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84화 (84/152)

■ 제 84절 :

침상에 누워 조용히 관조해 보니 다사다난(多事多難) 했던 하루였다.

비천문을 다녀와서도 검후에게 얻어 온 차로 솜씨를 발휘해 보겠다는 사숙님 덕분에 한시진 전에야 간신히 자 신의 방으로 올 수 있었던 은성이었다.

지금은 자시쯤 된 것 같았다. 반시진 전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밤비가 이제는 제법 굵어졌는지 귓전을 간 지럽혔다. 비가 오자 마음이 감성적으로 변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떠 올렸는지 은성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 가 드리워졌다. 은성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는 한참동안 어려 있었다.

그런데 행복한 표정으로 팔 베게를 하고 침상에 누워있던 은성이 미소를 짓다 말고 갑자기 윗몸을 일으키었다.

부드럽던 눈빛에는 작은 의혹이 어리어져 있었다. 눈빛에 어리던 의혹이 짙어져 가자 은성은 더는 참을 수 없 었는지 침상에서 내려와 경장을 걸쳤다.

하지만 화룡검을 챙기지는 않았다. 심기(心氣)를 완성한 이후 굳이 화룡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 다. 태극진기를 분화시켜 오행진기중 진수기(眞水氣)를 운용하자 은성의 신체 바깥으로 검은 묵기가 흘러 나 왔다. 희미하게 빛을 내던 유등(油燈)을 끄자 은성의 모습은 어두움에 동화되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창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칠흑같은 어듬속에서 이곳 저곳 희미한 유등만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은성은 창문밖에 허깨비처럼 떠 있었다. 진수기를 조절하여 어둠과 구별할 수 없도록 명암을 조정한 은성의 신형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내력을 조절하여 몸에 부딪혀오는 빗방울이 뭉치지 않고 작은 빗방울 상태를 유지한채 떨어져 내리도록 유도하면서 조용히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일장 이장 서서히 오르던 은성의 신형이 멈춘 곳은 허공 삼십장 높이였다. 세상은 어두움에 뒤덮여 있었지만 은성의 심안은 모든 곳을 대낮처럼 살펴보고 있었다.

은성의 신형이 바람이 일렁이듯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천추영웅전의 위쪽에서 나타났다. 어두움 속에서 도 무림맹의 경비무사들은 철통같은 경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두움을 꿰뚫어 보고 있는 수많은 눈동자 들이 밤의 정령들과 눈싸움이라도 하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눈동자들이 향한 곳은 혹시 라도 적의 내습이 있을 수도 있는 장소였다.

비내리는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경비를 서고 있다면 칭찬해줄 상관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발각되면 비내리는 밤에 먼지나게 맞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천추영웅전 허공중에 멈추어 선 은성의 의혹은 풀리지 않고 짙어만 가고 있었다. 낮에 검후와 사공자의 결전 시 분명히 이곳에서 이상한 기운들이 흘러 나왔는데 지금은 아무리 집중해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서 히 신형을 낮추어 천추영웅전의 오층 전각에 가까이 하던 은성은 이질적인 기운이 그가 더 이상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방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진기는 아니었지만 유형화된 강력한 기운이 그를 밀쳐 내고 있었던 것이다. 태극진기를 조금더 가중시키던 은 성이 급하게 튀어져 나왔다. 유형화된 진기는 은성의 강력한 내기에도 쉽게 뚫리지 않았다. 은성의 내기가 강 해지자 납작하게 이그러지고 있었지만 이그러들수록 반발력이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 만이 아니었다. 유형의 반발력만이 아니라 무형의 공격도 병행되어져 왔다.

정신을 섬뜩하게 만드는 날카롭고 치명적인 느낌이 거대한 공포처럼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심기를 완성하 여 정신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은성조차도 형용키 힘든 불안감에 갑자기 몸을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다.

놀란 눈빛으로 발밑에 보이는 오층 전각을 바라보던 은성이 다시금 조용히 신형을 하락하였다. 그러자 또다시 유형의 이질적인 기운이 그를 가로 막았다.

