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1절 :
심기를 운용하여 싸울 태세를 갖추던 은성은 흠찟한 느낌에 급히 몸을 날리었다.
'퍼버벅'
그러나 은성의 몸은 강한 충격을 받고 허공중으로 튕겨져 올라갔다. 괴인형이 움직인 기색조차 없었는데 어느 새 은성에게 다가와 권을 날렸던 것이다. 괴인형의 움직임은 심안조차도 뛰어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고 허공중으로 날아가는 은성을 어느새 뒤따라 왔는지 무수한 권장이 은성의 몸위에 퍼부어졌다.
정신없이 난타당하며 은성이 할 수 있는 일은 호심강기를 강화하는 것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괴인형은 힘을 한 점에 집중시킬 수 있는 역추공(力錐功)을 익혔는지 은 성의 호신강기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욱 날카롭고 극심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극심한 충격에 정신이 혼미 해져 오면서도 심안을 발휘하여 괴인형의 형체를 찾아 보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조차 없었다. 석동 의 공간안에 어느 곳에나 있었지만 또 아무 곳에도 없었다.
초인적인 의지로 한줄기 의식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은 은성은 난타를 당하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당 하고 있는 권법이 사신권법중 백호권법과 비슷하다는 착각이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은성이 석벽의 끝에 도달해서야 괴인형의 공격은 멈추어졌다. 하지만 마직막 일격은 지금껏 펼쳤던 공격에 비해 몇배나 강력하였 다.
'꽈과광'
은성의 몸이 부딪힌 석벽에서 돌이 튀고 벽이 푹 팽겨져 버릴 정도였다. 호신강기로 보호되어졌지만 괴인형의 무차별적인 난타에 은성의 몸은 내외부로 성한 곳이 별로 없을 지경이었다.
괴인형의 행동은 의외였다. 은성을 죽일 것처럼 공격해 놓고는 마지막 순간에 공격을 멈추고 석벽에 부딪힌 후 앞으로 떨어져 내려 힘없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는 은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꿈틀'
은성이 힘겹게 머리를 쳐들었다. 이마가 길게 찢어져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석벽에 부딪힌 이후 엄청난 충격에 호신강기가 풀린 상태에서 단단한 돌에 머리를 찧은 때문이었다.
서서히 정신이 든 은성은 아직도 심기(心氣)를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성한 곳이 없고 태극진기도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상이 심하였지만 심기만은 멀쩡하였던 것이다.
심기를 운용하여 몸을 일으켜 세운 은성의 이마가 순식간에 지혈되더니 상처가 급속히 아물어가기 시작하였다.
눈앞의 괴인형을 살펴보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일정한 형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영기(靈氣)들이 모여 형체를 이루었는데 저것에 이토록 크게 당했다는 것이 이해가 안갈 정도였다.
검기가 아무리 세도 검강에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조금전에 자기가 당한 것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눈앞 의 괴인형은 기를 날카롭게 집중시키는 역추공으로 강기조차 꿰뚫어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심한 내상을 입었지만 은성의 내상은 급속도로 치유되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괴 인은 전혀 무관심한 눈빛이었다. 은성이 내상을 회복해도 전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몰 랐다. 괴인형의 급습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은성은 내상 치료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마음을 두 갈래도 나누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또다시 괴인형(怪人形)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번에도 괴인형의 목소리는 은성의 머리 속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캬캬캬 인간아! 나의 왕국에서 나의 백성을 때리고도 무사할성 싶으냐? 한대를 때리면 열배로 갚아주는 것이 우리의 법칙이다."
괴인형의 말은 똑똑히 들렸지만 그 의미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당신의 백성을 때렸다고 그러는 것이요?"
은성이 심령으로 언어를 전달시키자 괴인형이 은성의 언어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소림에서 범각대사의 혜광 심어를 떠올리며 은성이 창안한 절기이었다. 무림맹에서 검후에게 사용한 것과 같은 수법이었다.
"뭐라고! 방금 내앞에서 직접 때리고도 발뺌하는 것이냐? 인간이 가증스럽다고 하던데 한치도 틀림이 없구나."
"아니..."
