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85화 (85/152)
  • ■ 제 85절 :

    천추영웅전(千秋英雄殿) 만등회(万等會) 내부..

    거대한 회의실 안쪽에서 나지막하면서도 비장한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회의실 분위기로 보아 매우 중대 하면서도 심각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림맹주를 중심으로 무림맹의 핵심세력인 여덣명의 원로 들이 좌우로 네명씩 숙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시진 전에 곤륜파에서 전서구가 다시 도착했습니다. 네 마리가 도착했는데 모두 동일한 내용입니다. 현천 교의 무리들이 곤륜산으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작은 규모지만 벌써 몇 차례 접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무림맹주인 삼성검(三星劍) 반도승의 말이 끝나자 앞에 앉은 장로들 중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곤륜 파의 위기를 도와주기 위해 팔일 후에 떠나기로 계획을 세워 놓고 준비중이었는데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해졌 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눈코뜰새 없이 분주한 무림맹이었다. 멀리 청해성의 곤륜산까지 몇천명이 출전을 하는 데 준비가 부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맹주님, 그럼 출전 일정을 앞당기실 계획이신지요?"

    비단화의(緋緞花衣)의 뚱뚱한 사람이 말을 하였다. 무림맹의 살림을 책임진 보금원주(寶金院主) 황금산이었다.

    출전으로 모두가 분주하지만 그중에 가장 분주한 사람이 보금원주였다.

    현천교와의 결전이 몇일 정도 소요될지 지금은 예측조차 불가능한 시점이지만 계획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감 안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출전에 관련된 세부 작전구상은 문상에 의해 이미 수립되어졌고 며칠전에 이곳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원로들에게 통보되어진 상태였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지옥같은 나날이었다.

    수천명이 무장을 하고 곤륜산까지 이동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곤륜산에 도착한 이후에도 계속된 지 원을 하여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나 분주하였는지 열흘도 안되어 아까운 살들이 열근은 빠진 것 같았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일정을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곤륜파의 상황이 시급하여 한시라도 빨리 출정하고는 싶지만 여의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간과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한 사람이 도와 주어도 가능한 일이라도 시일을 늦추면 몇 백명이 도와주어도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최강고수들을 모집하여 출전시키더라도 곤륜파의 본전인 자소전(紫昭 殿)이 불타오르면 별무 소용인 것이다. 상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재고(再考)한 듯 좌중이 침묵하고 있자 맹주가 말을 이었다.

    "출전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정해진 날짜에 하겠지만 미리 선발대를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발대 관련해서 는 문상께서 새로운 작전구상을 마치셨다 하니 의견을 듣고 결정하기로 합시다."

    회의의 최고 주관자인 맹주가 회의 목적과 결정하고자 하는 사항만을 간략하게 언급한 후 발언권을 문상에게 넘겨 주었다. 무림맹을 이끌고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은 맹주가 해야 할 일이지만 결전에 필요한 상세한 사항 을 계획하고 검토하는 일은 문상에게 위임된 권한이었다.

    맹주가 회의 탁자의 왼쪽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 문상을 지적한 후 자리에 앉자 문상이 앉은채로 맹주에게 고 개를 끄덕여 예를 표하였다. 오늘도 푸른색 학창의에 하얀 깃털로 짠 백우선을 들고 있는 문상이었다. 사태가 위급한 것 같았는데도 문상의 눈빛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현천문의 도발이 예상치 못할 정도로 급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청해성에 가있는 이공자와 암영원에서 파악 한 정보대로라면 대대적인 공세는 처음에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앞으로 이십일 정도 지난후일 것입니다. 다만 파상적인 공세가 예상보다 조금 빨리 진행된 것 같습니다."

    조용하면서도 명확한 발음이었다.

    왠지 신뢰성이 풍기면서도 안정적인 문상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좌중에 감돌던 긴박함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다급한 사태가 발생해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문상의 침착함 속에 깃들인 자신감이 회 의실 분위기를 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잠시 말을 마친 문상이 시선을 바로 옆에 위치한 암영원주에게로 돌리자 인상 좋아 보이는 암영원주가 문상의 말을 이었다.

