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70화 (70/152)
  • ■ 제 70절 :

    소림사를 나선 후 무림맹을 찾아 길을 떠난 은성과 검후는 어느새 하남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가르는 검각산에 이르러 있었다. 산중에 곱게 물든 단풍잎중 유난히 붉은 잎새를 따서 검후의 귓가에 꽂아 두고 즐거워하는 은 성이 밉지는 않았는지 검후도 연신 웃음을 지으며 산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에 잔뜩 끼인 구름만 없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려니 생각하는데 사시가 지나갈 무렵부터는 얄궂게 빗방 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은성이 검후를 끌어당겨 한손으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호 신강막을 펼쳐 내었다.

    그러자 은성과 검후는 물론이고 검후의 어깨에 올라탄 후 귓가에 꽃힌 붉은 단풍잎을 쪼아 대던 금아의 한자 두께로 옅은 금광이 어리면서 빗물을 퉁겨 내 주었다. 빗물에 몸을 적실 염려는 없지만 빗방울 때문에 좋은 경치를 구경하는 즐거움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검후를 꼭 끌어안고 길을 가는 것도 싫지 않은 은성이였다. 하루, 이틀 계속 비가 내려도 좋을 것 같았다.

    한참을 가다보니 눈앞에 검심주점 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그 푯말 옆에 있는 바위에는 만마폭(萬馬瀑)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검각산 제일경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만마폭포에 이르른 것이다.

    비도 오고 점심을 들 시간도 된 것 같자 은성과 검후는 주점안으로 들어섰다. 주점안에는 십여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비가 와서 절경을 구경할 수 없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점안에 들어선 후 자연스럽게 심안이 발휘된 은성은 이들이 모두 내가 고수인 것을 알아차렸다. 손 님들 뿐만이 아니었다. 음식과 술을 나르는 종업원은 물론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까지도 내가 고 수였다. 오로지 계산대에 앉아 문 밖의 쏟아지는 빗줄기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늙은이만이 내공이 없는 것 같았다.

    주점안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왠지 어색함이 베어져 나오 고 있었다. 은성과 검후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들어왔는데 그리 신경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이 더 어색하 고 이상스러웠다. 우의도 없는 두 사람이 옷에 빗방울 하나 묻히지 않고 들어왔다면 의아해 할 일이었다.

    게다가 검후의 미모는 어디에서건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하였다. 특히나 젊은 남자들이 많은 곳에서는 더 하였 다. 그런데 주점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의식적으로 은성과 검후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자신들이 하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주점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은 검후도 파악한 것 같았다.

    밖에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금아를 주점 밖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검후가 전음입밀로 몇 마디를 하자 금아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허공 높이로 날아가 버렸다. 구 름위로 올라 깃털에 묻은 빗물을 털어 낼런지도 몰랐다. 주점안에 미세하니 베인 살기를 파악하고 금아를 날 려 보낸 검후의 능력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은성은 검후와 함께 창가에 위치된 자리에 앉았다.

    주점안에 있는 무림인들의 공력이 크게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방심할 수 만은 없는 은성이였다.

    전음을 사용하여 검후에게 그냥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니 검후도 동의 하였다. 검후와 은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두 사람의 식탁에 물잔을 내려 놓으며 주문을 받으려고 하던 종업원이 뜨악한 표정으로 두사람을 바 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자리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다른 자리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습니다. 실은 급한 볼일이 있어 길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차 한잔만 마시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하 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일이 급하여 그냥 일어서야 될 것 같습니다. 일이 끝난 후 다시 이곳에 들리면 오늘 못 팔아준 것까지 곱으로 팔아 드리지요."

    은성이 공력을 운기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며 공손히 말을 하였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살기까지 숨겨가며 이곳에 모여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검후와 자신을 목표로 하지 않 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로간에 심기를 상해가며 다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설령 검후와 자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여도 크게 문제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검후와 자신을 목표로 하 고 있다면 이들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분위기를 어지럽게 한후 불시에 기습을 가해올 것이지만 이정도의 고수들은 손쉽게 처리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라고! 이런 경우없는 사람들을 보았나. 궁색한 산중에 처박혀 있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아 들어왔으면 하다 못해 엽차라도 한잔 팔아 줘야 되는 것 아니야?"

