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3절 :
사천성(四川省)
장강의 상류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리우는 사천성 은 삼국시대때 촉한을 통일한 유비가 수도로 삼았던 성도(成都)가 위치하고 있다.
상업이 발달하고 문물이 풍부하며 명산 대찰이 널려 있어서 그런지 사천성에는 이름난 무림 문파도 많았는데 도교에서 허령동천이라 불리는 수려한 경관의 아미파는 물론 같은 구대문파에 속하는 청성파와 점창파가 위치 하고 있으며 독과 암기에서 무림 일절인 당문이 사지를 웅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곳 사천성이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곳 에 무림 정의를 표방하며 구대문파(九大門派)와 오대세가(五大勢家) 그리고 일방(一幇)을 아우르는 거대세력 무림맹(武林盟)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백년 역사 속에 무수한 기인이사들이 명멸해 갔으며 숱한 무림혼들이 마교 타도라는 기치아래 장렬하게 산 화해간 피의 역사가 세겨진 무림맹... 잦은 안개로 유명한 사천성은 무림맹이 세워진 이래로 안개조차 피빛을 머금으며 붉은 기가 감돌고 있다고 표현되고 있었다.
검각산을 넘은 은성과 검후는 이십여일이 지나서야 사천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원래 열흘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곳저곳 명승고적(名勝古蹟)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배로 걸린 것이다.
무림맹에 빨리 도착해야할 이유는 충분하였지만 무림맹에 도착하면 둘만의 시간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다 보니 발길이 자연스럽게 지체되어졌다.
그 동안 검후는 은성의 신묘한 심기(心氣)로 인해 내상이 완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공지대사의 내공을 물려 받아 내력화 하면서 조금은 이질성이 남아 있었던 내공이 은성의 심기로 정화되어 정순하게 변해 오히려 내상 을 입기 전보다 무공이 증진되어져 있었다.
사천성에 들어선지 한시진이나 되었을까?
삼십여명의 말을 탄 무인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은성과 검후 앞으로 달려왔다. 괜히 먼지를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서는 길 한편으로 비켜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운차게 달리던 말들이 검후와 은성 앞 에서 일제히 앞발을 높이 들고 멈추어 섰다. 말들이 멈추었는데도 불구하고 먼지 구름은 은성과 검후 앞으로 자욱하니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는지 은성과 검후를 뒤덮어 오던 먼지 구름이 떠밀리듯 밀려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은성이 심기를 발휘한 때문이다.
"혹시 보타문의 검후이신지요?"
제일 앞에 위치한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이 검후를 바라보며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말을 타고 급하게 달려 왔는데도 불구하고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침착한 어조로 묻는 중년인의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검이 매우 인상 깊었다. 검의 크기로 보아 일반적인 검보다 반자는 더 커 보일 것 같은 검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미 이들의 신분을 짐작하였는지 검후가 짧게 대답하였다.
이들이 멀리서 달려올 때 앞쪽에 나부끼던 깃발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상징인 정천번(正天 幡)으로써 용과 봉이 붉은 태양을 보호하고 있는 문양 밑에는 무림맹이라는 글자가 금실로 수 놓아져 있었다.
검후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모두들 말에서 내려 검후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하지만 말에서 내리지 않고 여전히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흰 갈기를 바람결에 흩날리는 백마위에 탄 노도 인과 한눈에 보아도 명마임을 알 수 있는 검은 갈기의 오추마에 탄 화의 장삼을 입은 이십세 초반의 젊은이였 다.
"무림맹 외당 당주를 맡고 있는 섬예 입니다."
등 뒤에 긴 장검을 찬 중년인이 말에서 내린 후 자기소개를 마치자 검후가 중년인의 날카로운 눈매를 직시하 면서 반갑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점창파의 사일검(射日劍)님 이시군요.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오년전 무림맹에 들기 전까지 점창산의 분일봉(分日峯)에서 점창파의 비전절기 사일검법(射日劍法)을 완벽히 익히고서야 하산하였다는 섬예였다. 일검에 태양을 두쪽으로 갈랐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창파 의 내공심법인 북명신공(北冥神功)이 경지에 이른 듯 날카로운 눈빛이 깊숙이 갈무리 되어 있었다.