    "교도수가 백만명이고 무예와 술법에 능한 사람이 일만여명에 달한다는 현천교라 하여도 곤륜파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총력을 기울여도 승부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수비만을 목표로 한다면 천하의 마 교조차도 쉽게 함락하기 어려운 곳이 곤륜입니다. 교의 존폐가 달린 일인데 이처럼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보면 무언가 믿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암영원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내 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곤륜산에는 현천교의 호교무인들이라 파악되는 무술가들과 술법가들이 대거 모여 들었 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주력인 현세화단(現世化團)과 극락조단(極樂造團)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도착 하고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십일 정도는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일독식이라 불리는 암영원주의 말이 끝나자 회의 분위기는 다시 암울해지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수많은 첩보 조직을 이끌며 천하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암영원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현천교의 이해할 수 없는 의도가 내심 불안하였기 때문이다. 곤륜파를 치면 무림맹에서 도와주러 올 것이 기 정사실인데 과감히 공세를 감행하다니 그 의도를 전혀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의구심이 짙어진 눈빛들이 문상에게로 모여들었다.

    "암영원주의 말대로 아직까지는 현천교의 속셈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현천교주가 무모하게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상치도 못할 암계가 숨어 있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력이 개입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지만 마교가 개입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문상이 말을 하는 동안 좌중은 숨막힐 듯한 적막감에 잠겨 들었다.

    이번 결전의 상대가 현천교라고 생각하였는데 상황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잘못하면 정사마( 正邪魔)모든 무림세력이 총동원되어 건곤일척의 혈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현천교의 총공세 예상일이 예측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사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맹주님 말씀대로 먼저 선발대를 보낼까 합니다. 선발대는 저희 무림맹의 최정예인 적무대로 하겠습니다."

    문상의 말이 끝나자 맹주와 무상은 물론 원로들마저 당연한 결정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무림맹에서 무공에 능한 고수들이 속한 곳은 단 세곳에 불과하였다. 십칠세 이하의 잠룡들이 수련에 전념하고 있는 청무원이 첫 번째이고 무림맹 수비를 위한 내당과 무림 곳곳에 설치된 외당을 관리하는 수성원이 두 번 째였다. 하지만 진정한 무림맹의 전력은 무상이 원주로 있는 천무원에 있었다. 천무원은 세 개의 당으로 나뉘 어져 있었다.

    무림의 전대 고수는 물론 전전대 고수들도 일부 소속된 수무당(守武黨)과 은성의 사부등 해외고수들이 소속된 보무당(保武黨) 그리고 천무당이 있었다. 천무당에는 목검문에서 활약한 남궁혼이 대주로 있는 청무대와 암살 등 비밀스런 임무만을 담당하는 흑무대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적무대가 있었다. 무공과 법술을 익힌 고수들이 즐비한 무림맹 핵심 전력이 바로 적무대인 것이다.

    "선발대의 수장은 적무대주인 복마승(伏魔僧) 혜초이며 청해에 가 있는 이공자가 군사로써 보좌하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선발대는 내일 출발할 것입니다. 비록 예상에 없던 일이지만 보금원주께서는 출전에 차질이 발생 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몇일동안 잠을 잘 못 잤는지 얼굴이 푸석푸석 해진 보금원주가 문상의 말에 즉시 확답을 하였다.

    지금은 비상 시국인 것이다. 앞으로 살이 열근이 더 빠진다고 하여도 맡겨진 일은 완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평소 철두철미(徹頭徹尾)라는 말을 신봉하는 보금원주의 확답에 맹주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는 보금원주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그만큼 확고하였다.