반박을 하려던 은성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때렸다면 금호밖에 없었다. 아니, 금호안에 소환된 요귀인 유령을 때린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유 령이 눈앞에 있는 괴인형의 백성이란 말인가?
"그럼 당신이 유령들의 왕이라도 된다는 소리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은성이 따지듯 물었는데 예상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캬캬캬! 그렇다. 내가 바로 전능한 유령왕이다. 그리고 이곳은 나의 왕국에서도 나만이 드나들 수 있는 비밀 스런 성전이다."
"이럴 수가..."
은성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금호가 이곳 에 와서 취한 행동도 이해가 갔다. 한낱 유령이 유령왕의 처소에 들어와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유령왕에게 발각되었다면 더한 행동을 취해도 이해할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자기의 백성을 괴롭히고 성전에 무단 침입한 자신을 왜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나는 금호를 때린 것이 아니오. 금호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소."
"무엇 때문이냐?"
유령왕의 목소리는 처음보다도 적의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은성의 진정을 알고 있었던 듯 싶었다.
"나는 금호와 계약을 맺은 것이오. 금호가 나를 도와 주기로 하였오."
"뭐라고! 내 허락도 없이 내 백성을 강제로 불러들여 봉인시켜 놓고 명령을 듣도록 강요시킨 것이 계약을 맺 는 행위더냐?"
유령왕이 화난듯한 기색으로 은성에게 쏘아 붙였다. 그런데 유령왕의 말을 듣고 보니 은성도 아차하는 심정이 되었다. 계약이라면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육합천서 안에는 귀신과 유령을 불러들이고 봉인시켜 부릴 수 있는 술법들이 넘쳐 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모든 술법이...
은성이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부적을 그려 귀신과 유령을 불러드리고 주문을 외워 봉인시키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지만 귀신과 유령의 입장에서는 강압적으로 끌려가 자의가 아닌 타의로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셈이었다.
육정육갑신처럼 계약을 맺은 인간이 소환하여도 나설 일이 아니면 굳이 현신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꼼짝없이 봉인되어 부르면 나타나고 시키면 어떠한 일이라도 행해야 한다면 아무리 귀신이라도 너무 잔인하고 부도덕한 일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서라는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이성의 판단력이 둔해진 것 같음을 자책하며 은성 이 유령왕에게 심령으로 의사를 발하였다.
"내 생각이 부족하여 금호의 의사를 물어보지 못했구려. 내 금호에게 사과하리다."
"흐! 그래도 염치가 없는 놈은 아니구나. 그런데 무슨 이유로 무공을 가르쳤느냐?"
"..."
은성이 대답을 망설이자 유령왕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은성은 유령왕의 신형이 여전히 그 자리 에 남아 있지만 예감으로 유령왕이 이미 눈앞에 닥쳐 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처럼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는 없었다. 유령왕과 말을 하면서 심기를 운용한 결과 내상도 많이 완쾌되어 있었다. 위험을 느끼자 심기를 극한으로 운용하여 묵귀영의 신법을 발휘하자 은성의 신형도 종적이 없이 사라 져 버렸다.
심안도 극대화 되었다. 하지만 유령왕의 모습은 희미한 안개처럼 잔영만이 간간이 보여지고 있었다. 그것만으 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던 은성이 다급한 눈빛을 발하였다. 해저 오백장 밑에서 엄청난 수압을 견뎌내며 익힌 묵귀영의 신법보다도 유령왕의 신법이 더 빠르고 변화가 무쌍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령왕의 공세를 미세하나마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유령왕 의 허깨비같은 신형이 옆구리쪽을 파고들고 있었다.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는 빠른 공세에 은성이 다급히 타 격 예상지점에 호신 강기를 집중하였다.
"콰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뒤쪽으로 날아가던 은성이 고개를 돌리었다. 유령왕이 충격을 받았는지 허공에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강기를 집중시켜 방어한 때문인지 은성은 큰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령왕의 약 점도 알게 되었다.
