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66화 (66/152)

■ 제 66절 :

검은 바위 위에 은하수가 걸쳐져 있는 듯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려오는 작은 폭포는 물방울이 햇빛 에 반사되어 송림사이로 둥근 무지개 다리를 걸쳐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줄기 검광이 송림사이에서 튀어나와 무지개를 가른 후 사라져 버렸다. 검광은 무지개가 잘라지지 않았음이 억울한 듯 재차 튀어나와 현란하게 허 공을 유린하고 있었지만 야속한 무지개는 한치도 잘라지지 않았다.

송림 사이에서 솟아오르던 검광이 서서히 이동하여 소나무로 가려진 공터를 지나 시야가 확트인 곳으로 나아 가자 비로소 검광을 펼친 사람의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지금껏 허공을 가로지를 검기를 날리우던 검객은 긴 머리를 휘날리는 소녀였다.

소녀의 검은 투명하였는데 투명한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가 어찌나 극냉한 음기를 뿜어대고 있는지 멀리 에서도 차디찬 한기가 뻗쳐 나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 소녀가 바로 소림 삼신승중 한명인 공지대사 에게서 보타문의 비전 무공을 사사받기 위해 지객원을 나선 검후였다.

지금껏 보타문의 장문인에게만 전해지는 비전 무공을 펼쳐내던 검후가 빙검 여래혼을 회수하여 눈앞에 세우고 는 호홉을 가다듬은 후 눈에 익은 절기를 펼쳐 내었다.

검후가 익힌 무공중 가장 위력이 강한 옥녀산화의 초식이었다. 검후 주변을 에워싼 화영들이 예전에 비해서는 몇배나 많아져 있었다. 순간 짙은 화향이 물씬 풍길 것 같은 화영들이 폭발하듯 허공중에 걸린 무지개를 향해 쏘아져 나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무지개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던 것이다. 옥녀 산화의 초식을 펼치며 허공중으로 날아 올랐던 검 후가 서서히 떨어져 내려오면서 다시금 호홉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도 검후의 빙검 여래혼에서 옥녀산화의 초식이 펼쳐졌지만 처음의 초식과는 왠지 다른 것 같았다. 초식 을 펼치기에 힘이 부친 듯 여래혼이 무겁고 둔중하게 나아갔으며 몸에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옥녀산화의 초식 을 펼치는 데에도 검후의 표정에는 자신없어 하는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여래혼이 나아가는 검로를 따라 한송이 두송이 피어오른 수많은 꽃송이 들이 아름답게 빛을 내다가 갑자기 팽 이처럼 회전하며 화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옥녀산화의 초식과 다를게 없었다. 옥녀산화의 초식을 펼치면 검후 의 주변을 에워싼 화영들이 번개같은 속도로 검후가 원하는 방향으로 퍼져나가 가공할 파괴력을 자랑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검후의 주변을 에워싼 화영들이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면서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검후가 정 면으로 내뻗고 있는 빙검 여래혼의 검봉이었다. 수많은 화영들이 스며들고 있는데도 여래혼의 검봉에 매달린 작은 꽃 한송이는 커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화영들이 앞다투어 스며들자 작은 꽃송이의 색이 서서히 변화되어져 갔다. 검봉에 걸린 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꽃 한송이의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빙검 여래혼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작은 금화(金花)는 찬란한 비상을 꿈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빙검 여래혼은 차마 금화를 떨쳐내지 못하 고 있었다. 내력이 받쳐 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화가 눈녹듯이 여래혼 속으로 스며 들어간 후 한참 있다가 '후' 하는 날숨 소리와 함께 검후가 빙검 여래혼 을 옥으로 세공된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런 검후의 얼굴에는 땀방울들이 소록소록 돋아나 있었다. 작은 폭포수 앞에 다가선 검후가 두 손으로 물을 퍼 세안을 하였다. 그리고는 송림속으로 들어가 넓직한 바위 위에 앉아 내기를 고르기 시작하였다.

송림속을 파고 들어온 솔바람 한줄기가 채 물기가 마르지 않은 검후의 옥용을 훑고 지나가자 검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검후가 검법 수련을 마치자 송림 공터와 육십여장이나 떨어진 절벽위에서 검후를 내 려다 보던 눈길도 이내 돌리어졌다.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뒤돌아 바람에 몸을 싣는 인영의 승포자락이 유난 히도 돋보이고 있었다.

