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00화 (100/152)

[연재]황정허무검(100)

유령왕이 쌍두곤과 격전을 벌이고 은성이 심기로써 물살을 제어하고 있을때 황하 위에서도 치열한 격전이 벌 어지고 있었다. 쇄목(?木)의 공격을 어렵사리 방어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돌풍같은 와류속으로 누런 용이 그 려진 깃발을 매단 선박들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황하 유역에서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황룡채의 수적들이었다. 폭풍치듯 휘몰려오는 황하의 물살을 가르며 쳐 들어오다니 미친듯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파도치듯 어지러이 몰아치는 물살속에서도 한척의 낙오도 없이 능수능란 하게 배를 몰며 덮쳐드는 것을 보면 물길에는 이력이 난 놈들이었다. 무공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우위에 있으 나 흔들리는 배위에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라면 방심할수 없는 것이다.

천기는 무정(無情)한 것일까?

어찌된 일인지 이들이 공격하는 시점부터 그토록 자욱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던 안개조차 조금씩 옅어져 가고 있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배위에 타고 있는 무림 고수들이 아니었다. 배가 파손되어 물에 빠진채 구조되지 못한 무림인들이 주 목표인 것 같았다.

급류를 타고 내려오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무림인이 발견되면 수중에서 사용하기 가장 편한 무기인 분 수자를 손에 든 수적 두명이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 내렸다. 그들은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 어 물속에서 활동하기가 편리할 것 같았다. 게다가 오리의 물갈퀴처럼 생긴 넙적한 신발을 착용한 것이 오늘 을 대비하여 많은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무림맹의 이십여 선박중 쇄목에 당해 파손된 배는 여섯척이나 되었다.

배가 파손될시 무공이 아주 고강한 고수들은 몸을 날려 다른 배로 이동할수 있었지만 모진 날씨와 아우성치며 조여오는 물살에 대다수의 무인들은 목재 부스러기를 의지한채 떠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들의 형편이 이러하니 무림맹 보금원에 고용되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던 인부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 다. 인부들 대부분이 수영에는 능하였지만 이처럼 광란하는 물살속에서는 있으나 마나한 능력이었다.

하나같이 부서진 선박 부스러기를 부여잡고 목놓아 구조 요청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중 운이 좋은 사 람들은 뒤에서 올라오는 배에 구조되기도 하였지만 아직은 안개가 짙어 구조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풀속에 숨어있는 토끼를 발견한 독수리의 기세일까?

물속에 들어간 수적들은 급류를 타고 날 듯이 덮쳐들어 왔다. 그리고는 거침없는 동작으로 물속에 빠진 무인 들에게 접근하여 비장의 살수를 날리었다. 철저한 수련이 있었는지 한치의 실수도 없는 잔혹한 살수였다.

물속에 빠져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티던 많은 무림인들이 이들에게 허망하니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물속에 뛰어든 수적들의 목표는 또 하나가 있었다. 물밑으로 깊숙이 잠수한 그들은 무림맹의 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빨판같이 생긴 둥근 물체를 배 밑바닥에 대자 급류에 휩쓸려가던 그들의 몸이 어찌된 일인지 단단 하니 고정되어져 버렸다.

몸이 고정된 수적들은 허리춤에 매단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를 꺼내들었다. 집중 공격당한 무림맹의 배 한척 이 처참히 부서지며 침몰되고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무림맹에서 이들에 대비한 작전을 지시하였다. 이들 이 도끼로 배 밑창을 찍어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암기와 지풍에 능한 선상의 고수들 몇 명은 선실로 내려 갈 수밖에 없었다. 한명의 수적을 상대하기 위해 몇 명의 고수가 소요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 정도로 매섭게 몰아치는 역풍을 제치고 무림맹의 고수들이 수적선에 올라타서 그들과 백병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방적인 싸움은 아니었다. 그들중에서도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보라 속에 피보라가 몰아치는 아비규환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때 갑자기 물 밑으로부터 엄청난 괴음이 들 려오며 물살이 하늘높이 솟구쳐 올랐다. 격전하는 고수들 조차도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몇척의 배가 치솟는 돌풍에 견디지 못하고 파손되어졌다.

