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68화 (68/152)
  • ■ 제 68절 :

    천문금쇄진 내에서 마인과 혈투를 벌여 가까스로 마인을 격살한 은성은 과도한 내력의 소모로 탈진하여 깊은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잠에서 깨어난 은성은 예상외로 몸이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자 누운채 심안을 발휘하여 몸의 상태를 점검 해 보았다. 두발과 오른팔의 부러진 뼈는 그대로였지만 신기하게도 몸의 내상이 완전히 나아 있었다. 경락이 막히고 오장육부의 장기들이 타격을 받고 뒤틀리며 자리를 이탈하자 각 장기속으로 스며 들어간 오행진기들이 자체적인 치유능력을 발휘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장기들이 정상으로 회복되자 오행진기들이 다시 태극진기로 통합되어 막힌 경락을 뚫고 하단전과 중단전으로 나뉘어 들어가 중상을 입기 전의 몸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심안을 발휘하자 내부 장기들의 상태 및 경락과 혈맥은 물론 몸안의 골격까지도 눈에 보듯이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골절 부위에 집중 하고 근육과 골격을 이완시킨 후 부러진 뼈를 맞추자 감쪽같이 접골(接骨)이 되어졌다.

    부러진 뼈를 접골한 은성은 지면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석자 정도 공중으로 떠오른 후 가부좌를 틀고 편안히 공중에 앉았다. 은성의 몸 주위로 황금색 진기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다시금 조용히 사그라 들었다.

    번쩍 눈을 뜬 은성이 무표정한 시선으로 사위(四圍)를 둘러보았다. 갈라지고 파헤쳐진 땅바닥과 마인의 처참 한 시체가 눈에 들어오자 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 천문금쇄진 내로 들어올 때만 하여도 마인이 주선 지부라고 부르던 선경이었는데 지금은 황폐해지고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폐허 속에서 화룡검을 발견한 은성이 태극진기를 운용하자 흙속에 반쯤이나 박혀 있던 화룡검이 날아 올랐다.

    허공으로 일장여나 떠오른 화룡검은 붉은 불꽃을 토해 내며 검날에 묻은 핏자욱을 태워 버리는가 싶더니 여유 롭게 다가와 은성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안으로 스르르 스며 들어갔다.

    마인의 처참한 시체도 그냥 방치할 수 만은 없었다. 허공중에서 내기를 운용하여 널찍하니 사각으로 땅을 파 헤친 은성이 마인의 시신으로 눈길을 돌리었다. 그러자 목이 잘려진 채로 검은 핏자국 위에 나뒹굴고 있던 마 인의 몸뚱아리가 머리와 함께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구부러진 채로 싸늘이 굳은 마인의 사지 가 반듯하게 펴지며 서서히 이동하자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눈을 부릅뜬 마인의 머리가 뒤따라 왔다.

    은성이 사각으로 파 놓은 흙구덩이 속에 머리와 몸통이 붙은 채로 누워 있는 마인의 시체 옆에는 마인이 손수 만든 술병과 술잔 또한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인세를 떨쳐 울릴 능력을 가진 절세 마왕조차도 죽으면 초라 한 한 구의 시체밖에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흙구덩이 옆에 쌓여 있던 흙들이 일제히 튀어 오른 후 쏟아져 내 리자 어느새 작은 봉분 한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진세 내부에 나뒹굴고 있는 붉은 바위를 잘라내어 비석까지 만들어 줄 것인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소림에 끼친 위해(危害)를 생각하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술 한잔 얻어먹은 대가는 충분히 치른 셈이었다. 마왕의 봉분을 만든 은성의 신형이 더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허공 삼장 높이까지 떠올랐다. 그리고는 천 문금쇄진 내의 대지로 찬란한 금광을 뿜어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마인과 은성의 대결로 인해 제 멋대로 파 헤쳐지고 갈라진 흙들이 해일이라도 일어난 듯 떨어 울리더니 신기하게도 평평해져 가기 시작하였다.

    일각이나 지났을까?

    주선지부가 처음의 모습대로 대충 형태를 찾아간 것 같았다. 작은 봉분이 한 개 생기고 선초로 덮인 지면의 칠할 정도가 붉은 황토흙으로 뒤덮여 졌지만 뒤쪽에 심어져 있는 다섯 그루의 나무중 두그루도 심한 격전에도 불구하고 용케 제 형상을 유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공중에 뜬채로 몸을 회전시키며 사위를 바라보던 은성이 조금은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서서히 몸을 내려 붉은 빛이 감도는 평평한 바위위로 내려 앉았다.