"사일검의 명성이 높다 하지만 검후의 명성에 비할 수 있겠소? 듣자하니 검후는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혀 태 어나자 마자 검기를 부릴 수 있다고 하던데 지금쯤은 검강조차도 시전할 수 있을 터이니 감히 그 명성에 따라 갈 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흰 백마위에 타고 있는 노인이었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이죽거리며 검후를 무시하 려 들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깐죽거리는 듯한 말을 듣자 사일검 섬예가 검후의 눈치를 보며 노인의 소개를 하였다.
"무림맹 삼대 호법중의 한분이신 화산파 매화검선(梅花劍仙) 대협 이십니다."
섬예는 예상치 못한 매화검선의 조롱 섞인 말소리를 듣고 초면에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직책이 직책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매화검선 호법은 화산파의 전대 장로로 무림맹의 직책을 떠나서도 자신이 함부로 나설 수 없는 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림맹의 호법이라고 하여도 검후의 신분으로 보아 당연히 말에서 내려서 예를 갖추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말위에 올라 내려다보며 검후를 무시하는 언사를 하는 매화검선의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찌 태궁(胎宮)에서부터 무공을 익힐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 보타문의 역대 검후들께서 기이절륜한 무공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내셨지만 아직 그러한 무공까지는 창안해 내시지 못하셨습니다. "
무림인들을 대할 때에는 나이를 떠나서 보타문의 장문인 신분으로 대해야만 하는 검후였다. 아무리 매화검선 이 화산파의 전대 장로이며 무림맹의 호법이라고 하여도 검후를 무시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욕 됨을 당함은 보타문이 욕됨을 당하는 것이며 역대 검후들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는 행위였다. 검후가 매화검선 의 말꼬리를 살짝 비틀어 비꼬아 주자 매화검선의 하얀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보타문에 절세 신공이 무수히 많다 하는데 전대 검후는 별로 성취가 없었던 모양이구려. 전대 검후는 그 연 세에도 신공 성취가 부족하였는데.., 그래 검후는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히지도 않으셨다 하면서 무슨 배짱 으로 강호에 나오신게요? 몇 년 아니 몇 십년 더 있다가 나오는 것이 좋지 않겠소?"
매화검선이 전대 검후를 모욕하는 말과 함께 '검후가 무림의 험난함을 모르고 너무 어린나이로 무림에 나서지 않았느냐' 면서 검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자 오추마에 타고 있던 화의(花衣)의 젊은이가 나섰다.
"검후의 나이가 갈수록 어려지니 다음 검후는 열 살도 되기 전에 무림에 출세(出世)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무림맹에서 유능한 보모라도 한명 구해 놔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오만 방자한 말이었다. 무례한 언변에 검후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젊은이를 날카롭게 쏘아본 후 매화검선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흥, 화산파는 무공을 나이로 익히시나 보군요. 호법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뿌듯하시겠습니다."
심성이 고운 검후가 이처럼 화가 잔뜩 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매화검선이 스승님인 전대 검후를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무위가 무림에 크게 떨치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매화검선이 분명할진데 이처럼 스승을 모욕하는 것은 명백한 시비이며 보타문에 대한 도전이었다. 무 림의 평화를 위해 무공이 마교 교주와 버금간다는 마교의 광명우사와 혈전을 벌이시다 돌아 가셨는데 무공에 대한 성취가 적다니... 너무나 화가 난 듯 검후의 눈가에는 물기마저 어리어 있었다.
"허허허!"
노도인은 검후의 반격에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웃음을 그치자 날카로운 눈초리로 검후를 쏘아 보았다. 불화로조차도 얼려버릴 정도로 차디찬 눈빛이었다.
"검후는 괜한 허영심으로 노도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것이 헛된 명예일망정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시오."
노도인은 무공으로 검후에게 혼을 내주고 싶지만 애써 자재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오추마에 타고 있 던 화의 젊은이가 목전의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마치 어린 아이를 훈시하는 듯한 위압적인 어 조로 검후에게 말했다.
"매화검선 호법님의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아무리 보타문의 명성이 높다 하지만 그것은 무공이 높은 검후가 살아 있을때의 얘기오. 전대 검후께서 살아 있다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검후없는 보타문은 삼류문 파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오. 알아서 행동하라는 말이오."