    경우가 없기는 종업원이 더하였다. 손님에게 다짜고짜 반말 짓거리에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질까지 하고 있으니 세상천지에 막 나가는 종업원이었다.

    "뭐야! 어떤 지랄같은 놈들이야? 가뜩이나 비가 내려 기분이 꿀꿀한데 이놈들 잘 걸렸다."

    다른 쪽에서 음식을 나르던 험상궂게 생긴 종업원이 한손에 음식을 받쳐들고 은성과 검후쪽으로 다가오며 곱 지않은 욕설을 퍼부었다.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던 은성은 오늘 이곳을 조용히 빠져나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식한 산적들이 운영하는 주점인가 싶어 찬찬히 훑어 보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산적들이라고 하기에 는 이들이 너무나 조직적이었고 또한 무위도 너무 높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난잡해지자 서둘러 빠져나가 려 하던 은성이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속에 있는 검은 구슬이 진동하며 요동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소한 독이라면 피독주라 불리우는 구슬이 이 처럼 심하게 울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강하게 피독주를 자극할 수 있는 독이라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은 벌써 중독되어 쓰러 졌어야만 했다. 이중에 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독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은성과 검후 주변으로 다른 종업원까지 가세하여 윽박지르자 주점안에 있던 시선이 모두 은성이 있는 쪽으로 쏠리었다. 그러자 계산대에 앉아 있던 노인이 급히 일어나 다가오며 아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종업원을 나무랐다.

    "이놈, 노대야! 손님에게 그 무슨 무례한 말버릇이냐. 당장 그만두고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나이답지 않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나무라는 노인이 다가오자 피독주가 더욱 심하게 진동하였다.

    노인을 바라본 은성이 눈가에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옆에 있는 검후를 끌어안고 창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순간 노인의 손에서 벼락같이 검은 강기가 솟구쳐 나오며 은성과 검후를 향해 날아갔다. 부서진 창문의 파 편들이 검은 강기에 닿자 흔적도 없이 녹아 들어가 버렸다. 검은 강기는 광룡처럼 사납게 달려들었지만 은성 의 신법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주점의 창문을 부수고 검후를 안은채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은성의 주 변이 순식간에 환해지며 뇌성벽력이 터져 나왔다.

    '번쩍.. 꽈광.'

    그리고 뇌성벽력 속에서 잔뜩 웅크린 은성의 등짝을 향해서 검은 강기가 사정없이 부딪혀 버렸다.

    '퍼어억'

    큰 충격을 받은 듯 검후를 안은채 허공으로 날아가는 은성을 품속에 안기었던 검후가 부축하여 간신히 땅에 착지하였다. 검후의 입가에 핏자욱이 흘러내려 떨어지는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은성을 바라보니 큰 충격을 받은 듯 코와 입으로 핏물이 뭉클뭉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서 있기도 힘든지 반쯤 허리를 굽혀 한손으로 간 신히 땅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것만 하여도 천행인 것 같았다. 악운이 끼였는지 떨어지는 벼락의 곁가지 일부에 몸이 격중되어 버 린 것이다. 게다가 벼락에 빗겨 맞은 후 호신강막이 약해진 틈을 타서 검은 강기에 다시 한 번 적중되었는데 그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한 은성이었다.

    벼락을 맞은 후 그 찰나적인 순간에도 검후를 감싸안고 몸을 돌려 검은 강기에 온몸을 던진 은성의 처참한 모 습을 보니 검후의 가슴이 미어져 왔다.

    은성이 고개를 더욱 수그리며 웩하며 핏물을 뱉어내자 검은 핏덩이가 한주먹은 쏟아져 나왔다. 은성의 하얀 장삼은 검은 강기에 녹았는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너절해져 있었다. 특히나 등짝 부근은 옷을 입었다고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는데 피독주를 지니고도 중독되었는지 피부 색깔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다행히 검은 핏덩이를 뱉어낸 은성은 허리를 펼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공을 운기해 본 검후 는 자신은 내상이 심하지 않으며 공력 운기에도 큰 지장이 없음을 알게 되자 다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눈앞에 뒷짐을 지고 자신과 은성을 바라보는 노인과 노인을 중심으로 검과 도를 빼어들고 모여선 무 리들 이 있었지만 자신의 무공이 남겨져 있으니 최악의 순간은 아닌 것이다.

