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황정허무검(101)
쌍두곤의 공격으로 무림맹의 배가 반이상 파괴되었기 때문에 수뇌부들이 탄 배로도 몇 명의 무인들이 추가로 승선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게 은성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친 듯이 광란하는 물살에 선박이 심하 게 요동칠때 멀미를 하였는지 하얗게 변한 안색으로 문상이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은성과 검후에게는 바라마지 않던 기회였다. 쌍두곤에게 당한 내상도 거의 완치되고 있는 은 성이었다. 이제는 제법 잔잔해진 황하의 물결을 내달리면서 하얗게 일었다가 스러지는 포말을 검후와 같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으로 자리하여도 마냥 행복한 둘이었다.
"오라버니, 저것 보세요. 비어(飛魚)예요."
은성과 같이 뱃전에 부서지는 물살을 바라보던 검후가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목소리로 손가락질을 하며 하얀 잇속을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검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햇빛에 온전히 몸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매우 특이한 물고기였다. 비어(飛魚)라는 표현대로 작고 투명한 물고기는 강위를 스치듯 날아가고 있었다.
사오장을 날다가 하얀 포말에 내려앉아 몸을 살짝 튕기고는 추진력을 얻어 또다시 포말위로 떠서 날아가는데 선박이 나아가는 속도에 전혀 뒤짐이 없었다.
비어의 신기함이 호기심을 자극하였지만 활짝웃는 검후의 아름다운 미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잠시 비어를 바라본 은성의 시선은 어느새 순진무구한 표정의 검후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햇살에 부서지는 검후의 옆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검후와 다정하니 함께 있자니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은성이 조용히 손을 뻗어 검후의 손을 잡자 검후가 고개를 돌려 은성을 보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배안에 많은 사 람이 있었기 때문에 창피하였는지 안색은 홍안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싫지 않은 듯 검후도 마주잡은 은 성의 손을 더욱 꼬옥 잡아 주었다.
검후의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몇가닥이 바람에 흩날리자 은성이 다른 손으로 날리는 머리카락을 제쳐 어깨 너머로 넘겨 주었다. 그러자 검후의 머리위에 곱게 자리잡은 금접이 은성만 알수 있도록 한쪽눈을 슬며시 감 았다 떴다. 아마도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검후님, 보기에 좋으십니다."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천의 목소리였다. 은성과 검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서스럼없는 웃음을 지으며 모용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두분이 너무나 다정스러우니 시샘이 날 지경입니다. 하늘이 며칠동안 흘린 눈물에 황하가 넘쳐 고생을 했는 데 저처럼 애인없는 사람들이 서럽게 흘린 눈물이 또다시 황하를 덮을 것 같습니다."
조금은 익살스런 표정이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용가주님을 연모하는 여인들이 손가락으로 헤아릴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황하가 넘쳐 난다면 그녀들의 흠모지정이 넘쳐 흘러서일 것입니다."
바람에 자색 경장을 휘날리는 모용천의 해학적인 모습에 검후도 웃음띤 얼굴로 응대해 주었다.
"검후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언비어(流言蜚語) 입니다. 누구 혼사길 막을일 있습니까?"
과민한 반응을 하며 누가 들을세라 고개를 좌우로 휘둘러 대는 모용천의 모습에 검후와 은성의 입가에도 웃음 이 지어졌다.
"이형께서 바로 해동신룡(海東神龍)이라고 불리시는 분이겠군요. 일전에 한번 뵈었었지요?"
모용천이 이번에는 시선을 은성에게 돌리었다.
무림맹을 출발한후 청성산에 모여 식사가 끝난후 잠깐 눈길을 마주친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잠깐 동안 바라본 것 뿐인데 서로간에 인상이 깊어서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진 것 같았다.
"분에 넘치는 명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동 동방파의 이은성 입니다."
은성이 모용천에게 한문파의 장문인을 대하는 자세로 경건하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웃음띤 얼굴로 다가온 모용천이었지만 은성이 쉽게 대할 수 없는 배분이었기 때문이다.
"분에 넘치다니 너무 겸손하시군요. 마교의 권마황을 물리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며칠전 놀라운 신위를 펼쳐 불길속에서 사람들을 구해 오시는 것을 보니 오히려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가 과분한 명호를 차 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고고일검(孤高一劍), 일검속에 담긴 경지가 너무 드높아 알아줄이 없으니 홀로 고독하도다. 진실로 모용세가의 가주에게만 어울리는 명호이잖아요."
