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67화 (67/152)
  • ■ 제 67절 :

    멀리 지객원이 보이자 검후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은성을 빨리 보고자 하는 들뜬 마음에 면경도 보지 못하고 서두른 것이 내심 후회가 되었다. 촉박히 내딛던 검후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데 지객원 방향에서 금빛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금아였다.

    "와! 진짜네. 은성이 귀신이다. 무당이다."

    검후에게 다가선 금아는 뜻 모를 말을 하였다. 그런데 헤어진지 세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금아의 중원어 실 력은 부쩍 늘어 있었다. 그동안 은성에게서 중원어를 집중적으로 배운 것 같았다.

    "은하야! 반갑다. 반가워."

    금아가 검후의 어깨에 내려 앉으며 반가움을 표시하자 검후도 미소를 띄우며 인사를 하였다.

    "그래, 금아야! 나도 반가워."

    어깨위로 앉은 금아의 황금색 깃털을 쓰다듬던 검후가 지객원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검후의 내심을 짐작이라 도 하였는지 금아가 종알거렸다.

    "은성이 오고 있다. 은성이 대단하다. 은성이가 은하 오고 있다고 하여서 믿을 수 없어 먼저 와 봤다. 귀신같 이 맞췄다. 봐라! 저기 온다."

    금아의 말처럼 지객원 방향에서 은성이 빠른 속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검후가 무의식중에 한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하자 역시나 한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한 은성이 발걸음을 빨리하여 순식간에 검 후에게로 다가왔다.

    "은성이가 매일 은하 니 얘기만 했다. 지겹게 했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다. 은하, 은하, 은하..."

    검후에게 다가오던 은성은 금아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태극진기를 약하게 응축시켜 금아에게 쏘아 보냈다. 맞으면 다소 충격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금아는 어느새 검후의 어깨에서 날아오르며 잽싸게 피 해 버렸다. 피하면서 금아는 계속 은성을 놀리었다.

    "잠꼬대도 했을거다. 은하, 은하..."

    무안해진 은성이 금아에게 다시금 진기를 쏘아 보내 혼을 내 주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출되려는 진기 를 회수했다. 정말로 자기가 잠꼬대를 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손을 내리고 정감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검후를 바라보니 검후의 눈가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망울이 맺 힌 채로 웃음을 지으며 검후가 은성이에게 다가와 은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양손으로 은성의 등을 껴안았다.

    금아에게서 은성이 자기만을 생각 하였다는 말을 듣자 너무나도 큰 행복감에 눈물이 맺힌 검후였다.

    은성을 껴안고 있자 이 세상 모든 행복이 다 자기 것인양 느껴졌다.

    "야! 니들 지금 뭐하고 있냐? 여기 소림사다, 소림사... 떨어져라! 떨어져!."

    금아의 질시어린 외침이 있었지만 한참을 껴안고 있던 은성과 검후는 반각 정도 지나서야 아쉬움과 반가움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보며 서서히 몸을 떼었다. 하지만 아직도 양손은 꼬옥 잡고 있었다.

    한달 전 지객원주를 통해서 공지대사의 죽음과 검후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은성이였다. 공 지대사가 왜 죽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길이 없는 은성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고승이 한명 죽었다는 슬픔보다 는 가르침을 내려줄 사람이 사라진 후 검후가 겪을 실망과 시련에 더 애달파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검후를 만나기 전까지 한달여 동안 은성의 검후에 대한 걱정은 하루도 빠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은 관심으로 표현되고 관심은 걱정으로 가슴을 애태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금아에게도 은성의 검 후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 보였던 것 같았다.

    오늘 이처럼 놀림까지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이었다.

    오늘 이처럼 건강하고 활달한 모습으로 꿈속에서까지 그리워하던 환한 웃음을 다시 보여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검후의 환한 웃음속에서 은성은 그동안 애태우며 키워 왔던 가슴속 응어리가 일시에 하늘 저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검후의 다정한 눈망울을 바라보던 은성은 정감이 가득 서린 검후의 눈빛 깊숙이에 어 려있는 현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검후가 크나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빠져들 것 같은 검후의 큰 눈동자를 바라보며 은성은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러자 검후도 입가에 가득 미소를 담으며 화답해 주었다. 진실한 사랑이란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검후와 은성은 서로간에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건만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그 모든 심사를 다 푼 것 같았다.

    깊고 깊은 눈빛 만으로 말이다. 다정한 연인이 한손을 마주 잡고 소림사의 지객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 를 금빛 새 한 마리가 뭐라고 꿍시렁 거리며 뒤따르고 있었다. 바람결에 희미하게 금빛 새의 투덜거리는 소리 가 들려 왔다.

    "애인없는 새...서러워서..."

    더는 들어줄 수 없었는지 바람이 휭하고 다른 소리는 휩쓸어가 버렸다. 지객원의 정자에서 바라보는 죽림의 정취는 언제나 평온하기만 하였다.

    옆에 은성이 앉아 있어서 그런지 하늘에 떠가는 조각 구름도 그들만의 낙원을 찾아 정겹게 흘러가는 듯 보였 고 대잎이 소슬바람에 '솨아아' 떨어 울리는 소리도 다정한 사랑의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이 모두가 사랑하는 님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며 검후는 마주 잡은 은성의 손을 더욱 굳세게 잡았다.

    "하늘이 파랗기도 하네요. 저 높은 파란 하늘 아래 오라버니와 저 단둘이만 있는 것 같아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검후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성은 시선을 위쪽으로 올리었다.

