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2화 (102/152)

[연재]황정허무검(102)

모용천이 바라보기에도 환자들은 안색이 편안하고 혈색이 돋워지며 눈에 띄게 양호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치유되어져 가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곧 죽어가는 환자들도 회광반조( 廻光返照) 현상으로 갑자기 상태가 양호해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상태를 보니 중독된 후 지금껏 잘못된 처방을 받았음이 명백하였다.

그렇다면 독성이 신체 깊숙이 침투되어 장기 등 신체 기관이 정상이 아닐터 피독주로 독기를 흡수한다고 완치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판단컨대 좀전에 은성이 완치할 수 있다고 말한 호언장담(豪言 壯談)은 성급한 것 같았다.

궁금증은 풀라고 생기는 것이다. 치료가 마쳐지기를 기다린후 조용히 질문을 하였다.

"무림맹의 약수원에서도 다스릴 수 없었던 괴독(怪毒)인거 같은데 피독주만 믿고서 자신함은 성급함이 아니오?"

모용천의 질문에 은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자신감에 찬 미소였다.

"모용세가의 신입(新入) 제자가 세가의 독문무공을 허투루 펼치면 가주님께서 그 허실을 살펴 바르게 펼치도 록 지적하여 주실 것입니다. 모용 가주님은 가주님께서 옳다고 자신하시면서 가르침을 내리는지요?"

은근한 비유(比喩)였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은성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대충 감이 잡혀 왔지만 모용천은 마저 들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눈을 감고서도 펼칠 수 있고 꿈속에서도 펼칠 수 있도록 수 만번 수련한 무공입니다. 의 식이 아닌 무의식에까지도 각인될 정도로 수없이 연습하고 연구하며 완벽히 익혀온 무공인데 가르침에 자신감 이 없다면 말이 되지 않겠지요."

모용천의 대답에 은성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은성이 대답하고자 하는 바를 모용천 스스로가 대신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부가 설명해줄 부분이 남아 있었다.

"모용 가주님의 말씀과 같이 저 또한 여기에 있는 환자들의 상세를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기에 치유를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실은 선친께서 의원이셨는지라 저 또한 어려서부터 의술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은성이 의가(醫家)의 자손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은성의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모용천의 궁금함은 여전 하였다. 아니 계속 더해져 갔다. 해동 소국에서 어린시절에 의술을 배웠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 실력이 무림맹 약수원의 의원들 보다 더욱 고명해질수 있는지...

그리고 어려서부터 의술을 배워 왔다면 도대체 나이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공은 또 언제 배웠 다는 말인지...?

"그럼 이형께서는 환자분들이 며칠 정도면 완치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까지 알 수 있을까? 모용천이 은성의 의술 경지를 엿보려는 듯 재차 질문을 하였다.

"두시진 정도면 환자들이 깨어날 것인데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내일 정도면 내공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답하는데 망설이거나 전혀 막힘이 없는 은성을 보면서 모용천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 었다.

"하매, 수고했어. 피곤하지?"

은성의 관심은 언제나 검후에게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답하며 활짝 웃는 검후와 은성을 보니 모용천은 갑 자기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생각해서도 안되는 그리고 잊었다고 자신하는 단어였다. 심공(心功)이 절정에 올라 이제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하고 있었건만 ...

은성과 검후가 수뇌부들이 탄 배로 돌아올때 모용천과 약수원의 의원까지도 뒤따라 왔다. 환자들이 치유된 후 맥을 짚어보고 상태가 크게 호전된 것을 알 수 있었던 무림맹 약수원의 의원이 무림맹주에게 검후와 은성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자 옆에 있던 개방방주 만취개가 주독에 걸린 딸기코를 만지면서 짓궂은 표정 으로 메기같이 큰 입을 열었다.

"이대협, 의술이 높다는데 이것도 고칠 수 있나?"

만취개가 가리키는 곳은 붉디 붉은 주먹만한 딸기코였다. 만취개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신체 부위였다.

"대협이라니요? 난처한 호칭입니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주독을 제거할 수는 있습니다."

사실 은성에 대한 호칭은 사람마다 많이 달랐다. 나이가 어리므로 평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소 협이라는 호칭도 많이 사용되었다. 대협이라는 호칭은 목검문에서 은성의 활약을 직접 확인한 사람들과 며칠 전 은성이 화마속에서 호신강막을 펼쳐 위험에 빠진 무인들을 구해 나오는 것을 보고 감격한 무림 맹주와 문 상이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호칭이었다.

