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94화 (94/152)

■ 제 94절 :

"흑수에는 안개조차 검다더니 한치 앞도 분간할수 없을 것 같구려."

삼태극의 문양이 그려진 도포를 입은 무당 장문인 구양진인이 눈앞의 검은 안개를 주시하며 말하였다. 무당산 의 골짜기에도 사시사철 운무에 가려 있는 곳이 있었지만 안력을 돋우면 주변을 살필수가 있었는데 이곳은 안 개가 검어서인지 안력을 돋구어도 안개 안쪽의 경물을 살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수는 목적지인 당극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지리적 요충지로 돌아가려면 이틀이 더 소요되어 진다.

"누군가 장난을 쳐 놓은 것 같습니다."

문상이 백우선을 천천히 부쳐가며 입을 열었다. 날씨가 덮지도 않았는데 습관인 듯 했다. 시선은 흑무를 꿰뚫 어 보려는 듯 흑무속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안광은 고요하였다.

현재 군웅들은 흑무와 삼십여장의 거리를 둔채 멈추어선 상태였다. 이곳은 습지가 많았지만 평야처럼 넓은 초 지로 이루어져 수뇌부가 앞에 위치하고 그 뒤로 각파의 무인들이 각자의 진영을 유지하며 말위에 앉아 있었다.

흑무는 구름처럼 넘실거렸는데 일백여장 높이까지 솟구쳐 오르며 일행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안개가 걷힐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짜피 통과해야 할 것 같은데 과감히 결단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천 당문의 장문인 당기독 이었다.

조금 헐렁한 회색 가죽옷은 잔잔한 바람이었지만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몸 구석구석에 숨겨둔 절독과 암기 들의 무게 때문인지도 모른다. 잔혹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지만 의외로 성질은 급했다. 흑무속에 어떠한 위험이 있어도 능히 이겨낼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과감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문상! 장난을 쳐 놓은 것 같다니. 그럼 누군가가 술법을 부려 검은 안개를 펼쳐 놨다는 말 같은데 , 목적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무림맹주가 조심스레 문상의 의견을 구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문상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무림맹주였다.

자신이 보기에는 큰 위험성은 없어 보였지만 신제갈이라 불리우는 문상의 의견은 다를지도 몰랐다.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고 진군을 늦추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흑무속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상대할 적은 밀교와 배교의 술법에 정통한 현천교라는 것을 간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아도 실존하는 것이 법술입니다. 여기 모인 일천 오백여 무인은 무림의 정영(挺令)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이 쓰러지면 무림이 무너집니다."

현기에 찬 문상의 지혜로도 쉬이 결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판단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먼저 흑무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은 보무당이었다. 하지만 문상은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자신은 지혜는 뛰어나지만 무공은 없다고 알려진 문상인 것이다. 무림맹을 도와 현천교를 멸할 수는 있지만 자신은 지혜만을 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보무당에 있는 해동신룡이라 불리우는 청년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 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무당의 청년 또한 모를 것이다.

"흑무속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수 없는 지금 무턱대고 진군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선발대를 보내 서 위험 요소를 파악하고 가능하면 제거한 이후에 진군토록 하겠습니다. 선발대는 특기별로 적당한 사람을 골 라 열명씩 세 개조로 나누어 조사토록 하겠습니다. 장문인들께서 추천해 주십시오."

문상의 의견에 따라 수뇌부에 속한 각파의 장문인들이 자기 문파의 인재들을 추천하려고 하는데 검후가 앞으 로 나섰다.

"잠깐만요. 안개속에 독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안개 자체가 독무인지 아니면 독이 안개속 어딘가에 산포돼 있 는지는 몰라도 절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슴속 피독주가 은은히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이 있다니? 검후께서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지요?"

사천 당문의 당기독이었다. 검은 안개가 눈앞을 가리자 독에 정통한 제자 두명이 흑무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 와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독은 아니었다. 독과 암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당문에서도 알 수 없었는데 독과 는 전혀 무관한 보타문의 장문인 검후가 독에 관해 언급하다니 어찌보면 자존신까지 상하는 일이었다.