    이 모두가 자신만을 희생하며 검후 자신을 보호해준 은성 때문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검후가 눈에서 살기 를 뿜어 대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마교의 무리들이 분명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은..은하! 저 앞의 노인 굉..굉장한 독공 고수야..."

    말하기조차 힘이 든지 더듬거리며 어렵사리 말을 잇던 은성이 시선을 높이 들어 검심주점의 뒷편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석산위로 향하였다. 더욱더 두꺼워진 빗줄기로 인하여 석산은 안개에 가리워진 것처럼 형상마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은성은 분명히 볼 수가 있었다. 하늘위에서 뇌전이 일어 은성이 직시하던 석산위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햇빛이 반사되듯 검후를 향해 내리 꽂혀져 오고 있었다.

    이세상에 뇌전보다 빠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뇌전보다 파괴력이 강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뇌전보다 빠른 것은 분명히 있었다. 바로 마음(心)이었다. 앞에 있는 노인을 경계하며 잔뜩 진기를 돋 군 검후는 갑자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운에 몸이 밀려 나가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급하게 저 항하였지만 이미 몸은 수장여나 밀려나 있었다. 밀려나는 곳이 노인이 있는 방향이자 앞 뒤 가릴 것 없이 빙 검을 뽑기 위한 발검의 자세를 취하였다.

    놀라기는 지금껏 주점의 계산대에 앉아 은성과 검후에게 독공을 펼치다가 여의치 않자 독강을 발휘하여 은성 을 공격했던 독중지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동신룡이라고 불리는 애송이는 이미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 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만 눈앞의 검후는 별로 내상을 당한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여유있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화급히 몰아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주점안에서 암중에 마 교의 칠대절독중 세가지나 시전하였던 독중지마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검후와 해동신룡은 연달아 세가지 나 하독하였는데도 중독된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몸속에 축적된 독기를 장세에 실어 보내 공격할 수 밖에 없었다.

    '묵룡강(墨龍剛)' 이라고 불리는 이 수법은 독중지마 최고의 절기이었다. 강기의 위맹함은 말할 것도 없었으 며 강기에 직접 맞지 않고 그 강기에 서린 독기에 스치기만 하여도 염라부를 방문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극랄 한 독공의 정화인 것이다. 독기 또한 강기를 펼치는 독중지마의 마음대로 조정 할 수가 있었다. 한꺼번에 칠 대절독 모두를 펼칠 수도 있는 것이다.

    묵룡강에 정통으로 적중당한 은성이 급사하지 않은 것만이 의아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어떻게 주점안에서 삼대절독을 막아낼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후의 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자신 에게 달려들자 깜짝 놀란 독중지마가 황급히 공중으로 몸을 날리며 검후에게 묵룡강을 날리고자 하였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대지를 떨어 울리는 소리가 들려 오며 방금까지 검후가 위치해 있던 곳에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꽈과과광'

    대지가 갈갈이 찢겨지며 놀란 흙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주점앞의 대지는 순식간에 초토화 되었으며 그 여 파로 주점의 일부 건물이 폭싹 내려 앉아 버렸다. 너무나 놀란 가슴에 검후가 눈을 돌려 은성의 행방을 찾았 다.

    '휴'

    다행이었다. 언제 몸을 이동하였는지 은성도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해 있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은 성의 안전이 더욱 급하다는 판단에 뒤돌아 몸을 날리려던 검후가 헛바람을 들이키었다. 수십개의 검과 도가 눈을 돌린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하여 몸 앞으로 짓쳐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다급한 것은 하늘 위에서 검은 바람처럼 휘몰아쳐 오는 노인의 공세였다. 흑룡처럼 사납게 울부짓으며 다가오는 공세는 전력을 다하여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다.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빨리 이들을 살상하기로 마음을 굳힌 검후의 빙검 여래혼에서 싸늘한 검기가 빙탄이 되 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빙검의 검봉은 독중지마가 펼친 묵룡강의 중심부를 향하고 있었다. 한편 심기를 펼 쳐서 검후를 밀어내 간신히 위급함을 넘긴 은성은 이형환위의 수법을 펼쳐 역시 위급함을 모면 할 수가 있었 다.

