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6 절 :
사부님을 따라 동방파가 머무는 보무당의 숙소에 도착하자 자운검은 사제인 구천진인(九天眞人)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숙님에 대한 예를 갖추어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은성은 무릎을 꿇고 존경어린 눈빛으로 구천진인을 바라 보았다.
말로만 들었을 뿐 처음 뵙는 사숙님이었다. 동방파에서 수련중 법술을 가르친 육합진인에게서 들은 바로는 구 천진인은 사문이 배출한 가장 걸출한 기인이었다. 동방파의 도인들중 무공과 법술을 동시에 수련하여 둘 다 경지에 이른 사람은 백년이래로 유일하다는 평이었다. 코밑으로 단정하게 기른 팔자수염이 무척이나 어울려 보였다.
그런데 은성을 바라보는 인자한 사숙의 눈빛이 점차로 날카롭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부드럽던 눈빛이 송곳 처럼 예리한 기세로 은성의 뼛속까지 파 헤치려는듯이 쏘아보는가 싶더니 냉정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은성에게 물어왔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밑도 끝도 없는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질문이었다.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질문의 요지조차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자 은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구천진인을 바라보았다. 구천진인의 질문에 당황한 것은 은성 이만이 아니었다. 이역만리 사부를 찾아 길을 나선 제자를 자랑하고 사문의 소식을 같이 듣고자 하였건만 분 위기가 이상해지자 자운검 또한 사제의 의도가 무엇 때문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제! 왜 그러는가? 해동에서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가 분명하네."
갑작스런 사제의 변화에 자운검이 황급히 제자를 옹호하였지만 구천진인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다. 오 히려 좀전보다도 얼굴 표정이 더욱 굳어 있었다.
"사형!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자운검에게 중립을 지킬 것을 요청한 구천진인의 손아귀에는 어느새 한자 정도의 붉은 단도와 아홉 개의 방울 이 뭉쳐진 금빛 요령이 각기 들려 있었다. 사제의 수중에 들린 물건들을 보던 자운검이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 다. 사제가 법보(法寶)중에서도 가장 위력 이 강한 두 가지 물건을 동시에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도력이 높고 법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사제가 이처럼 최강의 법보를 두가지씩 이나 뽑아 들고 은성을 경계하고 있다니...
고개를 돌려 제자를 바라보니 제자는 사제의 손에 들린 법보들의 위력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순진한 눈빛 으로 무슨 일이냐는 듯 사제의 얼굴만을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은성의 눈빛을 바라보던 자운검도 약 간 이상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제가 오해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력을 담아 사람을 옭아메는 듯한 사제의 눈빛을 은성이 너무 나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은성의 눈빛속에 의아함은 있었지만 두려움이나 공포심은 한 올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숙님, 동방파 이십육대 제자이며 앞에 계신 허 사부님께서 십이년전에 제자로 거두어 주신 이은성 입니다. 사년전 사문에 들어 백운검 김장로님에게서 삼년동안 동방파의 무공을 익히고 일년전 산문(山門)을 나왔다가 사부님을 찾아 중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은성이 그 동안의 행적을 상세히 말하자 이제야 조금 의심이 풀렸는지 구천진인의 싸늘하던 눈빛이 다소 누그 러 들었다. 그러나 구천진인은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은성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너의 몸에 감도는 신기(神氣)는 무엇인지 설명해 보아라? 요상스러운 기운은 아니지만 범상한 인간이 결코 지닐 수 없는 기운이다. 그리고 너의 정체가 벗겨지기 전에는 결코 허튼 생각을 하지 말거라. 아직까지 혈요인(血妖刃)과 구천령(九天鈴) 앞에서 온전히 도망간 마물은 하나도 없었다."
구천진인의 말을 듣던 은성은 어이가 없었다.
