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97화 (97/152)
  • [연재]황정허무검(97)

    보무당의 무인들은 중원내의 문파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한 문파의 장로급 고수들이었다.

    경공을 발휘해 달리고 있었지만 모두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힘겨워하는 무인도 있었다. 금룡각 의 고수로 덩치가 크고 힘이 천하장사이며 외문 무공에 치중하여 무공을 수련한 해동역사(海東力士) 였다.

    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독 경신술에는 자신이 없었다.

    옆에 차고 있는 천붕추(天崩鎚)라는 철추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 머리통만한 철추는 심해에서 생산되는 만 년한철이 섞여 있어 일반 쇠의 세배 무게나 되었지만 해동역사는 이를 공기돌처럼 자유자재로 다룰수 있었다.

    모추(母鎚)인 천붕추와 긴 철삭으로 연결된 자추(子鎚) 유성추(流星鎚)는 주먹만한 크기지만 순수 만년한철로 만 제조되어 있었다.

    천붕추가 상대의 기세를 제압하면 유성추는 상대의 움직임을 원천봉쇄 시킨후 필살의 한수를 날리곤 하였다.

    그 기세가 유성보다도 빠르다고 하여 유성추라 이름 붙여졌지만 진정한 유성추의 위력은 변화무쌍함에 있었다.

    필승의 승리 뒤에는 천붕추라는 무기를 보조해 주는 유성추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신법의 대가와 맞붙어도 유성추의 변화무쌍함이 상대의 움직임을 저지시킬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신법 과 경신술에 아까운 수련시간을 낭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해동역사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작정 달려 야만 할 때에는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자신을 빼고는 모두가 여유롭게 달리고 있었지만 가장 여유로운 사람은 자신보다 이장여 앞에서 걷는 듯 달리 고 있는 동방파의 은성이었다. 분명히 걷고 있었다. 다리의 근육이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음을 장담할 수 있 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힘들여 경신술을 전개하는 자신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도 신기하여 달리는 내내 은성의 보법을 주의하여 살펴 보았지만 걷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공을 사용하여 달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기가 찰 노릇인 것이다.

    당극(唐克)은 무림맹에서 보면 황하(黃河)에 이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청해성에 있는 파안객납산 맥(巴顔喀拉山脈)을 원류로 발원하는 황하는 설산(雪山)과 빙천(氷川)의 맑고 깨끗한 물로 출발하지만 내려오 면서 휩쓸리는 토사가 많아 누런빛을 띄게 되었다. 물 한말에 진흙 여섯되라고 할 정도로 유수(流水)중에 포 함된 진흙의 양이 많아서 황하(黃河)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것이다.

    황하 유역은 건조하여 일년중 비가 내리는 날짜는 적었지만 한번 내리면 집중 호우형으로 비가 내리기 때문에 수해가 극심하고 치수가 어려웠다. 격류가 심하고 물살이 급해서 어선은 물론 상선들조차 우기에는 출항을 금 하고 있었다.

    일행이 당극에 도착할 무렵부터 대기가 습해지고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미리 파견되어진 무림 맹의 보금원 소속 무인들에 의해서 출항 준비는 완벽하게 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당극에 거주하는 어부들은 우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판단되었는지 배를 꽁꽁 묶어두고 햇빛에 널어 말리던 생선조차 모두 거둬 들이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밤에 하늘을 주시하던 문상의 아미가 조금 찌푸려져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깔렸는지 별조 차 보이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습하고 대기가 불안정한 것을 보니 많은 비가 올 것 같았다.