무림맹 소속의 배만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격류를 따라 곡예하듯 휘달리던 수적선의 배들이 몇 배나 큰 피해 를 입었다. 수적선의 배들은 조금씩 간격을 두고 상부로부터 끊임없이 떠 내려오고 있었다. 수적선 소유의 선 박 대여섯 척이 전복되고 몇척의 배에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뛰어들어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수가 얼마인 지 정확히 예측되지는 않고 있었다.

이때였다.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탄 배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내공을 실어서 부는지 낮은 듯 하면서도 격하게 거센 바람을 뚫고 울려 나오고 있었다. 피리 소리를 듣자 수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던 무림맹의 고수들이 대부분 무림맹의 배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무림맹의 배들이 서서히 강변쪽으로 선수를 돌리었다. 광풍이 조금 약하게 불고 배를 안착할수 있을 것 같은 오른쪽 강변이었 다. 무림맹의 배들이 대부분 강변쪽으로 다가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황하 중심부에 위치된 수적선의 배위에서 는 끊임없이 비명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무림맹의 절정 고수 몇 명이 아직도 수적선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적들과의 싸움에서 눈에 띄는 고수들이 있었다. 가장 돋보이는 고수는 좀전에 등평도수를 시전하며 쇄목을 날리우던 모용세가의 젊은 가주 모용천이었다.

한마디로 자색 폭풍우였다. 자색 그림자가 휘도는 곳에는 죽음과 공포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떼거지로 덤비던 수적들이 뒷걸음을 치며 쫒기더니 겁먹은 얼굴로 죽음의 사신처럼 누런 입을 들썩이는 파도 속으로 미련없이 몸을 던졌다.

삶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되어진 것 같았다. 조타수마저 격류에 몸부림치는 황하속으로 몸을 날리면 배 는 일각도 버티지 못하였다.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순식간에 거친 물살에 균형을 잃고 전복되어져 갔다.

광풍을 몰고 가는 파도를 역류하며 자색 그림자가 다가서면 목표한 수적선에서는 비명소리가 먼저 울리어 나 왔다. 자색 그림자가 배위에 어른거리기도 전에 배 밖으로 몸을 날리는 성질 급한 수적들 또한 있었다.

그렇다고 배위에 있는 수적들의 무공이 모두 낮은 것은 아니었다. 가슴위에 붉은 물살무늬가 수놓아진 현세화 단의 고수들조차 숨어 있었다.

하지만 모용천의 무공은 거침이 없었다. 하늘의 신장이라도 능히 상대할수 있을 것 같았다. 동쪽으로 손을 휘 두르고 있는데도 반대쪽의 수적까지도 죽어 넘어졌다. 파란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대는 고수도 심지어는 검강 의 초입에 든 현천교의 절세 고수조차도 피를 줄줄이 흘리며 광풍에 실려가 거친 황하속으로 수장되어져 갔다

. 수적들에게 자색의 그림자는 지옥의 사신이었던 것이다.

모용천 뿐만이 아니었다.

삼성검문(三星劍門)의 차기 문주이자 무림맹주의 아들인 옥룡 반수석의 무위도 그 못지 않았다. 그리고 무림 맹 대공자인 삼일검(三日劍) 이종주와 무당파 장문제자인 진허 또한 명불허전이었다.

물밑에서 지옥의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섬찟한 괴음은 그 이후에도 두 번이나 더 들려왔다. 하지만 하늘을 덮 칠듯한 해일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네 번째 울부짖음 소리는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처절하 고 광포한 울부짖음 소리가 울려 퍼진후 곧이어 벌어진 사태는 무림맹과 수적들 모두에게 경악스럽고 공포스 러운 장면이었다.

황하가 일직선으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해용왕신이 노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는 것 같았다.

수적선에서 벌어지던 백병전도 순간적으로 멈추어졌다.

황하 강변을 따라 늘어선 산맥보다도 더 높이 솟구쳐 오른 강물이 이대로 덮쳐 내려온다면 황하 중심부의 수 적선은 물론이고 강변으로 서서히 몰려가고 있는 무림맹의 배들조차 한척 예외 없이 몰살되어질 것 같았다.