화의의 젊은이는 노도인 보다도 더욱 예의가 없었다. 목전의 상황을 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발하던 무림맹 외 당당주 섬예가 험악한 분위기를 가라 앉히기 위해서 급히 중재에 나섰다.
"사공자님, 맹주께옵서 검후님을 극진히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섬예의 말속에는 극진히 모셔 오라는 검후에게 너무하는 것이 아니냐는 무언의 항변조차 녹아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사공자는 맹주의 명령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한마디를 첨언하였다.
"검후, 무림맹에 들면 분수에 맞게 행동하기를 바라겠소!"
사공자의 무례한 말에 은성은 진즉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자재하고 있었다.
사공자의 무공이 옆에 있는 화산파의 전대 장로인 매화검선과 버금갈 정도로 높아서 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후는 보타문의 장문인의 신분이었다.
검후 스스로 보타문의 위상을 세워가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면서도 애써 자재 하는 이유였다. 사공자라 불리는 자가 나이에 비해 엄청난 무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검후가 밀릴 것 같지는 않 았다. 소림사에 가기 전이라면 필패(必敗)였겠지만 지금이라면 조금 우세한 승부를 벌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공자라 불리는 것을 보니 무림맹주님의 넷째 제자인 폭풍검 파검식(破劍式)님 이군요. 맹주님이 무공만 전 수하시고 예절은 가르치지 않으셨나 보죠? 뒷골목 무뢰한 보다도 예의가 형편없군요. 설마, 지금까지의 무례 한 언사를 맹주님에게서 배우신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이! 챙"
비록 검후의 나이가 어리지만 무림맹에 입성한 후 차지할 위상을 모를리 없는 사공자였다.
사부이신 무림맹주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하지만 무림 구대문파 장문인과 동등한 위상에 전대 기인들인 삼대 호법조차도 말을 높여 주어야 할 신분인 것이다.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으며 무엇보다도 무공이 약 해 보이는 검후를 배분만 따져 존대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옆에 화산파 전대 장로인 매화검선은 전대 검후 생전에 같은 검을 사용하는 무림맹 소속이면서도 전대 검후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열등감 때문에 괜히 나이 어린 검후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화검선 호법의 싸늘한 언사에 검후가 다소 의기소침해지자 지금이 검후의 기를 꺾어 놓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훈계하며 사부까지 싸잡아 욕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든 사공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생긴 것과는 달리 매우 열혈적인 사공자였다. 화를 삭일 수 없었는지 검후를 바라보는 눈에는 화염이 피어 흐 르고 있었다. 검후와 삼장여나 떨어져 있었지만 사공자의 폭풍 같은 검기는 검후를 서서히 옥죄고 있었다.
패도적인 검세 속에는 태산이라도 짓눌러 버릴 정도로 진중한 기세가 담겨져 있었다. 검후의 옷깃이 검세에 찢어질 듯 휘날리고 검후 주변의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어져 갔다.
발밑에 지면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만근거력의 기세가 중검의 묘리로 펼쳐져 검후를 압박해 가고 있 었지만 검후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의외의 상황에 사공자가 기세를 더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 지만 역시나 검후를 한발자국도 물러나게 할 수가 없었다.
기세를 땅으로 흘려 보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일신진기만으로 버티면서도 사공자의 태산같은 기세를 한치 물 러섬도 없이 감당해내고 있는 것이다. 백마위에서 사공자의 암수를 모른 채 방관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던 매화 검선의 눈빛이 급속히 변화되었다.
사공자의 무공수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매화검선이었다. 삼성 정도만 발휘해도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검후가 사공자의 십성 무공에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다.
아니 견디어내고 있는 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는 것 같던 사공자가 돌연 눈살을 찌푸 리는 것 같더니 고통에 찬 표정을 발하고 있었다.
기 싸움에서 패한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황을 이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검후든 사공 자든 둘 중의 한명이라도 다친다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맹주에게 뭐라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공자와 검후의 사이로 진기를 쏘아보내려던 매화검선은 앞으로 나아가던 진기가 금성철벽(金城鐵壁)에 가로 막힌 것처럼 더 이상 나아가지 않자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의 놀라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의 진기를 방해하는 내기가 검후의 옆에 서있는 나이어린 청년에게서 뻗 혀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검문을 다녀온 청무대원들의 보고가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마교 소교주를 물리치고 권마황을 패퇴시켰다는 믿을 수 없는 보고를...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절대로 믿 지 못할 사실이었다.