    그것도 새벽이 밝아오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무림맹 소속의 선박 이십여척은 특수 제작한 것이다. 황하의 거센 물살도 문제없이 헤치고 나갈수 있을 것 같 았다. 그러나 나아가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선발대로 출발한 적무대가 무사히 곤륜에 도착하여 우여 곡절 끝에 곤륜파와 합세하는데에 성공하였다고 하니 일정과 조금 차이가 생겨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현천교에 있었다. 이미 청해성의 대부분을 장악한 현천교에서 황하유역을 주름잡는 수적들조 차 통제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 것이다. 수적들의 무공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고강한 무림 고수들이 아 무리 많아도 물위의 한정된 공간이나 물속에서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험한 수로에서 날씨조차 도와주지 않으면 무림고수들이 탄 배도 하찮은 수적 몇 명이 조정하는 배에 당해 침 몰될 수도 있었다. 물에 빠지고 급류에 휘말리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되는 것이다. 잔잔한 물길에서는 수적들 을 겁낼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이처럼 우기가 닥친 황하에서 마주치는 수적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적들 이었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우기가 끝날때까지 당극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우기의 평균 기일을 감안하면 길어야 사오일이겠지만 현천교와의 전쟁이 눈앞에 닥친 지금 사오일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검은 하늘을 말없이 주시하던 문상의 눈꺼풀이 살며시 닫혀졌다. 그리고는 미동조차 없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때 문상이 취하는 습관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감겨진 눈동자에는 천지간의 지혜가 반짝이고 백가 지 계책이 오고가고 있었다.

    일각후 백우선을 들고 숙소로 드는 문상의 발걸음은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백가지 계책중 가장 좋은 계책 을 결정한 듯 싶었다.

    방안에서 명상 수련중인 은성은 굳이 바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문상과 마찬가지로 내일 새벽녘부터 비가 내 릴 것을 알고 있었다. 황하에 세차고 거칠은 물결이 일더라도 이미 수풍화독(水風火毒)이 침입치 못하는 경지 에 오른 자신은 걱정이 없었지만 보무당의 무인들과 검후조차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스승님과 사숙님은 자신이 직접 보호해주면 되지만 은성과 떨어져서 보타문의 장문인 신분으로 수뇌부들과 함 께 할 검후에 대한 걱정이 컸다.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되면 그곳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은성이 눈을 감은채 심령으로 유령왕을 불렀다.

    [유령왕, 내일부터는 배를 타고 황하를 따라 이동할 것이오. 우리 선단의 삼백여장 앞에서 물 밑으로 이동하 며 물 위쪽과 물속에 해를 입힐만한 것들이 있는지 잘 살펴 보시오.]

    [알겠다. 수상한 것이 발견되면 보고 하겠다.]

    [좋소. 그리고 수로로 이동하는 며칠동안 화룡검을 맏겨둘 터이니 필요시 사용하기 바라오.]

    [캬캬캬! 정말이냐?]

    [훗훗! 정말이오.]

    심령으로 유령왕과 대화를 주고받은 은성의 옆에 놓인 화룡검이 허공중으로 날아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지저(地底)에 숨어있던 유령왕이 어느새 튀어나와 화룡검을 받아든 것이다.

    진기로 형상화된 유령왕은 땅속이던 벽속이던 물이 스며들 듯 마음대로 오고 갈수 있었지만 화룡검을 소지한 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허공과 물속이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화룡검이 빠져나갈 공간만 있다면 아무리 좁은 공 간이라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방법이지만 부수고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강기덩어리인 유령왕이 마음만 먹으면 철벽산(鐵壁山)이라도 통과할 수가 있었다.

    무산의 지하 석동에서 화룡검을 사용하여 무진쾌의 수법과 유성검법을 가르침 받은 유령왕이었다. 영성이 있 는 존재이다 보니 화룡검속에 무한정한 진력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 성이 화룡검을 맡기자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유령왕의 신형을 이루는 태극진기가 은성과 생령의 끈이 연 결되어 있기에 은성은 느낄 수가 있었다.

    은성이 생각하기에 유령왕이 황하의 물속을 이동하여도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황하의 물색 이 탁해 물밑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현명한 유령왕이 황하의 물색과 동일한 색으로 형색(形色)을 변화시킨 후 이동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하 격전

    뱃전에 나와 격랑에 몸부림치는 누런 물결을 보노라니 은성은 세삼스레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져 왔다. 팔십여 명이나 타고 있는 큰 배이었건만 폭풍우에 휘말린 가랑잎처럼 위태로운 몸짓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드넓은 강물 위에는 당극을 출발한 무림맹 소속의 선박 이십여척 외에는 단 한척의 배도 떠 있지 않았다.

    아무리 노련한 어부라도 이런 악천후속에 배를 띄운다면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날씨 였다. 무림맹에서 제조한 배가 워낚에 튼튼했기 망정이지 일반적인 어선이나 상선이라면 최소한 반이상은 파 손되거나 전복되었을 정도로 황하는 심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아마도 황하 밑바닦까지 까 뒤집어지는 모양이 었다.

