 은성은 상황을 감안하여 사람들의 이목만 피해 은신해 있도록 지시하였다. 이곳은 적지(敵地)나 마찬가지의 장소였다. 어떤 적수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에서 유령왕을 잠시라도 떠나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 밖으로 나와 배위에 오르니 이곳도 상황이 일단락 되어 있었다. 멀리 하늘위로 대여섯명의 살수들이 기구 를 타고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 비록 무림맹이 보유한 선박들의 돛대를 부러뜨리고 돛을 찢어놓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들로서는 너무나도 막대한 피해만 입고서 도주하는 것이다.

작전도 완벽하고 공격에 가담한 무력도 나름대로 대단하다 자신한 것에 비해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이 모두가 은성이 한명 때문에 뒤바뀐 결과였다. 현천교의 귀명자가 그토록 자신하던 혼세지계(混世之計)가 서서히 삐거 덕거리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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