사위는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처럼 높다랗게 솟아 올랐던 강물이 거짓말 같이 물속으로 딸려 들어가 버렸다. 공포 에 잠겨 전투조차 멈추고 망연자실해 있던 무림맹의 고수들조차 안색이 하얗게 변화되어졌다. 무림맹의 수뇌 부들이 탄 배에서 급작스럽고 날카로운 피리소리가 숨가쁘게 울려나오더니 무림맹 소속의 배들이 빠르게 방향 을 회전시켰다.

조심스럽게 강변으로 접근하던 배들이 갑자기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배들만이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피리소리를 듣자 수적선에 머물던 절정 고수들조차 강 상류로 몸을 날려 무림 맹의 배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모용천과 반수석은 등평도수의 수법을 발휘하고 있었다. 무림맹 대공자와 무 당 장문제자는 공력이 조금 모자란 듯 품속에서 몇 개의 판자조각을 꺼내 십여장 간격으로 물위에 던지고 그 것을 밟고 날아갔다.

파도에 일렁이는 강물위로 나무 판자가 스치고 나아가면 바람처럼 따라가 어느새 슬쩍 즈려밟고 날아가는 그 들의 공력도 절정 이상이었다. 물살만 고요하다면 충분히 등평도수도 펼칠수 있을 것 같았다.

수적들은 그냥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배를 안착시킬수 있는 왼쪽 강변은 무림맹의 배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오른쪽 강변은 암초가 많고 물살이 심 해 배를 댈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림맹의 고수들이 모두 물러난 것을 위안삼아 안도의 숨을 몰아쉬 던 수적들이었다. 그런데 하늘은 가까스로 살아남아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수적들의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는 괴악스런 비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강변에 배를 바짝 접근시킨후 서서히 멈춘 듯 나아가 던 무림맹의 무인들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수 없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황하가 폭발한 것이다.

중심부에서 폭죽처럼 치솟아 오른 수전(水箭)은 하늘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대지조차 찢어 발겼으며 검은 물 살이 활화산처럼 폭죽하며 두려움에 떠는 하늘을 온통 뒤덮고 대지를 삼켜버릴 듯이 다시금 쏟아져 내려왔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세였다.

강중심부를 따라 하류로 이동하던 수적선이 일시에 처참히 분해되며 하늘높이 치솟아 오른후 붉은 핏줄기를 토했으며 피를 삼킨 검은 하늘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며 강변에 위치한 무림맹의 선박으로 쇄도하였다.

"콰롸롸롸락..."

"퍼버버벅"

순식간에 무림맹의 배 두척이 산산이 터져 나가 버렸다.

두척만이 아니었다. 이제 일순간만 지나면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온 나머지 아홉척의 배조차 산산이 부서져 나 갈 것 같았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이 많이 타고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자연의 분노가 거 대무비한 힘으로 덮쳐들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고수들이 배에서 몸을 날려 강가로 날아갔다.

강가로 몸을 피한다고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는지 여력이 있는 무인들은 호신강기조차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무림맹의 선박들을 코끼리 개미 밟듯이 일거에 휩쓸어 나갈 것 같 았던 물살들이 좌악 갈라지며 무림맹의 배들을 피해 양쪽으로 천둥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떨어져 내린 것이다

.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선박을 경계로 떨어져 내려온 물살의 여력만으로도 선박들이 파괴될 위험 이 다분하였는데 예상외로 힘없이 사그라져 버리고 말았다. 자연의 폭력앞에 인간처럼 나약한 존재가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조차 믿고 싶지 않았는지 모두가 멍한 눈빛이었다.

수뇌부에 탄 문상의 안색은 더욱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토록 의지견성하던 눈빛에도 피곤한 듯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간신히 입을 떼어 뭐라고 지시를 하였다. 문상의 의견에 따라 선박들은 닻을 내리고 고수들이 분분히 몸을 날려 강가에 고정 쇠를 수십개나 박 고 배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런 와중에도 몇몇 절정 고수들은 몸을 날려 파손된 두척의 선박에서 삶을 보존 한 무림인들을 건져내고 있었다. 그런데 물속에 빠진 무림인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강물의 색을 보니 은연중 검은 색을 띄고 있었다.

중독된 듯한 증상이었다. 황하가 검게 변하다니 믿지 못할 기사(奇事)였다.