    어제 아침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로 인하여 수뇌부들간에 심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결국 출항하기로 결정되어졌다. 문상이 각파의 장문인들에게 선박을 구경시켜 준것도 일조하였지만 무 엇보다 곤륜의 위기가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출항이 결정되었으나 정작 출항이 시작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수뇌부들과 무림맹의 수무당 무인들은 무슨 작전이라도 세우는지 틀어박혀 회의를 하였고 각 문파의 제자들중 일부는 비를 맞으며 바쁘게 뛰어 다녀야 했 다. 각 배마다 난간 곳곳에 배가 심하게 흔들려도 몸을 고정시킨채 파수를 볼수 있도록 보완 작업을 하고 장 작이나 나무판자 등 물에 뜰수 있는 물건들을 구해 배 구석구석에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출항이 시작되었는데 뜻밖에 은성이 탄 보무당의 배가 가장 앞쪽에 위치되어졌다. 보무당원들과 배를 조정하 는 무림맹 소속 선원들에 수무당의 노고수 두명이 입선(入船)했다.

    수무당의 고수들은 오십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무림의 원로 고수들이며 이들의 잠재력은 무림맹의 제일가는 전력이었다. 평상시에는 학처럼 고고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책을 읽거나 무공을 수련하고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며 시간을 보내었지만 무 림맹에 큰일이 벌어지면 앞장서서 해결하는 세력이 수무당이었다.

    큰일이 벌어져도 두세명 정도 밖에 출동하지 않았지만 이번 현천교 사태는 무림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는 대 사건이므로 수무당원 모두가 참전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무림맹의 가장 선봉적인 전력이 선발대로 출발한 적무대이고 나머지 고수들을 무상이 데리고 떠나갔지만 무림 맹의 맹주와 문상이 위치한 이곳에 보무당외 무림맹의 무인들이 거의 없는 것은 수무당을 믿기 때문이었다.

    보무당의 전력도 막강하지만 수무당의 원로 고수들은 한사람 한사람이 일당백의 고수들인 것이다.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거센 바람이 물살을 튀기며 안면을 때리고 있었지만 은성은 뱃전의 난간에서 움직 일 줄을 몰랐다. 자세히 보면 은성만이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의 난간 여기저기에 보무당의 무인들이 나와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루 한번 한시진씩 돌아가며 번을 서야만 되는 것이다.

    비를 맞는 것 같았지만 실상 은성의 몸에 부딪힌 빗물들은 둥글게 뭉쳐 은성의 옷 위로 방울져 흘러 내리고 있었다. 품속에 보관된 부적들이 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심기(心氣)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품속에는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것이 보관되어 있었다. 바로 검후에게서 정표(情表)로 받은 하얀 손수건이었 다. 정소저가 선약문을 방문해 주라고 부탁하며 주었던 선약문의 약도가 그려진 손수건도 있었지만 그 의미가 달랐다. 품속에 손을 넣어 검후가 건네준 손수건을 만지는 은성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어졌다.

    번을 서는 다른 보무당의 무인들은 춤을 추듯이 일렁거리는 배위에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난간에 새 로 설치된 버팀목을 한손으로 꽈악 움켜 잡고 있었지만 은성은 두손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다른 무인들과 같이 내력을 돋워 천근추의 수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은성의 몸은 전혀 불안정 해 보이지 않았다. 배가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요동치면 요동치는 대로 은성의 몸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 이 마치 배에 고정된 부속품인 것 같았다.

    문상의 명에 따라 이틀동안 철저히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아직껏 눈에 띄는 적도들은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적도만이 아니었다. 조그만 어선 한척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앞쪽에서 황하 밑바닥을 스치듯 전진 하는 유령왕에게서도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처럼 거친 날씨 때문에 걱정했는데 도리어 날씨 때문에 적도의 침입이 없는지도 몰랐다.

    청해성 남단 특합토(特合土)...

    하늘이 뻥 뚫렸는지 장대같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기암절벽의 산정에 오십여명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 다. 사방에서 흘러드는 물줄기로 인하여 거센 풍랑을 일으키는 황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정이었다.