사숙이 자신을 요괴나 마물로 생각하며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밖에 없었다. 사숙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여 오해를 푸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서 신기가 감돈다니... 거기서부터 오해를 풀 수 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사숙이 자신을 오해할 소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자신은 신체 외부로 내기를 전혀 발산하 지 않고 있었다. 사숙 정도의 무위라면 은성 나이또래 청년 고수들의 내기(內氣)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은성에게서 아무런 내기가 흘러 나오지 않자 의아해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사숙이 법술 중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훔쳐 읽는다거나 아니면 영적인 능력을 살펴볼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또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상단전이 개발되고 심기(心氣)를 자유 자재로 다스릴 수 있는 은성은 심상(心想)이 다른 사람에게 간파되거나 심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결계를 친 듯 정신 적인 방어막이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천진인의 표정을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자신에 몸에 지닌 물건 중...
'아!'
갑자기 생각나는 물건이 있었는지 은성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구천진인의 심사를 자극하지 않겠 다는 듯 서서히 백의 장삼 속으로 한손을 넣었다가 무엇인가를 빼어들어 사부님과 구천진인의 앞에 조심스럽 게 내려 놓았다.
세치 길이의 붉은 목갑이었다. 목갑을 여니 목갑안에 목도장이 한 개 들어 있었다. 특별난 것도 없는 작은 나 무 도장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목도장을 바라보는 구천진인의 눈빛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세차게 떨리 고 있었다.
법술을 익힌 술사(術士)답게 단숨에 목도장의 진가(眞價)를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금으로도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는 벽조목에 육갑인이 세겨져 있으며 그 주위로 서서히 피어 오르는 신기(神氣)로 보아 육갑인 안에는 육정육갑신이 봉인되어 있음이 확실하였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뚫어져라 육갑인을 바라보던 구천진인이 떨리는 눈빛으로 은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성은 이 육갑 인이 지닌 효능을 잘 모르는지 덤덤한 모습이었다. 손에든 법구들을 품속으로 갈무리한 구천진인이 은성이 내 민 붉은 목갑을 닫아 은성에게 건네 주었다. 목갑은 은성의 품속으로 들어갔지만 아직도 구천진인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떨리는 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윽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어지자 구천진인이 은성에게 물었다.
"네가 간직한 법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마음은 진정되었지만 여운이 남았는지 구천진인의 음성은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은성은 구천진인이 육갑인을 보고는 오해가 풀렸음을 직감하였는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사부의 얼굴을 보니 사부도 구천진인의 오해가 풀렸음을 느꼈는지 안도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방파에서 육합진인 사숙에게 육합천서(六合天書)와 통천여의 대법(通天如意大法)을 배웠는데 인연이 되었 는지 육정육갑신을 뵈올 수가 있었습니다."
'허허!'
대답을 듣던 구천진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은성을 바라 보았다. 십년전 동방파를 나 오기전 삼백여명의 도인들중 육정육갑신을 부를 수 있었던 도인은 자신과 육합진인 둘밖에 없었다. 법술은 그 성취를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고 게다가 육정육갑신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만이 신을 뵙고 계약을 맺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온전한 능력 의 신을 불러올 수는 없었다. 신은 자신을 소환한 자의 도력에 걸맞는 수준의 능력만을 가지고 현신하기 때문 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몇 명의 술사가 신을 소환해도 신은 각기 다른 능력으로 여러 곳 에 현신하여 능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예외가 있었다. 신이 술사와 언(言)으로 계약만을 맺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술사와 약 속의 징표로 삼은 법구(法具)에 형체를 담아 스스로 봉인되는 경우였다. 이 경우에는 술사가 징표가 되는 법 구로서 신의 소환을 요구하면 온 전한 능력을 가진 신이 현신하여 술사를 도와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신들은 인격이 불완전하고 혼탁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에게 절대로 자신을 맡기지를 않고 있었다. 선인 의 경지조차도 뛰어넘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영혼에게만 온전한 자신의 능력을 맡겨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신이 봉인된 법구는 인세에서 구경할 수 조차 없는 신물(神物)로 술사들의 이상속에서만 떠돌고 있 었다. 그런데 은성이 가진 육갑인이 바로 그러한 신물이었던 것이다.
