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62화 (62/152)

■ 제 62절 :

권마대의 대원들이 하나둘 사라져가고 아홉명으로 줄어들자 보잘 것 없는 혈의대 놈들에게조차 은근히 멸시와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권마대원 비참한의 심정은 분통하기 이를데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곧 돌 아올 권마황을 생각하며 묵묵히 참고 견디고 있었다.

권마대원이라는 명예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자신들을 모멸감조차 느껴질 정도의 시선으로 깔보는 안휘지 부의 보잘 것 없는 졸병놈들을 때려 죽이려고 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교 본산으로 가서 권마황을 기다리라 는 소교주의 명령에 따르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교라면 기를 쓰고 달려드는 무림 정파놈들과 사파의 떨거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변복을 하고 되도록 밤을 이용하여 길을 재촉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들이 마교 본산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권마황이 없어 지자 비겁하게 몸을 사려 도망쳤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오십명중에서 사십일명이 사라지자 남은 아홉명의 권마대원들의 단결력과 믿음은 친형제와도 같이 깊어져 있 었다. 비참함과 남은 동료들은 사라진 권마대원들에게 뻗쳐졌을 마수에 대비하기 위하여 잠시도 경각심을 버 리지 않고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천마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백여장 떨어진 곳에서 경공과 추적술이 특기인 밀찰대원이 은밀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 말 이다. 밀찰대원은 전문 추적자 답게 노련하기 이를데 없었다. 권마대원들과 항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뱀 이 수풀속을 기어가듯 일점의 소리도 없이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권마대원들의 행적을 잃어 버려도 천리향의 냄새만 따라가면 되는 일이니 이번 추적은 문제 될것이 전혀 없었 다. 게다가 자신은 밀찰대 중에서도 경험과 무공이 뛰어난 최상급의 밀찰대원이며 자신의 뒤에도 두명의 밀찰 대원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중을 기하며 경각심을 높여 길을 재촉하는 권마대원들을 추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를 따르는 밀찰대원은 시종 여유로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재수가 없으려면 황소 뒷발에도 제비가 밟혀 죽을 수 있고 어린 아이라 생각하고 과소 평가한 사람이 반로환동한 고수일수도 있는 것이다.

아홉명의 권마대원들중 한명인 뇌충은 사실 자진하여 권마대에 가입한 사람이 아니었다. 덩치가 크고 무공이 고강하였지만 우둔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권마대 내에서 별명이 무뇌아(無腦兒)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마교 총관 쌍뇌(雙腦) 포병인의 숨겨진 제자로써 십대장로들을 견제하기 위해 심어둔 간세로 활동하고 있었다.

권마황이 마교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권마대원으로써 살아가야 하지만 혹시라도 마음이 돌변하 면 권마대를 자폭시킬 비장의 무기로써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천리향...'

그 종류가 수십가지가 되며 시전한 사람만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 효과가 한달이나 지속되는 비밀스런 향기이지만 마교내에서 사용되는 천리향중에서 뇌충의 후각을 벗어날 수 있는 종류는 단 한가지도 없었다.

마교 총단에서 제작되어 충분한 시험을 거친 후에만 총단과 각 지부에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의 권마대원들은 마교 본산으로 무사히 돌아가면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뇌충이 생각하기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소교주의 어투와 음산인마의 눈빛 그리고 자신들에게 천리향이 뿌려질때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조만 간에 죽음의 사신이 자신들을 찾아올 것이라는 예측에 한치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소교주에게서 무슨 오해 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이처럼 허망하게 죽을 수 만은 없었다.

비록 간세로서 권마대에 가입되어졌지만 지금 옆에 남아있는 대원들간 그동안 무척이나 깊은 정이 들어 있었 다. 오해를 풀고 이들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 아니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살아나고 싶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목숨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부를 나선지 두시진이 지나서 였는지 주변에는 어느새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참한, 동부속에 있던 귀신이 쫒아 오면 어떻게 하지?"

