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5절 :
"저쪽에 이동하는 무인들은 척후(斥候)를 위함인지요?"
지옥같은 흑무를 벗어나 한시름을 놓았다고 생각한 군웅들 중에서 십여명이 사방을 경계하는 자세로 앞쪽으로 나아가자 은성이 다급한 눈빛을 하며 수뇌부들에게 물었다.
"그렇소, 이제부터는 우리 화산파에서 선봉을 맡아야 하므로 앞쪽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라 하 였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자하신공(紫霞神功)을 익혀서 그런지 혈색조차 은은한 자색으로 빛나는 화산 장문인 소요진인이 대답하였다.
"잠깐만 멈추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지만 은성의 표정이 다급함을 보자 소요진인이 전음을 보내 척후를 하려는 제자들을 만 류시켰다. 그리고는 은성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은연중 채근하는 눈빛이었다.
"앞쪽에 독이 있습니다."
"독?"
사천당가의 장문인 당기독이 성질 급하게 먼저 물어왔다.
"오라버니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피독주의 반응이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요."
부상당한 보타문의 제자들을 구하느라 조금 늦게 당도한 검후가 오면서 들었는지 은성의 말을 비호해 주었다.
검후가 은성을 오라버니라고 호칭하자 몇몇 장문인들이 세삼스런 표정으로 검후와 은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앞장서고 다음은 당문이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처럼 피독주의 반응이 심한걸 보니 앞길에 지 독한 절독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아요."
검후가 피독주를 가지고 있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군웅들이었다.
다른 이견(異見)이 있을리 없었다. 검후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좌중을 둘러본 은성은 수뇌부들 중에 모용씨 의 젊은 무인도 포함돼 있다는걸 알수 있었다.
모용씨이니 모용세가 출신인 것 같았는데 이곳 수뇌부는 장문인들만 참석할수 있으므로 모용세가의 장문인인 것 같았다. 다른 문파의 장문인들은 대개가 오십을 넘어섰는데 의외였다.
"문상, 현천교도들을 얕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처럼 치밀한 작전을 구사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게다 가 흑무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심리적 경계심이 허술한 틈을 노려 절독까지 살포해 놓았다는 것은 저들 에게 결코 무시못할 지략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갈세가의 장문인 제갈승이었다. 문상 또한 제갈세가 출신이었다. 굳이 배분을 따지자면 제갈승의 사제뻘이 었는데 어려서 제갈세가를 나간 이후로 행적이 묘연하였던 제갈뇌였다.
십여년이 지난후 무림맹에 입맹하고 나서야 제갈세가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가끔씩 문안인사를 드렸지만 내 심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잊고 살았던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사형제간의 정도 미미하였다. 하지만 제갈세가 출신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천교에서 이처럼 치밀한 함정을 설치할 수 있다니 그들을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양지에 나와 있고 그들은 음지에 숨어 있어 우리가 불리한 입장이므로 조심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파악해 야 할 것 같습니다."
문상이 말을 마치자 고개를 끄덕인 수뇌부들이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흑무속의 불꽃에 의해서 대다수가 말(馬)을 잃었지만 그래도 수뇌부는 양호한 편이었다. 일파의 장문인들이라 명마를 소유한 때문이었다. 문상의 적안설룡구가 끄는 마차 또한 전혀 피해가 없었다. 경공술을 펼칠 수 없는 문상에게는 천만 다행인 것이다.
수뇌부들이 군웅들의 앞에 나서서 일사분란하게 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출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살아남은 말들은 부상자들을 태우는데 사용되었다. 어짜피 목표한 당극에서부터는 수로를 이용할 생각이니 말들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일행들의 가장 앞에 위치한 검후의 몸을 빛내던 광채가 서서히 확산되어져 가자 검후가 손을 들어 군웅들을 멈추도록 하였다. 흑무에서 이백여장 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곳에서부터 독이 하독되어진 것 같았다.
당문의 고수 한명이 검후 곁에 다가가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주시하였다. 당문에서 독당(毒黨)을 맡 고 있는 독공 고수였다. 한참을 살펴본후 뒤쪽을 바라보며 수신호를 보내자 당문쪽에서 다시 세명의 노고수가 경공을 발휘해 다가왔다.
독과 암기 말고 당문에서 자신하는 무공이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경공이었다. 당문의 암기가 무림의 일절로 소문날 수 있었던 것은 빠른 신법과 경공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세명 모두 독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상외로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개방의 독공 고수까지도 가세하여 품속의 독물들로 앞쪽에 하독된 독에 여러가지 실험을 하며 한참을 상의하더니 검후와 함께 일시에 물러나왔다. 당문 고수들의 보고를 받은 당기독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화되었다. 검후와 당기독이 수뇌부에 다 가가자 맹주가 물었다.