술사들이 사용하는 마귀나 지옥야차와 같은 잡신들을 다스리는 법보가 아니라 천상에 있는 육정육갑신의 온전 한 힘을 빌어 사용할 수 있는 천고의 기물이었다. 자신도 육정육갑신을 부를 수는 있었지만 부른다고 아무 때 나 나타나는 육정육갑신이 아니었다.
천기가 어긋나는 일을 바로잡는 일등 육갑신이 판단해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거기다 본신 능력의 일할도 안되는 능력만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이 거의 없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은성이 소환하면 온전한 능력의 육정육갑신이 은성을 도와줄 것이고 이때는 다른 술법가가 아무리 청 하여도 육정육갑신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육정육갑신이 봉인된 육갑인을 지녔다고 생각한 후 다시 한번 차 분히 은성의 얼굴을 보니 예사로운 관상이 아니었다.
안색에 광채가 흐르고 눈빛은 심연보다도 깊으며 현묘한 기운이 담기어져 있는 것 같았다. 범인(凡人)은 신인(神人)을 알아볼 수 없다고 자신이 큰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내가 잠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네가 간직한 법보는 예사 물건이 아니니 신명을 다해 소중히 간직 하도록 하거라!"
구천진인은 괜한 오해로 사질에게 못난 꼴을 보였던 것이 무안했던지 은성과 자운검의 눈빛조차 똑바로 바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능력을 보유한 사질 덕분에 마교와의 접전에서 잃었던 청운검 손장로의 원수를 갚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안색은 어느 때보다도 밝아져 가고 있었다.
"사제! 자네 때문에 간 떨어질 뻔 하였네. 십년만에 만난 제자인데 회포를 풀기도 전에 오해로 인해 불상사가 생길 뻔 하지 않았나? "
입가에 미소를 띠고 구천진인에게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은 자운검은 자상스런 눈빛으로 은성에게 물었다.
"사문에는 별일이 없더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항상 사문에 두고 있던 자운검이었다. 따지고 보면 중원까지 와서 무림맹을 돕 고 있는 것도 사문의 영광을 위함이었다. 십년동안 잊고 지냈던 사문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한전에 칩거하시던 사조님들께서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조사(祖師)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창안해 놓으 신 조사지공이 사문에 전해져서 장문인과 장로들께서 수련중이십니다."
은성의 설명을 들은 자운검과 구천진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화되었다. 사백님들이 운명하셨다니 침통한 일이었 지만 조사지공이 사문에 전해졌다는 것은 밤새도록 기뻐해도 모자랄 정도로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사조님들께서는 입적하시기 전에 조사지공에서 얻은 심득으로 사신권법의 위력을 한 단계 발전시키시고 웃으 시며 돌아 가셨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은성의 설명에 자운검과 구천진인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드리워졌다.
'선재(善哉)로구나!'
자운검이 다행이라는 듯이 짧게 중얼거렸다.
"저, 사부님! 사문에서 듣기로는 손사숙님도 중원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손사숙님은 안녕하신지요?"
십년전에 세명이서 중원에 파견 되었다고 들었는데 두명밖에 보이지 않으니 은성으로서는 당연히 의문시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은성의 질문을 들은 자운검이 웃음을 그치고 무엇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애통한 표정을 지 었다.
"조사지공이 발견 되었다니 손 사제가 살아 있었으면 제일 기뻐했을 터인데..."
자운검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서야 은성은 손사숙이 이미 운명하셨음을 알 수가 있었다.
"사부님, 사숙님은 마교와의 접전시 돌아가셨는지요?"
보무당에 오면서 내당주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리며 은성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자 자운검이 그렇다는 듯 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제를 잃은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년이나 흘렀구나... 그동안 무능한 사형들은 시간만 갉아먹고 지낸 것 같다."
