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98화 (98/152)

[연재]황정허무검(98)

선실 밖은 스산한 바람소리에 빗방울이 휘몰아치며 음산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반시진 전까지 선실 밖 에서 경계근무를 한후 선실안으로 들어선 은성은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져 가고 있음을 알수 있었다.

배의 요동도 더욱 심해져 갔다. 이러다가 배가 뒤집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배는 좌우로 넘어질 듯 기울어지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채 바람을 거스리고 갈짓자로 나아가고 있었다. 무림 맹에서 특수 제조한 선박이라서 이나마 버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부는지 중원에 오면서 바다에서 겪었던 폭풍우가 생각날 정도였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사부와 사숙은 경계 근무를 서기 위해서 뱃전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선실 내에서 기우뚱 거리는 배와 보조를 맞춰 자연스럽게 흔들리던 은성의 눈빛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급히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오자 사방이 하얀 운무속에 잠겨 있었다. 심안을 운용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운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짙어만 갔다.

배위에 비상 나팔이 울리고 선실안의 고수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바람도 더욱 거세져 갔다.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강물이 파도처럼 솟아 올라 배를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얀 운무는 흩어지 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늘에서는 물을 쏟아 붇는지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광풍이 몰아치는데다 사방을 분간키 힘든 운무라니...

선실 밖으로 나온 보무당의 고수들은 흔들리는 배위에서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내공을 운용하며 불안한 눈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배를 강변으로 대도록 하고 뛰어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조직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들에 비해 은성의 불안감은 한층 더하였다. 심안으로 사방을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늘을 보니 검은 흑운이 두터운 층을 이루며 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저 멀리 다른 곳의 하늘빛은 그렇게 까지 어둡지 않았다. 검은 흑운은 무림맹이 이 동하는 황하의 강폭을 따라 띠를 두른 듯 두텁게 드리워져 있었다. 근처에 있는 모든 구름이 몰려든 것 같았 다.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안개에 있었다. 자연의 이치대로라면 비가 내리면 안개가 낄 수 없었다. 게다 가 안개는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광풍속에서도 날리지 않고 있었다. 예사 안개가 아닌 것이다. 안개 속에서는 귀기조차 일렁이고 있었다.

은성의 걱정은 또 하나가 있었다. 아직 다른 고수들은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안개속 저멀리 격류처럼 휩쓸려 내려오는 커다란 통나무들 때문이었다. 유령왕의 경고대로 매우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엄청난 크기였다. 어른 세명이 두팔을 벌려야 간신히 안을수 있는 두께였다. 그런데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 오 는 일반 통나무들이 아니었다. 뾰족하게 깍은 통나무의 끝에는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쇠가 박혀져 있었다. 쇠 침은 하나같이 무림맹의 선박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강물에 떠내려 온다면 옆으로 드러누운채 떠내려오는 통나무도 있을 법한데 그런 통나무는 한개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파도를 현으로 삼아 튕겨진 거대한 화살과도 같이 수백개의 통나무가 성난 기세 로 쏘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쉬이이이익...촤아악.'

사방은 시끄러운 소리로 정신을 차릴수 없을 지경이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안개 속에서 귀기가 느껴집니다."

구천진인이 자운검에게 내공을 돋워 말을 전하였다. 미친듯한 바람소리에 내공을 돋우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 았기 때문이다. 내공을 돋우웠지만 목소리는 광풍에 떨리며 정확하지 않았다.

"사부님, 앞쪽에 거대한 쇄목(?木)들이 떠내려 오고 있습니다!"

은성이 사부를 바라보며 말을 하자 배위에 탄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은성의 말은 모두가 정확히 들 을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귓전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명확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왔던 것이다.

"쇄목이라니?"

쇄목은 십여장 안에까지 이르렀건만 안개가 심해 선박위에 탄 고수들의 눈에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끝이 뾰족한 통나무입니다. 부딪히면 배가 파손될 것입니다."

급하게 외친 은성이 뱃전으로 뛰어가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다른 고수들도 뱃전으로 가기 위해 내공을 사 용하였다. 배의 흔들림이 심해 내공을 돋우지 않고는 일보도 움직이기 힘든 형편이었다.