    '휴...'

    은성의 입가에서 깊은 한숨이 쉬어져 나왔다. 내공이 천인의 경지에 이르렀고 상단전이 트여 심기까지 운용할 수 있었는데도 자칫 하였으면 죽음의 강을 건널 뻔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뇌전을 부릴 줄 아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계산대에서 다가서던 노인이 자신의 심안에도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극강한 고수이며 위험하기 이를데 없는 공격을 가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감지한 은성은 검후를 안고 창문을 부숴트리며 튕겨나가는 순간에 태극 진기를 운용하여 강력한 호신강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가선 노인의 무공 수위가 예측 불가능했기 때문에 최대한 호신강기를 두텁게 운용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뇌전을 맞았는데도 내상만 입고 몸이 갈갈이 찢겨지는 참상을 면할 수 있었지만 허공에서 갑작스레 뇌 전을 맞고 머뭇거리는 와중에 달려드는 묵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뇌전을 맞고 흐트러지는 진기를 최대한 모아 등뒤로 돌리고 그 부위로 묵강을 막아 내었지만 묵강의 위력은 예상보다도 더 지독하였다. 뇌전에 당한 내상이 더욱 심해지었으며 중독된 증상마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중독은 넝마처럼 찟겨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몸을 가리고 있는 백의 장삼안에 고이 보관된 피독주 에 의해서 순식간에 치유되어져 버렸다. 태극진기를 익힌 덕분에 왠만한 독에는 중독되지도 않고 또한 중독되 었다고 하여도 짧은 시간안에 해독할 자신이 있지만 지금처럼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피독주가 있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한 내상으로 인해 내부 혈관이 파열되어졌는지 핏물이 목구멍으로 넘어오자 은성은 핏물을 뱉어낸 후 속이 시원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급히 태극진기를 돌려 보았지만 생각대로 진기가 운용되지가 않았다.

    간신히 파열된 혈관 부위로 진기를 이동시켜 응급조치를 마쳤는데 자연스럽게 발동된 심안이 위험신호를 보내 오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위험한 기운이 살기에 베인채로 주점 뒤편의 하늘까지 치솟은 석벽위에서 흘러 나오 고 있었다. 구름에 싸인 듯 흐릿하여 정확한 실상은 보이지 않았건만 분명히 저 높은 그 어딘가에 아주 위험 한 존재가 그와 검후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성은 재수가 없어서 우연히 뇌전을 맞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뇌전에 정통으로 맞지 않고 곁가지에 맞았기에 망정이지 황천으로 직행할 뻔한 것이다.

    하지만 검은 구름사이에서 반짝이던 뇌전이 위험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부위로 반짝이며 흘렀다가 반 사되듯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비로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비록 태극진기는 쉽게 운용할 수 가 없었지만 절세곡에서의 깨달음과 수련으로 상단전에 축적된 심기를 어느정도 다룰 수 있는 은성이였다.

    아직은 허무경상의 칠단계 수련법이 완성되지 않아 심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는 없었으나 타인이나 다른 물 체에 심기를 운용하여 조절하는 것은 태극진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은성의 간절한 의지는 심기를 발휘하여 검후의 몸을 뇌전보다 빠른 속도로 밀쳐내 버렸다. 땅바닥에 뇌전이 터진후 밀려드는 여력은 그리 문제될 것도 없었다. 중단전의 내단에서 흘러나온 진기가 이형환위를 펼칠만한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살펴보니 검후는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다. 소림사에서 어떤 기연이 있었는지 내공은 물론 초식 조차도 크게 향상되어 있었는데 독강을 쓰는 노인네와 십여명의 검과 도를 다루는 무리속에서 악전분투(惡戰 奮鬪)하고는 있지만 국면을 다소 유리하게 이끌고 있었다.