권마황이 누구인가?
일대일로 대결하면 자신조차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대마두인 것이다. 아무리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배웠다고 하여도 저런 앳된 청년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매화검선이 은성의 진기를 뒤돌리기 위해 내력 을 배가시키자 매화검선의 내력에 맞춰 역시나 진기를 더하던 은성이 갑자기 진기를 뒤로 물리더니 일시에 거 두어 버렸다. 하지만 회심의 미소를 짓던 매화검선의 진기는 헛되이 허공을 갈라야만 했다.
사공자와 검후의 내력 대결이 멈추어 졌는지 치열하게 얽혀들던 검세가 일시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사공자 는 손해를 많이 보았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져 있었다. 잠시 후 안색을 회복한 사공자가 떨리는 눈길로 검 후를 바라 보더니 말에서 내려 검후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공자의 눈빛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무시하고 멸시하는 듯한 눈빛이 감탄과 존경이 서린 눈빛으로 돌변한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 이십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공자가 무릎을 꿇은 채 검후에게 큰 절을 올리자 검후가 놀란듯한 표정으로 급히 다가가 사공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비록 사공자가 무례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였지만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만 하여도 받아줄 용의가 있는 검후였다. 무림맹주의 제자가 아무리 잘못을 범했 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다니...
"사공자! 제가 저희 사부님에 비해서 아직은 무공이 일천하니 저에게 조언을 해 주었다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다 잊겠으니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사공자의 위신을 생각하여 검후가 방금 전의 모욕과 무례함을 모두 잊겠다고 말하자 사공자가 검후를 바라 보 는 눈빛에 존경스러움이 더해져 갔다.
"검후님, 제가 오늘 검후님의 자애스러움과 심오한 공력에는 두손 들었지만 초식에서만은 아직 굴복하지 않았 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시면 한수 지도해 주실수 없겠는지요?"
앞뒤 가리지 않는 급한 성격에 무모함까지 명호인 폭풍검에 딱 들어맞는 성격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장 점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대양을 뒤덮는 폭풍에도 굴하지 않을 자신감과 솔직함 이었다.
"좋아요! 사공자가 원한다면 시간을 한번 내 보겠어요."
사공자의 솔직 담백함에 검후의 감정도 풀렸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쾌활하게 변해 있었다.
"하하!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외당주! 준비한 말들을 대령하게."
"알겠습니다. 사공자님."
사공자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외당당주인 섬예가 털이 고운 백마 두 마리를 끌고 왔다. 그런데 외당 당주에게 서 말 고삐를 건네 받은 은성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후와 백마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아직 한번도 말을 타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성에 비해 검후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는데 말을 탈줄 아는 것 같았다. 사공자와 무림맹의 외당 대원들은 물 론이고 검후까지도 말위에 올라타자 다급해진 은성이 백마에게 심기를 발휘하여 뜻대로 따르라는 의지를 전달 하였다.
백마는 은성의 의지가 머릿속으로 전해지자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순종적인 자세로 선선히 은성을 받아 들였다. 은성이 백마위에 올라타자 일행은 무림맹이 위치한 성도 방향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길을 가면서 은성은 서서히 기마술을 숙달시켜 갔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백마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 만 은성의 의지를 알아듣고 그대로 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자욱한 안개가 성도 명물중에서 제일이라 칭해지는 무림맹을 휩싸고 흐르자 무림맹 중앙에 거대한 규모로 솟 아오른 오층 전각이 안개속에서 제모습을 바람난 계집의 속살처럼 히끗히끗 내비치고 있었다. 철옹성으로 회 자될 정도로 삼엄한 경비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의 구석구석까지 안개는 무인지경으로 퍼져 흐르고 있는 것이다.
외성의 길이만도 이십여리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의 무림맹 정문으로 통하는 길은 청석으로 매끈하게 포장되어 있었는데 마차 십여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남문 또는 주작문으로 불리우고 있는 정문으로 마차 한대가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마차를 끄는 짐승은 평범한 말이 아니었다. 백설보다도 더 하얀 짐승의 이마 정중앙에 길쭉하며 뾰족 한 뿔이 돋아나 있었으며 눈동자의 색은 타는 듯한 적색이었다.