"독의 종류는 알아내셨습니까?"
하독된 독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독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야 해독 가능성과 해독 방법이 나올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고 민에 잠긴 듯한 당기독이 고개를 외로 꼬며 굳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닙니다.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알아내지 못하였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아직까 지 무림에 출현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절독인 것 같습니다."
사천당가의 장문인이 모르는 독이라면 새로운 독이라고 확신하여도 좋을 것이다. 당기독이 계속 말을 이었다.
"피독주가 없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무형지독은 아니지만 이정도면 무형지독에 거 의 필적할 만한 절독입니다. 절세고수가 내공을 발휘해서야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광물독(鑛 物毒) 종류인데 땅에서 반자 높이에서 한자두께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풀이나 바위가 일정한 높이에 서만 띠 모양으로 죽어가고 변색된 것을 보면 바람에 흩어지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독성은 치명적입니다."
"발목에 나무(木)를 묶고 건너가면 어떻습니까?"
당기독의 설명대로라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문상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당기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독진은 현천교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 후 펼친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피독 주만 없더라도 그들의 음모는 성사됐을 것입니다. 문상님 의견대로 하면 무사히 건너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 만 이처럼 가공할 독진을 방치한 채로 떠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입니다. "
지당한 말이었다. 무림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무림맹에서 이처럼 위험하고 치명적인 절독을 방치한채 떠 날 수는 없는 것이다. 곤륜파를 구하는 것보다 더 시급할 수도 있었다. 절독을 펼친 적들은 이것조차 예상하 였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두려운 상대였다. 수뇌부들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독은 불에 약하다고 하는데 불에 태우면 어떻습니까?"
묻는 문상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당기독이 벌써 실행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 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가지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독한 자들이 독을 제거하는 방법인데 기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검후께서 가지고 있는 피독주로 일일이 독기를 흡수해야 하는데 하독 범위가 너무 넓어 한달여는 소비될 것입니다. 절세지보인 피독주를 아무에게나 맡겨 독을 제거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파나 마교에서 피독주를 쟁취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몰려올 것입니다.
이 또한 어려움이 많습니다. 마지막 방법은 문상님 의견대로 독을 태우는 방법인데 이것도 간단하지가 않습니 다. 좀전에 저희 당문의 고수들이 실험을 해 보았는데 평범한 불로는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삼매진화에 는 매우 약했는데 이 넓은 초지의 독들을 모두 없애려면 여기모인 군웅들중 삼매진화를 발휘할 수 있는 고수 들이 한달여는 고생해야 할 것 입니다. 이 또한 실행키 어렵습니다."
들어보니 모두가 불가능한 방법들이었다. 여기서 한달여를 소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와아아!"
낙담하여 방향을 잡지 못한채 고심하고 있는 수뇌부들의 귀에 군웅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왠일인지 고개 를 돌려 절독에 싸인 초지를 바라보던 수뇌부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금빛 광채에 휩 싸인 괴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낮게 날며 절독을 태우고 있었다.
"치지지지직"
절독이 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종횡무진 날뛰는 괴물체는 사람의 형상인 것도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형상이 변화되고 있었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다니는 것이 절대로 인간으로서는 낼 수 없는 속도였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달여 동안을 소비해야 제거 가능한 절독이 일각도 안돼 완전히 제거돼 버린 것이다.
절독을 제거한 금빛의 괴물체가 번쩍하는 것 같더니 불시에 사라져 버렸다. 땅으로 꺼진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도 황당한 사태에 군웅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지만 은성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멀리서 심기 를 집중하여 당가 장문인의 고뇌에 찬 말을 듣고서 은성이 해결책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들이 마교나 현천교 의 무리라면 절독에 힘없는 백성이 죽어가던 말던 제갈길로 떠났을 텐데 굳이 절독을 제거하고자 고심하고 있 는 모습을 보니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심령으로 유령왕을 불러 명령을 내리니 간단히 해결되었다. 유령왕이 소환된 신체는 오행진기가 합일되어 이 루어진 태극진기이니만큼 삼매진화 보다도 효과가 더 강했던 것이다.
유령왕이 사라지자 급히 현장을 답습한 당문의 고수들에게서 절세 지독이 모두 제거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당 기독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처럼 침착하고 여유로운 문상조차도 놀랍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 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