    부러진 뼈가 단단히 붙을 때까지 생각할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마인의 목을 베었던 수법에 대한 의 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진기가 완전히 탈진되고 죽음이 가까이 닥쳐오자 화룡검에 간절한 기원을 한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화룡검이 의지가 있는 생물처럼 마인에게로 나아가 태극진기로도 쉽게 뚫리지 않는 두터 운 호신강기를 뚫고 마인의 목을 잘랐다는 것이 지금도 믿겨지지가 않고 있는 것이다.

    문득 부동명왕심공을 익히며 겪었던 기이한 현상을 생각해낸 은성이 양미간 사이에 있는 상단전에 정신을 집 중하고는 그 기운을 끌어 일장여나 떨어진 대지를 향해 쏟아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 다. 아수라 혈마왕으로 변신한 마인의 강력한 호신강막을 뚫은 파천의 위력은커녕 모레 한알조차 움직이지 않 았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은성의 머리는 영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없던 능력이 그때만 우연히 생겼다는 말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막강한 위력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는 태극진기보다도 더 강력한 위력을 가진 거대한 잠재적인 정신력이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 잠재적인 정신력이 무의식중에 발휘되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잠재적인 정신력을 능수능란하 게 다룰 수 있을까 고심하던 은성은 머릿속이 화악 뚫려져 오는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정신력 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단전이 개발되기 전에는 익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허무경 칠단계의 수련법이 바로 정신력 수련법이었던 것이다. 허무경의 칠단계 수련법을 익히면 상단전에 내공과는 구분되는 심기(心氣)가 축적되어질 수 있었다.

    심기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의지(意志)만으로도 이기어검이 가능하고 진기가 없이도 멀리 떨어진 사람을 살상 하거나 치료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심기는 운기조식 방법으로는 얻을 수가 없고 오로지 정신 수양과 깨달음에 의해서만 축적할 수 있었다.

    심기는 이승을 떠나면 계의 율법에 따라 금제되어 사라지지만 영혼 속에 잠재적 씨앗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어 떤 계기가 되면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낼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를 닦다가 죽어 윤회하는 영혼은 환생 하여 도를 닦으면 범인에 비하여 큰 성취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고승(高僧)들이나 고도(高道)들이 제자를 거둘 때 제자의 도근(道根)을 살피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허무경 칠단계의 수련법을 익히던 은성은 그 자신이 이미 어느정도 심기가 축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 었다. 상단전속에 감추면 반딧불만 하고 펼치면 밝은 불빛만한 광명이 머무른채 거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청명하게 유지한채 의식을 상단전에 집중하고 명상에 잠기자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수법중 가장 강력하 고 기묘한 수법인 심안(心眼)이 어떻게 발휘되어 졌는지를 명철하게 알 수가 있었다.

    비록 이번에 부동명왕심공을 익히면서 얻은 깨달음으로 인하여 상단전이 개발되어 졌지만 그전부터 심기가 상 단전 부근에서 축적되고 있었던 것이다. 심기가 축적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운곡에서 얻었던 천부경 의 구절 때문이었다. 현묘지도가 담긴 천부경에 대한 명상은 사고를 넓고 깊게 할수 있는 토대가 되면서 깨달 음을 증진시켜 주었으며 조사지공중 제 삼절인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의 수법을 참오하면서도 사고의 깊이가 심오해져 버린 것이다.

    동방파에서 삼년간 무공을 익히면서 깨달음이 깊어지자 심기가 생기기 시작하여 그것이 그동안 심안으로 발휘 되고 있었다. 소림사에서 상단전이 개발되자 상단전 주변에서 머무르던 심기들이 비로소 상단전으로 들어와 응집되어졌다. 그 당시 은성은 심안이 몇배나 강해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허무경 칠단계의 수련을 마치면 상단전상의 심기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심기 자체는 천지 자연의 순수한 정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단전이 발달되면 심안은 물론 불가에서 득도한 여래 만이 가질 수 있다는 육신통(六神通)이 길러지는 것이다.