송림이 우거진 능선에 지어져 있는 별각안에서 검후는 공지대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런 향취가 느껴지는 별각은 지금과 같이 공지대사의 무공 강습시를 제외하고는 두달전 부 터 검후 혼자서 사용하고 있었다. 원래는 공지대사가 머물던 처소였으나 검후에게 내어준 후 공지대사는 같은 소림삼신승의 한명인 공수대사와 머물고 있었다.

두달전 이곳에 도착한 검후는 조금도 쉴 틈이 없이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검을 들고 나가 보타문의 무공을 수련하고 공지대사에게서 무학에 대한 강론을 듣고 무 공을 전수 받았으며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운기조식에 몰두하였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묘시 말부터 해가 중천과 서산 사이에 걸려져 있는 미시 말까지 하루 네시진동안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 고 나면 온 몸에 있는 진기가 탈진되어 몸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로 나른해져 왔다.

그걸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시초부터 유시초까지 공지대사와 함께 보타문의 절기들을 펼쳐 보이며 비무를 하였다. 간단하게 석식을 먹 고 유시 중반부터는 공지대사에게 이곳 별각에서 무공 강습을 들었다. 오늘따라 공지 대사의 얼굴에서 범접키 힘든 광휘가 솟아나고 있었다.

"검후! 좀전에 펼치었던 무공의 이름이 '천녀유한(天女有恨) 이라고 했습니까?"

별각에 들기전 비무를 하면서 공지대사에게 펼쳤던 검법을 말하는 것 같았다.

천녀유한은 선녀가 춤추는 것 같은 우아한 검법으로 검로가 물 흐르듯이 부드러우면서도 공수가 자유로운게 특징이었다. 검후와 비무를 하면서 종종 겪어본 검법으로 부드러움 속에 내밀한 자연의 조화가 담겨 있어 검 도의 깊은 묘미가 숨어 있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공지대사는 오늘 놀랄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무중 천녀 유한 검법을 펼치던 검후가 검로에 취해 무아지경 상태로 접어들어 버렸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공지대사와 비무에 열중하다 보니 비무 상대인 공지대사와 천녀유한 검법을 펼치는 빙검 여래혼만이 존재하는 무아경의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무아경의 상태에 접어든 검후는 비무 상대인 공지대사 의 공격을 막고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서 천녀유한의 검법을 무상무념의 심정으로 차분히 전개하고 있었지만 공지대사는 생사의 기로에서 헤메게 되었다.

두달간이나 비무를 벌였지만 지금까지 검후가 우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비록 두달동안 공지대사가 검후의 무공 약점과 보완해야 할 사항을 교정해 주었으며 새로운 무공 전수 및 무공상의 상승 무리를 깨닫도록 도움 을 주었지만 아직도 공지대사의 무공경지에 비해서는 한참이나 모자라는 검후였다.

그런데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검후가 펼치는 천녀유한의 검법에 공지대사가 여유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하 고 있는 것이다. 몇번이나 가까스로 위급한 상황을 넘긴 공지대사가 불영선하보 대신에 근래에 들어서 깨우치 기 시작한 금강 부동신법을 펼치고서야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호가 있어야만이 익힐 수 있다는 금강부동 신법을 펼치고서도 천녀유한의 공세에서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천녀유한이라는 검법은 검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송림속을 휘도는 한가닥 바람처럼 자유롭고 계곡속을 흐르는 한줄기 물살처럼 거침이 없었다. 막으면 휘어들 고 피했다 싶으면 어느새 한줄기 바람처럼 눈앞을 파고 들고 있었다. 극변의 초식인 것도 같았지만 무변으로 이어지는 자연검로였다.

아무리 절세적인 신법일지라도 바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순간에 몸을 천번 변화 시킬 수 있는 무공도 안개속에서 옷이 젖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공을 이용해 억지로 막아낼 수는 있지만 말이다. 비무를 통해 검 후의 초식을 보완해주고 상승 검도를 일깨워 주고자 하였지만 더 이상 초식만으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자신이 익힌 소림의 모든 무공으로도 초식만 가지고는 현재의 위기를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호승기공중에 소림 최고로 일컬어지는 금강불사공(金剛不死功)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고서 반야신공을 최대한 운용하여 간신히 검후의 공세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천녀유한의 부드러운 검초가 그처럼 매섭게 보일 수가 없었다. 반야신공의 막대한 잠경을 넘어서 금강 불사공 으로 층층이 보호되는 공지대사의 승포자락에 작은 구멍까지 뚫어 놓을 정도였던 것이다.