"어이쿠"

금룡각의 외문고수인 해동역사가 성급히 앞으로 내닫으려 하다가 배가 크게 기우뚱하자 몸의 균형을 잃으며 외마디 소리를 내었다

"휴우우...,젠장!"

다행히 잽싸게 몸의 무게 중심을 낮추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기 망정이지 배위에서 뒹구르는 망신을 당할 뻔한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선수로 나아가는 해동역사는 조금은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화아악'

내공을 돋우워도 간신히 일이장 정도밖에 볼수 없었던 군웅들의 눈앞이 일순 밝아졌다.

선수로 나간 구천진인이 품속에서 혈요인(血妖刃)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혈요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혈광 이었지만 주변의 안개를 환히 비추어 주고 있었다. 강물에 파도조차 일렁일 정도로 심한 광풍에도 흐트러지지 않던 운무가 이상하게도 혈요인이 비추어지자 맥을 못쓰고 사방으로 흐트러져 버렸다.

"쩝, 옥령신수(玉靈神水)를 사용할 필요도 없잖아!"

백록담의 노괴인인 혈수선(血水仙)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투덜거림도 잠시,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만연하여졌 다. 은성이 외친대로 끝이 뾰족한 쇄목이 떠내려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처럼 거대한 쇄목인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성난 야수처럼 덮쳐들고 있는 통나무들은 어느새 뱃전에 가까워져 있었다.

'콰과과과과...'

자연의 힘은 불가항력이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휩쓸만한 거대한 몸짓으로 저처럼 커다란 괴목들이 산을 무너뜨릴 기세로 몰아쳐 오다니... 모두들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지 입을 벌린채 눈만 동그라니 뜨고 있었다.

암기는커녕 검기나 검강도 무용지물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장풍을 날리는 것도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행동일 것이 뻔하였다.

'쏴아아아아...꽈과...'

엄청난 위세의 통나무가 뱃전에 부딪혀 오자 뱃전에 위치한 고수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배가 부서질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운이 좋아 한개를 피했다 하더라도 쇄목은 한 개가 아니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채 몇 개씩 무리를 지어 떠내려 오는 쇄목은 혈요인이 비추이는 끝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몇 개가 있을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몸을 날리면서 배가 파손되었을시 의지할 그 무엇인가를 찾던 고수들의 눈가에 의아함이 떠올려졌다. 지금쯤 은 배가 처참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나와야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 보니 아직도 선수에 몇 명의 고수가 남아 있었다. 저들중 누가 그 쇄목을 막아내었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누가 그 거대무비한... 의아해 하면서 다시금 선수로 다가서고 있었다.

은성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심기(心氣)를 사용해 간신히 쇄목의 방향을 돌려 놓았지만 쇄목이 떠내려오는 기세는 너무도 강대하였다. 황 하의 물살이 너무나 거세게 흐르기 때문이었다. 천리마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쇄목에 심기를 쏘아보내 이 력타력의 수법으로 물살을 이용해 쇄목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던 은성은 쇄목에게서 강한 저항을 느낄 수 있었 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쇄목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리가... 역시나 쇄목이 의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쇄목에 의지를 부여해 주는 무엇인가가 있 었다. 심안에 쇄목속에 숨어있는 인간들이 보였던 것이다.

한명도 아니고 두명이나 있었다. 의지가 없는 쇄목이 선박을 향해서 정확히 덮쳐오는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 다.

"쇄목속에 앞뒤로 사람이 들어있습니다."

은성의 낭랑한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퍼지자 보무당 무인들의 눈빛에 실날같은 희망이 반짝이었다. 사람이라면 상대해 볼 담량이 있는 것이다. 보무당의 무인들과는 다르지만 수무당의 노고수중 한 명도 나름대로 바쁜 시 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음률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공을 돋워 가닥 가닥 끊긴 소리만을 전달하는 것이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수무당의 고수는 품속에 있는 형형색색의 깃발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운무만 끼지 않았다면 깃발 신호도 병행하기로 약정돼 있었지만 어쩔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제발 뒤쪽의 선박들이 쇄목의 정체와 그 위험성을 잘 알아듣고 대책을 세우기를 기원하는 수 밖에 없었다.

'피리릿 피핏!'