    육신통은 심안과 같이 시력이 미치지 않는 부분까지 형체나 성질까지도 직접 보듯이 알 수 있는 천안통(天眼 通)과 멀리서 나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타심통(他心 通)에 다른 사람의 업과 인과를 볼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그리고 몸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고 벽이나 땅속 은 물론 공중까지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마지막으로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는 경지인 누진 통( 漏盡通)이 있었다.

    육신통이 길러지는 단계는 허무경상의 팔단계 수련법으로서 아직은 심안외에는 다른 능력은 개발되지 않은 은 성이였다. 허무경 칠단계 수련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인과의 대결에서 심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은성의 천운(天運)이었다.

    너무도 절실한 마음에 심기가 반응하여 발휘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 심안을 사용하면서 무의식중에 칠 단계 수련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위에서 좌정한 은성은 허무경 칠단계의 수련법을 떠올리며 무아지경속으로 잠겨들고 있 었다. 허무경 칠단계 수련법은 다른 수련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 요구되는 수련법이었다.

    명상과 깨달음 속에서만 심기가 축적되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미 축적된 심기는 수련으로써 사용 가능할 수 있 지만 깨달음이 없다면 더 이상의 진보는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축적된 심기만 사용하여도 하단전과 중단 전에 축적된 태극진기 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은성이 현재의 무위를 한단계 건너뛰기 위해서는 태극진기를 축적하는 것보다는 심기를 축적시켜야만 하였다.

    명상에 잠긴채 심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수련한지 이틀이 지났을 때 은성은 천문금쇄진 내부로 누군가가 들어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문금쇄진 내로 들어오기 전만 하여도 전혀 심안이 통하지 않던 천문금쇄진이었지만 이틀간의 명상으로 심기 를 사용하는 방법이 조금 숙달되어지자 심안은 천문금쇄진 까지도 관통되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더 명상을 하여서 조사지공의 심득까지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사지공의 마지막 구절에 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인영이 천문금쇄진 안쪽으로 발을 내 딛기도 전에 은성은 인영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범각 대사와 달라이라마였다.

    범각대사는 천문금쇄진의 명문(明門)에 위치한 채로 진세 내부를 살펴보다가 마인은 간데 없고 없던 봉분이 하나 생겼으며 은성이 바위 위에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 동안의 추이를 예상하였는지 명문옆에 서 있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천문금쇄진 내부로 들어섰다.

    이들이 진세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에 은성도 명상에서 깨어났다. 바위위에서 몸을 들썩이지도 않은 것 같았는 데 은성은 어느새 결과부좌의 자세를 풀고 바위 앞에 서서 범각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님, 다행히 마인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마인과의 결전에서 상처를 입어 상처를 치유하느라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은성은 부러진 뼈들마저 어느새 완치가 되었는지 행동하는 것에 조금의 불편도 없어 보였다. 마인과의 대결에 서 바위 등에 부딪히며 생긴 작은 상처들도 딱지하나 없이 완치되어 있었다. 백의 장삼은 더럽기 이를데 없었 으나 피부에서는 옥과 같이 광채가 흘러 나왔다. 무엇보다도 은성의 눈빛은 며칠 전에 비해 더욱더 현묘해진 것 같았다.

    은성의 심원한 눈빛을 바라보던 범각대사는 은성이 이미 자신이 바라볼 수 없는 높은 경지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대협의 신수를 보니 제가 괜한 노파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며칠전 진세내로 들어섰다가 갑자기 진세가 뒤 틀리는 바람에 이대협의 안위 확인은커녕 뒤엉켜진 진세속에서 늙은 육신을 눕힐 뻔 하였습니다. 간신히 빠져 나간 후 오늘 혹시나 하여 달라이라마님과 함께 들어섰습니다. 이대협이 잘못됐다면 저희 둘도 이곳에 뼈를 묻기로 작심하였는데 천의는 거역할 수 없는가 봅니다. 악인은 죄옥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미타 불!"

    은성에게 혜광심어로 말을 마친 범각 대사가 마인의 봉분이 있는 방향을 향해 허리를 숙이자 달라이라마도 불 호를 외우며 봉분을 바라보았다. 진세내로 들어선후 은성이 무사함을 확인하자 큰 시름을 놓았다는 듯이 달라 이라마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평안함이 깃들여 있었다.

