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87화 (87/152)
  • ■ 제 87절 :

    침상에서 내려선 은성이 진금기(眞金氣)를 운용하여 눈앞에 작은 백호 한 마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아무리 가늘더라도 백호와 은성을 연결해주는 기의 끈이 있어야만 하였다. 물론 기감을 끊고 심기로써 조정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기감이 끊긴 백호의 진금기가 대기중에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결국 진기로써 만든 형체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분해되어 소멸되는 것이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 등 사신 권법에 운용되는 신물(神物)들을 오행진기를 사용하여 만들어 보았는데 하나의 예외도 없었다. 진기로써 여러 가지 동물들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던 은성의 눈에 이채가 뜨여졌다. 어제 아침 검각산으로 떠난 금아를 장난 스레 만들어 놓았는데 일각이 지났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아!"

    일순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금아는 금색인지라 오행진기가 통합된 태극진기를 운용 하여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은성이 다시금 진기를 사용하여 작은 호랑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백색이 아닌 금색이었다. 짧은 시 간안에 만들어진 호랑이는 진금기를 운용하지 않고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금호는 한참이 지났는데도 소멸되지 않고 그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극에서 분화된 오행진기는 그 각자가 불완전 한 존재이라서 자연속에서 소멸되어지는 반면에 완전한 자연진기인 태극진기는 자연과 동화되어 그 형상이 변 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은성은 지금껏 방안에서 떠 다니던 각각의 오행진기들을 흡수하고는 귀여운 금호(金虎) 한 마리만을 남겨 놓 았다. 오래전부터 습관화된 피부 호홉인지라 소멸시키고자 하는 내기의 동물은 손바닥만 가져다 대어도 솜에 물이 빨려들 듯 손바닥으로 흡수되어졌다.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금호의 크기를 조절하고 한 마리의 금호를 두 마리로 나눈 다음 다시 통합시키다 보니 날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금호는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움직일 수가 있었다. 심기(心氣)를 사용하여 움직이게 하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았다. 하지만 진기와 심기를 거두자 목각 인형처 럼 움직임이 멈춰져 버렸다. 멈춰진 금호를 조용히 쓰다듬자 금호가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사부님과 사숙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연구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부님! 밤새 편히 주무셨는지요?"

    사부의 방에 들어가서 은성이 큰절을 올리며 문안 인사를 여쭙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자운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편히 잘 잤구나. 너도 편안하였느냐?"

    "예, 사부님."

    오붓한 사제지간 이었다. 은성이 밤사이 천추영웅전을 다녀오고 명상에 잠기느라 분주하게 보냈듯이 자운검도 조사지공을 연구하느라 두시진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을 끼칠까봐 서로를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제 비천문에 들려 검후의 부모를 뵈었다 했는데 미처 물어보지를 못했구나. 그래, 흡족해 하시는 눈치더냐

    ?"

    은성이 어젯밤 조금 늦은 시각에 보무당에 도착했기 때문에 차만 마시고 오늘로 미룬 질문이었다. 사랑스런 제자의 장래가 결정될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은성의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지금 은성의 장래를 같이 고 민하고 걱정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할 수 없이 좋은 분들이셨습니다. 저를 친아들같이 반갑게 대해 주셨습니다."

    은성의 대답을 듣자 자운검이 마음이 놓였는지 미소를 띤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손으로 긴수염을 연신 쓰다 듬는게 무척 흐뭇한 기분인 것 같았다. 사실 부족함이 없는 제자였다. 검후도 훌륭한 신부감이었지만 은성도 비할데 없이 훌륭한 사윗감이었던 것이다. 자운검이 보기에도 은성과 검후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불안감이 싹 가시는 자운검이었다.

    "검후와 혼사를 논해본 적이 있느냐?"

    자운검의 말에 은성이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사..사부님, 아직 어린데..."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애써 변명하고 있었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사부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본 은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매의 사부님이 마교의 광명우사에게 패해 목숨을 잃으셨는데 하매를 도와 보타문의 명예를 되찾아 주고 싶 습니다. 그리고 손사숙님의 원수를 갚아 위로를 해 드린 후 정식으로 청혼하겠습니다."

    볼수록 제자 하나는 잘 둔 것 같았다. 의젓한 제자를 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였다. 동방파가 거처하는 숙소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문을 두드림도 없이 거침없이 들어올 수 있 는 사람은 한명밖에 없었다. 사제인 구천진인이었다. 오늘도 밤새 법술을 수련하고 이제야 들어 오는 것 같았다.

    손사제가 죽은후 피맺힌 원한을 반드시 갚자고 맹세한 자신과 구천진인이었다. 지금도 손사제가 보고는 싶지 만 십년이 흐른 지금 원한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하지만 '맹세'는 전혀 퇴색되지 않고 아직도 자신과 구천 진인을 강하게 묶어 놓고 있었다.

    사제의 복수를 위해 약속한 맹세가 족쇄가 되어 자신과 구천진인을 한치의 여유도 없게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은성이 찾아와서 그나마 여유와 미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 니 갑자기 제자에게 해줄 말이 생각났다.

    "은성아! 손사제의 원수는 우리들 몫이니 너는 신경쓰지 말거라. 그리고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백사람을 죽 이는 것도 도에 어긋나지만 백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사람을 죽이는 것 또한 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인명은 재천이니 혹시나 나와 사제가 잘못되더라도 원한을 갚는다고 무차별한 살상을 하지는 말거라. 약속하겠느냐?"