대리국의 왕족이라는 고수의 지풍은 은성조차도 감탄할 정도였다. 한가닥 두가닥 심지어는 한꺼번에 다섯가닥 의 지풍이 쏘아져 나가고 어떤 지풍은 교묘하게 휘어져 쏘아져 갔다. 하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파란색 강기가 풍랑속을 뚫고 나아가서 거대한 통나무 속으로 사라져 갔다.

'쐐애액'

금룡각의 고수인 묵사풍의 검은 화살도 공간을 당겨 통나무 속으로 깊숙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으랏차차'

금강역사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방향 감각을 잃고 선수로 달려드는 쇄목을 향해 연신 천붕추(天崩鎚)를 휘 두르고 있었다. 그의 신력(神力)은 대단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만년한철이 섞인 사람 머리통만한 철추가 쇄목을 후려치면 그처럼 산을 무너뜨릴듯한 기세로 달려들던 쇄목도 방향을 바꿔 옆으로 삐져 나가고 있었다.

물론 은성이 심안으로 조금씩 도와주었지만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쇄목속에 탄 이들이 현천교의 사주를 받은 수적들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수 적들이 수리(水理)에 능하고 수전(水戰)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가공할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들도 보무당의 무인들이 탄 선박에 십여개 이상의 쇄목들이 연이어 당하자 작전을 달리하게 되었다.

선두에 있는 배는 붉은 광채 때문에 운무가 사라져서 그들의 모습이 쉽게 노출되었고 앞서 공격한 동료들이 너무도 허망하게 실패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수가 승선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던 모 양이었다.

갑자기 쇄목들이 기묘한 진세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은성이 탄 배만을 피해 나선형으로 흩어졌다 모인후 뒤 쪽의 배들을 목표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수법인지는 모르지만 통나무속에 은신한 수적들에게 작전 을 지시하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쇄목들이 배를 피해서 떠내려 가자 보무당의 무인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은성의 걱정은 더 커져만 갔다.

검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보무당이 승선한 배는 다행히 사숙께서 혈요인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배들은 속수 무책인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쇄목이 배 앞에 닥쳐들면 아무리 고수라도 쉽게 상대할 방법 이 없을 것 같았다.

통나무들이 비껴가자 환호성을 울렸던 보무당원들의 얼굴색이 서서히 변화되고 있었다. 앞쪽에서 배를 한입에 삼켜 버릴만한 거대한 크기로 강물이 솟아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모두들 안면이 검은 흑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물줄기가 높아지더니 거대한 산만한 크기로 다가들었기 때문 이다. 이대로 부딪힌다면 배가 산산조각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랄까?

배위로 덮쳐 누르는 산만한 물줄기가 은성의 심기(心氣)에 두줄기로 갈라질 무렵 은성에게로 유령왕이 심령을 발해왔다.

[앞쪽 강물속에 괴물이 있다. 대단한 놈인 것 같다.]

실로 진퇴양난 이었다. 앞쪽으로는 또다시 거대한 높이로 물줄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으며 쇄목들은 거침없이 흘러가 뒤에 위치한 선박들로 덮쳐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심안을 집중하여 검후가 탄 배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모산파의 주진인이라는 술법가 때문인지 그 곳에서도 안개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 주위로 오장 안쪽만이 안개가 사라져 있었지만 은성의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어졌다. 배의 선수에 있는 무림맹주와 신비한 능력자인 모용세가의 젊은 가주가 눈에 띄여서 더욱더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지지직, 파사솩.'

'헉!'

은성의 바로 뒤쪽에 위치한 선박이 쇄목에 부딪혀 처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하지만 두눈을 뻔히 뜨고서 바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쪽에서 하늘을 가리며 덮쳐오는 엄청난 위력의 물줄기에 총력(總力)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령왕! 도와주어야 하오?]

간신히 심령을 전할 여력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흥! 나를 뭘로 보는거냐? 이쪽은 걱정 말아라.]

유령왕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은성의 다급함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콰가가강.. 우지직'

또 한 척의 배가 형체를 잃고 부서져 가고 있었다. 수무당의 고수들에 의해서 엄청난 위력의 쇄목들이 떠내려 온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부서진 배에 승선했던 고수들이 문상에 의해서 미리 준비됐던 나뭇조각이나 널빤지를 강물에 뿌려가며 이를 발판으로 멀정한 배로 몸을 날려가고 있었다. 아무리 수영에 능해도 이렇게 미친 듯이 날뛰는 격랑속에 서 헤엄을 칠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공이 뒤처지는 무인들은 배의 파편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휩쓸리며 하류 로 떠내려 가면서 애타게 구조 요청을 하였다.