유령왕은 방금전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금 은성에게로 공격을 퍼부어 댔다. 이번에는 기를 훨 씬 날카롭게 집약시켰는지 타격을 받은 은성이 고통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반탄강기에 휘말린 유령 왕도 은성에게서 튕겨져 나왔다. 그런데 튕겨져 나간 유령왕은 또다시 은성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어찌나 표홀하고 빠른지 은성의 날카로운 공세를 모두 피해버린 유령왕의 빗살같은 권이 은성의 방어막을 뚫고 앞가 슴으로 닥쳐 들자 은성이 급히 호신 강기를 앞가슴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허초였다. 유령왕은 어느새 은성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극대화한 심안속으로 유령왕의 권경이 등뒤 명문혈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지자 은성도 심기를 동원하여 호신강기를 명문혈 쪽으로 집중시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초에 시간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 호신강기로는 유령왕의 공세를 충분히 막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술을 앙다물고 충격에 대비하던 은성의 안색이 찰나지간에 하얗게 변화되었다. 순간 복부에 엄청난 충격이 전달되어졌다.
'왁'
붉은 피를 토하며 은성의 신형이 가랑잎처럼 뒤쪽으로 날아갔다. 눈앞이 하애지는 것 같았다. 지금 또다시 유 령왕이 덮쳐든다면 방어할 방법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유령왕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가까스로 심안을 운용하여 바닥에 내 팽겨치는 수모를 모면한 은성이 다시 한번 왝하니 검은 피 를 토해낸 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유령왕을 바라 보았다.
"내가 가르치려는 무공이 그것 뿐이더냐?"
조소에 찬 유령왕의 음성이었다.
"아니, 아직도 남아 있다."
두 번째의 내상으로 태극진기를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된 은성이 심기를 북돋우며 말을 받았다.
"캬캬캬! 그렇다면 어디 한번 펼쳐 보거라. 캬캬캬캬캬!"
유령왕의 괴기한 웃음소리가 석동안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웃음을 보이던 유령왕이 갑자기 웃음을 멈 추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성을 바라 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유령왕의 신체가 산산조 각으로 터져나가 버렸다.
유령왕의 신형이 분해되는 순간 은성도 쓰러지며 한쪽 무릅을 땅에 대었다. 은성의 시선은 산산이 부서진 유 령왕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에 핏기하나 없는 것이 심기조차 발휘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진기와는 달리 심기는 소모되지 않는 기운이었다. 하지만 심력이 달려 정신력이 분산되면 심기는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령왕을 상대하느라 과도하게 심력을 낭비하여 심신 양면으로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은성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져 있었다. 도저히 당할 수 없을 것 같던 유령왕을 무찌른데 따 른 안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기의 순간 지금까지 이론상의 무학이었던 조사지공 최후의 초식인 일종무종 일(一終無終一)을 펼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상단전이 완성되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이론상의 무공으로 천부경을 연구하며 일생을 바친 동방파의 조사인 덕수진인도 이론상으로만 창안하여 놓았던 무공이었다. 자꾸만 닫혀지려는 눈꺼풀을 힘들게 올리며 심력을 회 복하려던 은성의 입가에서 미소가 급격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쿵'하고 땅바닦에 쓰러져 버렸다.
희미해진 시선에 유령왕의 조각난 시신들이 진기화해 다시금 뭉쳐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희열이 절망으로 변하면서 끈질기게 잡고 있었던 한줄기 의식의 끈이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지나가고 석동안은 다시금 영기로 채워져 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문득 정신이 든 은성은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눈을 감기전의 상황이 은성의 뇌리에 선명히 재현되고 있었다. 이승 이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눈을 감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살며시 눈을 뜬 은성이 다시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은 안정되어졌고 안색도 평온해져 갔다.
여전히 석동(石洞)안이었다. 진기를 살펴보니 내상이 모두 치유되어 있었다. 쓰러진 이후 자체적인 치유 능력 이 발동되어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유령왕의 심사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굳이 집중하지 않 아도 은성의 심안은 사방을 살펴보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였다. 심기를 집중하여 심안을 극한으로 운용하자 비로소 석동 한쪽에 익숙한 기운이 감별되어졌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그것은 분명 유령왕의 존재였다. 자신에게 무슨 목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도의에 어긋나지만 않는 다면 들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목숨의 빛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누운 채로 은성의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서서히 날아갔다. 유령왕의 앞이었다. 내려 앉으며 가부좌의 자 세를 한 은성이 조용히 눈을 뜨며 유령왕에게 심령을 발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이요?"
