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81화 (81/152)

■ 제 81절 :

검후가 거처하는 보타전은 천추 영웅전 앞에 위치되어 있었다. 주작 제삼문인 의협문(義俠門)을 지나 좌측에 이어진 전각중 가장 마지막 전각이었다. 보타전을 주축으로 오대세가와 개방 그리고 몇 개 뛰어난 문파들이 거처하는 전각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다. 맞은편 우측 전각에는 무림 구대문파를 위한 전각들이 있었다. 은성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보타전 안으로 들던 검후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검아!"

그리고는 반가운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 고일검(高一劍)이 찾아 와 있는 것이다. 헤어진지 이년동안 보지 못했다가 어제 의협문을 들어서며 잠시 보았던 동생이었다.

"누님, 오래간만이네요."

남매지간 이지만 검후가 보타문에 든 후부터는 두 번밖에 보지 못한 오랜만의 상봉이라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 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평안하시지? 바빠서 아직 인사도 못 갔네..."

이년 넘도록 한번도 뵙지 못했는데 아직도 찾아 뵙지 않은 것이 민망스러운지 검후가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지 으며 안부를 물었다.

"실은 한달 전에 아버지가 조금 다치셨어. 지금은 상처가 거의 다 아무셨지만..."

일검이 조금 침통스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뭐! 누구와 비무하셨는데?"

일검의 무림맹 청무원 입원(入院)을 위해 비천문(飛天門)을 사천성으로 옮겼지만 부친은 한 문파의 장문인 신 분이었다. 절강성에 있을 때 어중이 떠중이 들을 포함하여 숱한 무림인들이 비무를 요청하였지만 한번도 거절 하지 않으셨던 부친이셨다. 그리고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부친이기도 하였다.

절강성내에 분광검(分光劍) 고검성의 명호가 떨쳐 울려지고 비천문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숱한 비무와 이에 따른 승리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연속된 부친의 승리가 우연이 아님을 잘 알고 있는 검후였다.

비천문이라는 작은 문파에, 문하 제자들 수도 많지 않았지만 검후의 가문은 천년의 비밀속에 잠겨 있는 신비 지문 이었던 것이다. 검후도 이년 전에야 알았던 사실이었다. 동생 고일검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청 무원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그 뛰어남이 드러나서는 안되기 때문에 가진 바 능력조차 금제되어져 있어야만 하 는 고일검인 것이다. 가문은 잠룡의 숙명을 이어 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었다.

천년의 봉인이 풀려야지만 깊고 깊은 심연속에서 뛰쳐 나올수 있도록 안배되어진 것이다. 아들에게만 일인 비 전되는 경세적인 무학은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는 세상에 노출될 수 없었다.

부친은 아무리 무공 수위가 높은 고수가 비무를 요청하여도 비전절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비천문에서 제자들 에게 전수해주는 이류무공만으로도 상대가 거의 없는 부친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검후는 절강성 보다는 고수들이 훨씬 많은 사천성이라고 하여도 부친이 당하셨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철저한 잠룡 행세를 하시느라 가진 바 무공을 스스로 금제하셨지만 왠만한 고수들은 털끝 하나도 건드리기 힘 든 부친이셨기 때문이다.

"비무가 아니야. 창피한 일이지만 나 때문이었어..."

자괴심이 들었는지 이어지는 일검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했다.

"한달전 휴가를 받아 집에 가는데 한적한 곳에서 갑자기 복면인들이 나타나 공격을 하더라구. 두 세명은 감당 할 수 있었는데 이십여명이 떼거지로 덤벼 혈도가 찍히고 그놈들한테 납치됐는데 다행히 내가 납치되는 것을 비천문 제자 한명이 본거야. 아버지 무공이 그렇게 강한 줄은 처음 알았어. 아버지 혼자서 이십여명을 상대했 는데도 아버지가 이겼으니까. 나를 구출하면서 암습에 당해 몇 군데 도상을 입으셨지만 말이야."

"복면인들 정체는 알아 내셨대?"

검후가 분하다는 듯이 물었다. 자신의 동생을 납치하려는 무리라면 마교도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두놈은 사로 잡았는데 알아낼 수가 없었어. 아버지가 심문하려고 하는 순간에 입안에 든 극독을 깨물 어 자살했으니까. 아버지는 마교도들일 것이라 하시더라구."

역시나 마교도들 이었다. 그들의 무공과 수법을 모를 리가 없는 부친이셨기 때문이다.