"검후님, 제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군요. 어제 검후님이 발휘하신 검식을 보니 고고일검은 검후님에게 넘겨 야 할 것 같았습니다."
검후가 현천교의 탄트라를 일격에 격살시킨 다정만리(多情萬里)라는 초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림 삼신승중 한명인 공지대사가 심혈을 기울여 창안하고 천녀유한 검법과 함께 검후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무공 초식이었 다.
"모용세가의 검법의 경지는 눈으로 쫒아갈 수 없고 입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그려볼 수 없다는데 제가 운이 없어 아직 한번도 식견할 수 없었네요. 하지만 삼성검문의 차기 문주인 반수석님조차 한수 아래임 을 시인하셨다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옥룡 반수석의 무위는 저보다 약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입니다."
모용천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고 있었지만 은성이 바라보는 모용천은 그 누구보다 강해 보였다. 은성 이 심안을 발휘해도 추측 불가한 무공 수위였다. 무림맹을 출발하여 같이 이동하는 무인들중 은성의 심안을 벗어나는 고수들은 열 손가락에도 크게 못미치고 있었다.
익살스런 웃음기를 담고 있었지만 모용천의 천진스런 눈빛은 깊고도 심원하였으며 무방비 상태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동작 하나에도 신묘한 무공의 현기가 깊숙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하매의 말을 들으니 모용가주님의 검에 대한 경지가 매우 궁금해지는군요. 추후에 고고일검의 경지를 식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이거 두분이서 쌍으로 공격하니 감당할 수가 없군요. 나중에 보시고 흉이나 보지 마십시오."
모용천이 웃으며 두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정담을 나누던 여섯개의 시선이 갑자기 강물위로 돌려졌다. 뒤쪽에 위치한 배에서 한사람이 강물을 밟으며 뛰 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에든 작은 나무판자를 물위에 던지며 그것을 밟고 도약하고 있었지만 경공실력 이 보통이 아니었다.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물위를 건너 수뇌부들이 탄 배로 크게 도약한 사람은 무림맹 약수 원(藥水院) 소속의 의원이였다.
무림맹주에게 다가가 심각한 안색으로 무어라 보고를 마치더니 검후와 은성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이었 다.
"검후님, 환자들의 치료가 예상외로 어렵습니다. 해독이 쉽지가 않아 검후님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황하의 검게 변색된 물에 중독된 환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검후의 피독주를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괜한 자존심때문인지 알아서 치료하겠다고 하더니 차도가 없자 염치불구하고 검후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알았습니다. 먼저 출발하시지요."
검후가 혼쾌히 승낙하자 의원의 안색이 환해졌다.
중독 초기에 부탁하지 않고 환자들의 상태가 악화된 이후에 부탁한다고 거절할까 두려웠었던 것이다. 밝은 표 정으로 검후에게 감사의 예를 표한 의원이 다시금 목판을 뿌려가며 경공을 발휘하자 검후가 슬며시 은성을 바 라보았다. 은성이 웃으며 검후의 한손을 거머쥐자 검후의 옥용에도 미소가 가득 드리워졌다.
바람이 일었는가?
한쌍의 연인이 손을 마주잡고 강물위로 떨어져 내렸건만 한 방울의 물조차 튀겨지지 않았다. 제비가 물을 박 차듯 날렵하니 몸을 날리며 등평도수의 수법을 발휘하는 검후와 은성을 보던 모용천도 뒤따라 몸을 날리었다.
뒤따르며 은성과 검후를 보니 둘다 등평도수를 펼치는 모습이 자연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검후의 무공이 높은 것은 불문가지지만 해동신룡의 무공은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해동신룡이라고 불리는 은 성의 정체와 무위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평소 사람보는 안목이 높음을 자신하는 모용천이었다. 하지만 해동신룡이라는 정체모를 젊은이는 도무지 짐작 하기조차 어려웠다. 구룡 삼봉중 삼봉을 대표하는 검후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은 젊은이였다. 도대체 어떤 내력을 가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말을 건넸지만 아직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전혀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등평도수를 펼치면서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 초열의 불길속에서 호신강막을 펼쳐 여유롭게 빠져나올수 있 는.., 어쩌면 자신과 비등한 내력을 소유하고 있는 초절정의 고수인지도 몰랐다.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쉽고도 간단한 방법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 해서는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은성과 검후의 경공 실력에 감탄한 것은 모용천뿐만이 아니었다. 정도 무림의 수뇌부들 모두가 은성의 실력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미리 예상했었는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문상을 제외하고 말이다.
