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93화 (93/152)
  • ■ 제 93절 :

    "여러분! 일전에 말씀드린 제 제자입니다. 은성아! 모두 해동에서 오신 분들이니 인사 드려라."

    자운검의 소개에 은성이 벌떡 일어나 각자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인사를 올리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운검 사부님을 모시고 있는 이은성 입니다. 말학 후배이니 편히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빙 둘러 앉아 식사를 할 정도로 사부님과 친하다면 은성이 마땅히 공경해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근골도 훌륭하고 명문정파인 동방파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어 보이는 구먼. 그런데..."

    "잠깐!"

    등에 붉은 표주박을 멘 노인의 말을 검은 표주박을 멘 노인이 갑자기 가로막았다.

    '엥...'

    붉은 표주박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중인들의 시선이 검은 표주박 노인에게로 일시 에 쏠리었다. 의아한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표주박을 메고 흑수선(黑水仙)이란 명호를 가진 이 노 기인은 열 번 만나야 한마디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사십년 지기인 혈수선(血水仙)조차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흑수선을 바라보던 중인들의 시선은 흑수선의 시선이 가리키 는 곳으로 이동되어졌다. 흑수선의 시선은 은성의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검은 어디서 얻었느냐?"

    흑수선이 한올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선문(鬼仙門)의 고진인께서 저에게 물려 주셨습니다."

    흑수선이 화룡검의 내력을 알고 있을거라 추측하며 은성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그 검은 아무에게나 물려줄 수 없는 검이다."

    여전히 흑수선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고진인께서 눈을 감으시며 저에게 화룡검을 물려 주실때에는 귀선문의 명맥이 단절된 이후였습니다."

    "그..그가 죽었다는 말이냐?"

    이번에는 무감각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죽었느냐? 누구에게 죽었느냐?"

    혈수선 또한 깜짝 놀란듯한 표정이었다. 할 수 없이 은성은 해동에서 신검을 부리는 마교의 고수와 싸운 이야 기를 간략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은성이 말을 하는 동안에 모두들 식사를 멈춘 채 은성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 었다. 신검에 얽힌 이야기는 자운검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자운검과 구천진인 조차도 놀랍다는 눈빛으로 은성 의 말을 듣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으로 마교의 고수가 죽은 후 신검이 저절로 날아서 중원쪽으로 도망갔다는 설명을 들은 중인들은 모두 한결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가장 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 람은 구천진인 이었다.

    "마교의 천마해체대법(天魔解體大法) 이로구나."

    구천진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마해체대법은 익히기도 어렵지만 사물에 영혼을 전이시켜 조종하기 위해서는 원영지체(元靈之體)를 이루어 야만이 가능한데... 불가능한 일이야...'

    다시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구천진인이 은성에게 말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구나. 신검에 영혼을 싣고 도망갈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에게 고진인이 당했 다는 말은 믿을 수 있겠으나, 아무리 네가 화룡검을 사용했다고 하여도 원영지체(元靈之體)를 이룬 고수가 그 처럼 어이없이 당하다니..."

    "저도 화룡검에 그처럼 신묘한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는 우연히 발휘되어졌지만 오행진기중 화기(火氣)를 주입하면 화룡검에 감추어진 힘이 나타난다는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 세상 일은 한치도 예측키 어렵구나. 무림맹을 도와 마교를 무찌른 후 비급을 얻어 귀선문과 다시 한번 자웅을 겨뤄 보고자 하였는데... 고형, 고형의 원한은 우리가 갚아 주겠소이다."

    은성의 말을 듣던 혈수선의 눈빛이 점차로 처연하게 변하더니 넋두리를 하였다. 옆의 흑수선도 허탈한 표정이 었다. 이들의 표정을 보니 귀선문과 악의를 가지고 대결을 벌인 것 같지는 않았다. 고진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긴 은성을 바라보던 혈수선이 손바닥을 위로 향한채 들어 올리자 등뒤에 멘 표주박의 뚜껑 이 하늘로 솟구친 후 혈수선의 손바닥 위로 빨려 들어갔다. 뚜껑은 술잔 모양이었다.

    내력을 운기했는지 등뒤 표주박의 입구에서 안개처럼 작은 물방울이 피어올라 순식간에 뚜껑을 겸한 술잔속에 가득 차자 혈수선은 술잔을 높이들어 술잔채로 허공에 뿌리었다. 안개처럼 좌악 퍼진 액체가 증발되어 허공중 으로 사라지자 눈이라도 달렸는지 술잔은 등뒤 표주박 위에 정확히 떨어지며 입구를 꽈악 밀봉하였다.

