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64화 (64/152)
  • ■ 제 64절 :

    "범각대사? 아! 삼년전 운좋게 빠져 나갔던 그 중 이름이 범각인가 보군. 그래, 그런데 범각이 뭐라고 하며 자네를 이곳으로 보냈나?"

    은성을 바라보는 마인의 눈빛에는 은성을 경계하는 듯한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금전에 술을 따르면 서 은연중 공력을 겨루며 은성의 내력을 파악했을 터인데도 한줌의 동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마인은 은성의 공력 정도는 자신있어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공력을 겨루면서 최선을 다하 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은성 역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중단 전의 공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단전 의 공력만 사용했음을 알았다면 이처럼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분부하신대로 제 소개는 하였으니 제 의문을 먼저 풀어 주십시오. 말씀이 끝나신 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은성은 말을 하면서도 마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 지 해 있는 사람보다는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서 허점이 더 많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은성의 발걸음은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한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묘한 현기까지 어리어져 있었다.

    마인이 눈을 빛내며 은성이 칠성보나 구궁을 밟고 있는지 살펴 보았지만 일정한 법칙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동방파의 개파조사가 천부경 속에서 깨우침을 얻어 창시한 현묘하기 이를데 없는 보법 일시무시일의 위력이었 다. 은성의 보법을 본 마인이 이제서야 경각심을 느꼈는지 입을 열면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는 은성이 진법을 빠져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마인이 대답하는 도중에 유 리한 위치를 선점하여 은성이 빠져나갈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좀전에 은성을 무시하며 뛰어 봤자 벼룩 이라는 생각에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내가 그때는 성급했었네. 무공을 닦아 천축 무림 백대산인(百隊山人)의 위치에 오르자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거지. 무공을 더 배우기 위해 중원에 넘어와 보니 중원의 무공 수준이 보잘 것 없길레 중원 무림을 접수하겠 다는 생각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성급하게도 제일 먼저 소림을 목표로 했으니 말이야..."

    마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은성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일백년전 소림사를 혈해(血海)에 잠기게 하였다는 마인의 무위에 대해서는 범각대사에게서 소상히 들어 알고 있었다. 소림사의 백팔나한진으로도 간신히 붙잡아 놓은 마인의 무공이 그 당시 천축국의 일백위 정도의 무공 수준이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은성의 안색이 조금 변화되자 가벼운 미소를 지어내던 마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

    담담하던 마인의 목소리가 고조되는가 싶더니 온몸에서 혈광이 뭉클뭉클 솟아 나왔다. 그리고 두 눈에서는 잠 깐이지만 혈광이 줄기줄기 세어 나왔다. 마인이 혈광을 내뿜자 진세 내부의 대기가 순간적으로 요동치는가 싶 더니 서서히 잦아 들었다. 마인이 혈광을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천축국의 무공이 그처럼 대단하다니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하지만 이제는 천축국으로 돌아가시면 천축 제일 고수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천축 제일고수? 하하하! 내 비록 기연을 얻어 반로환동하고 무공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천축 백대산인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지도 못할 것이네."

    은성은 마인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천축 '백대산인'중 십위권 안의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들중에 한 명이라도 중원에 넘어왔다면 중원이 마교와 무림맹 두 세력만의 각축장이 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마인만 하여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일백오십여세에 반로환동하였다면 반신선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다. 마인이 소림을 벗어나 사파의 세력들을 규합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몇 년안에 중원 무림맹에 버금가는 거대 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으리라...

    아니, 천축의 고수들이 이미 중원에 들어와 암약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

    무공을 배운다며 공지대사에게 가 있는 검후의 작은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고 있음이 안타까워진 은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후를 생각하자 은성은 정신이 바짝 들어왔다. 검후의 작은 어깨에 큰 부담을 지우게 할 수는 없었다. 눈앞 에 있는 마인이 아직까지는 속마음을 확연히 드러내 놓고 있지는 않지만 중원 무림맹에, 아니 중원 무림맹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소림에 위해를 가할 의도가 있다면 결코 '천문금쇄진'을 나가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천문금쇄진과 불수복마진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지 아니면 최후의 방법으로 범각 대사의 요청대로 마인을 제거하는 수 밖에 없었다.

    "범각 대사께서 말씀하시길 진세안에 있는 사람은 피에 굶주린 광인 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세를 벗어나면 소 림을 멸하고 세상을 피에 뒤덮이게 할 악마이므로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은성은 마인의 본성을 떠보기 위해서 마인을 선동하려고 원색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말을 하였다. 하지만 마인 은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반선(半仙)의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은성에게 반문하였다.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피에 굶주린 악마로 보이나?"

    다시 한번 준수하면서도 심원한 눈빛을 발하고 있는 마인을 바라보며 은성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심성을 외모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 않는지요?"

    "허허, 그럼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말한다면 자네는 내말을 그대로 믿 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인이 다그치듯 은성에게 묻자 은성은 난처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심성은 외모로써 판단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몇마디 말만으로 사람의 선악을 판단할 수도 없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 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인의 다그침에 난처해 하던 은성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마인의 시선을 직시하였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거나 자존심이 없는 사람만이 거짓말을 하는 법이다. 눈앞의 마인은 비록 심성은 종잡을 수가 없지만 거짓말을 할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에 진세에서 나가신다면 소림사를 용서해 주실수는 없겠는지요? 천축으로 가셔도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은성이 시선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마인의 의사를 물어오자 마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생각을 가다 듬던 마인이 다시 혈광을 일으키며 나직이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글쎄, 백년전에 못다한 염원이라 포기하고 천축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구만... 쉽지않은 결정이야. 하지만 소림사를 용서해 줄 수는 없다네. 이곳에서 백년동안 갇혀 있으면서 매일같이 다짐하던 소 림사 멸문인데 그냥 갈 수만은 없지. 향후 '소림사'란 이름은 더 이상 중원에서 나돌지 못할걸세.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하지."