    하얀 조각 구름이 몇 점 떠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을뿐 손가락으로 찌르면 파란물이 줄줄 세어나올 것만 같은 파아란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련한 검후의 목소리를 듣자 은성의 마음도 행복한 상상속으로 빠 져 들어갔다. 파아란 하늘을 지붕삼아 하얀 조각 구름위에서 검후와 단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며보는 것이다.

    구름으로 집을 짓고 가구도 만들고 예쁜 옷도 만들어 입는다. 구름이 흘러가는 지역의 건축 양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집을 개조하고 검후에게는 매일 다른 옷을 손수 지어 선물해 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곳에서는 잠시 쉬었다 흘러가고 가뭄에 목타는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빗줄기도 선사해 주며 끝간데 없는 하늘 저편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입가에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하얀 조각 구름을 응 시하던 은성이 퍼특 행복한 상상속에서 깨어났다. 하얀 조각 구름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아였다.

    언제 사라졌었는지 어느새 하늘 저 높이 오른 금아가 검은매 한 마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창공을 거침없이 누 비던 검은매가 오늘 임자를 만난 것이다. 금아는 하늘 위에서 빠르기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검은매를 고양 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슬쩍 슬쩍 건들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매는 생사가 오락가락 하는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금아를 피해 달아나려고 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급선회 하고, 죽은척 날개짓을 멈추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오다 몸을 뒤집으며 상승기류를 타고 몸 을 위치를 바꾸는 등 나름대로 금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매는 금아에게서 조금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멀어지는가 싶으면 금새 가까워지고 눈앞에서 사라 졌는가 싶으면 어느새 뒤 꽁무니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며 파란 하늘을 어지럽히 던 금아의 즐거운 유희는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검은매가 금아에게서 회피하려는 동작을 갑자기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금아가 괴롭히면 괴롭히는대로 모든 것을 체념하였다는 듯이 철저하게 금아를 무시하며 검은매가 저항을 포기 하자 더 이상 괴롭히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는지 금아도 흥미를 잃어 버렸다. 검은매를 포기한 금아는 파란 하늘에 금빛 잔영을 그으며 은성과 검후에게로 날아왔다. 아마도 이곳에 검은매 보다도 더 재미있는 말동무가 있는 것 같았다. 검후의 따스한 손을 잡고 한껏 분위기에 젖어있던 은성이 전음을 날려 다른곳에서 놀다 오라 고 하였으나 금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순식간에 정자의 난간에 내려앉아 은성이를 바라 보았다.

    "은하 오면 소림사 떠난다고 했잖아? 안가냐? "

    금아의 당돌하면서도 똘망한 말소리에 검후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어 금아를 바라 보았다. 아무리 영물이라고 하여도 그렇지 금아가 중원어를 너무나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아는 언제 가고 싶은데?"

    검후가 은성을 대신해 금아의 의향을 물었다.

    "지금 가자! 소림사는 이제 지겹다. 맨날 목탁 소리하고 염불 소리만 들린다."

    "그렇지만 선사님이 안 계시잖아. 선사님 나오셔서 오라버니 안계시면 서운해 할 텐데..."

    금아가 소림사를 떠나려고 하자 갑자기 달라이라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 검후가 달라이라마에 대한 말을 하 며 은성을 바라 보았다. 소림사를 올라올때는 같이 왔었는데 범각 대사를 만나러 가신 이후의 행적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사? 아! 늙은 대머리 중. 나도 한 번도 못 봤다. 은성아! 대머리 중 어디갔냐?"

    금아도 검후의 말을 듣고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생각이 미쳤는지 역시나 은성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하였다.

    "금아야! 늙은 대머리 중이 뭐야! 좋지 않은 표현이니까 다음부터는 그렇게 호칭하지 말고 선사님이라고 불러 . 알았지?"

    은성이 나무라는 어투로 말하자 금아가 시선을 돌리며 낮게 투덜거렸다.

    "흥, 다 늙어 뼈다귀만 남은 노인이다. 제자라고 되게 챙긴다... 선사가 뭐야, 선사가..."

    투덜거리며 흘깃 은성을 본후 은성이 엄한 표정으로 계속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금아가 고개를 돌려 은성의 두 눈을 바라보며 또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선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선사 어디 갔냐?"

    어린애 같이 투정을 부리는 금아를 바라보던 은성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금아를 쓰다듬었다. 금아가 동물이 아니라 말 잘 듣는 친동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달전에 절세곡에서 빠져 나온 은성은 지객원까지 오는 도중에 소림의 상공에서 은성을 찾아 배회하고 있는 금아를 만날 수가 있었다. 검후가 수련을 마치기로 한 석달 중에서 남은 두어달동안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은 성은 금아에게 집중적으로 중원어를 가르쳤는데 이미 인간의 언어의 소중함을 알아 차린 금아는 중원에 와서 불편했던 기억들 때문인지 놀랄만한 집중력으로 언어를 습득해 나갔다. 전에 소림사에 오르기전 검후에게서 중원어를 배우던 때 보다도 몇 배나 향상된 집중력과 호기심으로 이제는 짧은 문장은 왠만큼 다 구사할 수 있 는 수준이 된 것이다.

    "선사님은 이곳에 남아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우리끼리 먼저 하산하라고 말씀하셨어. 일을 끝마치면 무림맹 으로 오시기로 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은성은 말끝의 여운을 길게 남긴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범각 대사와 달라이라마를 생각하자 불연 듯 두달전의 기억이 은성의 눈가에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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