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04)
만취개의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주변 경관을 바라보던 은성의 입에서 저절로 찬탄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와..!"
그리고는 검후와 함께 뱃전으로 나아가 자연의 경이로움에 환희의 눈빛을 보내었다. 황하(黃河)를 타고 오른 배는 어느새 드넓은 호수에 도착해 있었다... 악린호(鄂隣湖)였다.
그런데 선홍색으로 물들여지는 낙조(落照)가 호수위에 절경을 선보이고 있었다. 잔잔히 출렁이는 호수의 물결 마다 다홍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멀리 호숫가에 위치한 기괴한 산세는 그림자로써 일렁이며 만상(萬象)의 형상 을 빗어내고 있었다. 천상의 석공조차도 이보다 조화롭고 자유스럽지는 못할 것 같은 빼어난 재주였다.
멀리서 무리진 물새들이 선홍빛 하늘을 가로지르고 그 위에 어스름이 조용히 안개비처럼 성겨져 오고 있었다.
선홍의 물결이 살며시 스러지고 하늘가에 머물던 붉은 구름이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동안 뱃전에서는 아무런 소음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일각여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가 숨소리조차 멈춘채 자연의 미경(美境)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이대협, 청해제일경(淸海第一境)을 감상한 소감이 어떤가?"
만취개의 홀린듯한 목소리였다. 거지들의 두목이 자연경관에 취해 목소리조차 떨려온다면 어울리지 않겠지만 은성은 이해할수 있었다. 청해제일경이 아니라 중원제일경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곤륜산이 이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천만다행인 것 같습니다. 곤륜파가 지척에 있었다면 수도하시는 분 들이 매번 넋을 빼앗겨 도행을 이룰 수가 없을 테니까요..."
"..."
이제 두시진 정도만 더 가면 선박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종착지인 찰린호(?隣湖)가 나올 것이다.
그곳에서 곤륜산까지는 사흘이 소요되는 거리였다.
"오라버니, 오늘 찰린호에 도착하면 선상에서 밤을 보낼거예요. 무상께서는 모레쯤에나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왔는데 오시면서 큰 격전을 치르셨다고 하시네요."
"흥! 현천교 놈들이 똥줄이 타 들어가니 하루살이 빛을 보고 모여들 듯 하는 구만. 아무리 발악해봤자 노린내 만 짙어질 뿐이지..."
다소 흥분한 듯한 만취개의 말을 듣고 보니 무상이 이끄는 무림맹 쪽에도 상당한 손실을 입은 것을 알 수 있 었다. 아무리 무림맹쪽의 전력이 강해도 죽음을 도외시한 공격에는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게 다가 죽음을 불사하고 덤벼드는 무리가 무예와 술법에 능한 자들이라면 결코 만만히 상대할 수 없는 적수들인 것이다.
어둠이 짙어져 가고 있었건만 선박들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악린호를 지나 한시진 정도 지나자 드디어 찰린호에 접어 들었다. 길다면 긴 수로행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도난사(都蘭寺)
청해성 동쪽에 있는 청해호(淸海湖) 사백여리 상부에 위치한 거대한 사찰로 일백여년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한 사리탑에서 보름만 되면 서광이 흘러나온 이래로 소원성취 등 수많은 이적을 보여 이제는 청해성 제일 명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도들의 발길이 넘쳐 나더라도 적막속에 잠든 고즈녁한 장소가 있었다. 도난사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행과 침묵으로 수련에만 전념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그런데 눈을 지긋이 감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현묘로운 기운을 내뿜는 노인들의 복장이 매우 특이하였다. 혼 원모(混元帽)를 쓰고 득라의(得羅衣)를 입은 도사의 복장이었다. 사찰 가장 깊숙한 곳에 도복을 입은 도사들 이 모여 있다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부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 )이 신묘로운 향기에 휩싸여 모셔져 있었다.
무료했기 때문일까? 신단에 피워놓은 향기가 바람처럼 건물 내부를 한바탕 휘돈 후 신단 뒤쪽의 미세한 틈새 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향기는 소리없이 흘러 지하에 위치된 암동을 지나 깊숙하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일백여명의 노도사들이 현 묘지경에 들어 수련중인 건물 지하에 이처럼 깊은 암동이 위치하고 있다니 괴사가 아닐수 없었다.