    검후의 빙검에서 쏟아져 나온 빙탄에 당했는지 적도 다섯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문제는 석산위에서 뇌전을 부려 공격하고 있는 괴인이었다. 뇌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닥쳐왔 기 때문에 피할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뇌전은 하늘위에서 직접적으로 떨어져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석산 위에 있는 괴인을 통해 반사되어 나오는 와중에 찰나적인 시간 지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 도 도저히 피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빨랐는데 뇌전이 석산에 닿았다 싶은 시각과 거의 동시에 눈앞을 파고 들 었기 때문이다. 구름 사이에서 백색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 감지되자 은성은 이형환위를 펼쳐 순식간에 십여장 이나 이동해 버렸다. 뇌전이 은성이 머물던 대지를 강타하자 은성의 잔영이 섬광속에 작렬되어졌지만 간신히 은성은 몸을 피해낼 수가 있었다.

    '꽈과광...푸확'

    '우르르릉...번쩍'

    뇌전이 대지를 사정없이 유린한 이후에야 천둥 벽력소리가 사위를 진동시켰다. 은성이 머물던 자리에 있었던 바위 하나가 산산히 부서져 허공중으로 날아가며 산화되어 버렸다.

    천신이 진노하신 것일까?

    대지는 두려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은성의 진기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져 가고 있었다. 상단전에 있는 태 극진기가 빨리 회복되도록 내상을 치유하고 막힌 경락을 뚫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기가 회복되어져 가자 은성은 묵귀영의 수법을 펼쳐 이리저리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혹시나 검후가 있는 방 향으로 날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검후가 싸우고 있는 부근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빗방울 사이로 몸을 숨기며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진기가 이할 정도밖에 회복되지 않았으나 은성의 신형은 잘 보이 지도 않을 정도로 빨리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자 석산위에 있는 괴인이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은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향해 뇌전을 방 출해 내었지만 여전히 은성은 뇌전에 격중되지 않은채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인이 뇌전을 부리는 방법은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뇌전이 방출된 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야 다시 떨어져 내리던 뇌전이 눈깜박할 사이에 몇 개나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뇌전이 괴인의 몸을 통해 반사돼 내려오면서 몇 개로 분리되어 날아왔던 것이다. 뇌전은 처음에 한 개가 떨어 지던 위력보다는 많이 약해졌지만 여전히 인간이 감당해 낼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괴인의 공세를 피해 몸을 날리면서 끊임없이 진기를 회복하고 있었기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이동하면 서, 허공중에 남은 잔영들에게 뇌전들이 쏟아져 내려와 살수가 있었던 것이다.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넘긴 은 성은 등뒤에 식은 땀까지 흘러 내렸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네 개의 뇌전중에 한 개는 몸을 이동하는 바로 앞에서 작렬하며 섬광을 번뜩이었는데 조금 만 빨랐어도 뇌전에 정통으로 적중될 뻔하였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네게나 되는 뇌전을 방출한 괴인은 힘이 달렸는지 한참 동안이나 뇌전을 날려 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은성은 진기를 오성정도까지 회복할 수가 있었다. 이제 묵귀영을 펼치는 허공중에는 은성의 흐릿한 잔영만이 떠돌고 있었다. 아무리 석산위에 있는 괴인의 눈이 좋다고 하여도 이제는 자신의 신형이 보이지 않 을 것 같았다. 빗줄기는 더욱더 굵어져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는 은성이였다. 자신이 심안을 발휘하고서야 간신히 위치가 파악된 괴인 은 저 멀리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자신과 검후에게 정확한 공격을 가해 왔었던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능력이었다. 뇌전을 부리는 것 자체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아니 인간의 상상속 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어떤 능력이 더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빗줄기 속에서 떠돌던 은성의 흐릿한 잔영조차 살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대지에는 독중지마와 뒤엉켜 난전을 벌이고 있는 검후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쟁호투로 혼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뇌전을 날릴 수는 없었 다.

    갈곳 없는 뇌전이 방향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꼭 뇌전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비장의 수법으 로 몸안에 뇌전을 축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약한 인간의 신체로는 한계가 있지만 나름대로 장 점이 있었다. 방출했다하면 끝장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뇌전을 불러왔다 방향을 정해 방출하는 수법보다 몇 배나 빠른 수법으로 인간이 피해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하여도 피해내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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