    흑수선도 혈수선과 같은 행동을 한후 눈을 감고 두손을 모아 합장을 하였다. 아마도 고진인의 명복을 빌어주 는 것 같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채로 조용히 눈을 뜬 혈수선이 은성을 바라 보았다.

    "그 검은 귀선문의 보물이며 인세에서 얻을수 없는 신물(神物)이니 귀하게 다루도록 해야 한다. 귀선문과 우 리 백록곡(白鹿谷)은 십년에 한번씩 모여 각자의 절기를 발휘하여 기량을 비교하였는데 하늘은 무심하기만 하 구나."

    "잘 알겠습니다."

    은성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일행은 식사를 시작하였다.

    옆에 사람 머리통 만한 철추(鐵鎚)를 매단 거대한 덩치의 금룡각 고수는 다른 사람 세배 분량의 밥을 타 와서 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비워 버렸다. 하지만 백록곡의 두 노인은 입맛이 없었는지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은성도 고진인을 생각하노라니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서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은성이 빈 그릇을 모두 모아 한곳으로 가져갔다. 식기를 반납해야 했던 것이다.

    은성 일행이 식사를 조금 늦게 해서인지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식사시간은 반시진 이라고 들었는데 식사중 호위를 서는 무인들의 근무 교대 때문에 조금 길 어진 것 같았다. 호위는 구대문파중 소림과 아미 그리고 곤륜파를 제외한 육대문파에서 이대문파씩 돌아가며 인원을 차출하여 서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편안한 식사 시간을 갖을 수 있는 것이다. 곤륜에 가까이 가면 이처럼 여유로운 식사 시간을 기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듯 조금 밖에 남지 않은 휴식시간을 최대한 여유롭게 즐기고 있 었다.

    그런데 식기를 반납하고 사부님과 해동의 고수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던 은성이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한 곳을 바라본 후 시선을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다. 은성이 가는 길과 십여장이나 떨어진 곳에 일백여명의 젊 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모두 식사를 마친 후인지 군데 군데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군계일학 정도가 아니었다.

    두명의 도인과 세명의 속인이 자연스럽게 걸터앉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 한명 한명이 닭 무리속에 숨 어있는 봉황처럼 뛰어남이 비교조차 할수 없을 정도였다. 주변에 늘어선 젊은이들의 무위가 낮고 기량이 떨어 져서 비교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젊은이들도 대단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 뿐이었다. 하지만 중앙에 있는 다섯명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은성의 눈빛을 느꼈는지 그들중 자색 경장을 한 젊은이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자신보다 일곱에서 여덣살 정도 많아 보였는데 은연중 심안을 발휘하여 본 은성은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무위를 쉬이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단전이 완성되어 심기(心氣)를 발휘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심 안의 깊이가 몇 배나 깊어진 은성이었다. 검후 정도의 고수조차 은성의 심안을 벗어날 수 없는데...

    자색 경장의 젊은이가 싱긋 웃었다. 잠깐 마주친 눈빛은 고요하고도 심원하였다. 심산유곡 맑은 계곡속의 용 천수처럼 지혜 또한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자의를 입은 젊은이의 시선은 이내 옆자리의 도인에게로 돌아갔다. 혈색이 초록으로 빛나 야수처럼 보이는 젊은 도인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현묘지기(玄妙之氣)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허 아우의 도력으로도 이번 곤륜행의 성패를 예측할 수 없다니 참 의외로군 그래."

    자의를 입은 젊은이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주변을 압도하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하는 순간 주변에는 시끄러운 잡음 한마디도 들려 오지 않았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천신을 청해 앞일을 볼 수 있다는 오신철갑보를 익히신 삼천 진인 장로님 조차도 초조해 하시는 표정이십니다. 예전에는 자세하고 선명히 가르쳐 주시던 천신이 요즘은 선 문답 식으로 애매하게 가르쳐 주신답니다. 장로님 말씀으로는 천지간에 엄청난 술법이 펼쳐져 천도(天道)가 흐트러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무당파에서 도력이 가장 높으신 삼천진인께서 하신 말씀이니 틀림이 없을 것이네. 실은 나도 오면서 모산파 의 주진인을 만나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신귀(神鬼)들과 천신들이 하나같이 입을 열지 않는다 하더구만."

    혈색이 초록색인 무당의 진허라는 도사의 말을 받아 이은 백의의 젊은이도 자색 경장의 젊은이에 못지 않은 천골(天骨)이었다. 하지만 신비함은 조금 덜하였다.