"아니! 맹주와 문상께서도 대협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난처하다고 그러는 것인가? 맹주가 대협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소협이라고 한다면 맹주께서 더 난처해 지실 것이네 . 그렇지 않습니까 맹주님?"

도리어 화난듯한 기색을 보이면서 유들유들한 말투로 맹주를 바라보며 만취개가 물었다. 능글맞은 표정이 압 권이었다.

"허허! 개방주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권마황을 물리치고 목검문을 마교의 암습에서 구원했으며 절세적인 무 공으로 수차례 정도무림(正道武林)을 위해 공헌한 이대협을 대협이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대협이라 고 호칭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은성을 대협이라고 인정하는 것에 가장 목매달아 하는 것은 사실 무림맹주였다. 은성의 놀랄만한 신위를 목격 한 이후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은성을 붙잡아 두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주의 내 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든 맹주의 전폭적인 지지에 신이 난 개방주가 이번에는 사방을 둘러보며 목청을 더 욱 높이기 시작하였다.

"맹주님의 말씀을 다들 잘 들었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이대협을 대협이라 칭하지 않는 분들은 마음이 옹졸하 고 양심이 쥐꼬리만한 사람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 그런 분들은 안 계시겠지요?"

만취개의 주장에 주변 수뇌부들의 얼굴에 쓴 웃음이 지어졌다.

만취개가 무엇 때문에 이리도 해동의 소년을 두둔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양심이 쥐꼬리만하다는 놀림을 당 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대협이라고 호칭해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변 수뇌부들에게서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자 의기 양양해진 만취개가 매우 만족한 표정을 한 채 간신같은 웃음을 지으며 은성을 바라보았다.

"흐흐흐! 이 대협, 험험... 설마 치료비를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참으로 기가 막힐만한, 한편의 연극같은 대사였다. 말문이 막혀 올 정도였다.

"... 그럼요. 빈손으로 살아가시는 분인데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치개의 순진하면서도 괴팍스런 괴행(怪行)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은성이 대답하였다.

"흐흐!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니까. 흐흐흐. 이 대협 그런데...그것말고 요즈음 이곳이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데 혹시 이곳도 예전처럼 무성한 숲으로 복원될 수 있을까?"

만취개가 이번에 가리키는 곳은 앞머리 부근이었다. 옆과 뒤쪽에는 머리숱이 많았지만 앞부분에는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나 있어 몇 년만 지나면 민둥산이 되어질 것 같았다. 까치집처럼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는 머리였 지만 그나마 계속해서 사라져 가니 무척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공짜만 밝히니 앞 머리가 빠지지 않고 베겨 나겠는가? 이대협의 의술이 높아서 설령 고친들 무슨 소용이 있 겠는가? 자네 천성이 그럴진데 금방 또 빠지고 말 것이네."

개방주와 친분이 두터운 청성의 적하자였다. 허리춤에 찬 장검은 적하자의 키보다도 더 커 보였다.

"아니, 공짜 좋아하는 사람은 머리가 빠진다면 우리 개방도들은 전부 대머리가 될 팔자란 말씀이십니까? 우리 사부님 명호가 '장발걸왕(長髮乞王)' 이라는거 잘 아시면서 왜 또 시비이십니까?"

만취개가 숨한번 내쉬지 않고 따따따 급하게 말을 내뱉더니 적하자가 반박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은성에게 돌리며 쉴세없이 큰 입을 나불거렸다.

"우리 개방도들이 얼마나 높고 깊은 편견속에 파묻혀 사는지 이 대협도 잘 봤지. 그렇지? 이러한 편견을 극복 하고 벗어나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네. 부디 왕년의 무성했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게. 가능 한가?"

물론 가능하였다. 익살스러운 만취개가 애절한 눈빛까지 발하자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가능은 하지만 최소 두시진은 소요될 것입니다."

"엥!!"

은성의 대답에 만취개가 크게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머리를 나게 하는 민간요법이 있었지만 효과가 적고 그 시일이 몇 년이나 소요됨을 잘 알고 있던 만취개였다.

은성의 의술이 높다길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본 것인데 방법이 있다니... 게다가 두시진이면 가능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만취개만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수뇌부들 중에 은성의 말을 믿는 사 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은성의 말이라면 무조건 신뢰해 줄 수 있는 검후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 이 대협! 두 시진이라면 좋네. 지금 당장 시작하세."