"왜? 원하는 것을 말하면 들어줄 것이냐?"
유령왕이 착 가라앉은 음성을 보내 왔다.
"한번 생각해 보겠소. "
은성도 나직이 대답하였다.
"후훗 그래, 먼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보거라! 왜 금호에게 무공을 가르치려고 하였느냐?"
벌써 세 번째 묻는 질문이었다.
"혼자서는 상대하기 벅찬 적수들이 있소. 금호에게 무공을 가르쳐서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요."
"뭐라고! 너의 무공으로도 상대하기 벅차단 말이냐?"
"그렇소."
"캬캬캬캬캬! 너보다 강한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냐. 정녕 인간이 확실하더냐?"
"아직은 확신할 수 없소. 하지만 자신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오. 게다가 인간이 아닌 것도 있소."
"무엇이냐?"
유령왕이 흥미가 일었는지 다급히 물었다.
"사문의 원수가 있는데 지옥의 마수(魔獸)조차 다룰 수 있다고 들었소. 실제 금호를 수련시킨 것은 그 마수들 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소."
"그 원수의 이름이 무엇이냐?"
"마교 십대장로중의 한명인 야차귀노요."
"야?차?귀?노... 캬캬캬캬캬."
유령왕이 야차귀노의 이름을 한자씩 강조하며 곱씹듯 부르더니 광포한 웃음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 데 유령왕의 웃음소리에는 살기가 베어져 나오고 있었다. 종적에는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분간할 수 조 차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울부짓던 유령왕이 다시 은성의 뇌속으로 음성을 전달했다.
"야차귀노의 악행이 도가 지나쳤는가 보구나.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운명인가 보다. 보아하니 너는 신비한 능 력을 많이 가진 듯 하구나. 삼일전에 만들었던 호랑이의 형상을 다시 만들어 보거라."
은성이 태극진기를 운용하자 눈앞에 금호가 만들어졌다. 유령왕은 금호의 형상에 매우 관심이 많은가 보았다.
한참동안 만져 보더니 은성에게 음성을 전달하였다.
"일반적인 진기가 아니로구나. 매우 훌륭하다. 그런데 이것은 며칠동안이나 형상을 유지할 수 있느냐?"
유령왕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해져 있었다.
"아마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흩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나와 진기의 끈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생령의 끈은 연 결되어 있소. 나에게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위치를 느낄 수가 있을뿐더러 내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 게 진기를 거둘 수도 있소."
"너만 살아 있다면 평생 말이냐?"
"그렇소."
은성의 말을 들은 유령왕이 한참동안 침묵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또다시 질문을 하였 다.
"그때보니 너는 이것의 크기를 늘였다 줄였다 조절할 수 있던데 인간의 형체로 만들 수도 있느냐?"
"가능하오."
은성의 대답을 들은 유령왕의 신형이 부르르 떨려 왔다. 신형이라고 해 봤자 영기가 뭉친 덩어리일 뿐이지만 말이다.
"운명인줄 알았더니 숙명이로구나!"
유령왕이 뜻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중얼거림 조차도 은성의 귀에 들려왔다.
"너는 나와 계약(契約)을 맺을 수 있느냐?"
"예?"
은성이 의외라는 듯이 반문하였다.
지금까지 유령왕의 말을 들어보니 태극진기로 만든 형상을 원하는 것 같았다. 금호의 형상이건 인간의 형상이 건 유령왕이 원하면 인간을 헤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기꺼이 넘겨주려고 작정하고 있던 은성이었다.
영기로 만들어진 유령왕이 아닌 태극진기로 만들어진 유령왕이라면 적수가 없을 터이었다. 진기만으로도 강기 를 상대하였는데 강기덩어리인 태극진기로 무장을 하고 공격을 하면 은성조차도 일합(一合)을 자신할 수 없었 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계약을 요구한다는 것인지...?
계약을 맺음은 은성에게 봉인이 되고 은성의 명령을 기꺼이 따르겠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유령왕이라도 천도(天道)를 어길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 계약에 응하면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원해서 하는 말이요?"