누런 흙탕물은 몇 모금만 마셔도 숨이 막히고 살고자 하는 의지도 가로막았다. 운이 없어 나뭇가지조차 잡을 수 없었거나 의지가 약한 이들은 누런 흙탕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사방이 보이지 않으니 슬퍼해줄 사람도 별로 없었다.

수뇌부들이 탄 배에 있는 문상은 몇 명의 고수가 도와주어 간신히 광풍과 폭우속에서 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혈색은 핏기가 사라진 백색이었다.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는 뱃전에서도 부동의 자세로 앉아 붉은 주작이 세겨진 작은 봉모양의 기물(奇物)로 주문을 외우면서 쉴세없이 허공을 그어대며 붉은 불꽃을 날려 오장여 떨어진 곳까지 백운을 태워 없애고 있는 주진인을 제외하고는 모두의 시선은 앞쪽 강물로 고정되어 있었다.

배에 오르기전 문상이 비상 사태를 대비하여 수무당 고수들에게 전수하여준 신호가 유효적절하게 사용되어 앞 쪽의 상황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쉬리리릿!'

앞쪽에 쇄목이 나타나자 사천 당문이 자랑하는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이 광풍을 가로질렀다. 그 뿐만이 아니 었다. 무당파의 장문인인 구양진인의 손에 들린 송문고검이 날카로운 기음을 내뿜으며 날아가 거대한 쇄목을 세로로 길게 두쪽으로 갈라내 버렸다. 이기어검의 수법이 발휘된 것이다. 검강이 운용되었는지 깨끗하게 반으 로 나뉘어지는 쇄목속에서 두명의 수적이 몸이 절단된채 분수처럼 허공으로 피를 흩뿌리고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엎어져 물속으로 잠겨드는 수적의 미간에서 나풀거리던 종이가 부적인 것도 같아 보였다. 쇄목을 절단한 송문 고검이 눈이라도 달렸는지 다시금 선회하여 돌아왔다. 그런데 절정의 수법으로 쇄목속에 잠복하여 조정하던 수적들을 죽인다고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정하던 수적들은 죽었지만 쇄목은 여전히 거대한 위협으로 수뇌부들이 탄 배로 쇄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였다.

지금껏 나서지 않던 무림맹주의 몸이 선상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맹주의 몸은 어느새 쇄도해 오 는 통나무 앞의 허공중에 걸리어 있었다. 다시 한번 전설적인 허공답보의 초식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배조차도 날아갈 듯 휘몰아치는 광풍속에서도 맹주의 몸은 일점 흔들림도 없었다. 천년의 세월을 버텨 오는 거암(巨巖)처럼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을 보이던 맹주의 손에서 일순간 하얀 광채가 퍼져 나왔다.

'파자작..터텅'

더 지켜 볼 필요도 없었다. 도(刀)도 아니고 검(劍)으로 휘둘렀을 뿐인데 쇄목이 분쇄되듯이 찟겨지며 일장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그토록 위압적인 기세로 몰아쳐 오던 쇄목이었는데... 하지만 이런 맹주를 바라 보는 수뇌부들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십년전 마교와의 결전에서 몇 번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삼성검법의 제일초인 일성광휘(一星光輝)는 패도적인 초식이었다. 어찌나 패도적인지 거칠 것이 없었다. 변화 도 빠르기도 신묘함도 일성광휘 앞에서는 허망한 몸부림으로 끝을 맺었다.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공격한 마교 의 절정고수도 허무함에 두눈을 부릅뜬채 죽음을 맞이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내력의 소모가 심한 것이다. 연이어 세개의 쇄목을 분쇄한 맹주가 내력이 달려 허공 답보의 초식을 발휘할수 없었는지 황하의 강물을 찍어 누른채 다시 선수로 날아왔다.

그렇지만 또다른 쇄목이 다시 덮쳐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하지만 이 배에는 무림의 날고 긴다하 는 절정 고수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갑자기 자의(紫衣)가 번뜩이더니 모용세가의 젊은 가주인 모용천이 물위로 몸을 날렸다. 무림맹주처럼 허공으 로 이동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신법이었다.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물을 밟고 날아가더니 손을 휘돌려 큰원을 그리면서 쇄목을 밀고 당겼다.

