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74화 (74/152)
  • ■ 제 74절

    이역만리 머나먼 타향에서 드디어 사부님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사부님이 무림맹에 계실지도 모른다는 강 한 기대감에 은성의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자운검님이 저의 사부님 되십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 무림맹에 계신지요?"

    숨죽이며 사부의 거취를 묻는 은성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은성의 표정과 음성 변화는 물론 호홉까지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주시하던 문상의 눈빛이 다시금 이채를 발하였다.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는지 조금은 실망스런 눈빛이었다.

    "오! 자운검 허대협의 제자로구만, 염려말게 자네의 사부는 보무당(保武堂) 내에 기거하고 계시다네."

    은성은 문상이 자기를 주시하면서 왠지 심기를 자극하는 기운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 괜히 신경에 거슬리고 있 었다. 처음에 인사를 나눌 때부터 느꼈는데 진기처럼 유형화된 기운은 아니었지만 왠지 속마음을 투시라도 하 고자 하는지 희미하면서도 집요한 기운이었다.

    자연스럽게 발휘된 심기가 문상의 기운을 막아 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다행히 사부가 무림맹내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요사스런 기운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적안설룡구가 끄는 마차에 올라탄 문상이 앞으로 나서자 검후와 은성도 일행의 앞으로 나와 무림맹을 향해 말 을 몰았다. 주작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안개가 서서히 걷혀져 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은성은 안개가 사라져 가는 것이 왠지 인위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림맹 안쪽에서만 안개가 걷혀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정문인 주작문은 세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십장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주작 제일문까 지는 말이나 마차등에 탄 채로도 외성 경비무사들에게 신분을 의심받지 않는한 자유롭게 오고 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주작 제일문에서 일백여보 떨어진 주작 제이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말이나 마차는 좌측에 마련된 마보방(馬保房)이라는 건물로 보내야 했으며 신분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철저한 조사를 거친 이후에만 통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주작 제일문을 지난 후 무림맹 외당 대원들에게 타고 있던 백마를 내준 은성은 문상을 따라 검후와 나란히 붙 은 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은성은 채 십보도 걷기 전에 바로 앞에서 걷는 문상의 발걸음을 기이한 눈빛으로 주시하게 되었다.

    문상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보폭이 일정하고 발걸음은 부드러우면서도 자유로워 보였다. 여유 로우면서도 거침없는 행보는 은성이 익힌 조사지공 일시무시일의 높은 경지까지 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상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였지만 학문의 궁극(窮極)과 무 공의 궁극은 선의 궁극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은성이었다. 한발 앞에는 문상이 있고 두어발자국 뒤 에는 무림맹주의 제자와 호법이 안내하고 호위하는 듯한 형세로 모셔 가고 있어서 그런지 주작 제이문도 무사 통과였다.

    주작 제이문을 통과하자 드디어 무림맹의 내성이 눈에 들어왔다.

    내성과 외성은 오십여장 떨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는 이십여장이나 되는 깊은 수로(水路)가 흐르고 있었다.

    무림맹의 동쪽에서 흘러나와 수로를 타고 좌우로 나뉘어져 흐르다가 서쪽에서 합류한후 외성밖으로 빠져 나가 는 수로는 무림맹의 수호령이자 젖줄이었다. 그리고 또한 무림맹의 목줄이기도 하였다.

    무림맹 외당에는 이곳으로 흘러 드는 수원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별도의 조직까지 있을 정도였다.

    주작 제이문을 지나 삼십여보쯤 가자 붉은 암석이 깔린 넓은 석교(石橋)가 나타났다. 생사교(生死橋)라 불리 우는 다리는 천년은 버텨 보일 정도로 튼튼해 보였는데 석교의 가장자리에는 각종 조각상들이 무림맹의 이백 년 역사를 자랑하듯 세월에 침식된 채로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는 주작교라고 불리워졌으며 붉은 주작을 상징하기 위해서 사천성 동쪽에 위치한 민산(岷山)에 있는 적룡 곡에서 붉은 화강암을 채취하여 만든 석교이었다. 하지만 마교와의 대접전이 잦아지고 주작교를 건넌 인원 중 살아 돌아오는 무인들의 수가 줄어들자 어느새 피와 생사를 가름한다는 '생사교'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바뀌어 져 버린 것이다.

