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3절 :
천문금쇄진 내부로 들어선 은성은 범각 대사의 가르침을 따라 신중을 기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천문금쇄진은 음양이 대립(對立)하지 않고 상호 의존(依存)하면서도 상호전화(相互轉化)하는 가운데 양소음장(陽消陰長)이나 음소양장(陰消陽長)의 묘 까지도 실려 있는 천고의 기진이었다.
오행은 역으로 변화되고 건곤이 뒤바뀌어져 있으며 진축(陣軸)은 계절 및 시간에 따라 수시로 변화되고 있었 다. 천문금쇄진의 생문만을 따라 이동하는데도 진세의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동명왕심공을 발휘하 고서야 은성은 침착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다.
간신히 명문을 찾아 들어간 은성은 천문금쇄진 안쪽의 상황을 자세하게 살펴 볼 수가 있었다. 사방 일백여장 넓이의 내부에는 붉은 풀들이 빼곡이 자라 있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몇그루 나무도 있었으며 역시나 붉은색 의 바위들이 군데 군데 놓여져 있었다.
마인이 머물만한 집은 보이지 않았지만 범각 대사가 말한 젊은 마인은 분명히 안쪽에 있었다. 마인은 윗부분 이 평평한 석판을 앞에 두고 돌을 깎아 만든 의자에 앉아 잔을 들어 무엇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범각 대사가 말한 것 보다는 어려 보였다. 삼십여세가 아니라 이십세 중반을 갓 넘긴 것 같은 얼굴이었다. 벽안의 눈동자를 하고 있을 뿐 잘 생기고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 맑은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이 피에 굶주린 광인이요 악마로까지 일컬어지는 마인이라니... 믿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범각 대사의 신신당부를 기억한 은성은 태극진기를 운용하고 부동명왕심공을 발휘하면서 천문금쇄진 안쪽으로 발걸음을 들여 놓았다.
"어서 오시게나."
마인은 은성이가 진세 안으로 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은성을 맞아 들였다.
"주선지부(朱仙地府)에 온 것을 환영하네! 이곳에 와서 앉으시게."
마치 친한 친구에게 말을 거는 듯이 격의없는 마인의 목소리에 은성은 앞으로 나아가 마인과 석판을 마주하며 돌의자에 앉았다. 범각 대사의 말에 의하면 마인은 천축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은성보다도 더 유창하게 중원어 를 구사하고 있었다.
"천축국에서 오셔서 일백년전 소림사에 죄를 지어 이곳에 갇혀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반로환동의 도인들에 대한 전설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뵙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요?"
범각 대사의 말에 따르면 앞에 있는 마인의 나이는 최소한 백오십여세는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얼굴로만 판단하면 형님뻘인 나이 이지만 실제 나이는 고조부의 고조부 정도나 되는 높은 연배였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낳은 아이라도 윤회하여 태어난 몇대조 조상일지도 모르는데 이름보다도 더 허망한 것이 나이 아닌가? 이름도 안 불린지 일백여년이 지나서 그런지 다 잊어 먹었다네. 어허 , 이런 내 정 신좀 보게. 귀중한 손님이 오셨는데 접대할 생각조차 안하다니... 잠깐만 기다리게."
말을 마친 마인이 한손을 들어 가까이에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마인의 손에서 붉고 날카로운 혈광이 검처럼 피어올라 손을 휘젓는대로 붉은 바위속으로 파고들어 어 른 주먹만한 덩어리로 절단하였다. 그리고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어리는 순식간에 마인의 손바닥으로 빨 려 들어갔다. 돌덩어리는 마인이 손바닥을 떨쳤는데도 불구하고 허공중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고 날카로운 혈광이 돌덩어리 주변을 몇 번 휘젓자 어느새 투박한 돌덩어리는 찻잔의 형상을 찾아가기 시작 하였다. 윗면을 평평하게 잘라낸 마인이 찻잔 모양의 돌덩어리를 뉘어 입구쪽에 혈광이 어리는 손가락을 댄후 돌을 회전시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찻잔 모양의 돌속으로 손가락이 파고 들면서 내부가 깎여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잔 모양이 완성되자 붉 은 혈광이 더욱 더 짙어지더니 돌잔 표면의 거친 부분을 다듬기 시작하였다. 돌가루가 미세한 먼지로 화해 퍼 져 나가는가 싶더니 돌잔이 회전을 멈추고 공중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었다.
그리고 마인이 손바닥을 활짝 펴고 공중으로 향하자 돌잔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에는 돌잔 내부에도 물이 가득 차 버렸다. 마인이 진수기라도 익혔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것도 잠시 돌잔에 담긴 물과 돌잔 표면에 맺혀진 물기들이 증발되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공중 에 떠있던 돌잔이 서서히 은성이가 위치한 석판앞에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네.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준비성이 없어진다네. 한잔 받게. 주선지부에서만 맛 볼수 있는 불로과(不老果)로 담근 술이라네."
마인은 역시나 돌로 만든 것 같은 술병을 들어 은성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고맙습니다. 힘들여 담그신 것 같은데 감사히 먹겠습니다."