"휴..,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그리고 인사해! 그러니까..., 해..해동에서 오신 분이야."

은성을 소개하려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더듬거리는 검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안색을 본 고일 검이 금새 검후의 내심을 짐작하였다.

"형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명호가 해동신룡 이시지요?"

생각보다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나도 만나서 반갑네. 동생이 하매와 무척 닮아서 처음 볼때부터 하매 동생인걸 알 수 있었네."

검후를 닮아 무척이나 잘 생긴 고일검 이었다. 아마도 절세적인 용모가 집안 내력인 것 같았다.

보타전에는 검후와 두명의 시녀밖에 없었다. 보타문의 문도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에 들어 선후 검후가 옷을 갈아 입으러 간 사이 은성은 고일검과 무공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제 자랑이 아닙니다. 제가 왠만한 초식은 몇 번만 봐도 따라 한다니까요. 아마 알고 있는 초식수로는 제가 청무원 내에서 몇 번째 안에 들어갈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공이 쉬 늘지가 않는다고요..."

내공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풀이 죽어가는 고일검 이었다. 목소리조차 한풀 꺾여진 고일검이 의기소침한 얼굴 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공 수위로만 보면 뒤쪽에서 첫 번째일 거예요. 나름대로 집중력도 좋고 노력도 많이 하는데 생겼다 하면 조금씩 세어 나가는 것 같으니..."

고일검의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무림맹의 청무원에서 가르치는 내공이 범상한 무공일 리가 없었다. 딸은 타고난 무골이며 내공 수위도 높은데 아들은 자질이 형편없이 떨어져 내공 습득이 더디다니... 고일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심기를 발휘하여본 은성이 빙긋 웃었다.

"동생, 걱정말게. 내가 보기에 동생의 내공은 다른 사람처럼 서서히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비약(飛 躍)할 것 같네. 아마 그 날이 멀지 않았을 거야."

예상대로 고일검의 내공은 금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나 교묘하고 고도의 수법이 발휘되어 금제 되 어졌는지 일반 고수들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본인조차 모르고 있지만 성급하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달 전 아버님이 저 때문에 다치신 이후 이를 악물고 절치부심하여 내공만을 수 련했는데 조금도 늘어난 것 같지가 않으니 한심할 지경입니다."

고일검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절실히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일검의 내공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열 다섯 살 소년이 가지기에는 넘치는 내공 수위였다. 그 중 삼할 정도 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장차 비천문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약한 마음을 먹어서야 되겠나. 머지 않아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네. 열심히 수련에 정진하게."

은성이 재차 비약을 암시하여 주었지만 고일검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비약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 기 때문이었다. 다만 해동의 신비한 문파에서 온 고수가 하는 말이라서 은연중 약간의 기대는 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왠지 믿고 싶은 것이 또한 절실한 심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은성과 고일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검후가 들어섰다.

활동하기 편한 경장 차림이었다. 무림맹에 오면서 즐겨 입었었던 옷이기도 하였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었 지만 검후는 어떠한 옷도 잘 어울렸다. 시녀가 내어온 차를 마시며 조금 쉬었다가 비천문에 가기로 한후 정담 을 나누는데 보타문 안으로 또 다른 방문자가 들어섰다.

"검후님! 삼공녀님과 사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청화(靑花)라 불리는 시녀의 목소리였다. 일행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서자 사공자 폭풍검 파검식과 삼공녀 설 화 냉소연이 보타전의 너른 뜰 앞에 서 있었다.

"검후님, 보타전에서의 첫날밤이 편안하셨는지요?"

"예, 염려 덕택에 평안하였습니다. 공자도 잘 주무셨는지요?"

사공자가 의례적인 안부를 묻자 검후도 의례적인 인사로 대꾸해 주었다. 하지만 사공자는 보타전에 방문한 뚜 렷한 목적이 있었다.

"하하! 아닙니다. 이놈이 어찌나 칭얼대던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말을 하며 사공자가 허리춤에 매달린 고풍스런 검을 톡톡 건드렸다. 사공자의 명호이기도 한 폭풍검이었다. 검후를 주시하는 사공자의 눈빛은 호승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신 삼공녀는 검후가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 면서까지 굳이 가까이 하려 하는 은성의 정체가 궁금한지 은성에게 더 많은 시선을 주고 있었다.

권마황을 이긴 해동신룡 이라고 소문이 났는데 정말로 실력이 그렇게 높은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권마황이라 면 자신과 사제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절세 고수였다. 폐관중인 대사형만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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