은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 계약을 맺겠느냐?"
"좋소."
은성에게는 절대로 손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유는 계약이 끝나고 물을 수도 있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이 조건만 수락하면 기꺼이 너의 종이 되어줄 것이다."
"말해 보시오."
"야차귀노가 부리는 마수들을 상대하고 그에게 강제로 봉인돼 강시가 된 수많은 나의 백성들을 구해내야 하므 로 네가 내놓을 수 있는 모든 진기를 발휘하여 인간의 형상을 빗은 후 거기에 나를 소환시키는 조건이다."
유령왕의 말을 듣고서야 은성은 유령왕이 봉인을 불사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야차귀노는 유령왕에게도 원수지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석동안에 깃든 영기만으로는 야차귀노를 상대할 자신이 없을뿐더러 석동안의 영기는 산을 벗어나 시간이 흐르면 흩어져 사라졌기 때문에 공격할 형체를 얻을 수 없는 유령왕이 은성의 진 기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은성이 가진 진기 전부가 필요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모자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 기를 모두 내 놓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령왕이었다. 은성이 죽으면 진 기가 흩어진다니 은성의 안위에 무관심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은성이 절대로 진기를 내 놓을리 없을 것이라 는 판단이 든 유령왕이 절충안을 내 놓고 있는 것이다. 은성을 보호하면서 야차귀노를 상대하기 위한 가장 좋 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은성이 태극진기가 없어도 심기를 발휘하여 더 높은 무공조차도 발휘할 수 있음을 알 았다면 판단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중단전에 조그마한 내단이 형성되어 있어서 몸안의 태극진기가 모두 빠져 나가도 오장 육부를 보호하고도 남을 태극진기를 보존할 수 있는 은성이 거절할리 없었다. 그리고 심기(心氣)가 존재하는 이상 태극진기는 큰 소용도 없었다.
"조건을 수락하겠소.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구해내고 야차귀노를 소멸시킨 후 당신의 몸을 원래대로 돌이켜 주겠오."
"정.. 정말이냐?"
유령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은성의 배려에 감격하였다는 듯한 음색이었다.
"날 믿고서 봉인을 자청하지 않았소?"
"... 알겠습니다. 저도 주군으로 존대하겠습니다."
유령왕의 음성이 끝나자 은성이 태극진기를 발휘하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형상은 처음 이었지만 무림맹에 있을때 많이 연습한 보람이 있었는지 생각보다는 쉬웠다. 하단전과 중단전에 축적된 태극 진기를 한점 남김없이 뽑아 내어 드디어 형상이 완성되었다. 유령왕이라는 별호에 맞게 위엄있고 강인해 보이 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는데 진기로 모발과 의복조차도 만들어 주었다. 무림맹을 떠나올때 챙겨온 도구로 부 적을 그려 금호를 소환하던 대로 주문을 외우며 의식을 진행하자 유령왕이 은성이 만든 형체 속으로 스며 들 어가 버렸다.
"주군께 충성을 맹세 합니다. 어떤 분부이시던지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유령왕이 은성앞에 부복하자 은성이 심기를 발해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 유령왕이라고 부르겠소. 먼저 유령왕의 능력을 알아야 겠으니 가진 능력을 내게 보여 주시오."
"알겠습니다."
유령왕이 펼치는 재주를 바라보던 은성이 나직이 감탄을 하였다. 태극진기로 형체를 갖춘 유령왕의 무위는 더 욱 가공해져 있었던 것이다. 파괴력만이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신법조차도 더욱 빨라진 것 같았다. 어찌나 빨리 날아 다니던지 은성이 심안을 극대화 시켜도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유령왕의 신체는 은성과 생령으로 이어진 태극진기이라서 은성은 느낄 수가 있었다. 영안이 개발되지 않았는데도 유령왕에 대해서는 영능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령왕에게는 은성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 또 있었다. 유령왕의 형체가 녹아들더니 금령석 속으로 녹아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이동하였는지 벽쪽에서 물처럼 금색 강기가 흘러 내려오더니 땅에서 뭉치면서 다시 유령왕의 형체를 이루었다. 아마도 유령왕의 선천적인 능력이었던 것 같았다.