부동명왕심공을 발휘하여 무형의 기운과 저항하며 기세대결을 벌일지 고민하던 은성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위로 조금 떠올랐다. 심기(心氣)를 발휘하여도 유형화된 기운을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괜히 진기 를 낭비하며 무림맹에 소란을 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저 오늘 낮에 흘러 나왔던 이상한 기운들이 무엇이었는지 정체를 밝혀내서 의혹을 풀고자 이곳에 왔었던 은성이었다.

낮에 이곳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왔던 기운은 유형화된 기운은 아니었다. 생각이나 느낌 또는 강한 투시력(透視 力)처럼 무형화된 기운이었다.

은성의 상단전이 발달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조차 없는 기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낮에 흘러 나왔던 무형의 기운이 전혀 내비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층전각을 둘러싼 이질적인 기운속에 묻힌 무형의 기운과 는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전각을 둘러싼 무형의 기운에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낮에 흘러나왔던 기운 에는 생명력이 깃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전각위에 떠 있는 은성이 손바닥을 펴서 아래쪽으로 향하자 손바닥에서 어둠보다도 더 짙은 검은 구슬들이 흘 러 나왔다. 구슬은 빗방울 보다도 천천히 전각위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자 전각을 감싸고 있던 기류들이 슬 며시 요동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진수기로써 장환(掌環)을 내뿜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오층전각을 감싼 기운을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리패엽장의 패엽건곤(貝葉乾坤)을 펼쳐 건곤일척의 승부를 결할 수도 있 었지만 은성은 내심 자재하였다.

이때 허공중에 신형을 고정시킨채 망연자실해 있던 은성의 뇌리에 유성처럼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결계(結界)'

"음..."

은성이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어떤 건물이나 공간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기관진식을 설치하거나 소림사에서 마인을 가둔 것처럼 천문금쇄진이나 불수복마진 같은 진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관진식이나 진법 은 침입자를 사상(死傷)시킬 수가 있다.

침입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건물이나 공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부적이나 진언을 사용해 만드는 결계 가 대표적인 수법이었다. 대부분의 결계는 수행자가 수행도량을 수호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었다. 수행하는 동안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심적인 안정을 유지하며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일정한 건물이나 공간을 결했던 것이다.

밀교에서 비밀리에 전수돼 오던 수법이 이곳에 펼쳐져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펼쳐진 결계의 고강함이었다. 결계의 강도는 결계를 펼친 사람의 능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사람이 펼칠 필요는 없었지만 이처럼 막강한 결계를 펼치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엄청난 능력자들이 몇날 며칠, 아니 그 이상의 세월동안 심력을 소모해야만이 가능할 것 같았다.

정파의 주축인 무림맹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천추영웅전 최상단 건물에 밀교의 최상승 수법인 결계가 펼쳐 져 있다니 믿지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확인한 바로는 이곳에서 말로 표현키 힘든 사악한 기운까지 스며 나오지 않았던가..?

의혹이 중첩되어졌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은성이었다. 천추영웅전의 삼층이나 사층으로 침입하여 오층으로 들어 갈 수도 있었지만 그쪽도 어떤 대비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오늘만 날은 아닌 것이다.

천추 영웅전 상부 허공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어둠을 뚫고 보무당 쪽으로 사라져 갔다. 검은 그림자는 어둠 과 완전히 동화돼 형체를 분간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빗방울 튕기는 것까지 주의 하였지만 자 신이 지나가는 공간에 순간적으로 빗줄기가 사라지는 현상까지는 주의하지 않고 있었다.

허공중에 아주 잠깐 동안 나타나는 현상으로 아무리 시력이 좋은 경비무사라 할지라도 알아챌 수가 없을 것으 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간 자취를 좇아 눈동자를 옮기는 무심한 시선 한 쌍이 있었다. 은성이 보무당으로 사라짐을 확인하고서야 방향을 바꾸고 침묵에 잠긴 시선의 주인공 옷자락 사이로 하얀 깃털 몇가닥이 살짝 내비쳤다. 하늘에 별빛하나 없었지만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신기한 깃 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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