"예, 그렇습니다. 보타문의 조사님께서 말년에 깨달음을 얻으셔서 창안하신 다음 역대 검후에게만 전해지고 있는 검법입니다."

검후의 대답을 들으니 검후는 아직도 천녀유한 이라는 검법의 위력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도 있었다. 오늘 검후가 무아경의 상태로 접어들지만 않았다면 공지대사 조차도 천녀유한이란 검 법의 진정한 위력을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지대사가 검후의 공세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사라지자 상대를 잃어버린 검후가 무아경 상태에서 깨어났는데 좀전에 자신이 펼친 가공할 무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 고 있었다. 더 이상 비무를 계속할 마음이 싹 가신 공지대사가 오늘의 비무는 여기서 그치겠다고 하자 눈가에 다소 의아한 기색을 띄였을 뿐이었다.

"왜 검법의 이름이 '천녀유한' 인지 검후는 혹 들으신 바가 있는지요?"

검법명을 보면 잔혹하고 살기가 어린 검법이 연상되었지만 검법은 부드럽고 정정당당하였으며 검의는 은연중 만상을 포용하고 있었다. 공지대사는 천녀유한 이란 검법의 뛰어남에 비해서 왠지 검법명이 어울리지 않는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도 확실히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사님께서 말년에 검법을 만드신 후 한 번도 실전에 사용해 보 지 못했다 들었습니다. 역대 검후들께서도 그리 많이 사용하지는 않으셨구요."

"음..."

공지대사가 이해가 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법을 겪어보니 보타문의 조사가 말년에 깨달음을 얻어 이 무공을 창안한 후 가졌을 자부심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림을 석권할 무공을 창안하였다고 하지만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고 이를 익힐 제자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마도 보타문의 이대 검후는 일대 검후인 조사에 비해 자질이 부족하였던 것 같았다. 자신은 나이가 들어 서 방 정토로 향할 날이 멀지 않았는데 제자는 자질이 부족해 절세 검법을 평범한 수준으로 밖에 익힐 수 없으니 한이 맺힐 만도 한 것이다.

"검후! 보타문의 무공은 신비하기 이를데 없지만 노납이 생각하기로는 그 모든 무공의 정화가 깃든 무공이 바 로 천녀유한 인 것 같습니다. 향후 검후의 성취는 모두 천녀유한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공지대사가 검후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검후는 쉽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공지대사를 바 라 보았다.

"대사님, 비록 천녀유한의 검법이 조사님께서 창안하신 검법으로 저도 심오한 경지까지는 수련하지 못하였지 만 그 위력은 한계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대 검후님들이 평하신 본문의 무공 서열로 따져도 다섯 손가락 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말한 의도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듯이 의아해 하는 검후를 바라보던 공지대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는 표정으로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검후, 천녀유한은 깊이가 없는 검법입니다. 아마 검후께서 평생을 수련해도 그 심연 밑바닥에 이르렀다고 장 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계가 없는 검법이지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강호 제일 문파를 표방하는 소림사에 도 그에 필적할 만한 무공이 드문 형편입니다."

공지대사의 말을 듣던 검후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달마역근경과 소림칠십이절기를 포함하여 심오하고 절세적인 무공이 무궁무진하게 전해지고 있다는 소림사였 다. 심지어 어떠한 무공은 너무나 심오한 경지이라서 일백년에 한 명도 제대로 익힌 자가 없다는 풍문조차 떠 돌고 있는 소림사인 것이다. 그런 절세 무학의 보고인 소림에서조차 비교할만한 무공이 없다니...

머리 속으로 다시 한번 천녀유한의 검로를 되새겨 본 검후가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녀유한의 검법을 두명이 펼쳐 낸다고 하여도 공지대사를 이 겨낼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옥녀산화의 초식이나 아니면 자신의 태사조와 함께 옥녀산화의 초식을 창안한 후 따로이 심득을 얻어 창안하였다면서 공지대사가 가르쳐준 다정만리(多情萬里)라는 초식이라면 다소 나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고승은 절대 허투른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옥녀산화 초식을 보완해 주고 이보다 몇배나 위력적인 다정만리라는 초식을 전수까지 해준 무학의 대종사인 것이다.