    "곤륜과 합세하면 현천교의 무모한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으며 이후 후발대가 출전하면 현천교의 무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향후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현천교의 수뇌진들을 철저하게 응징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교입니다. 마교가 개입되었다면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 음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지만 마교 십대장로중 권마황과 번뇌마승이 죽 고 독중지마까지 부상을 입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문상의 말이 끝나자 원로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파도처럼 휘몰아쳐 갔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마교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뿐만 아니라 전력도 많이 감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교 십대장로는 마교에 대한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그들이 거느린 부하들의 무공이 높고 흉악하며 잔인해서만이 아니었다. 십대장로 개개인이 절세고수로써 그들중의 한 사람만 나타나도 피폭풍이 불고 근방이 시산혈해로 뒤덮여진 전례 때문이었다. 그런데 흉신거살 같은 마교 십대장로중 두명이 죽고 한명이 다쳤다니 이보다 더 좋은 소문도 없는 것이다.

    "문상! 십대장로중 권마황은 검후와 같이 온 해동신룡에게 당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지요?"

    평소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수성원주 무적지(無敵指) 구유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십년전 마교와의 대전(大戰)에서 권마황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벌였던 수성원주였다. 십년동안의 수련으로 묵 살지공(墨殺指功)이 경지에 들어 강기조차 뚫을 수 있게 되었지만 솔직히 아직도 권마황과의 대결에 자신을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발전한 만큼이나 권마황의 무공도 고강해져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평생 숙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권마황이 변방의 작은 문파 나이어린 제자에게 당했다니 쉬 믿어지지 않 았던 것이다. 수성원주의 질문에 답변을 하려던 문상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시선을 돌려 무림맹의 정보를 관장하는 암영원주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러한 일은 정보를 취급 하는 암영원주가 직접 말을 해주어야 신뢰성이 높아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문상이었다.

    역시 암영원주는 눈치가 빨랐다.

    "청무대원들의 말을 듣고 저도 반신반의 했었는데 저희가 여러모로 조사한 이후 권마황이 해동신룡에게 패한 사실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오후 검후를 만나기로 하였는데 사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소년의 무위가 자신의 사부보다도 높다는 말인가?"

    보무당 소속의 무인들에 대한 무공수위를 잘 알고 있는 무상 조차도 암영원주의 말이 쉬이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하였다. 그렇지만 암영원주의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어제 검후께서 사공자와 비무를 하여 이겼다는 사실은 무상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상께서도 인정하셨 듯이 검후의 무공은 전대 검후와 비슷하고 권마황과도 능히 대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비무를 지켜 본 이공녀의 말로는 해동신룡의 무공이 검후에 비하여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음..."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무상이 눈빛을 반짝이었다. 만약에 사실이라면 엄청난 전력이 보강될 수도 있었기 때 문이다. 일반적인 고수 몇십명보다는 한명의 절세 고수가 더 필요한 곳이 무림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해동신룡이 무림맹을 도와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의 스승이 현재 보무당에 머물고는 있지만 동방파가 그처럼 뛰어난 무공을 익힐 무공비급을 가지고 있다면 무림맹에서 내건 비급 몇 권 에 연연하여 굳이 무림맹에 머물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잘못하면 해동신룡은 커녕 그의 사부와 사숙조차 보 무당을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무상의 심중변화는 얼굴에 잠시 스쳐 지나갈 정도로 짧았지만 문상만은 알아 차린 것 같았다. 문상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어리어지고 있었다.

    "무상님, 동방파의 두분은 가슴속에 마교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복수를 마치기 전까지는 동방파의 노영웅 두분과 해동신룡은 저희 무림맹을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해동신룡은 검후와 보통 사이가 아 닌 것 같습니다. 검후가 머물러 있는 한 무림맹을 쉽게 떠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문상의 설명을 듣고 안심이 되었는지 무상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자신보다는 반도 안되는 인생을 산 문상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감탄스럽기만 하였다. 이미 출신입화의 무공 경 지를 이룬 무상이었다. 무공으로는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고 조직을 관리하며 작전을 세우는 일이라면 고금(古今)에 문상을 따를만한 사람 이 없을 것 같았다. 제갈공명은 물론이고 마교를 암중조정한다는 쌍뇌(雙腦) 포병인 조차도 문상의 상대가 안 될 것 같았다. 나이를 떠나 무상(武相)이 무림맹내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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