    나직하지만 소름이 오싹 끼치는 말이었다. 말의 내용은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인은 너무도 태 연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소림사에 의해 진세에 갇힌 것은 인과응보가 아닌지요? 게다가 뜻하지 않은 복연(福緣)까지 얻었으니 소림은 원수를 은혜로써 보은한 셈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데 소림에 혈채를 갚겠다는 생각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습니 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요. 지옥에 빠져도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 바로 옆에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렇지는 않네. 주선지부에서의 기연은 소림이 자의적으로 나에게 내려준 복연이 아니지 않는가? 내가 무공 이 강해 허공중에서 식수를 얻을 수가 있었고 주식으로 삼고 있는 붉은 풀들이 담고 있는 강한 독성을 억제할 능력이 있기에 이처럼 건재할 수가 있었지 다른 사람이면 몇 주야도 견딜 수 없었을 걸세. 결코 용서해 줄 수 가 없네."

    마인의 소림에 대한 복수의 집념은 쉽사리 사그라들 것 같지가 않았다. 더 이상 설득해도 마인이 마음을 바꾸 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든 은성은 공력을 배가 시키며 마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죄송하지만 소림사가 멸문되는 것에 그냥 방조할 수는 없습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도 하지만 진세안으로 들기전 범각대사님에게 노선배께서 개과천선 하지 않으셨다면 소림과 중생들을 위하여 살수(殺手)를 사용하겠 다고 약조하였습니다.

    말을 마친 은성의 몸에서 은은한 금광이 피어 올랐다.

    중단전에 있는 태극진기까지 끌어 올렸지만 진기는 예전처럼 몸 밖으로 넘실거리지 않고 있었다. 몇백만년 동 안이나 묵묵히 침묵하는 태산 준령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은성의 몸속에 있는 진기 들은 활화산처럼 거대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일면 푸른 창천을 붉은 화염으로 온통 뒤집어 놓을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열기에 휩싸인 용암 불꽃으로 말이다.

    "허허! 방금 나에게 살수를 사용하겠다고 말했는가? 내 지금껏 자네가 두려워서 불로과주를 주고 대화를 하였 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허허허! 주제를 모르는 젊은이로구만. 어짜피 삼사년이면 빠져 나갈수 있겠지만 몇 년 단축시켜 주기 위해 들어온 성의를 생각해서 좋게 대해주었는데 참으로 광오하기 이를데 없군 그래. 으하하하 하하핫."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하던 마인은 말을 끝내고 갑자기 광소를 터트렸다. 마인의 광소소리는 대기가 지진이라 도 일어난 듯 크게 진동하고 은성의 주변흙들이 물보라처럼 튀어 올라올 정도였다. 다행히 부동명왕 심공에 태극진기를 운용하고 있어서 낭패를 면할 수 있었지만 갑작스런 마소(魔笑)에 크게 당할 뻔한 것이다.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아는 것입니다. 맹룡이 아니면 강을 건너지 않는다고 나름대로 자신하는 바가 없다면 애 초에 진세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인이 은성에게 불로과주를 대접해준 정성에 대한 보답인지 은성은 마인에게 자신을 경시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마인에게 자신의 무위를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암수를 펼치기에 은성의 마음은 너무 선량하였다. 게다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본 적이 없는 은성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승을 등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젊은이로구만... 자네 내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가? 내 제자가 돼 준다면 소림사만 처리하고 천축으로 돌아가서 자네에게 내 모든 무공을 물려 주겠네. 나의 유가신공(踰跏 神功)만 대성하면 중원에서 자네의 적수는 찾아볼 수가 없을거네."

    은성을 바라보는 마인의 눈빛이 은근히 기대감에 차 올랐다. 은성의 훌륭한 근골과 나이에 비해 심오하기 이 를데 없는 무공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로환동한 자신에게 조차 큰 소리를 치는 꺽일줄 모르는 의지를 보니 제 자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소림의 은혜를 입었는데 소림사에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문이 있는 몸입니다. 사사로이 다른 스승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은성의 고집스런 얼굴을 보니 죽기전에는 마음을 돌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 을 돌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쯪쯪, 어리석은 놈. 기어이 무덤을 파는구나. 어디 그 자신있어 하는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봐야겠구나. 하지만 손과 발에는 눈이 없으니 죽더라도 네놈의 어리석음과 우직한 고집을 탓하도록 해라."

    말을 하는 와중에 공력을 증가시켰는지 마인의 전신에서 붉은 혈광이 일장 높이로 피어 올랐다. 그러자 혈광 에 싸인 마인의 몸은 사라지고 일장반 길이의 거대한 악마상이 나타났다. 일순 악마상의 상체가 주욱 늘어나 는가 싶더니 혈광에 휩싸인 악마의 손길이 순식간에 은성에게로 날아왔다.

    몸을 이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악마상의 하체도 어느새 은성의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