"대사님의 금언(金言)을 가슴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아직 무공의 경지가 부족하여 옥석을 구분하지 못 했던 것 같습니다. 천녀유한의 한계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겸허하면서도 열정이 느껴지는 검후의 태도에 공지대사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상승 무공을 익히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자질이 제일 중요시 되지만 그에 버금가는 항목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끝없이 노력하는 열정이었다. 검후가 자질은 물론 겸허한 마음가짐과 순수한 열정이 넘쳐 흐르고 있 음을 보니 죽어 검후의 태사조를 만나도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눈동자의 초점을 흐리며 희미한 미소를 띄우던 공지대사가 지긋한 눈빛으로 검후를 바라 보았다.

"보타문의 내공심법은 강호 일절로 소문이 나 있는데 노납이 알고 있기로는 불가(佛家)에서 유래되어 전해졌 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그러한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조사님이 보타문을 세우시기 전에 불가와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음...선과로다.'

검후의 대답을 들은 공지대사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였다. 그리고 무슨 결심이라도 했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풀었다.

"오늘 낮에 송림에서 검후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지켜 보았는데 더 이상 가르칠만한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 다. 옥녀산화 초식도 부족함이 없었으며 다정만리 초식도 더 이상 지도가 필요없을 정도였습니다. 다만 아쉬 운 것은 내공이 부족하여 초식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모두가 대사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대사님의 노고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천녀유한 검법도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검후가 말을 끝마치자 공지대사는 고개를 끄덕끄덕 한후 고요한 신색으로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 내기를 발휘하여 방문을 열어 제낀 후 방안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몇번 들이 마셨다.

"내일부터는 노납에게서 더 이상 무공을 배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약속한대로 남은 한 달은 채우시기 바랍니다."

"대사님 잘 알겠습니다.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 평생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한달동안 대사님께서 지 도해주신 무공 구결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열심히 수련하겠습니다."

공지대사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면 더 이상 염치없이 매달릴 수 없는 검후였다. 아직은 부족한 것 이 많았으며 조금 더 지도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자신은 한 문파의 장문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내공이 받쳐 주지 않는 초식은 사상누각이니 내공수련도 등한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 검후의 화후가 어느 정도인지 한 번 살펴 보겠습니다."

포단에서 몸을 일으킨 공지대사가 검후에게 다가와 검후의 완맥을 잡고 내공을 주입하자 검후가 공지대사의 내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급히 운기를 하여 저항하였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하여도 타인의 완맥을 함부로 잡는 것은 큰 실례가 되었지만 공지대사는 속인이 아닐뿐더러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공지대사가 자신의 내공 화후를 세밀히 살펴볼 수 있도록 운기를 하여 자신의 내공 정도 를 보여 주고 있는 검후였다. 그런데 공지대사는 검후의 내공 화후만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진기를 이리저리 휘돌리며 검후의 내기와 좌충우돌 시키더니 어떻게 하였는지 검후의 내기속으로 슬며 시 스며 들어가 버렸다.

자신의 내기가 검후의 내기와 별 저항없이 통합되어짐이 확인되자 검후의 등뒤로 돌아간 공지대사가 가부좌를 한 후 검후의 명문혈에 장심을 밀착시켰다. 갑작스러운 공지대사의 행동에 검후는 당황해 하였지만 명문혈로 물밀 듯이 들어오는 공지대사의 진력에 어떠한 말을 붙일 수도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급히 사문의 독문 내공심법을 운기하여 공지대사의 진력이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인도하기 시작하였 다. 잘못하여 진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들어서거나 역행하기라도 한다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지대사가 전해주는 진기는 순수한 불문의 내가진력으로써 보타문의 내력과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리 고 이미 생사현관이 타통된 검후인지라 공지대사의 해일같은 내가진력조차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 다. 벌써 대주천을 몇번 끝냈는지 기억에도 없건만 공지대사의 내가진력은 끊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 내 가진기 속에는 공지대사의 원영진기 까지도 섞이어 있었다...

검후는 어느새 무아경에 빠져 들어가 있었다. 무아경 속에서 검후는 환한 태양속에 잠겨 있었다. 한 없는 따 뜻함으로 검후를 감싸던 태양은 검후의 온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가슴속에 한없이 밝은 태양을 머금은 검후 는 태양보다 더 밝은 미소와 함께 행복한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검후가 꿈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시각에 검 후가 거처하는 별각이 어슴푸레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두 명의 노승이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하늘위에는 별들이 앞을 다투어 밝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승들이 주시하고 있는 별은 서쪽 하늘에서 심지없는 촛불인양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별 주위로는 두 개의 환한 별이 위치하고 있었 는데 희미하게 반짝이던 별이 몇번 깜박이는가 싶더니 긴 꼬리를 끌며 떨어져 버렸다. 희미하던 별이 떨어져 어둠에 묻힌 서산 아래로 파묻혀 가는 동안 한 마디 말도 없던 두 노승의 눈동자에 한떨기 이슬이 맺혀져 있 었다. 고개를 돌려 검후가 잠든 별각을 바라 보던 두 노승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처연한 목소리로 불호가 흘 러나왔다.