만취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성의 손을 덥썩 붙잡고 급하게 선창으로 끌고 들어갔다. 거지라 멋낼 일도 없을 터인데 머리가 빠지는 일이 매우 신경이 쓰이는가 보았다. 하긴, 그의 사부 장발걸왕에게 머리숱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제자로 거둬들여졌던 만취개였으니 신경이 쓰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선창에 들어간 은성이 만취개에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앉으라 하자 만취개는 앉은 채로 심공을 운용하였다.

개방 비전 절기인 취팔선공(醉八仙功)이었다.

은성도 만취개의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만취개의 붉은 딸기코를 정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독을 제 거하고 코의 건강과 직접적으로 관여되는 폐(肺)를 다스리어야만 했다. 심기를 오행으로 나뉘어 폐를 관장하 는 금기(金氣)로 변화시킨 은성은 심공에 열중인 만취개의 피부를 통해서 금기를 주입하여 주었다. 형체가 없 는 심기이니만큼 만취개의 내공과 부작용은 전혀 없었다.

은성이 발하는 금기가 서서히 높아지자 만취개의 콧구멍에서 호홉에 따라 미세하니 흘러나오는 호기(呼氣)의 색이 조금씩 변화되어졌다. 순백의 눈(雪)처럼 하얀 기운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와 만취개의 코 주위에 머물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만취개의 코 주변을 완전히 에워싸 버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취개의 코를 감싼 안개는 짙어져 갔다. 일각여나 지나자 은성이 발하는 금기가 만취개의 폐에서부터 목구멍을 따라 서서히 위쪽으로 상 승하기 시작하였다.

'솨' 하는 느낌과 함께 청량한 공기를 들이킨 것처럼 가슴속으로부터 막힌 속이 댐 무너지듯 조용히 터져 나 가는 감각에 온몸으로 희열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지만 만취개는 은성을 믿고 계속해서 심공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윽고 은성이 발하는 금기가 만취개의 코쪽으로 스며 나와 흰색 안개를 더욱더 새하얗게 만들어 버렸다. 휘 돌던 백기속에서 붉고 검은 기운이 실같이 가느다랗게 조금씩 빠져나와 공기중으로 사라져 갔다. 순간 선창안 에 알싸한 주향이 스치듯 묻어 나오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대기 속으로 희미해져 갔다.

만취개의 코속에 깊이 베인 주독을 제거한 은성이 이번에는 만취개의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하기 위해 심기를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머리카락을 주관하는 장기도 폐(肺) 이었다. 폐는 숨쉬는 일을 맡을뿐더러 심장 을 도와 혈액순환을 조절하고 기와 피를 고르고 순조롭게 흐르게 하며 피부와 털까지도 주관하는 것이다.

폐는 코를 관장하는 이유로 만취개의 딸기코를 치료하기 위해 폐를 다스린 것이 머리카락을 나게 하는 것과도 큰 연관이 닿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빠진 머리카락을 다시 나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특별한 치료법이 가미 되 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머리가죽에 퍼져 있는 세맥을 타통시켜야만 했다.

기행즉혈행(氣行卽血行)이요, 기체즉혈체(氣滯卽血滯)라는 말이 있다. 기가 가야 혈이 가고 기가 막히면 혈도 막힌다는 말이었다. 기가 막히어 혈이 원활히 통하지 않으면 머리카락이 온전히 생성되고 자랄 수 있는 자양 분이 공급되지 않고 불순물이 쌓여 머리카락이 쉬이 빠지고 또 빠진 자리에 머리카락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

인체중 경락(經絡)이 가장 발달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백회혈에서 이마 까지 연결되는 부위였다. 경락이 발달 되어 있지 않은데 세맥이 온전할 리는 없었다. 은성이 심안을 발휘하여 만취개의 머리 부분을 관조하여 보니 역시나 머리가 빠진 부분의 기맥과 혈맥이 대부분 막혀져 있었다. 무림인들이 익힌 내공심법의 종류에 따라 이곳이 활성화된 무인도 많았지만 아쉽게도 만취개가 익힌 심공에는 이곳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취급되어지는 것 같았다.

은성과 같이 천고의 기연을 얻어 전신 세맥이 타통되는 행운이 없었으니 만취개의 현재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은성이 심기를 발휘하여 만취개의 앞머리 부근에 집중한 후 만취개의 막힌 기맥을 서서히 열 어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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