    무슨 예식이라도 거행되는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들의 앞에는 제단이 차려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제단에 올려진 향촉(香燭)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제를 주관하는 듯 예관(禮冠)을 쓴채 일행의 제일 앞쪽에 위치한 사람만이 꿇어 엎드려 있었는데 무어라고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제단 뒤쪽에 천인공로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십세 후반의 소녀 한명이 전라의 상태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혈도라도 찍혔는지 붉은 천이 깔린 석판위에 일자로 누워 꼼짝도 못한채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예관을 쓴 사람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산정 주변에 을씨년한 기운이 솟아나오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짙어진 음산한 기 운이 산정 정상을 휘감아 올랐다.

    갑자기 예관을 쓴 사람이 일어나더니 손가락을 입에 물고 깨물었다. 그리고는 제단 주변을 돌며 손가락에서 솟구치는 핏물을 뿌려대기 시작하였다. 계속해서 주문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아홉바퀴를 돌고 제단앞에 다시 꿇어 엎드렸는데 어느새 산 정상은 비릿한 혈향이 깃든 혈무로 뒤덮여져 있었다.

    혈무가 짙어지자 귀기조차 감돌고 있었다.

    귀기는 제단앞에 꿇어 엎드린 사람이 붉은 단도로 심장 안쪽을 쑤셔박아 생혈을 뽑아 내자 절정에 이르렀다.

    심장에 단도가 틀어박힌 사람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요사스러운 단도를 타고 붉은 피가 흘러 나오는대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워대고 있었다.

    사방에 불어 닥치는 바람이 갑자기 강해지더니 혈무 바깥으로 시커먼 묵운이 피어 올랐다. 묵운은 혈무를 파 고 드는가 싶더니 제단의 뒤쪽을 온통 차지해 버렸다. 산정에 묵운과 혈무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묵운이 더욱 짙어지더니 혈무를 삼키듯 덮어버렸다.

    그러자 묵운에서도 비릿한 혈향이 묻어 나왔다. 귀기가 심하게 감도는 묵운이었다. 제단앞에 위치한 오십여명 의 사람들의 미간에 검은색 묵기가 파고 들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가 않은 듯 보였다. 가슴에 보라색 물결 무늬가 수놓아진 경장을 걸친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의 념을 모아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실패한 묵운이 서서히 물러났다.

    하지만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제단의 뒤쪽에 거대한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삼십여장은 될 듯한 용과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머리가 두개인 괴물은 또아리를 틀고 있었지만 그 높이가 오장여나 되었다.

    [너희들이 나를 소환한 목적이 무엇이냐?]

    심령으로 전달하는 음성이었지만 물리적인 위력도 있었는지 산정의 공기가 바르르 떨리었다. 심령을 뒤흔들 정도로 귀기로운 소리에 일행의 앞쪽에서 가슴에 도를 꽂은 채 꿇어 엎드린 사람이 신형을 부르르 떤 후 가까 스로 대답하였다.

    "지부(地府)에 계신 쌍두곤(雙頭鯤)님을 소환한 것은 한가지 부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탁에 앞서 먼저 저희 가 준비한 제물을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보았다.]

    "칠음절맥(七陰絶脈)에 걸린 순결한 처녀입니다. 순음지기가 가장 왕성한 나이로 며칠내로 절맥이 발작해 죽 을 운명입니다만 이러한 조건에 맞는 여아를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쌍두곤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 하지만 부족하다.]

    이승과 지옥의 중간계인 지부(地府)에 살고 있는 곤(鯤)은 전설적 동물인 용보다는 못하지만 풍운을 다스리고 큰 강을 범람시키며 작은 지진조차 일으킬 수 있었다. 생긴 것도 용(龍)과 비슷하고 영기가 있어 자연지기를 흡수해 내력이 용에 버금갈 정도이지만 유일한 단점은 땅속이나 심해 깊숙이에만 살기 때문에 음기만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용(龍)처럼 음양이 균형을 이루어 내단을 형성하고 조화를 이뤄 여의주로 탈바꿈 시킬수가 없는 것이다. 체내 에 쌓이는 음한지기가 많아질수록 심해나 지저 깊숙이로 파고들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도 하였다.