"당문주님, 목검문에서 선보인 '피독주'에 대해서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실은 피독주에는 또 다른 효능이 있 습니다. 주변에 독이 있으면 스스로 작용해 위험을 알려 준답니다."

"흐음..."

검후를 바라보는 당기독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나타났다. 부러움과 질시 그리고 욕심이 어루러진 복잡한 눈빛 이었다. 목검문에서 검후가 전설의 피독주를 이용해 마교의 절대독인 '앙천지독'을 해독하였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당기독이었다.

피독주만 있어도 당문의 독술은 진일보할수 있을 터인데... 게다가 또 다른 기능까지 있다니...

검후의 조언이 있자 자기 문파의 인재들을 서로 추천하려고 하던 장문인들이 한발 물러서 눈치만 살펴댔다.

얼마나 지독한 독인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귀한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독에 자신있는 사람들만 선발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독은 방비하고 싶어도 방비할 수 없는 독도 있었다.

심지어는 호신강막을 펼치어도 막을 수 없는 절대지독 조차 있는 것이다. 삼매진화를 다룰 수 있는 고수라면 상관 없겠지만 그러한 고수들은 장문인들도 함부로 명령할 수 없는 위치의 노고수들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정예고수로 한개 조만을 편성하여 들여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천당문의 고수들이 다섯명이나 포한된 선발대는 흑무속을 돌아다니며 길을 확인하고 독이 살포되어 있는 장 소가 있는지 그리고 또 다른 위험이 있는지 살펴 보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지를 못하였다. 선발대에 포함된 무공 고수가 안광을 돋구어 길을 찾고 위험 요소를 확인하였지만 안계(眼界)가 가리워졌다 뿐이지 진군시 큰 위험요소가 없었던 것이다.

반시진 가량이나 흑무속을 돌아다녔지만 중독된 징후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당문 고수들이 흑무 안쪽에서 채 집한 흙이나 나뭇가지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들을 세밀히 살펴 보았지만 아무런 독성이 발견되지 않자 당기독 이 검후를 바라 보았다. 당기독의 시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검후가 드디어 품에 있던 목곽을 열 고 피독주를 꺼내었다.

일순간 검후 주변이 환한 광채로 물들어졌다. 피독주는 은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무 안쪽에서 채 집한 물건이나 선발대의 몸에 피독주를 가까이 대어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당문고수들이 소지한 절독들은 잘 봉인돼 펼쳐지지 않았으므로 피독주에 영향을 미칠 리도 없었다. 이상한지 검후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직도 피독주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뇌부에서 상의한 결과 그대로 진군하기로 결정되었지만 검후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독에 관해서는 자신하는 당문이 가장 앞에 서기로 하였다. 당문의 고수들이 가장 앞에 선후 좌우로 날개를 벌려 위치하자 군 웅들이 그 안으로 들어간 후 서서히 흑무속으로 접어 들어갔다. 선발대의 보고에 의하면 흑무는 오리 가량이 나 펼쳐져 있었다.

흑무속에 접어든 은성은 왠지 불안한 느낌에 심안을 집중하고 있었다. 가슴속에 있는 피독주의 진동하는 정도 로 보아서 절독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먼 거리였다. 하지만 독 말고도 다른 위험이 있는 것 같았다.

심안을 집중하자 무언가가 감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술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성의 경지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 심기가 집중되어 심안이 발휘되자 은성은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숨소리조차 완벽히 감추고 한올의 미세한 기조차 흘려 내지 않고 있었지만 땅속에 수많 은 사람들이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완벽히 자신들을 감출 수 있다면 평범한 무인들이 아니었다. 고도 로 훈련된 살수집단인 것 같았다.

그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심안에 직접적으로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무엇 인가가 안개속 허공 위에서 그들을 노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저에서 검후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유령왕에 게 심령을 보내자 상황이 명백해졌다.

커다란 위험이 흑무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성이 검후에게 전음을 보내 지저의 살수들에 대한 존재를 알려 주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흑무가 짙어지더니 안개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으..으아악!"