    "스승님, 진인(眞人)은 하늘이 보살핀다고 스승님의 무사하심을 자신할 수 있었으나 너무도 고강한 적수의 무 위를 듣고 내심 걱정하였습니다."

    달라이라마의 표정만으로도 그 마음을 짐작할수 있다는 듯 은성이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선사님, 아마도 마인보다는 제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선사님을 다시 보지 못할뻔 하였습니다."

    달라이 라마에게 은성이 마인을 운이 좋아 이겼다고 말하자 범각 대사가 은성에게 혜광심어를 발하였다. 마인 이 죽자 소림이 흉겁을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범각대사의 안면에는 깊은 평화가 담기어져 있었다.

    "이대협, 어찌 운만으로 마겁(魔劫)을 막으실수 있었겠습니까? 이대협의 무위가 뛰어나신 까닭이지요. 중원의 하늘을 동방의 샛별이 가득 비추이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모두가 소림과 중원 무림의 홍복인줄 알고 있습니다."

    "대사님, 너무 과한 칭찬이십니다. 두분께서 부동명왕심공과 보리패엽공을 전수해 주셨기 때문에 마인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마인을 물리치는데 소림과 포달랍궁의 무공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소림과 포달랍궁 양 대 가람(伽藍)에서 마인을 제거한 것입니다."

    은성이 겸허하게 마인을 제거한 공을 소림과 포달랍궁으로 돌리자 범각대사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은성을 바 라보다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하였다.

    "이대협, 대협의 흉금은 바다보다 넓고 태산보다 높아 노납의 짧은 안목으로는 측정하기조차 어려우십니다. 일백여 성상을 마음을 닦아 왔지만 아직도 마음의 크기가 손바닥 보다 작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직도 깨달음이 부족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고 있으니... 이대협에게서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소림의 체면을 살려준 은성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표한 범각대사가 이번에는 달라이라마를 보며 혜광심어를 발 하였다.

    "선사님, 이제야 마음 편히 무량한 진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속세의 일로 불편했 던 기억을 잊어 주시고 저희 소림을 위해 애써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이대협과 선사님을 진세 밖으로 배웅해 드린후 저는 이곳에 남아 불도를 닦을까 합니다."

    범각대사의 말을 듣던 달라이라마는 은성을 일별한 후 다시금 범각대사를 바라 보았다.

    "대사님, 저 또한 요즈음 자그마한 심득이 있어서 깊은 선정이 필요한데 잠시 같이 수행할 수 있도록 선처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범각 대사가 보기에 달라이라마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 절세곡을 찾아왔을 때에도 십년전의 달라이라마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성정이 안정되고 깨달 음의 깊이 또한 깊어져 있었는데 절세곡에 도착한 후 한달여 동안에는 깊은 진경에 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바 로 옆에서 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근래에 들어 큰 가르침을 받았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달라이라마가 진경에 들 수 있었 던 원인이 은성에게서 가르침 받았던 진묘(眞妙)한 진리 때문임을 알 수는 없었다. 같은 불도를 닦는 도우로 써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게다가 달라이라마에게는 과거 악연은 묻어 버리고 소림을 위해 애써 준 은혜 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선사님이 원하시면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의 도우로써 선사님만한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빈승이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범각대사가 이곳에 남아도 좋다는 허락을 하자 깊이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답례를 한 달라이라마가 은성에게 다가왔다.

    "스승님을 모시고 다니며 높으신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만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미진했었던 부분에 대한 작 은 심득이 있어 몇 달 이곳에 머물며 선정에 들고자 합니다. 수행이 끝나면 무림맹에 들러 찾아 뵙도록 하겠 습니다."

    가르침을 내릴 수는 있지만 깨달음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가르침으로 인하여 조금 더 빨리 깨달을 수는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깨달음은 자각(自覺)으로 만이 가능한 것 이다. 자신의 제자인 달라이라마가 심득이 생겼으며 더 큰 깨달음이 눈앞에 닥쳐 이를 위한 수행을 하고자 하 는데 마다할 은성이 아니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며 은성이 말을 하였다.

    "대각의 기회는 불시에 닥치지만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선사께서 대각의 기회를 맞으신 것 같은데 정심으 로 매진하셔서 큰 깨달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다행히 이곳 천문금쇄진 내부는 외부에서 밀려드는 천기와 지 기가 쌓이는 천비지처(天秘地處)라서 수행을 위해서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 다."

