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0절 :
보무당으로 돌아온 은성은 방안에서 육합천서를 펼쳐 들고 고민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육합천서 안에서 유령(幽靈)을 불러내는 방법을 터득하여 태극진기로 만든 형체를 움직이게 할 수는 있었지만 왠지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육합천서안에 있는 술법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강한 무엇 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금호에게 무한의 능력을 주는 것이었다. 태극진기로 작은 호랑이 형상을 만든 후 금호를 소 환하자 어느새 생명을 가진 금호가 방안을 돌아다녔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뛰노는 금호는 자유의지를 가 진 애완견처럼 활동적이었다. 은성이 오늘 아침에 했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물건을 물어 뜯거나 부서트 리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은 어쩔 수 없는가 보았다.
아직은 금호의 진정한 위력을 모르고 있는 은성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알아야만 했다. 금호가 가진 위력을 실험해본 후 그 힘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소가 마땅치가 않았다. 방 주변에 호신강막을 펼쳐서 소음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할 수는 있었지만 방안에서 금호의 진정한 위력을 알 아볼 수는 없었다.
금호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던 은성이 갑자기 행낭을 꾸리기 시작하였다. 옷가지와 함께 부적을 만들 도구까 지도 꼼꼼이 챙긴 은성이 사부님과 검후에게 남길 편지 한통씩을 작성한후 탁자위에 한통을 내려놓고 방문을 나섰다. 생각할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곤륜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돌아오겠다는 서신이었다
허공섭물로 끌어당겨진 금호는 어느새 은성의 손바닥 안으로 스며 들어가고 은성의 허리춤에는 화룡검조차 메 어져 있었다. 어제 저녁처럼 진수기를 운용하여 어둠과 동화된 은성의 신형이 '스팟'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야공의 대지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타전의 밤공기가 살며시 요동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늘높이 솟구쳐 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개미새끼 한 마리 숨어들 여지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하는 무림맹에서 사람 한명이 빠져 나가는데 수비 무사 중 한명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니 무림맹의 내당주가 알면 눈이 까뒤집힐 일이었다.
허공으로 오백여장이나 솟구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큰 산맥들이 용이 꿈틀대는 듯한 기상으로 여기저기 펼 쳐져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허공중에서 의연한 기상으로 까마득하니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니 가 슴속에 호연지기가 솟아올랐다. 어디라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은성이 방향을 잡은 곳은 동쪽이었다. 하지만 우연한 이 결정으로 인하여 무림의 향방이 바뀌어지게 될 줄은 은성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무경 칠단계를 완성한 이후 은 성의 무공은 또 다른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중원으로 건너오기 전만해도 금아의 등에 타거나 화룡검을 의 지하며 허공을 비행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순수한 내력만으로도 몸을 자유자재로 이동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듯이 천리마 보다도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지만 내력의 소모는 거의 없었다. 한번 속도가 붙자 한줌의 진기로도 가속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한시진 정도나 비행하였을까?
멀리 높다란 산맥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깊은 영기가 서리서리 맺혀져 있는듯한 신묘한 산이었 다. 산이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밤 여기에 오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듯 강하 게 은성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산위에서 바라보니 유난히 마음에 드는 계곡이 있었다. 천마리 용들이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듯한 산맥중에서 가장 심처에 위치한 계곡이었다. 가까이 내려서니 천혜(天惠)의 절경이 따로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단애는 천길이나 되고 밤인데도 운무가 가득하니 사람의 발길이 닿지않은 태고의 신비가 고스 란히 감춰진 계곡이었다. 운무속으로 빠져 들었지만 심안을 발휘하자 사방을 대낮같이 파악할 수가 있었다.
속도감 때문인지 대략적으로만 훓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영기가 뿜어져 나오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심안을 발휘해서 다행이지 시력에 의존하였다면 발견할 수 없을 뻔한 장소였다.
영기를 따라 몸을 날리는데 참으로 기괴한 지형지세가 펼쳐지고 있었다. 위로는 천길이요 아래로는 일백여장 은 됨직한 단애 중간에 사람 한두명 들어갈만한 작은 바위 틈새로 들어가 보니 밑으로 지옥의 아가리만한 검 은 공동이 뻥 뚫려 있었다. 한참을 내려 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땅 밑으로 삼백여장이나 더 내려와서야 비로소 바닥에 닿을 수 있었는데 지하세계인 듯 넓은 공지가 나타났다.