전음을 날린후 고개를 쳐든 은성의 눈에 하늘높이 떠 있는 거대한 눈동자 두개가 비쳐졌다. 붉은 혈안이었다. 한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운 흑무인데도 혈안은 너무나 선명하게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일행들 모두 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흑무속에 든 일천 오백여 무인들 눈에는 혈안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혈안과 눈을 마주친 무사들이 갑자기 눈동자가 풀리고 흰자위가 벌겋게 변해갔다. 이윽고 눈동자에 핏발이 가 득 차는가 싶더니 '퍽'하고 두눈이 터져 나가며 죽어 나자빠졌다. 죄없는 말들도 수없이 죽어 나자빠졌다. 내 공이 약한 무인일수록 힘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늘에 걸린 혈안을 향해 암기들이 쏘아져 나갔지만 이상하게 혈안에 미치지 못하였다. 혈안까지의 거리가 너 무 멀고 혈안 앞에 펼쳐져 있는 방어막 때문이었다. 은성의 옆에 있는 금룡각의 묵사풍이라 불리는 고수가 검 은 활을 들어 올렸다. 화살조차도 검은빛이 감도는 묵시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손에서 벗어나자 귓청을 찟는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화살이 혈안에게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엄청난 빠르기였다. 손을 벗어났다 싶은 순간 어느새 혈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혈안 앞에 펼쳐져 있는 방어막조차 찟겨진 것 같았다. 혈안이 꿰 뚫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눈꺼풀이라도 달 렸는지 혈안이 닫혀지자 혈안이 걸려 있던 허공은 아무 것도 존재하는 않는 흑무만의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애꿎은 화살만 검은 공간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른쪽 혈안이 다시금 화살을 재는 묵사풍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 덕분에 수많은 무인들이 살아날 수 있었다. 붉은 눈의 금제에서 벗어나게 된것이다. 하지만 기력을 빼앗겼는지 힘이 없는 눈동자들이었다.

하늘에서 보무당원들이 위치한 곳을 내려다 보는 혈안에서 원독에 찬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백록곡의 두 노 괴인들이 주변에 물을 뿌리자 보무당의 무인들 주변에 있는 흑무가 완전히 가셔지고 있었다. 혈안은 방금 전 가공할 빠르기의 화살을 날린 놈이 화살끝에 무엇을 메다는 것을 확인하였지만 크게 주의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정력이 강한 놈이라고 하여도 자기가 그 한놈만을 집중적으로 바라본다면 찰나지간에 눈동자가 터져 나가 버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두 번째 화살은 날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혈안의 자신감과는 달리 화살을 날린 놈이 활시위를 힘차게 잡아 당겼다. 혈안은 활시위가 팽팽히 당 겨졌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가 않았다. 배교의 악마적인 술법인 지옥겁안(地獄劫眼)이 한사람에게 집중된다면 이를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금룡각의 묵사풍이 가진 활의 위력을 실감한 은성이 묵사풍을 혈안의 요사스러운 기운에서 보호해 주고 있다 는 걸 혈안이 눈치채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은성은 암암리에 심기를 묵사풍에게 보내 주고 있었다. 묵사풍이 활시위를 잡아 당겼지만 혈안이 큰 위협을 느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지상에서 일백여장 높이에 떠 있으며 앞에는 법술로 호신강막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과 같이 간신히 호신강막을 뚫고 온다해 도 호신강막을 뚫으면서 속도가 현저히 저하되면 그때를 이용해서 피하던지 아니면 눈을 감으면 되었다.

눈만 감는다면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서 자신들을 완벽히 보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화살을 쏘는 놈의 무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활시위를 놓았다 싶은 순간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피할 사이도 없었다. 호신 강막이 찰나지간 파괴되어 진 것 같았다. 급히 눈을 감으며 다른 쪽 눈을 뜬 혈안이 소름 끼치는 괴성을 질러 대었다.

"으아아아악!"

또 하나의 묵시(墨矢)가 눈을 뜸과 동시에 눈동자 속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피이윳! 아아아아악!"

다시 또 한번의 비명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한쪽 눈이 터져 나가자 화살을 흘려 보냈던 다른 쪽 눈을 떴는데 느닷없이 뒤쪽에서 나타난 묵시가 멀쩡한 눈을 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눈동자가 터져나가며 하늘 에서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첫 번째 쏜 화살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묵사풍은 화살에 신전법(神箭法)의 술법을 걸었다. 두 동강이 나기 전에는 끝까지 목표를 따라가는 것이 신전법이었다. 혈안이 눈을 감자 혈안을 지나쳐 갔지만 화살은 다시금 뒤돌아 날아와서 뒤에서부터 관통해 버렸다.