다행히 마지막 참변이 있은후 황하의 물살은 더 이상 광분하지 않았다. 광풍폭우는 여전하였지만 그에 걸맞는 정도로만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정도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검은 물살도 하류 로 떠내려가고 어느새 누런 강물색으로 변해 있었다.

"휴...!"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사방을 둘러본 자운검이 어느새 돌아왔는지 일장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은성을 바라본후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안도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은성이었다.

쌍두곤을 소멸시킨후 내상을 무릅쓰고 뛰쳐나와 간신히 무림맹의 배를 덮치는 물살에 심기를 발해 두쪽으로 갈라놓았지만 더 이상의 여력이 남아 있지는 못하였다.

두쪽으로 갈라 놓았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까지가 은성의 한계였다.

그런데 은성도 믿을수 없는 일이 발생되었다. 수뇌부들이 탄 배에서 거대한 기운이 일어나더니 선박 가장자리 로 떨어진후 재차 힘을 발휘하려던 물살들을 사그라트려 놓았던 것이다.

은성 자신과 비견될만한 힘이었다. 심기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내공력은 아니었다. 초인 적인 정신력이 발휘되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은성처럼 상단전이 발달되어 발생되는 심기는 아니지만 심 기의 일종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능력을 발휘하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내상을 당한 상태에서 너무 무리하여 심력을 발휘하느라 심안이 펼쳐지지 못한 때문이다.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보무당의 배에 스며든 후 심안을 발휘한 결과 사부와 사숙을 비롯하여 해동파의 고수들 이 모두 멀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검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은성이 심령으로 알수 있는 금접 조차 별 이상을 알려오지 않았다.

조금 있으려니 강물속에서 유령왕까지도 무사함을 심령으로 전해왔다.

광풍과 폭우가 여전히 몰아치고 있었지만 안개는 희끗하니 몇장앞을 바라볼수 있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미쳐 날뛰던 황하가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도대체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었다는 말인가?

땅이 뒤흔들릴 정도로 흉포한 괴음과 황하가 뒤집혀 들고 일어나는 괴사라니...

이곳이 현세가 아니란 말인가?

지옥에 와 있지는 않은지 황당해 하던 군웅들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가자 모산파의 주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 방금 전까지 뱃전에 서서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면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무언가 게시를 받 은 것 같았다.

"맹주! 악의 진원지를 발견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기상 이변은 술사들의 농간 때문입니다. 이대로 좌시 할수만은 없습니다."

방금전의 상황이 술법의 기운 때문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었다.

결연한 눈빛을 한 맹주가 수많은 인혈을 잡아먹고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히 도도하게 흐르는 무정한 황하를 조용히 응시하더니 시선을 들어 주변을 휘 둘러 보았다.

무림맹주의 시선이 멈춘 곳에 모용세가의 젊은 영웅 모용천이 있었다.

오늘의 활약으로 가장 부각된 영웅이었다. 어풍비행(御風飛行)을 펼치며 일선에서 활약한 은성이 보무당의 무 인들에게 신화적인 존재로 부각되었지만 지독한 안개 때문에 수뇌부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대신 수뇌부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사람은 등평도수를 펼치며 신묘한 무공을 발휘하던 모용세가의 어린 가주 모용천이었다. 모용세가에서 가장 자신있어 하는 검법은 한번도 펼치지 않았건만 권장의 수법만으로도 번천지복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모용세가라면 과거 무림을 들썩일 정도의 숱한 영웅들이 배출된 절대 가문이었지만 이처럼 나이어린 가주조차 도 짐작할수 없는 무위를 가지고 있다니 역시 용의 가문이었다.

"모용가주! 황하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오. 무림의 차세대는 구룡삼봉이 지 켜나갈 것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명불허전(名不虛傳) 이었소. 오늘 그대들의 신위를 한번 더 펼쳐 보이시오!"

뜻밖의 제안이었다.

모용세가의 가주에게 부탁한 것도 의외였지만 모용세가의 가신들을 제쳐두고 무림 신진 고수들의 수장이라는 구룡삼봉을 지적함은 수뇌부들조차 깜짝 놀랄만한 발언이었다.

'구룡삼봉(九龍三鳳)'

언제부터인가 정도 무림에 은밀히 회자되던 명호였다. 몇 명의 신비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구성원들이 대부분 노출되어졌지만 아직은 신비에 싸인 은밀한 모임이었다.