뇌충이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는 비참한에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자 비참한이 어이가 없는지 웃음까지 지었 다.

"이봐, 무뇌충! 그 허우대에 무공실력이 아깝다.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귀신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구!"

무공실력은 지금 남은 권마대 중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마음이 여리고 의지가 약해 삼십이 넘은 나이로도 귀신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까지 한 비참한이었다. 하지만 뇌충은 정말로 귀신의 존재를 믿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귀신은 분명히 있어. 내가 봤다구. 동굴속에서 귀신을 봤는데 흐릿하니 눈에 잘 보이지도 않더라구. 아무래도 으스스한게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뇌충은 정말로 귀신이 따라오기라도 하는지 불안해 하며 어깨까지도 '으시시' 떨었다.

"뭐! 정말 동굴속에서 귀신을 봤단 말이야? 그럼 그때 왜 우리에게 말 안했는데?"

비참한이 반신반의 하면서 책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귀신인가 아닌가 잘 모르겠더라구. 그런데 지금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귀신일지도 모 르겠어. 아마도 우리 권마대원들을 그 귀신이 다 잡아 먹은 것 같아."

뇌충의 말을 들으며 몸을 날리던 권마대원 허우덕이 핏 하고 실소를 흘렸다. 귀신타령이나 하고 있는 뇌충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봐 뇌충! 귀신은 없어. 그리고 설령 동부속에 귀신이 있다고 해도 지금쯤 동부속에 있는 혈의대 놈들을 잡 아 먹고 있을 거야. 안 그래?"

일행중 덩치가 가장 큰 허우덕이 바보스러운 뇌충을 안심시키기 위해 비참한의 의견을 동조해 주었다. 그런데 바보도 가끔씩 날카로운 추리를 할때가 있는가 보았다.

"아니야! 그 귀신은 우리들만 잡아 먹어. 동굴속에서도 우리들만 잡아 먹었잖아. 우리들이 도망치면 귀신도 동굴에서 나와 우리들을 따라 올거야."

바보라고 놀리던 뇌충이 칭얼 거리는 듯한 말을 듣던 비참한이 갑자기 번개라도 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일 행에게 속도를 조금 늦추라고 말을 하였다.

"뇌충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어.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 동부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전부 우리 권마대원들이 야. 만약에 뇌충 말대로 귀신이든 누구든 우리 권마대원들을 몰살시키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면 우리에게 위험 한 방향이 어느 쪽일까? 우리들조차도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앞쪽일까? 아니면 우리 뒤쪽일까?"

그래도 일행중에서 머리가 가장 좋다는 비참한의 말을 듣던 권마대원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리었다.

그런 권마대원들을 바라보며 비참한이 말을 이었다.

"맞아.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뒤쪽에서 쫒아오고 있는 귀신이던지 귀신과 같은 놈 일거야. 본산에는 조금 늦게 도착해도 되니까 뇌충 말대로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귀신은 어떻게 잡지? 속이나?"

비참한의 말을 듣던 뇌충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을 하자 쓸데없는 소리라고 면박을 주려던 비참한이 갑자기 무 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뇌충을 향해 알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후 동료들에게 이것 저것 지시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모두 동급이며 서열이 정해지지 않은 권마대원들이었지만 평소 비참한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잘 알 고 있는 권마대원들은 비참한의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달리면서 들어. 만약 뒤에서 누가 우리들을 추적해 온다면 아무리 길어도 일각 이상 걸려서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벌리지는 않을거야. 그리고 추적을 하는 방법은 우리들이 달려간 흔적이라든가 우리들의 냄새 를 맡을 수 있는 기물들을 데리고 하는 방법 뿐이야. 오면서 유심히 살펴 보았는데 우리 뒤를 따라오는 날짐 승은 본 기억이 없거든."

비참한이 벌써부터 미행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말을 하자 일행들은 물론 바보스러운 표정의 뇌충마저 도 눈빛을 빛내었다.