    견고하고 웅장한 자태의 주작 제일문과는 달리 내성에 위치한 주작 제삼문이라고도 칭해지는 의협문(義俠門)은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이 적용되어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끔 만들었다.

    의협문을 들어서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안쪽에는 양쪽으로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그 정점 에는 거대한 오층 전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무림맹의 심장부인 천추영웅전(千秋英雄傳)이었다.

    천추영웅전 앞에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무림맹주와 무림맹의 중요 인물들이 다 나와 있는 것 같았다.

    길 양 옆에는 어린 소년들이 청의 무복을 입고 가슴 앞에 열십자로 쌍검을 들고 서 있다가 검후 일행이 지나 가면 쌍검을 하늘높이 들어 부딪히면서 일행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하나같이 영기 발랄한 모습들이었다.

    검후와 나란히 걷던 은성은 문득 검후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늦어지면서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자 그 쪽을 바 라 보았다. 검후보다 두어살은 어려 보이는 소년이 쌍검을 열십자로 치켜든 채 검후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른 소년들은 검후가 지나간 이후에도 시선을 전방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소년만은 검후를 따라 고개가 조금 돌아와 있었다. 한데 소년의 눈가에 작은 물망울이 어려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감격스러움과 자랑스러움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광장의 끝에 당도한 검후는 무리의 중앙에 위치한 용포인에게로 서슴없이 다가갔다. 용포인은 십년전 부친이 자 전대 무림맹주에게서 정식으로 무림맹주 자리를 물려받은 삼성검(三星劍) 반도승 이였다.

    무림맹주 자리는 세습직이 아니었다. 무림맹주를 선출할 때에는 무공이 고강해야 함은 물론이고 무림 정의를 위해 쌓은 공적이 출중하여야만 하였다. 그리고 후보자들 가운데 최종적인 무림맹주 선출은 원로원의 정식 회 의에서 투표로 결정되었다.

    한데 삼성검 반도승은 십년전에 원로원 만장일치 동의라는 신화적인 전설을 남기며 현임 맹주로 등극했던 것 이다. 그는 이백년 무림맹 역사상 가장 완벽한 맹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열 살때 무림맹의 청무원에 들어 무공을 익혔는데 청무원을 나서던 열일곱살에는 더 이상 청무원에서 익힐 무공이 없었으며 그의 가전무공조차 어느정도 완성되어 있었다는 삼성검이었다.

    열여덣살 때 천무당의 청무대주로 발탁된 후 그가 이룩한 업적은 발군의 것이었다. 십년전 마교와의 치열한 혈전에서 가장 큰 활약을 벌였던 사람도 역시 그였다. 무림맹에서 자라서 숱한 신화를 일궈내며 모두의 우상 이 된 그를 무림맹주로 선출하는데 주저할 사람은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타문의 고은하 입니다."

    검후는 포권지례를 한후 맹주를 바라보았다. 오십여세 정도의 인자해 보이는 장년인 이었다. 얼굴이 조금 각 이 져 있어서 그런지 매우 고집스러워도 보였지만 편안하게 웃는 얼굴이 자상해 보이기도 하였다.

    "어서 오시지요. 무림의 안녕을 위해 먼길에서 찾아 오셨는데 멀리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시면서 안휘성의 목검문을 지켜 주셨다니 늦게나마 치하 드립니다."

    맹주는 검후가 나이는 어리지만 보타문의 장문인 신분이라 장문인을 대하는 예의로써 존대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같은 무림동도로써 어려울때 도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상대가 마교이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허허허! 맞습니다. 무림일통만을 외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잔악한 마교도들에게 고통받는 무림동도들을 구하 기 위해서라면 칼을 뽑는데 주저할 필요조차 없는 법이지요. 전대 검후께서 무림의 안녕을 위해 애쓰신 업적 은 이곳 무림맹뿐만이 아니라 전 무림 곳곳에 깊숙이 세겨져 있습니다. 검후께서도 무림의 안녕을 위해 애써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무림맹주가 사부의 공적을 찬양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검후의 가슴속에서도 불꽃같은 열정이 피어 올랐다. 후에 사부에 뒤지지 않는 검후로 기억되고 보타문의 명예를 지켜내며 사부의 원수를 갚고 무림 평화 를 지켜 내고 싶었다.

