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8절 :
새벽 바람속으로 희미한 별빛이 잔잔이 일렁이고 이슬을 머금은 풀잎위로 대지의 숨결이 히끄무리하게 솟아 오르는데 보무당 야외 수련장에서 두 눈을 감은 구천진인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귀문(鬼門)이 위치된 북동쪽을 바라보며 밤새 영력(靈力)을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영안(靈眼)이 열려져 있기에 천지홍황(天地弘荒)의 움직임이 훤히 보여졌다.
밤이 되면 세상은 어두움에 뒤덮이게 된다. 밤은 생기를 지닌 인간들이 잠을 자고 정령들과 죽은 사자(死者)들이 그들의 법칙대로 지배하는 또 하나의 세상인 것이다. 법력이 증가될수록 영계의 법칙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스스로의 부족함이 뼈저리게 느껴지고 있는 구천진인 이었다.
구천령(九天鈴)으로 주변에 있는 정령과 혼령들을 불러 원하는대로 부릴 수도 있었으며 혈요인(血妖刃)으로써 요괴와 죽은 이의 혼백조차도 제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건만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십년전 사제 인 손장로를 헤친 마교의 야차귀노라는 술법가와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악귀나 요괴를 부리는 야차귀노의 능력은 후천적으로 수련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능력인 것 같았다.
아니, 야차귀노(夜叉鬼奴)라는 술법가는 악귀나 요괴가 사람으로 변신했을 수도 있었다. 그 당시 보여준 야차 귀노의 경지는 인간이 수련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 보였다.
손장로를 잃은 후 밤을 낮삼아 영력을 키우고 수련을 하였지만 십년전 야차귀노의 경지에조차 이르지 못하였 다. 게다가 야차귀노의 능력이 십년동안 퇴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야차귀노의 능력은...
구천진인의 눈두덩이 아래 속눈썹이 미세하니 떨려 왔다. 그리고 지금껏 미동조차 하지 않던 오른손이 꿈틀하 자 소매속에서 한자정도 되는 붉은 단도가 튀어 나왔다.
혈요인(血妖刃) 이었다.
손사제의 죽음이후 복수를 꿈꿔온 구천진인이 스스로의 영혼을 구속하고 천기를 어겨가면서 십년동안 익혀 온 비장의 술법이 담긴 법기(法器)였다. 경면주사(鏡面朱砂)로 빼곡하니 부적이 그려져 있는 도집을 빼내자 붉은 도인(刀刃)이 희미해져 가는 달빛에 반사되어 요기로운 빛을 흘려 내었다. 도인에서 뿜어지는 붉은색 기운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붉은 기가 도인에서 솟구쳐 올라 봉인된 요귀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듯 격렬하게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도인에서 일어나는 기운들은 구천진인의 왼손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몇 방울의 피를 머금은 후에는 더욱더 격 렬해지기 시작하였다. 도인은 더욱더 붉게 달아 오르고 도인에서 솟아나와 발광하듯 휘도는 붉은 기운은 일장 정도나 길어져 사방을 헤집었다.
구천진인이 피를 뿌린 손가락으로 검결을 짚고 혈요인의 도인에 대자 적기(赤氣)는 절정에 달했다. 결계가 해 제되어졌는지 아니면 술법이 발휘 되어졌는지 혈요인의 붉은 도신에서 날뛰던 붉은 기운이 도신을 벗어나 하 늘로 솟구쳤다. 그리고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허공을 휘젓는가 싶더니 구천진인의 십장여 위쪽 허공에서 멈 춘 채 기이한 형상을 이루어 갔다. 전신에서 지옥의 화염이 이글거리는 듯한 화조(火鳥)였다.
주문을 외웠는지 구천진인의 입술이 몇 번 달싹이자 화조는 별빛을 살라 먹으려는 듯 거대하게 확산되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밤하늘을 번개처럼 가르고는 다시금 유성처럼 떨어져 내려왔다. 화조의 요악스럽게 울부짓는 소리가 밤하늘을 찢어 발기듯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용암속에서 노닐다 나온 듯 붉은 화염 으로 휩싸인 화조가 내려 꽂히는 곳에 구천진인이 태연히 서 있었다.
화조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었다. 번개가 일고 천둥이 치듯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구천진인을 덮쳐갔다. 일순 구천진인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 이는 듯한 착각이 일더니 화조가 구천진인의 등뒤를 파고들어 심장이 위치된 왼쪽 가슴으로 관통하여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혈요인 안으로 빨리듯이 스며 들어가 버렸다. 혈요인의 도신에 어리는 혈광이 더욱 요사스러운 빛을 뿌려 댔다. 창백한 안색으로 변한 구천진인이 검집에 씌워진 혈 요인을 갈무리한 다음 왼손을 들어 심장 부위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어 구천지옥에 떨어진다 하여도 어쩔 수 없다. 화염산의 불사조인 지옥화조(地獄火鳥)가 아니고서는 도저 히 사제의 복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옥화조에게 생기를 빨리 우고 영혼이 갉아 먹히더라도 야차귀노 너만은 반드시 혼백을 소멸시켜 주리라...'