은성은 마인이 힘들여 깎은 돌잔을 들어 술을 받았다. 그런데 돌잔을 들은 은성은 붉은 빛이 감도는 돌잔의 무게에 내심 놀랐다. 보이기로는 돌이었지만 실제로는 적철석이 다량 섞인 철광석이었던 것이다.
붉은 돌잔에 투명한 술이 알싸한 주향을 풍기면서 서서히 담기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돌잔속에 불로과주가 삼 할 정도 찬 이후에는 돌잔의 무게가 급격히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불로과 한방울이 열근의 무게라도 나가고 있는지 순식간에 돌잔이 천근 이상의 무게로 은성의 손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돌잔속에 술이 반이상 차기 시작하자 술을 받고 있는 은성의 팔위로 은은한 금광이 피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술을 따르고 있는 마인의 머리위로도 희미한 혈광이 피어 올랐다.
이력 차력의 수법을 사용하여 술을 따르는지 술의 무게는 돌잔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곧바로 돌잔을 잡고 있 는 은성의 손가락으로 전달되어졌다. 은성의 팔 위에서만 피어 오르던 금광이 전신으로 확대되고 마인의 머리 위로 뿜어져 나오던 혈광이 더욱더 커지고 짙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금광과 혈광이 맞부딪히려는 찰나 돌잔을 내리누르던 만근 거력이 서서히 가벼워지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금광과 혈광이 희미해지고 급기야 체내로 흡수되어져 버렸다. 돌잔위에는 불로과로 빚었다는 투명한 술이 팔 할정도 담긴 채 작은 물결을 일렁이고 있었다.
은성이가 아무런 거침이 없이 돌잔 속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자 마인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대단한 무위에 거침없는 배짱이로구만. 자네 내가 그 술에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다면 어쩔려구 그러 는가?"
은성은 달콤한 주향속에 한줄기 톡 쏘는 듯한 불로과주(不老果酒)의 맛을 서서히 음미한후 꿀꺽 삼켜 버렸다.
술은 뱃속으로 넘어갔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달콤한 주향이 입속에 가득하니 남아서 여흥을 돋구어 주고 있었다. 불로과를 따서 담근후 일이십년 숙성시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처럼 달콤하고 향기로운 술에 수작을 부렸을리 만무할 것입니다. 정말로 좋은 술이로군요."
은성의 말을 들은 마인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는가 싶더니 다시금 눈가에 웃음을 가득 담아 말을 하였다.
"자네가 진정한 주선(酒仙)일세. 칠십년전에 술을 담근 후 오늘 처음 개봉하는 것이네. 개봉식을 앞두고 이렇 게 탁자와 의자는 물론 술잔까지도 만들었는데 자네가 복이 많아 때맞춰 이 곳을 방문한 걸세."
몇잔씩 술이 오가자 이내 술병 속의 불로과주가 바닥나 버렸지만 주변에는 짙은 주향이 가시지 않고 펴져 있 었다.
"소림사에서 죄과를 받으라고 감금한 것 같은데 이곳에서 신선같은 생활을 하고 계실 줄은 정녕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주변에 널린 붉은 풀들도 선초(仙草)인 것 같은데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셨던 것 같습 니다."
한참동안 불로과주의 짙은 주향을 음미하던 은성이 마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마인이 피식 웃었다.
"훗!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을걸세. 이곳에 펼쳐진 진세는 모든 것을 가두고 풀어 놓지를 않는 신비하기 이 를데 없는 진법이라서 노부도 이곳에 갇힌지 백년이나 지난 최근에서야 그 원리를 대충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 을 정도라네. 이 진법은 사람만 가둬 놓는 것이 아니라 흘러 드는 지기와 천기까지도 가두어 놓는다네. 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 들어와 뭉치니 평범한 풀도 선초가 되고 과일은 영과(靈果)가 되더구만."
말을 마친 마인이 은성을 빤히 바라 보았다.
은성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범각대사의 요청대로 부동명왕심공을 계속해서 발휘하고 있었다. 마인이 자신 의 두눈을 직시하자 내심 경각심을 높였지만 마인은 섭혼공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백년전 소림사를 혈사(血死)에 잠기도록 만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범각 대사의 이야기로는 대화 도중에 마인이 갑자기 기습 공격을 가했다고 하니 정상적인 정신 상태는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처럼 예의 바르고 얌전하며 의젓하지만 언제 성격이 돌변할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은성은 태극진기를 최대한 운용하여 만일에 대비하였다.
"흐으음. 보아하니 자네는 소림의 땡초는 아닌 것 같은데 정체가 무엇인가? 자네 소개를 먼저 하고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마인은 은성이가 예민한 부분을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담담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몇 백명을 일시에 몰살시킨 피에 굶주린 광인이 아니라 공맹의 도를 전하는 현학자 같은 모습이었다.
"해동에서 온 이은성 이라고 합니다. 소림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삼년전에 이곳에 들르셨던 범각 대사님의 요 청으로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