깊고 깊은 암동이 끝나는 곳. 그곳에 또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갑자기 넓어진 공간 속에 드러난 거대한 건축물은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지하궁전처럼 신비하고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그 거대한 지하 궁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총관! 혼세지계(混世之計)는 잘 진행되고 있는가?"
사방이 둥근 원형의 석실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 자애로워 보이는 장년인의 음성이었다.
"예상대로 입니다. 곤륜파는 아홉 개 봉우리중 가장 앞쪽에 위치한 청령전에 오할 이상의 세력을 결집시켜 수 비하고 있으며 무림맹의 세력들도 곤륜파에 가까운 찰린호(?隣湖)에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무림맹 무 리들은 저희측 공세에 당해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역시나 편안한 자세로 독대하고 있는 총관이라 부리는 사람은 매우 특이한 생김새였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안색과 피부도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도 모두 흰색이었다. 안면에 서린 짙은 주름살과 다소 꾸부정한 자세로 보아서는 노인일 것 같았는데 장담할 수는 없었다. 흰자위가 하나도 없는 칠흑같이 검은 동공속에서 때때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백광(白光)과 침착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정기어린 목소리는 강한 생기(生氣)가 넘쳐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양검 금성무는 이틀정도 있어야 도착할 것이라니 본격적인 결전은 그때부터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도착한 무림맹의 무리들과 곤륜파에 조촐한 선물을 보내줄까 합니다. 그들 에게 조급증을 심어줘서 대책없이 날뛰도록 만든 후 철저하게 짓뭉게 놓도록 하겠습니다. 삼성검 반도승에게 겁 없이 청해성으로 들어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도 저승에서 말입니다."
총관의 검고 사이한 눈동자에서 원념이 흘러 나오고 목소리는 짙은 살기에 휩싸여 있었다. 무림맹에 대한 개 인적인 원한까지 가미된 눈빛이며 목소리였다.
총관에 비해 그의 앞에 좌정한 장년인은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며 목소리였다. 세상일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반은 초월한 듯한 자세였다.
"그래야겠지... 우리의 목표는 곤륜파가 아니니까..."
"혼세지계의 일장(一場)과 이장(二場)은 완벽히 진행될 것입니다. 마지막 삼장(三場)만 성공할 수..."
"어허, 총관! 그분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인가? 천리위에 거하시는 분이네 ! 망언을 삼가하게."
갑자기 장년인이 목소리를 높이며 총관의 말을 끊었다. 지금까지의 자애롭고 부드러운 기세가 아니었다. 삼백 장 지하에 위치한 지하석부를 뚫고 지상의 대지까지 움츠릴듯한 거대한 기세였다.
"교..교주님, 죄송합니다. 저도 그분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어떤 방법인지 알 수가 없는지라 조급하여..."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바짝 수그린 총관이 급히 변명을 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네. 믿고 기다리시게."
어느새 자애로운 목소리로 돌아온 교주의 말속에는 그분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념이 담기어져 있었 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도만 일백만명인 현천교의 교주가 이처럼 신봉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럼 이들이 언급하는 그분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총관! 혼세지계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게. 아무리 큰 둑도 작은 구멍하나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네. 게다가 무림맹의 문상은 자네조차도 무시못할 인물이라고 수시로 말하지 않았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세지계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곤륜파와 지원 가능한 무림세력들의 규모와 무위를 백번도 더 넘게 검토하여 짠 작전입니다. 거기에 무림맹 문상이 결전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작전을 미리 예측하여 거기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아무리 문상의 능력 이 신출귀몰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도 십년전부터 철저히 준비하여 짜여진 혼세지계에는 미칠 수가 없을 것 입니다."
"당연히 성공해야지. 무조건 성공해야 하고 말고. 혼세지계가 성공하고 현천교의 교리가 세상을 뒤덮는 날에 무림사에는 마교의 쌍뇌 포병인과 무림맹의 환제갈 제갈뇌보다 그대 귀명자(鬼鳴子)의 이름이 더 많이 거론될 것이오. 신기묘산에 걸리면 귀신도 울고 간다는 그대 귀명자의 이름을 말이오. 허!허!허!."
자신감에 가득한 현천교주의 웃음 소리가 나직하면서도 웅장하니 지하석실을 울려 나오고 있었다. 총관인 귀 명자가 잔인한 미소와 함께 날카롭게 내뿜는 살기에 섞인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