무당파의 태극권법과 유사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곡선적인 묘용을 중시하는 태극권법과 달리 모용 천의 권법에는 곡선적인 움직임속에 날카로운 직선적인 수법들이 가미되어져 있었다.

거대한 고목에 어린아이가 달라붙어 있는 형상... 하지만 거대한 쇄목은 떨고 있었다. 작은 진동에서 시작한 쇄목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흔들리더니 어느새 방향을 틀어 배를 비켜 나가고 있었다.

모용천의 활약에 수뇌부들의 눈에 놀라움이 담겨져 갔다. 등평도수의 경공신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용천이 발휘한 수법은 넉냥의 힘으로 천근을 움직인다는 사량발천근 이라는 고도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주가 엄청난 위세를 보여 쇄목을 물리친 후 내력이 달려 선수로 돌아왔지만 모용천은 아니었다. 내력이 아닌 무공의 신묘함으로 쇄목의 방향을 흐트렸기 때문인지 내력의 소모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자색 옷자락을 너울거리며 쇄목들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잠시동안의 운공으로 기력을 회복한 무림맹주도 계속 쉬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금 강물위로 몸을 날려 푹풍처 럼 몰아치는 쇄목들속으로 파고 들어가서는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쇄목속의 수적들을 주살하였다. 수적들이 없 는 쇄목은 목적없이 강물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무림맹의 선박들과 부딪힐 확률이 몇배나 줄어들 수 있기 때 문이었다.

무림 정도를 구성하는 수뇌부들의 관심이 온통 쇄목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문상의 눈빛은 앞쪽을 주시하고 있 었다. 주진인 덕분에 오장여 공간만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 너머로 시선이 향해 있는 것도 같았다.

왠일인지 문상의 눈빛은 매우 초조해져 있었다. 아직도 계속해서 떠내려 오는 쇄목들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일 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좀더 근원적인 불안감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눈앞에서 배가 두척이나 부서져 나가자 은성의 검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산악같이 거대한 몸짓으로 달려 드는 물살을 힘겹게 몰아낸후 심안을 집중하고서야 물살이 이처럼 거대한 높이로 솟아 오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물 속이었다.

아마도 유령왕과 대적하고 있는 괴물의 짓인 것 같았다. 유령왕과 대결하는 여파로 강물이 솟아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유령왕을 믿고 간과(看過) 할수만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스윽'

은성의 신형이 강물위로 내려선후 물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자 배위에서 놀라움에 찬 경탄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감탄사를 터트린 사람은 금룡각의 해동역사였다. 자신은 꿈도 꿀수 없는 경지였 기 때문이었다.

아니 해동역사 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보무당과 수무당의 무인들 모두가 진정으로 경탄하고 있었다.

은성의 몸이 등평도수의 수법으로 물을 차면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발을 모은채 물위에 조금 뜬채로 날 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어풍비행(御風飛行)의 수법이었다. 허공답보에 뒤지지 않는 수법이었다.

어풍비행의 수법으로 날아가며 아직도 앞쪽에 머물고 있는 이십여개의 쇄목에 다가간 은성은 심기를 발휘해 쇄목속에 잠복한 수적들에게 충격을 가해 기절시켜 버렸다.

도도한 강물을 따라 거침없이 쏘아져 나아가는 쇄목을 일일이 건져내어 강물밖으로 옮겨 놓을 수는 없었지만 위험이 훨씬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쇄목을 피하는 것도 쇄목속에 기절한 수적들의 목숨 도 이제는 운명에 따를 일이었다.

다행히 뒤쪽에서 강물위를 날아다니면서 쇄목들이 선박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는 무림맹주와 등평도 수의 수법으로 강물위를 뛰어다니면서 역시나 힘을 다하는 모용세가의 젊은 가주가 심안에 들어왔다.

운명도 거역할 힘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조금은 안심하면서 은성의 몸이 강물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배위에서 강물속으로 뛰어든 은성의 신형은 곧이 어 안개속으로 빨려 들어갔기에 보무당의 무인들조차 은성이 쇄목에 심기를 발하는 것은 커녕 강물속으로 사 라져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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