'구룡은 구름속에서 몸을 드러내 창천으로 치솟아 오르지만 삼봉은 아직도 심산유곡에서 유유자적하며 깃털을 가다듬고 있다.'

무림중에 조용히 퍼져 나가는 말중의 하나였다.

구룡이 몇 번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서로의 우의를 다지고 무림의 미래를 준비하였으나 삼봉은 아직도 본격적 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빗댄 말이었다.

검후가 무림에 나온후 변경되어졌지만 말이다.

비밀스러운 모임이었지만 무림맹 암영원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당연히 무림맹주의 귀에도 보고 되어졌 다. 그들 중에는 무림맹주의 아들인 옥룡 반수석 과 집안에만 머물러 있으나 그 뛰어남을 온전히 감출수 없었 던 천금같은 딸 반희정 그리고 대제자인 삼일검 이종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맹주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용천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구룡회가 드디어 여의주를 얻어 안개를 해치고 찬란한 창공 으로 솟구쳐 오를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믿겠네..."

굳은 의지와 끝없는 자신감으로 눈을 빛내는 모용천을 보니 젊은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왠지 호감 이 이는 것 같았다. 맹주의 목소리에는 신뢰한다는 기색이 역력이 담겨져 있었다. 맹주가 짧게 응답하였지만 모용천은 결코 가볍게 들려오지 않았다. 말속 깊이 담겨진 믿음과 신뢰에 걸맞는 성과를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

간결하니 대답하였지만 모용천의 눈빛에는 굳은 결의가 서리서리 엉기어져 있었다.

구룡삼봉의 이름을 걸고 공식적으로 처음 행하는 일이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무림에는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진고수들의 꿈과 희망으로 어우러지는 태양인 것이다. 걸음을 옮겨 검후에게 다가선 모용천이 공손히 부탁을 하였다.

"검후님! 같이 가시지요."

삼봉중 유일하게 참석한 검후였다. 구룡회의 이름이 아닌 구룡삼봉회의 이름으로 출전하니 만큼 검후도 같이 가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구룡은 이미 암중에 몇 번의 모임이 있었고 그들만의 방법으로 서열조차 메겨져 있 었다. 자신의 한마디면 거절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알겠어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지만 자기가 삼봉중의 일인으로 불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검후였다. 삼봉이라서 출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잔악한 사술(邪術)을 서슴치 않는 술사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수가 없었다.

기꺼이 따라가 그들을 응징해주고 싶었다.

"휘이익"

모용천이 입가를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자 허공으로 창룡음이 퍼져 나갔다. 배위에서 일학 충천의 수법으로 날 아올라 주진인이 가리켜준 방향으로 내달리는 모용천의 등뒤로 몇 개의 인영이 날아 올랐다.

검후 말고도 네명이나 더 있었다.

가끔씩 낮은 휘파람 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모용천의 등뒤로 오명의 인원이 바짝 따라붙어 사라져 갔다

. 인원은 적지만 이들의 자신감은 백만대군(百萬大軍)조차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은 물론 같이 몸을 날 리는 의형제들의 무공수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동지들이었다.

황하의 강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 정상에서 세찬 바람에 옷깃을 휘날리며 서 있는 인영이 한명 있었다.

휘날리는 옷깃을 따라 올라가 보니 가슴에 세겨진 보라색 물살 무늬가 유난히 돋보이는 인영이었다. 안개가 너무나 자욱하여 황하는 커녕 몇장 앞조차 잘 보이지 않으련만 중년인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뚫어져라 산 밑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년인의 이마 위에는 붉은 부적이 혈광을 내뿜으며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중년인의 몸체 바깥으로도 은은한 혈광이 어리어 비와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부적 때문일까?

중년인의 눈에서 사이하고 요기로운 백색 광채가 쉬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현천교 극락조단의 삼대고수중 한 명인 탄트라였다. 탄트라의 뒤에는 오십여명의 극락조단 고수들이 밀교의 술법인 만다라의 모양으로 진을 구 축하여 좌정한채 끊임없이 주문을 외워대고 있었다.

그들의 심령은 자유롭지가 않은 상태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킨채 가공할 만한 술법 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심령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심령을 모으면 구름을 몰고 한곳에 집중 폭우를 쏟 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집중된 역량으로 광풍을 불러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며 자욱한 운무를 불러오는 일 또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동시에 행하는 일은 아무리 오십여명의 술사들이 심령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 었다.