검후와 같이 선창으로 내려가 환자들을 둘러보던 은성의 눈에 이채가 뜨여졌다.
환자들이 모두 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힘겨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쌍두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음기에 중독되었으니 오행중 음독이 가장 먼저 침투되는 곳은 수(水)의 기운이 깃든 신장과 방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오행 상극의 원칙에 따라 오행의 균형이 깨어지고 수의 기능에 극(剋)하는 화(火)에 영향을 미 쳐 심장과 소장에도 독의 기운이 파고드는 것이 정해진 이치였는데 이치에 맞게 치료가 된 것 같았다.
"의원님, 이들에게 먹이신 약이 열화 침수탕(熱火沈水?)이 맞는지요? "
느닷없는 의원의 질문에 의원의 얼굴에 놀라움의 기색이 띄여졌다. 의리(醫理)에 깊은 조예가 없고서는 알 수 없는 희귀한 처방약 이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는지요?"
"상식과 증상에 따른 유추입니다. 그것말고 침술도 병행한거 같은데.. 음.. 십이경락중 족소음신경(足少陰腎 經)의 용천혈(湧泉穴)과 수천혈(水泉穴)에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극천혈(極泉穴)에 화침(火針) 시술을 하 셨군요?"
계속된 은성의 질문에 의원의 입이 벌어졌다. 한치의 오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의 가슴 아래로는 하얀 천으로 덮여져 있건만 어떻게 시술한 혈자리를 알아낼수 있다는 말인가?
거기다가 음독을 제거하기 위해 침을 불에 달궈 화침을 시술한 것까지 알아내다니...
"잘..잘못되었습니까? 완치가 어려운지요?"
의원은 피독주를 소유하고 있는 검후가 아닌 은성에게 사정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완치될 수 있습니다."
은성의 시원스런 확답에 의원이 굳었던 표정을 풀며 검후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피독주를 사용해 줄 것을 간 절히 바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검후가 피독주를 꺼내 선창안을 환히 밝히며 중독된 환자들을 한명 한명 해독 하는 중에 은성도 말없이 검후를 따랐다.
이들을 완치시키기 위해서는 피독주만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약수원의 의원들이 중독된 환자들에게 행했던 의술은 매우 수준높은 고명한 처방이었다. 증상을 살피 고 음양 오행 상생상극의 원칙에 따라 독을 소멸시킬수 있는 약을 복용시키고 독기를 제어할 혈자리를 정확히 찾아 시술을 행한 것으로 보아 약수원 의원은 최고 수준의 의원임이 명백하였다.
하지만 간과된 것이 있었다.
쌍두곤이 뿜어낸 독기에는 수기(水氣)속에 토기(土氣)가 섞여 상호전화(相互轉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도 쌍두곤이 지하 깊숙이에서 음기를 축적하면서 수기속에 토기의 기운이 섞이여 들어간 것 같았다.
음냉하고 지독한 수기속에 가려 토기가 감추어져 있었지만 오행의 시작이자 끝을 관장하는 토기였다. 토기(土 氣)를 무시하고 음양보사(陰陽補瀉)의 원칙에 다른 처방과 시술은 환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아직껏 환자들이 멀쩡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조금더 지체 된다면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것이다.
심기와 심안이 발달된 덕택에 수기속에 내포된 토기를 발견할 수 있었기 망정이지 환자들의 중독된 증상만으 로는 절대로 알아볼수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은성은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 약수원의 의원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검후가 피독주로 독을 흡수하면 은성은 심기로 무형의 침을 만들어서 환자들의 십이경맥중 하나인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과 잘못된 침술로 혈자리가 꼬인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의 태백혈(太白穴)을 풀어 주었다.
심기로 수혈을 짚어 잠이 들게 하면서 약해진 기력이 보충되고 손상된 경맥이 복구되도록 음양이 교차하는 음 유맥(陰維脈)과 양유맥(陽維脈)의 잠재지기를 끌어주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검후와 은성이 환자들을 치유하는 광경을 바라보던 모용천은 시선이 은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검후와는 달리 은성은 어떠한 시술도 행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침을 놓거나 혈을 짚기는커녕 내기조차 운용 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고통에 겨워 신음하다가 검후의 피독주에 독기가 흡수된 환자들은 은성이 지긋이 바라보면 곧 이어 아주 평온한 표정이 되면서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단지 바라만 보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