    음한지기 속에 내포된 음독 때문이었다. 그 불완전함을 극복할수 있는 절대적인 영약이 있었으니 인간이 지닌 순음지기였다. 그것도 극한의 순음지기여야만 했다. 칠음절맥에 걸린 처녀, 그것도 최고조에 이른 처녀의 생 혈(生血)만이 음독을 중화시켜 줄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환된 곤은 쌍두곤이었다. 쌍두곤의 의지가 아니었다. 눈앞의 인간들이 쌍두곤인 자신을 불 러 계약을 맺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음독은 뇌(腦)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또 한명의 칠음절맥 의 소녀가 필요한데도 말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명도 이미 찾아내었습니다. 일년여만 기다리시면 그 소녀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소녀를 취하기 위해서는 쌍두곤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지저 깊숙이 살며 반은 귀계에 속한 몸이지만 쌍두곤은 영물이었다. 탐욕스런 인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를 도와줄리는 없는 것이다.

    "내일 정오 무렵에 저 강으로 이십여척의 배가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풍랑을 일으키시어 배를 부수고 그들 에게 두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이 사라져야만 저희가 그 소녀를 마음놓고 데려올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뻔한 수작이었다.

    그들 모두를 없애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지부의 곤이라고 하여도 인간들을 무더기로 헤칠 수는 없었다. 천계의 천신들이 알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칠음절맥에 걸린 소녀라 니...

    유혹이 너무나 컸다. 요즘은 천계와 명부가 극도로 불안한 시점이었다. 지계에서 소환에 불응할수도 있었지만 나올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음독의 제거라... 걸리지만 않는다면 해볼만한 도박이었다.

    [그 배에 칠음절맥의 소녀가 타고 있느냐?]

    결국 쌍두곤은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소녀를 취하는데 가장 큰 방해가 될 인간들입니다. 저희들의 원수들이기도 하지 만 그들만 사라진다면 내년 이맘때 반드시 그 소녀를 데려와 쌍두곤님께 바치겠습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감을 느꼈는지 제단 앞의 인간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좋다. 너희들과의 계약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너희들의 채취가 나에게 이미 기억되어 졌음을 명심하기 바란 다. 내년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물론 너희가 속한 무리 모두에게 나의 잔인함을 일깨워줄 것이 다.]

    "명심하겠습니다."

    음산한 쌍두곤의 목소리는 심령으로 전달되어 졌지만 차갑고 으시시 하였다. 제단 앞쪽에 위치한 오십일명의 인간 모두에게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쌍두곤이 묵운으로 화해 사라져가자 산 정상에 감돌던 귀기조차 사라 졌다. 그리고 제단 뒤편에 놓인 칠음절맥에 걸린 소녀 또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황하의 누런 물살은 더욱 거세져 있었다.

    쌍두곤이 사라진후 일각여나 지나서야 제단 앞에서 예관을 쓴 사람이 몸을 일으키었다. 그동안 가슴속에 박힌 단도를 빼내고 지혈을 한후 혈기를 안정시켰는지 정상적인 안색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제례를 주관한 사람 은 현천교 극락조단의 일천여명 법술 고수들중 최고 술법가라 칭해지는 세명의 법사중 한명인 탄트라 였다.

    진언밀교를 통달하여 심장이 관통되어도 살아날 수 있으며 밤이면 지옥의 귀신조차도 자유자재로 소환하여 부 릴수 있는 괴승인 것이다.

    현천교의 교리에 빠져든 후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조차 불사하고 있었지만 한때는 좌도밀교가 아닌 정도 밀 교에서 알아주는 덕망높은 수행승이었다. 마해(魔海)는 깊기가 한량 없어서 한번 발을 딛으면 쉽게 헤어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탄트라가 일어서자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던 극락조단의 술법고수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오늘 다행히 쌍두곤과 무사히 계약을 맺었지만 하마터면 계약을 맺지도 못하고 모두가 죽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쌍두곤의 묵기에 이들이 의념을 모아 간신히 버틸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조금 더 쌍두곤이 강했거나 아니면 이들이 조금 더 약했다면 산정에는 처참한 주구들만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칠음절맥에 걸린 소녀를 우연히 발견하지 못했다면 쌍두곤을 소환할 엄두도 못냈겠지만 어쨌든 무척이나 운이 좋은 하루였다. 아무리 황하가 변덕스럽고 집중호우로 격랑이 심해도 수적 나부랭이들로서는 무림맹과 구문오 가의 고수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현천교에서 파견된 오십여명의 극락조단 고수와 이십여명의 현세화단 고수 가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법술에 능한 고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쌍두곤이 자신들을 도와준다면 형세가 역전될 수도 있었다.