게다가 이들은 심력을 분산시켜 쇄목속에 들어간 수적들의 의지 또한 조정해야 했던 것이다. 수적들의 얼굴에 붙어있는 부적은 이들 극락조단 술사들의 심기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탄트라가 천리안의 술법으로 강변을 바라본 후 상황판단을 하여 이를 뒤쪽의 술사들에게 알려주면 이들이 수 적들에게 일일이 행동 방침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탄트라의 심정은 갈수록 불안해져 가고 있었다. 쌍두곤이 나타날만한 시간이 지났는데 별 움직임이 없 는 것이다. 황하의 강물이 몇 번 크게 출렁거리며 치솟은 것으로 보아 물속에 있는 것이 확실한데 본격적인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지만 왠일인지 황하의 격랑은 기대와는 달리 점점 가라 않고 있었다.

쌍두곤과 동시에 공격하기로 예정되어졌던 쇄목 공격과 수적선을 동원한 직접적인 공격도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황하의 물이 일시에 공중으로 폭파되듯 치솟아 오르자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며 내 심 기대하였는데 별 성과도 없이 애꿎은 수적선만 전부 침몰되고 말았다.

탄트라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천리안으로 강물속까지 바라볼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정도였 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기회다!.

몇 번이나 속으로 응원하였지만 쌍두곤은 물속에서 잠이라도 들었는지 조용하기만 하였다. 애타는 심정으로 황하만 바라보느라 탄트라는 다른 곳을 살피지 못하였다. 그들이 있는 곳으로 안개를 뚫고 여섯 개의 그림자 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지 못했던 것이다. 산아래 쪽에는 현세화단의 고수들 십여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매복시켜 놓았던 것이다.

자신을 제외하고 뒤쪽에 있는 극락조단 술사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방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주변에 설치해 놓았던 결계조차 해지시켜 놓은 상태였다. 방술을 멈추고 각개의 역량을 발휘하면 각자가 익힌 술법으로 무림 고수조차 두렵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영혼조차 분리시킨채 심령을 집중시키고 있을때 적의 고수들이라도 침입한다면 저항조차 못하고 혼백이 갈라져 나갈 것이다.

매복된 현세화단의 고수들이 워낙에 고수들인지라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왠지 불안감이 계속 더해져 가자 탄트라는 속으로 쌍두곤만을 원망하고 있었다. 탄트라가 쌍두곤에게 거는 기 대는 뒤쪽의 극락조단 고수들보다 몇배나 지대하였다. 극락조단 고수들로 적의 발길을 지체시킬수는 있지만 하나같이 고수들인 무림맹도 들에게 절대적 타격을 입힐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쌍두곤이 가세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잘만하면 오늘 이 자리를 저들의 무덤으로 만들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가 도래했던 것이다. 현천교의 모든 전력을 기울여 맞상대하여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고수들을 잘만하면 몰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너무나 정신을 집중해서인지 주변의 사소한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광풍소리에 파묻혀 '큭'하는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간과하게 되었다. 아래쪽에 위치한 현세화단의 고 수들을 믿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신음소리조차 재대로 발하지 못한 채로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탄트라의 망념은 순간적으로 깨어졌다. 그것도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 의해서였다. 깜짝 놀라 눈을 돌리니 오십여명의 극락조단 고수들이 정체 모를 고수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살해당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고수들 같았는데 하나같이 나이가 어려 보였다.

놀라움에 커진 눈동자속으로 가슴쪽으로 날아오는 작은 금빛 구체가 보였다. 작지만 너무나 선명한 빛의 결정 이었다. 너무나도 빨라 바라보는 그 순간 가슴쪽으로 빨려들어 갔지만 아름다웠다는건 부인할수 없을 것 같았 다. 금색 별똥별이 가슴으로 떨어져 내려오고 아련한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 아팠기 때문일까?

문득 눈가에 눈물 방울이 맺혀져 왔다.

몇십년 동안 한번도 흘려보지 못한 눈물이었다.