그런데 터져 나가버린 혈안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혈안의 터져나간 조각들이 지상으로 떨어 져 내리면서 작은 눈동자 모양으로 형상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금 눈동자가 마상에 있는 무인들 이 정신을 빼놓고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하자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이 몸을 날려 작은 혈안들을 상대하기 시작 하였다.

지상과 가까이에 위치한 때문이지 검기에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붉은 눈 동자는 선명히 보여 상대하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비록 백록곡의 두 노괴가 보무당 주변에 있는 흑무는 몰아 내었지만 여전히 다른 곳은 흑무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키 어려웠다.

금룡각의 묵사풍이 화살을 날리는 것을 알리는 더더욱 없었다. 오로지 보무당의 고수들만이 똑똑히 볼 수 있 었을 뿐이었다. 보무당의 고수들도 은성이 혈안으로부터 묵사풍을 보호하고 힘을 보태 줬다는 것은 모르지만 말이다.

보무당의 고수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또 하나가 있었다. 거대한 혈안이 박살난 이후 화룡검을 빼어든 은성이 보무당의 앞쪽에 서서 땅속에 검기를 발휘하며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핏물이 흘러 나왔다. 땅속에 자객들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지만 그들의 감각에는 전혀 잡히지가 않았다. 그들이 은 성을 바라보는 눈빛에 경외심이 깃들어 가고 있었다.

술법에 가리워진 존재들이라고 하여도 유령왕에게 명령을 내리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만 은성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명을 받들어도 유령왕은 요귀들의 두목에 불과했다. 절대절명의 위기가 닥치면 어쩔 수 없지만 요귀에게 인간을 사냥하라고 맡겨 놀 수는 없었다.

세가 불리하여 무림맹측에서 피해를 입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요귀 따위가 인간을 죽이는 참극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인간이 아닌 지옥의 악귀들과 상대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진기를 유령왕에게 주었지 인간을 죽이 라고 진기를 나눈 것은 절대 아니었다. 땅속에 숨은 자객들에게 살수를 펼치면서도 일반적인 도살(屠殺) 같아 은성의 기분은 참담해져 있었다.

'삐이익'

갑자기 검은 안개가 뒤흔들릴 정도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려 나오자 곧 이어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많아 지기 시작하였다. 땅속에 숨은 자객들이 일시에 튀어나와 공격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어둠속에서 살수를 펼치는 수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는지 진혹하고 무자비하게 죽음을 흩뿌리고 있었다.

"히히히히힝'

말들이 구슬프게 죽어가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흑무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 다. 하지만 보무당 주변에서는 살수들이 솟아 나오지 않았다. 가끔씩 안개를 뚫고 한두명이 달려 나왔지만 허 무하게 생을 접어야 했다. 아무리 살수 훈련을 받았어도 이곳에는 그들이 상대할 수 없는 고수들이 너무나 많 았다. 그리고 이곳은 흑무로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곳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눈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방에 널린 것이 절세고수들 뿐이었다. 게다가 은성 에게 전음을 받은 검후에 의해 미리 경고되어진 이후였다. 한 명을 죽일 수는 있어도 두명까지는 어려웠다.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고 기습이 끝나는 순간 절세고수들의 차가운 검날이 어느새 파고들었다. 비명소리가 조 금씩 사라져 가고 공중에 떠 있는 혈안도 몇 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적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 나왔다. 불꽃이 일어나는 정도가 아 니었다. 하늘을 가리우는 불꽃이 화살처럼 날아오며 사방을 감싸오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나아가라!"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불꽃은 하늘끝까지 불사르겠다는 듯이 위력적으로 타 오르며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불꽃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림고수의 경공 보다도 빠른 속도였 다. 대부분 말을 버리고 최대한 신법을 발휘하였다. 흑무에 들기 전에 들은 말대로라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흑무의 끝이 나올 것이다.