    "이 땅에 마교가 남아 있는 한 검후의 전설은 영원할 것입니다."

    열정 어린 검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결연한 의지가 무심코 흘러나왔지만 검후의 목소리는 한자 한자 또렷이 광장안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맹주를 주축으로 모인 사람들이 검후에게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는 순간적으로 퍼져 나가 광장안을 가 득 메울 정도였다. 이런 반응이 나올줄은 몰랐던지 검후가 다소 계면쩍은 얼굴을 하였다.

    "오늘 검후를 보니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입니다. 같이 오신 분은 해동신룡이라는 분인지요?"

    맹주가 은성을 바라보며 검후에게 묻자 은성이 앞으로 나서며 포권지례를 하였다.

    "해동 동방파의 이 은성 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은성의 어깨 위에 앉은 채로 한마디 말도 없이 붉은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금아 가 갑자기 나섰다. 아마도 인사하는 분위기라고 느낀 것 같았다.

    "나는 금아다. 만나서 반갑다. 나 만나서 너 영광이다."

    맹주가 신기하다는 듯이 금아를 주시하였다. 무림맹안에도 말을 할줄 아는 구관조(九官鳥)가 몇 마리 있기는 하였지만 금아처럼 생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허허! 그래 금아를 만나서 영광이다."

    조금은 격식어린 분위기가 금아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변해 버렸다.

    "무림맹 정말 크다! 멋있다! 당신이 무림 맹주야?"

    금아가 두 번째로 입을 열자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빛을 하며 금아를 주시하였다. 역시나 깜짝 놀란 눈빛을 발하던 맹주가 금아를 바라보다 은성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이소협, 금아가 스스로 생각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요?"

    "뭐! 아니 그럼 내가 생각도 없이 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화가 난 듯 금아의 목소리가 처음 보다는 조금 높아져 있었다. 그런 금아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 을 짓던 맹주가 갑자기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허! 아니다, 아니야. 금아가 너무나 귀엽게 생긴데다가 말까지 할줄 알다니 너무 신기해서 물어봤던 것이다. 그래 내가 무림 맹주다."

    "귀엽긴... 맹주도 잘 생겼다 뭐."

    맹주가 자기에게 귀엽게 생겼다고 말하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기에게 쏠려 있자 금아가 기 분이 좋은지 양날개를 펼쳤다 접어 보이며 한껏 기분을 내었다.

    "이소협, 해동 동방파에서 오셨군요. 영물은 영웅에게 의지한다는 말이 있는데 금아를 얻은 것을 축하 드립니 다. 동방파라면 저희 무림맹을 도와주고 계신 대협들이 아직도 몇 분 남아 계십니다."

    무림맹주는 은성에게 매우 반갑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지만 검후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후는 무 림에 명성이 혁혁한 보타문의 장문인 신분이었지만 은성은 저 멀리 변방 소국 작은 문파의 어린 제자였기 때 문이다. 비록 그 문파에서 몇 명이 남아 아직도 무림맹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검후와 비교하면 그 중요도는 천 지차이였다.

    "검후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영웅전 안으로 듭시다. 검후에게 소개시켜 줄 분들이 너무 많아서 이 자리에서는 어렵겠습니다."

    말을 마친 맹주가 먼저 천추 영웅전으로 발길을 돌리자 모두들 맹주를 따라 전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은성은 다소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검후와는 달리 중원인도 아니고 무림맹 소속도 아니라서 선 뜻 따라갈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한시바삐 사부님이 계시다는 보무당으로 가 고 싶은 은성이였다.

    이런 은성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검후였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옆에 있는 문상을 바라보니 문상이 검후의 내 심을 짐작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쪽을 향해 말을 하였다.

    "내당주!"

    그러자 은성과 별로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서있던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 말을 받았다.

    "예, 문상님."

    "이 소협을 보무당에 계신 자운검 허대협에게로 안내해 드리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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