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03)
내면 깊숙이 침잠된 만취개의 심공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치료하고 있는 것 이다. 심안(心眼)을 발휘하여 만취개의 심공에 따른 기의 운행 경로를 확인한 은성은 만취개의 진기가 독맥을 타고 흐르다 머리 뒷부분의 옥침(玉枕)혈을 거쳐 백회(百會)혈을 지난후 이마위에 있는 척중(脊中)혈로 흐르 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회혈을 지난후 머릿속 깊숙이 형성된 경로(經路)를 따라 흐른 진기가 척중혈로 솟구쳐 오른후 인중에 위치 한 중추(中樞)혈을 거쳐 임맥으로 통하였는데 절정에 오른 고수답게 진기가 충만하고 경락이 잘 발달되어 있 으며 진기의 흐름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처럼 거침이 없었다.
만취개의 백회혈을 지나는 진기에 슬쩍 자신의 심기를 편승시킨 은성이 기력을 더하며 주변 락맥(絡脈) 및 세 맥(細脈)으로 만취개의 진기가 조금씩 퍼져 나가도록 유도하여 주기 시작하였다. 만취개가 가진 내력에 비해 아주 작은 기력(氣力)만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만취개의 진기도인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퍼져 나가는 만취개의 진기가 막힌 락맥에 이르면 은성의 심기가 가세하여 시원하게 뚫어 주었다. 일각도 되 기전에 만취개의 백회혈에서 척중혈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락맥이 모두 화통하니 뚫려져 버렸다.
이제는 세맥을 뚫어야 했다. 세맥은 절정의 고수여도 타통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미묘하고 난해한 기 로(氣路)였다. 십이정경(十二正經)과 기경팔맥(奇經八脈)처럼 일정한 기의 순환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몸속에 위치한 실핏줄 보다도 더 엉키고 설켰으며 무질서하게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지조화의 영능을 가진 영약을 복용하거나 천지간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 육체가 조화지경에 도달해야 만이 비로소 타통 가능하였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심안이나 영안이 열린 대각자(大覺者)의 도움으로도 타통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만취개의 복연(復緣)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장발에 대한 염원으로 이마 윗부분에만 복연이 집중되었지만 말이다. 심안을 발휘하여 만취개의 세맥을 눈으로 직접 보듯이 파악한 은성은 만취개의 진기를 가느다랗게 분화시켜 도인시키며 심기로 보좌하면서 세맥 타통을 시작하였다.
그러자 만취개의 앞머리 부위에 그물망처럼 퍼져있던 세맥이 조용한 물살이 밀려들 듯 소리없이 무너져 가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일각이 안되어 만취개의 백회혈에서 척중혈에 이르는 부위의 세맥이 완전히 타통 되어져 버렸다.
세맥이 타통되어진 부위의 피부도 조금은 변화되어 있었다. 기름기가 번들거리던 피부속에서 희미하니 회색 탁기가 흘러나와 사라지면서 유분조차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앞머리 부위에 있는 세맥을 타통시켜 만취개가 심공 운용시 자연스럽게 세맥으로도 기가 통해질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은성이 심기를 거둔후 길게 숨을 내쉬 었다.
비록 머리가 자라나고 쉬이 빠지지 않는 기틀을 마련하였지만 아직도 한가지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만취개의 앞머리를 짧은 시간 동안에 자라나게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황당해하고 도저히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도리질할 일이었지만 실상 은성이 만취개에게 장 담한 것은 나름대로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이 필요치 않는 경지에 오른후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 명상 에 잠겨 인간과 자연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허무경과 천부경을 화두처럼 연구하고 수련해오던 은성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그처럼 신묘하고 난해한 천부경에 대한 깨달음이 서서히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 오묘함이 조 금씩 베일을 벗어내고 있는 것이다.
앞 부분에서 우주 생성의 비밀이 밝혀지고 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無櫃化三)에서 인간 창조의 신비가 드러나더니 드디어 천이삼(天二三) 지이삼(地二三) 인이삼(人二三)에서 천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엿볼수 있 었던 은성이었다. 특히나 인이삼(人二三)이란 짧은 구절속에서 은성이 깨달은 지혜의 분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음양의 법칙과 삼재의 진도(眞道)가 어우러진 짧은 구절로 인하여 은성이 깨달음을 얻어 유령왕이 탄생되어질 수 있었고 또한 만취개의 해괴한 요구도 자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음양전화(陰陽轉化)와 삼극조화(三極調 和)의 도(道) 속에서는 상식이 허무하니 무너져 버렸다. 실로 인간의 조잡한 지식에서 벗어나 대도(大道)의 광대한 세계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는 절대적 지식이었던 것이다.
천이삼(天二三)이란 구절을 이해하면 천문을 살펴 미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지이삼(地二三)이란 구절은 인 간의 길흉화복을 꿰뚫을 수 있는 비밀이 담겨 있지만 인이삼(人二三)속에는 인간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대도비법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인간의 피부와 털(毛)을 관장하는 기관이 폐(肺)이니만큼 만취개의 머리카락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폐부 터 관장되어야만 하였다. 만취개의 심공이 끝마치기를 기다린 은성이 만취개에게 심공을 중단하고 편안히 호 홉만을 고르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심안으로 만취개의 폐와 머리카락이 연결된 기혈을 찾아낸 후 심기를 오행으로 나뉘어 다시금 금기(金氣)를 활성화 시켰다.