    갑자기 자운검이 엄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자 은성은 깊이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이 대답했다.

    "약속하겠습니다. 사부님."

    대답을 해놓고 생각해 보니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당부하는 말이었다.

    사부님의 온정에 다시 한번 코끝이 찡해졌다. 하지만 사부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사부와 사숙이 잘못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실로 들어서다 방안에서 사제간에 대화소리를 들 은 구천진인이 자운검의 방으로 들어왔다.

    은성이 일어서서 공손히 인사를 드리자 구천진인이 환한 표정으로 은성의 예에 답하고는 자운검을 바라보았다.

    "사형,! 법력이 크게 늘었습니다."

    호쾌하게 외치는 구천진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 같이 들떠 있었다. 흥분을 주체할수 없는 듯한 눈빛으로 이번 에는 은성을 바라보며 다가와 손까지 잡아 주었다.

    "모두 네 덕분이다. 심신일체(心身一體)라고 몸이 완쾌되니 영력조차 강해진 듯 하구나!"

    "사제, 요 며칠 좋은 일만 생기는구만. 축하하네!"

    사제의 진전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자운검의 목소리였다.

    법술 수련을 마치면 항상 초쵀한 얼굴로 초죽음의 되어 자신이 방으로 들어가던 구천진인 이었다. 겪어 보지 않아도 그 힘겨움이 몸으로 직접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사제의 기분은 최고인 것 같았다. 사제의 환 한 웃음을 보니 자신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법력이 증가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사숙님, 사숙님과 사부님 둘중에서 어느분이 더 강하신 거예요?"

    어찌보면 어린애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은성으로써는 진즉부터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들 의 내공 정도나 무위는 심안(心眼)으로써 감지할 수 있었지만 법력은 감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공에 비해 법력이 고강한 술사를 만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방파에서 평생 무공만을 수련하신 사부님과 무공도 익혔지만 법술에 더 치중한 사숙님중 어느 분이 더 강한 것인지 질문한 의도는 무공과 법술을 익힌 사람중 어떤 사람이 더 위험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함이었다.

    은성의 물음이 진지함을 의식한 구천진인이 자리에 좌정한 후 은성도 앉도록 시켰다. 무공에 관련된 질문이면 사형이 답변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무공과 술법을 비교하는 것이므로 두 가지를 동시에 배운 자신이 대답해 주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았다.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구천진인이 살포시 눈을 뜨고 은성 을 바라보며 질문을 하였다. 이해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하는 방법이었다.

    "무공과 술법중 어느 것을 배우는 것이 더 위험하겠느냐?"

    "술법입니다."

    동방파에서 육합진인에게서 술법을 배우면서 그 위험함을 누누이 들었던 은성이었다. 술법에 입문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성취를 얻는 사람이 매우 드물고 대다수 수련도중 미치거나 죽음에 이를 정 도로 위험한 것이 술법 이었다. 그에 비해 무공은 일정 수준까지는 쉽게 익힐 수가 있었으며 잘못하여 주화입마가 되어도 최악의 경 우 무공을 잃고 불구자가 되는 것으로 그쳤다.

    "무공은 나로써 공격하고 술법은 다른 것으로 공격시킬 수 있다. 무엇이 더 잔인해질 수 있느냐?"

    "술법입니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살인하지 않는다면 죄책감이 조금은 희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전의 상대방만을 공격할 수가 있는 무공에 비해 술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방까지, 심지어는 몇 백리 떨어진 적에게까지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었다.

    보통의 법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위력도 현저히 저하되겠지만 말이다.

    "무공은 인간이 익히는 것이지만 술법은 잡신과 요귀는 물론 지옥에 있는 악귀와 악신 그리고 천상의 신장까 지도 불러들일 수 있다. 어느 것의 위력이 더 세겠느냐?"

    "술법입니다."

    은성이 다소 힘이 빠진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자신도 육정육갑신(六丁六甲神)을 부릴 수 있었지만 법술을 익힌 사람중에는 이보다 더한 존재와 계약을 맺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존재가 지옥의 악신이라 면 아무리 무공이 고강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맞다. 무공에 비해서 술법이 배우기는 어렵지만 훨씬 잔인하고 위력도 강하다.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다. 술법은 강하면서도 위험하고 많은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지옥의 악신과 천상의 신장을 뵐 기회도 없을뿐더러 그들이 온전한 힘으로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공은 생각이 이는 순간 아니, 무의식적으로도 발휘할 수 있지만 술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한 후 주문을 외우는데 시 간이 소요된다. 육체가 약할뿐더러 술법을 펼치기 위해 지연되는 시간은 술법가의 최대의 약점이다."

    구천진인이 말을 듣고 보니 무공을 익힌 사람이 반드시 불리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공을 익히면 육체를 단련하던지 내기를 집중하여 외부의 충격에 즉각적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법술을 익힌 사람은 권경이 실린 주먹 한방에도 죽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숙과 같이 무공과 법술을 동시에 익히면 모를까 단순한 위험에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 가 사숙님의 경우처럼 술법을 익히다 보면 신체를 정상적으로 유지시키기가 힘들 수도 있었다. 사숙이 결론을 내리지 않고 말을 끝맺자 지금껏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자운검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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