    "천도(天道)가 흐트러졌다니 혈세가 시작되려는 조짐인지도 모르겠네. 현천교의 발호를 시작으로 다시 혈륜이 돌려고 하는지도..."

    "모용 형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무당의 진허도사가 진중하니 물어오자 자색 경장의 젊은이가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우리 모용세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네. 천지가 번복되고 혈륜이 돌아가는 난세가 닥치면 무림이 암흑 에 뒤덮이고 시산혈해가 되며 이때 절대 영웅이 탄생된다는..."

    "무림의 난세를 모용세가에서 구원한다는 전설입니까?"

    백의의 젊은이가 모용씨의 젊은이에게 물었다.

    "아니네. 아쉽지만 모용세가는 보좌하는 위치라네."

    모용씨의 젊은이는 처연해진 목소리였다.

    "헉!"

    그러자 사방에서 놀람에 찬 탄성이 흘러 나왔다.

    "모용형님이 보좌해야할 운명이라니 저는 절대로 승복할 수 없습니다. 삼성검법을 익힌후 하늘 끝에 올라있던 저의 자존심이 자만심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모용형님 때문입니다. 아버님조차 익히기를 포 기하신 삼성검법 최후의 초식을 죽음조차 불사하고 익히겠다며 할아버님을 조른 것이 누구때문인지 모르시지 는 않을 것입니다. 삼년동안 절치부심하여 간신히 사성의 경지에 도달하여 이제는 좁혀졌으려니 하였지만 더 욱더 멀어지신 형님이 아니라면 그 누가 절대 영웅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을 하다가 울분에 찼던지 백의의 젊은이가 앉아 있던 바위를 향해 한 손을 내리 눌렀다.

    신기한 일이었다. 바위가 부서지지도 않았는데 백의 젊은이의 한손이 바위속으로 깊숙이 사라져 갔다. 검법을 장기로 하고 있다는 젊은이의 장법치고는 너무나도 가공지경의 경지였다. 상처하니 없이 말끔하게 바위속에서 손을 끄집어낸 백의 젊은이가 결연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자는 모용형님을 넘기 전에 삼성검문 차기 문주인 저 반수석을 먼저 넘어야 할 것입니다."

    "..."

    길을 가다 멈춘채 호기심에 이들의 말을 듣게된 은성은 백의의 젊은이가 무림맹주의 하나뿐인 아들 옥룡 반수 석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듣고 싶었지만 엿듣는다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부와 사숙도 기다 리고 있었다. 모여있는 다섯명중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도인과 속인 두명의 얼굴을 흘낏 바라본 은성이 눈길을 거두고 사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세상은 넓고 인걸은 많다는 생각이 세삼스레 떠올랐 다.

    사부님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진군을 위해 모이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일천오백여명의 대 인원이 이동하는데 규칙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육로로 이동하는 당극까지는 삼일 거리였다. 전방은 육대문파에서 책임지고 경계를 하기로 하였고 후방은 오대세가에서 맡기로 하였다.

    은성이 속한 보무당은 육대문파 뒤에 바짝 따르는 수뇌부와 호위대 그리고 무림맹의 수무당에 바짝 붙어 뒤따 르고 있었다. 수뇌부에 속한 검후와 같이 하지는 못하여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고 내심 생각되는 은성이었다.

    심령으로 유령왕을 불러 다른 명령이 있기 전에는 검후를 보호하라고 부탁한 은성은 여류롭게 뒤따르고 있었 다. 은성을 태운 백마는 고삐조차 없앴는데도 한마음이 된 듯 은성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길을 가면서 은성은 해동에서 온 금룡각의 무인들은 물론 백록곡의 노기인들과도 친해져 있었다. 고국이 같아 서 왠지 친금감이 들었으며 같이 이동하고 식사때만 되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였기 때문이었 다.

    일행이 청성산을 지난지 삼일째 밤이 지났는데도 다행히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진군시에 육대문파는 두시진씩 선두를 번갈아 맡으며 전방을 경계하였는데 척후를 보내 행로의 안전을 확인하며 달리고 있었다.

    야간에도 철저히 경계를 세워서 그랬는지 아직껏 사소한 피해 하나도 없는 순조로운 진군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흑수(黑水)란 지명의 습지가 많은 지역을 지날때였다. 척후가 앞쪽에 검은 안개가 끼여 있지만 진군은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는데 생각보다 안개가 짙게 끼여 있었다. 척후가 보고를 마친 후 일행이 도 착하는 시간 동안에 더 짙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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