칠흑같은 어둠이었지만 은성은 사방을 환히 살필 수가 있었다.
사방 오백여장이 넘을 듯한 널따란 공간이었다. 삼십장 위쪽의 천정에는 종유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 며 사방의 벽에도 지하수가 흘러왔다 빠져나간듯한 흔적인듯 작은 동굴들이 산재하여 기괴한 암형(巖形)을 이 루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은 달랐다. 천정에서 떨어진 듯한 돌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예상외로 편 평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닥의 석질이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쇠보다 더 단단하다는 금령석(金靈石)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사방에 작은 풀 한포기 없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지 하동부에서 금령석 바닥을 뚫고 자랄 식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마실 물이 있었다. 이 넓은 지하 석동(石洞)에 영기(靈氣)가 넘실대게 하는 원인은 다름아 닌 한줄기 짧은 수로에 있었던 것이다. 폭이 반자에 길이 두자 정도밖에 안되는 수로였다.
기이한 일이였다. 한쪽 구멍에서 빠져나온 물의 세기로 보면 분명 분수처럼 뛰쳐나와야 마땅하지만 빠져 나온 물이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른 쪽 구멍으로 빨리듯이 스며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였다. 가까 이에 손을 대어보니 이유가 있었다. 물이 빨려 들어가는 구멍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조각을 넣어도 흔적도 없이 빨아들이는 엄청난 흡입력도 조금은 부족한 것 같았다. 물이 빠져나오는 구멍으로 세어 나오는 영기가 조금씩 누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의 누출로 석동 안에 영기가 가득 차고 가득 찬 영기가 석동 밖으로도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영기는 대기보다 무거웠다. 한꺼번에 빠져나가지 않고 석동 안에 가득 넘칠때에만 조금씩 빠져나갈 것이다.
영기가 가득 차서인지 심령이 더할 수 없이 안온하고 편안해진 은성은 이곳에서 금호에게 수련을 시키기로 마 음을 다졌다. 이처럼 심산유곡의 깊은 석동 속에는 괴상한 요수(妖獸)들이 살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그런 흔적 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비린내도 없었을 뿐더러 하다못해 짐승의 터럭 한 개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
태극진기로 금호를 만들어 술법으로 '금호'라 봉인한 유령을 불러내자 금호가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금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진기 덩어리에 유령이 소환된 것이므로 은성이 어떠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는 금호는 유령의 심령에 이끌려 행동할 것인데 무언가 두려움에 찬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유령에게 두려움이 있다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금호는 분명히 두려움에 떨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소환하였을때는 그처럼 생기발랄하던 금호가 꼬리도 내리고 슬슬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은성이 확연히 느낄 정도였다. 금호가 말을 할 수 없음이 답답해지는 순간이었다. 은성이 금호에게 다가가 오 른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쓰다듬으며 태극진기도 보충해 주었다. 금호의 크기가 두배로 커지 자 용기도 두배로 늘었는지 조금 나아졌다.
금호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금호에게 석부의 끝까지 갔다 오라는 명령을 내린 은성은 조금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금빛이 번쩍하고 사라진 후 언제 사라졌냐는 듯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지만 은성의 이형환위 신법보다 는 조금 못하였기 때문이다. 강기 덩어리라서 석벽을 두부처럼 파헤치고 아름드리 종유석을 스치기만 하여도 파괴시키는 것은 이미 예상된 위력이었다.
한가지 고무적인 것은 놀랍도록 변화무쌍하다는 것이었다. 유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은성의 묵귀영 신법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표홀하면서도 수많은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은성과 비무를 벌이는 금호는 연 전연패를 당하고 있었다. 환상적인 동작으로 허공 가득이 잔영을 남겨 가며 은성에게 달려들고 있었지만 은성 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심기(心氣)가 아닌 태극진기로 백호권과 사상금나술만을 펼치는데도 금호가 맥을 못추고 번번히 당하자 은성이 금호를 멈추게 한 후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들었다.
금호정도만 하여도 은성에게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검강이나 권강이 생명을 가지고 공격해 온다면 이 를 막아낼만한 무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교에서도 십대장로정도나 되어야 상대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은성이 한밤중에 예까지 날아와 수련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림사의 마인이 언급한 천축국의 고수들과 사문의 원수인 야차귀노를 상대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개발하 기 위함이었다. 무림맹에서 느꼈던 영안의 소유자들도 있었다.