눈앞에서 마지막 남은 극락조단의 부하가 죽어감이 슬퍼서도 그렇다고 죽는 것이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금색 별은 가슴으로 파고 들어갔는데 머릿속으로 튀어 나왔는지 갑자기 머릿속이 환하게 꿰뚫리듯 떠오르는 작은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자비(慈悲)'

부처님께서 수행의 근본으로 삼으라고 설법하신 흔하디 흔한 단어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 당하고 자신마저 죽어가고 있는데 책임감 없이 '자비'라는 단어가 떠오르다니...

어쩌면 무자비한 손속으로 살수를 벌이는 적들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일수도 있었다. 잔혹하고 무정한 자신들 의 술수가 원인이 되어 적들의 무자비함을 불러들였지만 저들도 좋은 인과를 얻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힘없이 감겨지는 탄트라의 얼굴에 문득 쓴 웃음이 베어 나왔다.

그동안 왜 자신이 자비라는 단어를 잊고 미친듯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자비라는 한 글자만 제대로 붙잡았어도 현세가 극락세계로 변할수 있었을 텐데...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나를 변화시켰어야 하는데...

아무리 늦었지만 그래도 가슴만은 후련한 탄트라였다. 쓰러져 광풍에 휘말린 탄트라의 몸이 황하의 깊은 물속 으로 거꾸로 떨어져 내려갔다.

소림삼신승중 한명인 공지대사가 심혈을 기울여 창안한 다정만리(多情萬里) 초식을 전개하여 산 정상 낭떠러 지에 서 있던 위험해 보이는 중년인을 처치한 검후가 빙검 여래혼을 검집에 꽂는 것으로 상황은 깨끗이 종료 되었다.

검후의 절초에 놀란 것은 탄트라만이 아니었다. 구룡중 여기모인 오룡들의 눈에도 감탄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심지어는 모용천의 눈가에도 놀람의 기색이 담기어져 있었다.

역시나 지금껏 황하에 일어났던 기상이변은 이들 때문임이 확실해졌다. 갑자기 운무가 걷히고 바람이 잔잔해 지기 시작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황하 강위에만 유독 몰려있던 검은 구름이 서서히 흩어지면서 내리는 빗방울도 훨씬 약해졌다. 황하의 물살은 여전히 거세게 흐르고 있었지만 저 정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닌 것이 다. 배로 되돌아가 군웅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던 검후가 은성이 탄 배쪽을 바라보았다.

선미에서 검후를 바라보며 은성이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검후가 손을 들어 올리자 은성도 역시나 손을 들어 주었다.

"수고했네."

짧은 무림맹주의 치하였다.

하지만 그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무림맹에서 공식적으로 구룡삼봉회를 인정하게 됨을 의미하는 역사적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추측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짧은 시간에 기상천외한 술법을 펼쳐내던 현천교의 고수 들을 전멸시키고 사태를 해결했다는 것은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었다.

향후 무림은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어 갈런지도 몰랐다.

오늘의 격전에서 무림맹에서 입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이십여척의 배중에서 십일척이 파손되어 물속에 잠겼으 며 노를 젓던 인부들을 제외한 인원도 이백 오십여명이나 죽었다.

배가 파손되어 물속에 잠겨든채 공격당하였기 때문인지 그중에는 고수들의 숫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림맹을 출발할 때 일천 오백여명의 인원이 어느새 사백 오십여명이나 줄어들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검게 변해버린 황하의 물에 중독당했는지 환자또한 오십여명이나 있었다.

간신히 적도들을 물리쳤지만 수뇌부들의 얼굴에는 짙은 암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외로 현천교도들의 암습이 계획적이고 치밀하며 그 기세가 잔혹하며 사나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술법 에 대한 대책이 미흡한 것이 최대의 약점이었다. 모산파의 주진인 이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피해가 몇배로 늘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선발로 내세운 무림맹 보무당의 배에는 술법에 능한 고수들이 몇 명 있어서 그런 지 한명의 피해도 없었지만 무술 고수들이 주류를 이룬 뒤쪽의 배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인원들을 재 배치하여 각 배에 분산시키자 아홉척의 배마다 인원들이 넘쳐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유입돼 오는 물도 적어졌는지 격랑도 훨씬 줄어 있 었다. 곤륜을 위하여 결코 멈출수 없는 무림맹의 배들이 다시금 황하의 강물을 따라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하 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