구천진인이 중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이자 입술 밖으로 핏물이 조금 흘러나왔다. 영적인 위력을 벗어나 괴물이 되어버린 지옥화조에게 생기를 나눠 주며 받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 입술을 얼마나 세게 앙다물었는지 입 술이 터져 버린 것이다. 동방파의 내공을 익혀 이미 무공으로도 고수급에 속하는 데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지대하였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동녘 하늘을 보니 여명이 밝아져 오고 있었다. 수련 장소에서 나와 보무당의 동방파 숙소로 들어오 던 구천진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방과 맞은 편에 위치해 있는 은성의 방안에서 왠지 모를 신묘한 기운이 뻗혀져 나오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음 이 한없이 평온해지는 기운이었다. 무엇일까? 의문이 든 구천진인이 은성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흠! 안에 있느냐?"
아무리 사질이라고 하여도 방문을 함부로 열 수는 없었다. 안쪽에 기별을 하자 스르르 방문이 열렸다.
"사숙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들어오십시오."
은성의 응대는 자신이 올 줄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래, 너도 잘 잤느냐? 안색을 보니 잠은 푹 잔 것 같구나. 잠자리가 바뀌면 꿈이 뒤숭숭한 법인데 다행이구 나."
구천진인의 말대로 은성의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광택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때문인지 빙기옥골 같은 피부에 마음속에 걱정 근심이 티클 만치도 없는지 한없이 밝고 평온한 인상이었다. 천상의 옥 동자가 지상에 강림한 것 같았다.
방안에 들어선 후 더 이상 신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약간 의아심이 든 구천진인이 미간에 영력(靈力)을 집중하였다. 방 안쪽에 영성(靈性)을 가진 생물이라도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영력을 집 중 하여도 은성이 지닌 육갑인 외의 영적인 존재를 더 이상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방 안쪽에서 느꼈던 신령한 기운은 신장(神將)이 강림한 것처럼 천상의 기운을 강하게 내뿜고 있었지만 이상 하게도 생기(生氣)가 느껴 졌었다. 육정육갑신이 뿜어 대는 기운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육갑신과 계약을 맺은 후 육갑신을 청해 모신적이 있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좀전과 같이 강력한 영적인 기운을 뿜어댈 수 있는 것은 육정육갑신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지옥화조에게 영력을 흡수 당하여서 자신이 착각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구천진인이 은성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 한번도 소환(召還)시킨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은성의 대답은 그의 예측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 자신이 느꼈던 거대한 영기(靈氣)는 무엇이란 말인가?
"육합진인에게서 어떠한 법술을 익혔느냐?"
직접 물어 확인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동방파를 떠나온 후 육합진인이 새로운 술법서(術法書)라도 입수한 것 같았다. 확률은 적었지만 타당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합천서(六合天書)와 통천여의대법(通天如意大法)을 익혔는데 육정육갑신과 계약 을 맺은 후 은신술과 토지신을 부르고 오귀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법술은 배우지 않았느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구천진인이 은성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육합천서는 천궁(天宮)에서 부터 전해졌다는 유래가 있었다. 총 삼권중 한권만이 동방파에 비전되어 내려오고 있었는데 동방파에 내려오는 서책에는 육정육갑신을 부르는 방법과 은신술(隱身術)을 배우는 방법만이 수록되 어 있었다. 그리고 통천여의대법은 육합천서에 비해서는 낮은 경지의 술법들이 수록되어져 있었다.
토지신을 부리거나 오귀부(五鬼符)라는 부적을 사용하여 오귀를 다스리는 방법은 술법가라면 대부분 가능한 수준 낮은 법술이었다. 통천여의대법으로는 절대로 처음에 느꼈던 강대한 기운을 가진 영적인 존재를 불러내 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법술은 동방파를 하산한 이후로 한번도 펼쳐 본적이 없습니다."
구천진인이 다소 몰아 부치는 듯 질문하였지만 은성의 표정에는 불쾌하다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문의 사숙께서 궁금해 하는 바에 대해서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아니, 그 이유가 무엇이냐? 오귀를 부리면 만사를 편히 할 수가 있지 않느냐?"
구천진인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사도 인간인 것이다. 새로운 것을 익히면 호기심이 생기고 자랑하고도 싶어지며 그 위력을 살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것은 나이가 어릴수 록 더욱 심했다. 자신도 어린 시절 법술을 배우면서 숱하게 경험한 터였다. 자신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법술 을 익힌 모든 이들의 공통된 심리였던 것이다.