벽 앞에서 형상을 이룬 유령왕이 한발 한발 은성에게로 걸어왔다. 그런데 유령왕의 몸 색이 변화되고 있었다.
태극진기로 만든 옷 색상이 붉은 색에서 검은색 그리고 청색으로 변화되는가 싶더니 머리카락 조차도 색상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피부에도 생기가 돌고 얼굴 모습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더니 갑자기 늙은이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여자로 변 하는가 싶더니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은성의 앞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다시 유령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은 옷 색상과 검은 머리 그리고 생기넘치는 피부에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은성의 눈앞에 다가선 유령왕이 마지막 능력을 보여 주었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은 후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버린 것이다. 잘라진 목 부위는 칼로 자른 듯이 매끈하였는데 당연히 피 한방울 흘러 나오지 않았다. 두손으로 받쳐든 목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금 머리가 목 위에 얹혀졌다. 유령왕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멀쩡하였다.
은성이 조사지공 최후의 초식인 일종무종일을 펼쳐 터트려 죽였는데도 흩어진 진기들을 뭉쳐 다시 형상을 이 룬 유령왕에게는 하찮은 재주일지 몰라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능력이었다.
유령왕의 능력은 은성의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은성은 유령왕에게 더한 능력을 주고 싶었다. 유령왕이 처 음에 은성을 공격할 때 백호권법을 펼쳤던 것으로 보아 유령왕의 재능은 인간이 상상하는 경지를 넘어선 것처 럼 보였다. 자신이 금호에게 가르치는 것을 훔쳐 배웠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처럼 능수능란하게 펼쳐 내었는데 직접 가르치면 그 효과는 어떠할 것인지...
역시나 유령왕은 은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번 보면 흉내를 내고 두 번 보면 거의 비슷하게 재현하였 으며 세 번 볼때에는 정심해지고 있었다. 해동권법과 사신권법에 사상 금나술까지 가르친 은성은 화룡검을 풀 어 무진쾌의 수법과 유성검법조차 가르쳐 주었다.
다른 무공은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신법은 은성보다도 몇 배나 뛰어났으며 지법등은 강기로 이루어진 신체의 특징상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동안에 흐르는 지하수는 신묘한 기운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물만 먹었는데도 은성은 전혀 허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은성에게서 배운 유령왕의 무공이 완성된 것은 무림맹에서 곤륜으로 떠나기로 예정된 하루 전날 이었다. 이제는 유령왕도 신법에만 의지하여 무작정 공격을 하지 않았다. 신묘한 무공의 정수를 배워 깨우친 후 상대방의 동작에서 허점을 파악하고 허점을 유도하며 또한 허점을 예측하여 공격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 다. 빠른 신법에만 의존하여 싸우던 며칠전에 비하여 최소 두배는 강해져 있는 것이다. 무림맹으로 떠나기전 유령 왕의 능력을 모두 파악한 은성은 유령왕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나에게서 백장 밖을 벗어나지는 마시오. 하지만 내가 부르기 전에는 나타나지 마시오. 가능한 땅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존명"
유령왕이 짧게 대답한 후 스르르 녹아 땅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유령왕의 능력으로 보아 백장 거리는 눈깜짝 할 순간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절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되자 심기를 운용하여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은성은 올때와 마찬가지로 무림맹으로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아무런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유령왕이 뒤따라 날아오는 것이 느껴지자 내심 뿌듯한 생각이 들었다.
유령왕에게 물어 들은 산 이름은 무산(巫山)이었다. 태양신 염제(炎帝)의 딸인 요희(瑤姬)가 죽어 운우의 신 이 되어 살고 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산이었다. 무산신녀(巫山神女)라 불리는 요희가 깃들인 산이 영험하 지 않을리 없었다. 영기가 넘쳐 흐르니 영기를 얻으 려는 영물들 뿐만 아니라 유령왕같은 요귀의 왕도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무산을 지나 한시진쯤 날아가자 멀리 무림맹의 천추영웅전이 보였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보무당 상부의 대지가 잠시 미동치듯 흔들거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내일은 무림맹에서 현천교를 치러 곤륜으로 떠 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