은성의 심기가 만취개의 폐를 활성화 시키면서 폐의 기능을 머리카락과 연결된 기혈에 집중되도록 힘쓰자 믿 기 힘든 일이 발생되었다. 차 반잔정도 마실 시간이 지나자 만취개의 앞머리 부근에서 검은 머리털이 삐죽이 며 솟아 나오더니 곧이어 우후죽순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만취개의 신체가 지닌 잠재적인 기운이 은성의 심기에 영향을 받아 머리칼이 자라나는 것에만 온전히 소용되 고 있는 것이다. 은성이 미리 만취개의 폐(肺)를 치료하고 머리카락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세맥을 타통시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때에 절은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아니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고 탄력적인 머리카락이었다.
순식간에 만취개의 앞 머리 부근에 머리카락이 무성히 솟아올라 한자 이상으로 자라나자 만취개에게 심기를 주입하던 은성이 서서히 심기를 거둬 들였다. 은성이 심기를 모두 거둬 들이고 눈을 감고 있던 만취개가 눈을 떳을 때에는 머리카락이 한자 반 정도나 자라나 있어서였다.
"아..아니! 이럴 수가..."
눈앞을 가린 무성한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만취개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더듬어 올라가며 놀라움에 말끝 을 흐렸다. 머리숱이 거의 없어 허전했던 앞머리 부근에 머리가 무성이 자라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취개로서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어찌나 기쁨에 겨운지 눈가에 물기까지 어려졌다.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 어 뒤쪽으로 넘기고 손을 내려뜨려 코 끝을 만져보던 만취개가 갑자기 은성의 두손을 거머 쥐었다.
"믿어지지 않는구먼... 이대협! 고..고맙네..."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만 보아도 주독에 걸려 부기가 있던 코도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는지 만취개의 감동 은 호들갑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전보다 훨씬 준수해 보이십니다."
은성도 기쁨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천부경의 깨달음으로 머리카락을 짧은 시간 동안에 자라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은 있었지만 한번도 시 도해 보지 않은 은성으로서는 치료전 조금은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치료가 성공적으로 되자 은성의 기쁨도 만취개에 못지 않았다.
"험험! 이래봬도 젊을 때에는 한 인물 했었다네. 사실 비밀이지만.., 땟국물이 흐를때보다 얼굴을 씻고 구걸 을 할 때가 수익이 더 좋았다네. 여인네들이 나에게 적선해주기 위해서 싸움까지 했었으니까."
은근한 목소리로 실제라는 듯 말을 하였지만 은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하자 만취개가 금새 말을 바 꾸었다.
"허험! 뭐 그럴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었네. 그건 그렇고 나의 이 우아하고 고결한 머릿결을 자랑좀 해야겠는 데 같이 나가세!"
새옷을 선물받은 아이들처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재촉을 하는 만취개였다. 하지만 은성은 선창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만취개를 치료하면서 천부경에 대한 미미한 심득이 있어 좀 더 깊이있게 명상해 보고자 함이었다. 아주 작은 실마리였지만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구절을 해석할 수 있는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방주님께서 먼저 나가시지요. 저는 생각해 볼일이 있어 좀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그럼 이대협! 나 먼저 나가겠네."
어찌나 급한지 '나가겠네' 라고 할때에는 벌써 선창을 반 이상 가로질러 나간 이후였다. 만취개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황소처럼 황급한 동작으로 선창을 나가자 입가에 미소를 짓던 은성이 눈을 감고 조용히 선정에 잠 겨 들었다.
선정에 빠져 고요한 심연속에 잠겨든 은성의 의식안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글자들이 있었다. 천부경 팔십일자(八十一字)였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부터 시작된 글자가 천이삼지이삼인이삼(天二三地二三人二三)을 지난 후 다음 문 장에서 갑자기 멈추어 섰다.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라는 구절이었다.
대삼합육은 쉽게 해석이 될 수가 있었다. 천을 상징하는 일(一)과 지를 상징하는 이(二) 그리고 사람을 상징 하는 삼(三)을 합하면 육(六)이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생칠팔구(生七八九)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뒷부분에 대한 해석이 난해하니 바로 앞부분에 대한 해석도 의심이 갔다.
'대삼합육(大三合六)'이란 구절속에 왠지 심오한 그 무엇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만취개를 치료하면서 인이삼(人二三)이란 구절을 참오하자 대삼합이란 구절에 대해 언뜻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뚜렷한 실체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것 같으면서도 끝내 보이 지 않는 얄미운 실마리였다. 선정에 든지 반시진이 지났는데도 실체가 발견되지 않고 계속해서 여덣 글자의 언저리만을 멤돌자 은성은 아쉬움을 남기며 서서히 명상에서 깨어났다.
도(道)는 억지로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처럼 무작정 외우고 반복학습 한다고 얻 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연이 없으면 평생을 찾아도 끝자락조차 내어주지 않지만 천연(天緣)이 있다면 순간적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또한 도(道)이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다.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선 은성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배안은 몇 개의 선창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은성이 명상에 든 선창의 문밖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호위를 서 주는 고마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까지 사랑스러운 검후였다.
선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은성이 검후의 손을 부드러이 감싸 잡았다. 비록 원하는 심득을 얻지 못했지만 이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의 마음을 얻었다는 사실에 은성의 가슴은 한없이 따뜻해져 왔다.
"하매, 사랑해!"
다정다감하니 진심어린 목소리였다.
"오라버니도, 창피하게..."
주변의 눈을 의식한 듯 검후가 수줍은 음성을 발했다.
"험! 험! 배안과 밖이 다같이 절경이니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 흐흐.. 이대협! 손목을 놓으 면 검후님이 도망이라도 갈 것 같은가?"
익살스런 표정의 만취개였다. 은성의 치료를 받은 후 주변사람들에게 흡족하니 자랑을 마친 것 같았다. 얼굴 표정에 대만족 이라고 씌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