흑무를 빠져 나온 군웅들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불꽃으로 화한 흑무속을 바라보았다. 불꽃속에서 미처 빠져 나 오지 못한 무인들이 오십여명도 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불꽃이 아니었다. 시커먼 연기를 한껏 뿜어대며 일 백여장 높이로 뻗쳐오르는 불꽃은 지옥의 화마(火魔) 그 자체였다. 아무리 고수라도 그 속에서 살아 나올 수 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꽃속에서 빠져 나오는 무리가 있었다. 호신강기조차 녹여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불꽃속에서 빠져나오는 인영이라니... 검후였다.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보타문의 제자 두명을 구한 후 빙검 여래혼으로 불길을 누그러뜨리며 불꽃속에서 무사 히 빠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과연 빙검 여래혼이었다. 빙검 여래혼의 검막에 불꽃이 닿으면 지옥의 화염같던 불꽃조차 기세를 떨구고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사그라 들고 있었다. 검후의 막대한 내공이 없다면 불가능 하 겠지만 말이다.

불길속에서 빠져나와 숨을 고르던 군웅들은 또다시 믿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불길속에서 둥그런 반 구(半球)가 서서히 빠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채 때문에 안쪽을 살필 수가 없었지만 불꽃속에서 서서 히 밀려 나온 반구가 마침내 불꽃을 완전히 벗어 나와 베일을 벗자 군웅들이 놀라 입을 쫘악 벌리었다.

"세상에..."

광채에 뒤덮인 반구가 걷혀지자 그 속에서 이십여명의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속에는 멀쩡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친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 공이 고강해도 호신강막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이처럼 넓은 범위로 펼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처럼 지 독한 불꽃속에서는 호신강기라 해도 오랫동안 내부를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구 조된 사람들이 한 문파의 제자가 아니고 여러 문파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들을 끌어 모아 호신강막을 펼쳤다는 말이었다. 호신강막속에서 무공을 발휘하여 또 다른 사람을 구 출할 수 있다니...

이십여명의 사람중 호신강막을 펼친 사람을 바라본 군웅들은 또 한번 놀랐다. 이처럼 인세에 보기드문 절학을 펼친 사람이 아직 어린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구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에게 포권을 하며 고마움을 표시하자 겸양한 자세로 마주 예의를 갖추고 있었는데 분위기로 보아 젊은 청년이 호신강막을 펼쳐 이십여명을 구한 것 이 확실해 보였다. 은성의 무위가 본의 아니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검은 안개는 강한 인화성 물질이 휘발되며 생겨난 것 같았다.

불길이 순식간에 덮쳐들자 사방은 아비규환 이었다. 보무당의 고수들은 모두 일당백의 정예들이라서 불길에 안전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각파의 젊은 무인들과 부상자 그리고 무림맹을 도와 주겠다는 의지로 참전한 떠돌 이 무사들이었다. 혈안과 살수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도 그들이었다.

사부와 사숙을 따라 몸을 날리던 은성은 묵귀영 신법을 발휘하여 옆을 달리는 보무당의 고수들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빠룬 속도로 뒤돌아 갔다. 무림맹에 자신의 무위를 되도록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의가(醫家)의 자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동방파 조사지공중 천일일(天一一)의 수법은 호신지공에 가까웠다. 호신강기를 펼치면 호신강기가 마음대로 늘었다 줄었다 가능하며 의지에 따라 변형이 되어 둥근 원형중 드나들 수 있는 통로까지도 만들 수가 있는 것 이다. 천일일의 수법으로 둥근 반구형의 강기막을 펼쳐 동서남북 네곳에 출입문을 만든 후 화마에 저항할 능 력이 없는 사람들을 접인신공으로 끌어당겼다. 심기를 극한으로 발휘해서인지 왠만한 무림인이 한치 앞도 재 대로 볼 수 없는 흑무속에서 이십여장 떨어진 곳에 있는 부상자까지도 선별하여 순식간에 호신지막 안으로 끌 어 당길 수가 있었다.

은성이 부지불식간에 펼친 수법도 대단하였지만 지옥의 겁화같은 화마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화염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호신강기의 출입문을 봉쇄하여 반구형으로 튼튼히 감싼 은성이 안쪽 에 있는 부상자들을 생각하여 서서히 움직이자 몸이 성한 고수들이 부상자들을 부축하여 은성을 따랐다. 지옥의 겁화같은 화염의 불꽃이 쉴세없이 호신강막을 위협하였지만 철통같은 호신강막은 흔들림조차 없이 무 사히 화염지옥속을 빠져 나온 것이다.