    달라이라마와의 작별인사를 마친 은성이 범각 대사에게 그만 진밖으로 나가자는 눈빛을 보내자 범각대사가 은 성과 함께 천문금쇄진 밖으로 나왔다. 진세 밖으로 나가는 은성을 몇 달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운 표정 으로 배웅한 달라이 라마는 은성이 진세 밖으로 빠져 나간지 일다경이나 지난후 진세내의 지형을 살핀다음 한 자리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기회라는 손님은 앞머리만 있고 뒷머리가 없어서 왔을 때 잽싸게 앞머리를 끌어 당겨야지 스쳐 지나가면 잡고 싶어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달라이라마였다. 심득이 생긴 지금 바로 수행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 심득을 기초로 얻을수 있는 대각의 기회를 잃고 마는 것으로 한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부좌를 틀고 호홉을 고르자 달라이라마는 깊은 진경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천문금쇄진을 나온 후 범각대사와 함께 불수복마진을 빠져나온 은성은 범각대사와 석별의 인사를 마친 후 지 객원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림사에 와서 절세곡에 처음 방문하던 때에 비해서는 상단전이 개발되고 심기 가 축적되는 듯 무공이 크게 향상된 은성이였다. 심안 또한 몇 배나 향상되어졌기 때문인지 소림의 하늘을 높 이 날며 은성과 검후를 찾던 금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인과의 대결시 마인이 발하던 마음(魔音)을 성찰하던중 우연히 창안한 무성음(無聲音)을 발하자 금아가 금 새 알아듣고 쏜살같이 은성에게로 날아 내려왔다. 주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하늘높이 금아가 있 는 방향으로는 큰 휘파람 소리가 울려졌기 때문이다.

    "은성아! 무슨 생각하냐?"

    잠깐 절세곡에서의 일을 회상하던 은성은 금아의 물음에 화급히 정신을 추스렸다. 검후까지 눈앞에 있는데 사 람을 앞에 놔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검후의 얼굴을 보니 화난 안색이 아니었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응. 잠시 선사님 생각했다... 은하! 금아가 답답해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이제 무림맹으로 떠날까?"

    은성은 금아가 답답해 하므로 소림을 떠나자고 하였지만 사실 소림에서 오래 머물수록 검후가 공지대사가 죽 은 일로 괴로움이 길어져 갈 것 같아서 서두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검후도 은성이 무림맹에 머물고 있는 동방파의 사부님을 빨리 보고 싶을 것이라는 생각에 즉각 찬성을 하였다.

    자신이 소림사에 들르자고 하지만 않았다면 벌써 상봉하여 사제간에 못다한 회포를 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검후였다.

    "잘들 생각했다. 그럼 생각난 김에 지금 바로 떠나자!"

    금아는 신이나 있었다.

    은성과 검후가 자기 때문에 소림사를 빨리 떠나자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물이며 인간의 말을 알아듣고 할 줄도 알지만 인간의 미묘한 심리상태까지 파악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검후가 지객원에 있는 동자승 청정을 불러 지객원주를 청한 후 소림을 떠나가겠다고 말을 전하자 장문인이 정 문까지 따라 나와서 은성과 검후를 배웅해 주었다. 장문인을 따라왔던 칠대 금강승들의 눈빛에는 아쉬움의 기 색이 완연하였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정허스님에게도 반장의 예를 취한 은성 일행은 소림을 등지고 조금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산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등뒤에서 산문의 범패소리가 은은히 들여오는 것 같았다.

    뒤를 한번 바라본 검후는 아직도 소림장문인과 지객원주 그리고 금강승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 다시 한번 반장의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돌아서는 검후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지대사가 모든 내공을 자신에게 전해준 뒤 숨져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내공은 직전 제자는 물론이고 자식에게까지 도 쉽게 물려 주지 않는 것이 무림인이었다.

    아무리 속세를 벗어난 고승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자신이 평생 수련한 모든 내공을 물려주어도 그중 삼 사할만을 상대방이 흡수할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데 누가 아까운 내공을 잃어버리면서까지 물 려 주려고 하겠는가?

    ...

    언젠가는 반드시 공지대사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소림을 도와주겠다는 의지를 굳히며 검후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은성과 검후의 머리 위쪽 저 높이에서 금빛 새 한 마리가 천천히 유영하듯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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