'아미타불! 극락왕생 하시길...'

극락왕생을 빌기 위하여 고개를 숙인 노승들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떨어져 대지속으로 스며들어 사그라 들자 노승들의 신형도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노승들이 사라진 산등성이에는 밤벌레 울음소리만이 애절하게 울려 나오고 있었다.

검후가 무공을 수련하는 송림 앞 공터에는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검광이 춤을 추고 있었다. 검광이 싸늘한 한 기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빙검 여래혼 인 것 같았다. 갑자기 빙검 여래혼 주위로 화영 들이 피어나는가 싶더니 여래혼의 검봉으로 스며들어 한떨기 금화 한송이를 피어 올렸다.

조그마한 금화는 눈부시게 빛을 내더니 여래혼의 검봉에서 빗살같은 속도로 튀어나왔다. 얼마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여래혼의 검봉에는 금화의 잔영만이 희미하게 남겨져 있었다. 여래혼은 육십여장 정도 떨 어진 벼랑 중턱에 위태롭게 뻗어있는 구부정한 노송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었는지 노송의 작은 가지 하나가 툭 끊어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노송위에 앉아 있던 검은매 한 마리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나뭇가지가 끊어져 절벽 아래로 떨어지자 고개를 숙여 일별하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날개 사이로 집어넣어 털을 고르기 시작 하였다.

공지대사에게서 전수 받은 옥녀산화의 이초식인 다정만리를 펼쳐 낸 검후가 만족한 표정을 지은 후 송림사이 로 걸린 무지개를 향하여 여래혼을 날리었다. 허공을 날던 여래혼은 검후의 손짓에 따라 몇 번이나 무지개를 가르면서 휘돌았다. 여래혼의 한광이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개의 칠채색과 어우러지자 그 아름다움에 검후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었다.

공지대사에게서 내공을 물려받은 이후로 검후는 옥녀산화의 초식이 십성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전에는 내공이 부족하여 펼칠 수 없었던 다정만리 초식도 팔성에 이르러 있었다.

무지개를 상대로 일각 이상이나 이기어검을 펼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공력이 달리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도 천녀유한의 검법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공지대사가 죽은 후 슬픔을 달랠길 없던 검후는 한동안 미친 듯 이 천녀유한의 검법만 수련하였다.

공지대사가 내공을 물려주기전 유난히 강조하였던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밤낮을 잊고 천녀유한의 검법만 연습 한 때문이지 아니면 공지대사가 전수해준 막대한 내공이 검후의 진기와 융화되어 비약적으로 내공이 향상된 덕분인지 검후는 서서히 천녀유한 검법에 담겨진 심오한 검리를 깨우쳐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깨우침이 깊어져 가자 공지대사가 왜 그리 천녀유한의 검법을 칭찬하였는지 이해가 되어졌다. 검리를 깨우쳐 갈수록 더 넓고 깊은 검리가 고뇌를 안겨 주며 저 멀리에서 손짓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무공은 서서 히 향상되어지지만 상승 무공은 비약을 통해서 한 단계씩 한계를 무너트리며 향상되어진다.

한달여 시간동안 천녀유한을 배우며 비약에 비약을 계속한 검후는 정확한 자신의 실력조차 가늠할 수 없을 경 지로 올라 있었다. 내기를 조정하여 무지개에 얽혀있는 여래혼을 회수한 검후는 지금껏 거처하던 별각이 위치 한 방향을 향해 긴 묵념을 올린 후 폭포수 앞에 다가가 땀과 눈물을 씻어 내었다.

송림을 벗어나 세달만에 은성이 거처하고 있는 지객원으로 향하는 검후의 뒷편에서 검후를 배웅이라도 하겠다 는 듯이 무지개 하나가 새로이 생겨났다. 송림사이로 고운 쌍무지개가 서로의 자태를 뽐내며 검후에게 어서 빨리 돌아보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검후는 무정하게도 고개한번 돌리지 않았다. 은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슴속에 가득찬 검후는 무지개 따위에게 마음을 나누어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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