"제 인생은 저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고맙고 감사한 인연을 굳이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되 도록이면 의타심을 멀리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오귀에게 도움을 받다보면 마음이 게을러질까 두렵기에 애써 자 재하고 있습니다."
은성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인생이 생각처럼 쉽게 흘러 가지만은 않는 것이다. 어떤 때 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아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법술을 배웠느냐? 단순한 호기심이었더냐? 그 시간에 무공을 익혔으면 조금이라도 더 성취가 높아지지 않았겠느냐?"
구천진인은 자신이 지금 나이 어린 사질에게 가르침을 내리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깨우침을 얻 기 위해서 질문을 하는지 정확히 분별이 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사질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이 평범하지 않 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만사가 순리(順理)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천리에 역행(逆行)하고 인과를 거역(拒逆)하는 현상이 벌어지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법술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바름( 正)과 타인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저 자신의 편함을 추구하고자 익히지는 않았습니다.."
은성의 말을 듣던 구천진인이 갑자기 두 눈을 깜박이었다.
은성의 얼굴에 희미한 영상이 겹쳐지는 것 같더니 누군가가 연상되어졌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깜빡이자 연상되어졌던 인물은 간데없고 맑고 바른 심성의 사질만이 두 눈에 담기어졌다. 멍한 채 로 은성의 얼굴을 바라보던 구천진인이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연상되어졌던 사람은 이미 구천 세계로 떠나신 사부님이었다.
방금 사질이 언급했던 내용은 사부님께서 생전에 항시 강조하셨던 내용이었다. 법술을 가르치시면서 항시 술(術)보다는 법(法)을 강조하셨던 사부님이었다. 우주만물과 인간 그리고 영적인 세계의 원리를 명상하고 수련 하는 법(法)을 익히는 것이 진정한 공부이지 이것을 밖으로 활용하는 술(術)을 중시하면 방도에 빠지고 편협 해지며 도에서 멀어진다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떠했던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강한 술법만을 고집하고 주체할 수 없는 호승지심으로 중원행을 자청하였으며 사제에 대한 복수라는 미명하에 천리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옥화조를 키워 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들어왔다. 동방파에 처음 입문하면서 꿈꾸었던 자신이 모습이 아닌 것이다. 밝음을 지향하여 도를 닦아 왔건만 어느새 한없이 깊은 어둠 속에 빠져 들어 있었다.
강함이 무엇이던가? 복수란 무엇이던가?
...
구천진인의 굳게 닫혀진 두 눈에서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뺨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내 리는 눈물이었다. 눈물은 실개천이 되었다가 냇물이 되고 이윽고 폭포수가 되어 흘러 내렸다.
나이 어린 사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나이 어린 사질 앞에서 편협함을 보이고 못난 행동을 하는 것에 비해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눈물은 모든 것을 쓸어 담아 몸 밖으로 쏟아 냈다. 이기심과 호승심 그리고 어리석음 까지도 쓸어 갔다. 한참동안 소리없이 오열하며 눈물을 흘린 구천진인이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눈을 떠 은성을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심성이 착하면서도 의지견성해 보이는 사질이었다.
"사질에게 못난 꼴을 보였구나. 실은 사질의 방문 앞을 지나다가 어떤 영적인 기운을 느꼈는데 너무도 신묘하 고 강대한지라 궁금하여 들려 보았다. 육정육갑신은 아닌 것 같았는데 혹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느냐?"
구천진인의 물음에 은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천진인이 방문을 열기 전까지 명상 수련 중이었던 은성이 었다. 태극진기가 완성된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터득된 분심술로 인하여 천지간의 오묘한 이치를 깨우쳐 가는 와중에도 구천진인이 다가옴을 느끼자 명상을 중지하고 반갑게 맞아 들였던 것이다.
동방파에서 법술을 터득하면서 느꼈던 감각으로 만약 자신의 방에 영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면 자신이 모를 리 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묘하고 강대한 기운이라면 간과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사숙님, 잘 모르겠습니다. 짐작되는 바도 없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저의 능력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된 답변이었다. 하지만 은성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미 허무경 칠단계의 수련이 완성되고 팔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은성이었다.
반신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인간이 지니는 내기의 경지를 지나 심기가 축적되고 영적인 능력이 날로 강해 지는 자신의 경지를 간과한 것이다. 이미 그 경지가 천인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밤새워 영안을 수련한 구천진 인이 은성에게서 천인들만이 내뿜는 영기를 우연히 감지했던 것이다.
명상에 잠기었던 은성이 명상중 작은 깨우침을 얻어 기쁜 마음에 잠시 마음의 경계를 허술이 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