각파의 장문인과 당주들에게서 피해상황을 보고 받던 무림맹주와 장문인들이 은성에게 달려갔다. 무림맹에서 육로(陸路)를 이용하여 곤륜으로 이동하던 일천오백여명의 인원중 이백여명이 죽거나 부상한 것으로 파악되었 는데 이십여명이 돌아왔으니 일백 팔십명으로 줄어들었다. 일백팔십명이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정체조차 파악되지 못한 적의 피해는 알 수 없었지만 현 세력이 무림 최고 고수들이 대거 몰려있는 정예세력인 것을 감 안하면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들중 일백팔십명이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적의 세력이 무시할 수 없음에 대한 반증이었다.

이기어검으로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호신강기처럼 방패막을 친 후 이글거리던 저주스런 혈안이 조금 만 늦게 터져 나갔다면 일백팔십명으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돋아나 는 것 같았다. 은성을 바라보던 무림맹주는 자신에게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자책이 들어왔다. 권마황을 물리쳤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처럼 무위가 높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로행으로 곤륜으로 향하는 무상(武相)과 비견될 정도였다. 아니 그보다도 높을 것 같았다. 아까운 정영들이 일백팔십명이나 죽었지만 속으로는 안도감이 스며져 나왔다. 전력이 사라진 일백팔십명보다 눈앞의 해동신룡 한 명이 더 듬직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대협! 제가 안목이 부족하여 이대협께 소홀히 한점 사과 드립니다. 그리고 위험에 빠진 무림 동도들을 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셨듯이 현천교와 마교의 무리들은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도 더 가벼이 여기고 있습니 다. 부디 저희 무림맹을 도와 사악하고 잔혹한 무리들이 사라지고 만민이 평화로운 무림을 이루는데 힘을 보 태 주시기 바랍니다."

중원 무림의 제일인자인 무림맹주가 한낱 변두리 국가인 해동의 무사에게 머리를 낮춰 친히 부탁을 한다는 것 은 지금껏 없었던 일이었다. 무림의 상황이 악화된 원인도 있지만 은성의 신위가 대단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은성이 아직 무림맹에 정식으로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은성도 어짜피 당분간은 무림맹을 도와 주어야 할 입장이었다. 검후를 도와주어야 하고 마교와의 일전에도 참가하여 야차귀노를 죽여 사문의 원한도 갚아야 하는 것이다.

"해동의 무인들은 예절을 중요시하고 정의에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무림맹이 정도를 걷는한 해동의 무인들 은 무림맹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무림맹의 존재 가치는 정도에 있습니다. 무림맹이 정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림맹의 존재가치가 사라지 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이대협 께서는 보무당의 사부님과 같이 저희가 현천교를 멸하고 마교를 물리칠때 까지 도와 주시겠습니까?"

은성에게 묻는 문상의 표정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흑무속에 이처럼 가공할 살진이 펼쳐져 있었던걸 예측하지 못한 자책 때문이었다. 자신이 흑무속에 직접 들어가 살펴 보았다면 이처럼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안 쪽에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지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직은..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은 무공도 모르고 독에도 내성이 없는 문상의 신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마교를 멸할 때까지라는 장담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이번 현천교의 사태를 해결하고 마교와의 싸움에도 가담 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교와의 싸움에서는 끝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몇 명 저희 에게 원한이 있는 마교인을 처치하면 저희 동방파는 해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마교도들이 누군인지 알 수는 없는지요?"

문상의 물음에 잠시 망설인 은성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이 죽음에 이르렀다면 마교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므로 무림맹이 나머지 세력을 치는데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은성의 설명에 무림맹주와 문상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런데 그 농도는 문상이 더 짙었다. 은성과 같은 고수를 잘만 활용한다면 그의 임무가 훨씬 앞당겨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의아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어떻게 이와 같은 거대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아함 이었다. 그도 자신처럼 특별한 존재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지도 몰랐 다. 이래저래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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