    최소한 그들에게 절대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황하가 미쳐 광란하고 그 속에 휩싸인 고수라면 현천교의 고수들은 물론이고 수리에 능한 수적들이 쉽게 그들을 상대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전에 쌍두곤에 의해서 전멸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현천교의 역사는 황하가 혈하로 변하면서 다시 쓰여진다. 내일 정오 우리는 우리들의 손으로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할수 있을 것이다. 모두들 자랑스런 현천교도로써 내일을 위해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낮지만 엄숙하고 경건한 목소리였다. 비록 내일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지만 현세에 극락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살인(殺人)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현세 극락을 위하여!"

    오십여명이 똑같은 목소리로 외친후 산 정상에서 훌훌 날아 내려갔다.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끄덕없이 타오르던 향촉이 꺼지더니 제단조차 가중찬 빗줄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 산 아래로 휩쓸려 갔다. 산정에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굵은 빗줄기만이 가열차게 쏟아지 고 있었다.

    밤이 되자 선실에 앉은 은성이가 자꾸만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조물거리니 어느새 은성의 손에는 작고 귀여운 나비 한 마리가 놓여져 있었다. 눈동자는 물론이고 날개조차 세밀히 조각되어 금새라도 날아갈 것 같은 금색의 나비였다.

    넒은 선실에는 칠십여명의 무인들이 잠을 자기 위해서 누워 있었다. 격랑이 심해졌는지 배의 흔들거림이 너무 심하여 운공조식은 꿈조차 꿀수 없는 것이다. 잠조차 재대로 올리 만무하였다. 모두들 피곤한 몸을 눕히고 눈 을 감은채 노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은성이 품속에서 부적을 꺼내 요귀소환 주문을 은밀히 외우자 금빛 나비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더니 조용 히 날개짓을 하였다. 유령왕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소환된 요귀에게 일방적으로 계약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정중히 부탁한후 계약을 요청하자 요귀가 나비형상의 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바로 승낙해 주었다.

    유령왕과는 달리 말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신했지만 말이다.

    이름은 금접(金蝶)으로 정해주었다.

    금접의 형상은 나비와 똑같았지만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머리핀 용도로 사용 가능하도록 다리가 변형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령왕에게 태극진기를 건네준 이후로 중단전에 있는 내단에서 흘러나온 진기가 이제는 어느정도 축적되어 금 호를 만들기에는 부족하지만 이처럼 작은 금접이라면 몇십 마리라도 만들 수 있는 은성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금접은 필요가 없었다.

    내일 아침 금접을 받아들고 입가에 미소를 한껏 지을 검후를 생각하자 은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졌 다. 검후의 행복은 그의 행복인 것이다. 금접에게 내려진 명령은 단 하나였다. 검후에게 절대절명의 순간이 닥치면 위력을 발휘하여 검후를 구해주는 일이었다.

    금접을 검후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은성은 또다른 준비를 하여야만 하였다. 은성에 의해 황하에 남모르게 던져 진 금접이 검후가 탄배로 접근하여 수면으로 뛰쳐나와 검후의 거처로 숨어 들어갔다.

    수뇌부들이 탄 배에서 검후의 거처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와중에 유령같은 금접의 접근 을 눈치챈 고수는 없었다. 은성이 금접에게 그 배에는 고수들이 많으니 소리를 죽이고 접근하라고 심령으로 신신 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은성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준 유지(油紙)을 입에 물고서 검후의 침상가로 도착한 금접이 유지를 내려놓 고 그 위에 올라 앉았다. 배의 흔들림에 유지가 자리를 벗어남을 막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검후가 일어나서 눈길이 가장 먼저 닿을만한 장소였다.

    새벽이 되자 예상대로 금접은 검후의 손에 쥐어지고 유지의 내용을 읽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검후를 볼 수 있 었다. 그리고 마냥 행복한 표정인 검후의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머리에 꽂혀지는 영광도 누릴 수가 있었다.

    동경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도 우아했지만 자신을 머리에 장식한 검후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검후가 눈치챌까 두려운 듯 금접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