마차는 정문을 나선 후 꽤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지만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멀리에서 보면 희미한 안개 속에 흐리무리한 유령이 붉은 안광을 발하며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일각여나 달린 마차는 앞쪽에 삼 십여명의 말을 탄 무인들과 마주 치고서야 멈추었는데 마차가 멈추자 안에서 푸른색 학창의를 입은 사람이 내 려 왔다. 하얀 깃털로 짠 백우선을 들고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문사풍의 인물이었다.
그를 보자 검후 일행의 제일 앞쪽에서 말을 달리던 외당 당주와 대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었다.
사공자와 매화검선 조차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자 검후도 다가오는 인물의 정체를 짐작하였는지 말에서 내렸 다.
적안설룡구(赤眼雪龍駒)라는 전설적인 명마가 끄는 마차에 백우선을 가지고 다니는 인물은 무림맹에 단 한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의 총관이면서 문상을 맡고 있는 환제갈(還諸葛) 제갈뇌였다. 무림맹에 처음 들 던 이십년전에 이미 타 고난 지혜는 하늘을 찌르고 가진 바 학식은 대지를 덮는다는 평가를 받던 제갈뇌였다.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환생하였다는 탄사를 받고 있었는데 능력이 어 느정도인지는 그 자신도 정확히 알 수가 없을 정도라는 소문도 있었다.
"검후! 먼길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마세(魔勢)가 창궐하여 걱정이 되었는데 역시 검후이십니다."
문상은 사십대 중반은 된 것 같았는데도 목소리가 맑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중한 신뢰가 담겨져 있어 듣는 이의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다.
"문상께서 친히 마중 나오시다니 감읍합니다. 오는 중에 마교와 몇 번의 접전이 있었지만 제 오라버니가 도와 주셔서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문상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인사를 나눈 검후가 믿음직한 시선으로 은성을 바라본후 문상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검후가 말에서 내릴때 역시나 말에서 내린 은성이었다.
"해동 동방파의 이십육대 제자 이은성 입니다."
은성이 문상을 바라본 후 포권지례를 하며 또렷하고 영롱한 목소리로 자기 소개를 하자 은성을 바라보며 인사 치례를 하려던 문상이 갑자기 말문을 닫고 심각한 눈빛으로 은성을 주시하였다. 깊고 깊은 문상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안색조차 변화되었던 문상은 굳었던 안색을 풀고 예의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자네가 바로 권마황을 물리쳤다는 해동신룡이로구만. 말은 많이 들었지만 반신반의 했었는데 오히려 소문이 부족한 것 같군..."
말을 하는 동안 문상의 시선은 은성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유능한 감정가가 오래된 자기나 고 서를 감정하기 위해서 뚫어져라 살펴보는 것 같았다.
한편 문상이 은성을 평하는 소리를 듣던 사공자와 매화검선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져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문상이 다른 사람을 평하는 것을 거의 들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상의 안목이 고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통달하고 주역과 관상은 물론 천기까지도 읽는다는 문상이었다. 해동신룡이 권마황을 물리쳤다는 정보가 청무대주에 의해서 전해졌지만 문상의 말처럼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권마황이 내상을 입었거나 아니면 어떤 흉계나 내막이 있어 일부러 져 주었다면 모를까 있을 수가 없는 일이 기 때문이다. 사공자 또한 그럴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져 있었기에 해동신룡을 마주 대하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직접 보니 귀공자 풍으로 글만 읽은 서생같이 생긴 외모가 심증을 더욱 굳건히 해 주었다.
그런데 문상은 해동신룡이라 불리는 서생차림의 은성이 정말로 권마황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소문이 부족한 것 같다니...
그럼 해동신룡의 진신 무공이 권마황 보다도 훨씬 높다는 말인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은성을 훑어 보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사공자였다. 매화검선 또한 소문으로 진위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은성과 직접 내기(內氣)까지 겨뤄 보았던 매화검선이었다.
처음에만 막상막하로 버티다가 금새 밀려난 것으로 보면 해동신룡에 대한 문상의 평가는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은성과 내기를 겨루면서 이기기는 이겼지만 왠지 찜찜했던 기분과 문상의 안목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매화검선을 반발심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해동의 동방파라니.., 자운검 허선도 대협과 구천진인과는 어떤 관계인가?"
무림맹 문상의 입에서 사부님의 성함이 나오자 은성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