금호 몇 마리가 덤비더라도 자신의 무위를 넘어설 수도 있을 천축국의 고수들과 야차귀노가 부린다는 지옥의 마수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진기를 금호에게 주입시켜도 자신이 심기를 발휘한다면 금호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극진기에 비해 심기가 훨씬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금호가 자신에게 쉽게 제압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자신은 상승의 무공수법들을 익혔지만 금호는 그 렇지 않았다. 야수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공고수에게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유령이라서 동작은 예측 불허할 정도로 변화 무쌍하고 빨랐지만 조금만 대적해보면 공격 수법이 눈에 선히 보여졌다.
오로지 유령신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해저 깊은 곳에서 익힌 묵귀영 신법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환술 을 펼쳐도 은성의 심안을 속일 수도 없었으니 번번이 패하고 마는 것이다.
은성은 금호의 위력을 높일만한 방법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태극진기를 반 정도 추가로 주입시키자 금호의 크기가 시라소니만큼 커졌다. 비무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 같았다. 은성의 권강과 수강에 맞고 튕겨 나가 동굴 바닥에 뒹굴기 일쑤였다. 다행히 강기 덩어리라서 그런지 회복은 빨리되고 있었다. 강기가 강기에 부딪혔다고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은 금호가 순식간에 회복되지 못하고 끙 끙대다가 기력을 회복하는 것을 보면 태극진기로 빗은 호랑이 형체에 깃든 유령 '금호'가 충격을 받는 것 같 았다.
생명체가 내뿜는 생기(生氣)속에는 생령(生靈)이 깃들여 있다. 그 생령에 강한 충격을 받은 유령이 정신적 타 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유령이 죽을리는 없었다. 하지만 타격이 강하면 강할수록 금호가 일어나서 재도 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금호에게 무공을 가르치며 따라 해 보라고 하였는데 따라하기는 잘 하지만 응용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사신권 법중 백호권법을 세 번이나 연달아 시연하며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지만 금호는 적절히 응용하지 못하고 있었 다. 괜히 동작만 이상해져서 가르치지 않음만 못한 것 같자 은성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시 한번 금아가 은성의 권강에 나가 떨어지고 은성이 이제는 비무를 멈추고자 할때였다. 갑자기 은성의 머 릿속으로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캬캬캬, 잔인한 놈이로구나."
깜짝 놀란 은성이 사방을 둘러 보았지만 보이는 이 하나도 없었다. 심안을 펼쳐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석동의 넓이가 오백장이라고 하여도 은성에게는 전혀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심안을 발휘하면 개미새끼 한 마리가 움 직여도 알아 차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감지할 수가 없었다. 환청이 아닌바에야 분명히 누 군가가 있을 것인데 알아 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요?"
사방을 둘러보며 심안을 극대화시킨 은성이 나직이 물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심기를 발휘하여 심안 이 극대화되자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럴 수가!"
일전에 무림맹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안이로구나.'
은성이 긴장된 눈빛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음..."
은성의 침음성이었다. 석동속의 영기가 소용돌이 치더니 급격하게 한 곳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바로 작은 수 로가 놓인 장소였다. 영기가 뭉치며 만들어 낸 것은 뚜렷하지 않지만 사람의 형상이었다.
순식간에 석동속에 넘실거렸던 영기는 물론이고 수로의 입구쪽에서 흘러 나오는 영기조차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괴물체의 눈이 위치된 곳으로부터 감당키 힘든 예리한 기세가 흘러 나왔 다. 그런데 괴인형을 본 금호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였다. 죽음조차 초월한 유령이 무엇이 두려운지 떨고 있는 것이다. 은성이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유령도 소멸되어 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괴인형은 아무리 보아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요물이란 말인가?
요물이 영안(靈眼)까지 발휘할 수 있다면 보통 요물이 아닐 것이라 판단한 은성이 금호에게 손을 뻗어 태극진 기를 회수해 버렸다. 진기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진기속의 생령은 은성과 이어진 태극진기 이라서 회수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쉽게 회수할 수가 있었다.
은성의 안색은 어느 때보다도 침중해져 있었다. 금호를 수련시킨 목적은 저와 같은 요물을 퇴치하기 위함이었 다. 그런데 호랑이 앞에 놓인 강아지 새끼마냥 두려움에 벌벌 떨며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다니 한심하다는 생 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대방이 그처럼 강하단 말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싸워 보지도 않고 투지를 잃다니... 심기를 운용하여 싸울 태세를 갖추던 은성은 흠찟한 느낌에 급히 몸을 날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