자운검이 손 장로를 떠올리며 슬픈 목소리를 내자 구천진인이 사형을 위로해 주었다.
"사형, 그때는 불가항력 이었지 않습니까? 그때 한 맹세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동안 사형과 제가 절치부심 하며 무공을 익히고 법술을 수련한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손사제의 원수를 갚아 주기 전에는 동방파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피맺힌 맹세 때문이 아닙니까?"
하지만 위로해 주려던 구천진인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울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오히려 자운검이 위로를 해 주어야 할 판이었다.
"사부님 그리고 사숙님, 저도 손사숙님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손사숙님을 돌아 가시게 한 원흉은 누구인지요?"
은성이 손장로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자 괜한 호승심에 제자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헛된 죽음을 당할까 내 심 걱정된 자운검이 대답하기를 저어하였다. 하지만 구천진인은 은성이 자신의 법보보다도 몇 배나 위력이 강 한 신기를 지니고 있으므로 원수를 갚는데 크 게 보탬이 되리라 판단하였는지 사형이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은성에게 말을 하여 주 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무공이 고강한 무인보다는 술법이 강한 술사가 무엇보다도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마교의 십대 장로중 한명인 야차귀노(夜叉鬼奴)라는 술법가이다. 그 능력이 하늘과 땅을 뒤 덮을 수 있을 지 경에 이른 자이다 결단코 섣불리 상대할 수 없는 자이다."
구천진인이 은성에게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였는지 자운검이 말을 이었다.
"사제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 유념하도록 하거라! 십년전 마교 검마황 휘하의 검마대와 일전을 벌이기 위 해 보무당에서 차출된 이십여명의 고수들을 혼자선 막아낸 괴물이다. 저마다 고수라 자처하던 보무당원들이었 건만 그 한명에게 열 세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사제가 법보를 꺼내 막아내서 일곱명은 간신히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손사제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처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지금쯤은 인간의 경지를 벗 어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은성에게 충고를 하여 주는 자운검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의 경지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하여도,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비장함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사부님. 형세를 판단하여 대적하고 섣부른 판단으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지는 않도록 하겠습니 다."
은성이 차분하고 결연에 찬 목소리로 자운검의 충고에 답하였다.
"사질이 총명하면서도 생각이 깊고 능력조차 출중한 것 같으니 사형이 부럽습니다. 저도 사질같은 제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은성을 바라보며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이던 구천진인이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운검을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자운검이 흡족하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관운장처럼 길게 기른 백염을 쓰다듬자 구천진인이 다 시 말을 이었다.
"며칠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마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덩달아 사파들이 유난히 기승을 부 리고 있다고 하는데 중원 무림에 다시 한번 피바람이 몰아쳐 올 것 같습니다. 무림이 혼란에 빠져 드는 것 같 은데 달리 생각해보면 잘된 일입니다. 손사제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가까워져 오는 것이니까요. 원수를 갚기 전에는 중원을 벗어나지도 그리고 사문에 연락을 취하지도 말자는 맹세를 지키느라 지금껏 피나는 수련을 하 였지만 하루빨리 원수를 갚고 이제는 동방파에서 남은 여생을 다하고 싶습니다."
강한 것 같으면서도 한없이 약한 것이 인간이었다.
젊었을때 그리도 의지견성하고 강직했던 구천진인도 나이가 많아질수록 제자 욕심이 생기고 수구초심(首丘初 心)이라고 한평생 몸을 담아 왔던 동방파에서 생을 마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구천진인의 말을 듣던 은성은 속으로 그 자신과 또 하나의 맹세를 하였다. 사부님과 사숙님이 맹세를 지키고 해동에 돌아가서 말년을 편히 보낼수 있도록 야차귀노를 반드시 제거하고자 하는 맹세였다.
중원에 와서 은성의 목표가 한가지 더 늘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