"지금부터 삼개조로 나누자. 일조는 냄새를 일시적으로 지우고 발자취를 알아볼 수 없는 바위로 된 계곡을 넘 자마자 은밀하게 은신해 있고 나머지 이조는 그곳을 넘어 일이백장쯤 지난 후에 양옆으로 나뉜 후 크게 원을 그려 다시 계곡까지 뒤돌아 오는거야. 대신 원을 도는 거리는 경공을 발휘하여 일각이상이 넘어야만 하고... 앞으로 가는 동안 두 번 정도 더 할거야. 그때까지 우리 뒤를 추적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면 귀신이든 귀 신 같은 놈이던 추적은 없는거야. 내가 장담하지."

비참한의 계교를 들은 권마대 일행들이 한결같이 감탄해 하였다.

평소 머리가 좋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처럼 좋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각 정도나 더 가 자 비참한이 설명했던 대로 냄새와 흔적을 지운채로 은신하기 좋은 장소가 나타났다. 게다가 앞쪽으로는 전망 이 탁 트이고 뒤쪽으로는 언덕이 있어 안심하고 숨을 수 있으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추적자를 관찰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지형지물이었다.

이들중 무공이 가장 강한 뇌충과 두명의 권마대원들이 계곡 양쪽으로 바람같이 스며 들어가자 남은 여섯명의 대원들이 일자로 정열하여 앞으로 경신술을 펼쳤다. 뒤쪽에서 보면 뒤쪽에 있는 허우덕의 큰 덩치만이 보일뿐 몇 명이 있는지 쉽게 알아 볼 수 없는 기묘한 배치였다.

한편 이들을 뒤쫒고 있는 밀찰대의 고수들은 서로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유롭게 따라가고 있었다.

제일 앞에 가는 밀찰 대원은 권마대원들과 백여장 정도 떨어져 따라가면서도 권마대원들의 상황을 수시로 간 략하게 암호로써 길가 나뭇가지나 바위에 표식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 뒤의 밀찰대원은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앞에 있는 밀찰대원의 뒤를 십여장부터 이백여장까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거리 조정을 하며 따라오고 있 었으며 맨 뒤의 밀찰대원은 두 번째 대원의 삼백여장 뒤에서 느긋하게 따르면서 가끔씩 전서구를 날리고 있었 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던 중간 위치의 밀찰대원은 귓가에 '구구구' 하는 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지금까지 의 느긋하던 걸음을 빨리하여 급하게 앞쪽으로 내달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앞으로 달려가 보니 맨 앞의 밀찰대원이 하얀 헝겊을 달빛에 흔들거리며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권마대원들이 두 방향으로 갈라졌 으니 한쪽 방향을 책임지라는 신호였다.

'제기랄'

이놈들이 혹시나 무슨 눈치를 첸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심정으로 갈림길에 급하게 암호를 남긴 밀찰대원이 은밀하면서도 다급하게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일다향 정도나 지났을까?

제일 늦게 도착한 마지막 밀찰 대원이 갈림길에 도착하여 암호를 확인하고는 전서구를 날릴까 망설이는 것 같 더니 급하다는 듯이 일단 몸을 날리었다. 자칫하면 추적이 실패로 끝날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번 째 밀찰 대원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던 밀찰대원이 주변을 둘러보며 못내 불안한 신색을 드러내었다. 빙 둘러 가고 있는 것이 왠지 온 길로 다시 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날카로운 직감으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가고 있는 권마대원들 이 전력을 다하여 도망가고 있는 듯이 판단할 여유를 주지 않고 있었다. 앞서 추적하는 밀찰대원이 재대로 된 암호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이각 전에 지나쳤던 계곡을 다시 지나쳐 가자 세 번째 밀찰대원이 위험을 직감하고 추적을 멈추었다.

바위틈에 숨어 멀리 앞을 보던 밀찰대원이 목탄을 꺼내 종이에 암호를 그려 넣고 품속에서 전서구를 꺼내었다.

하지만 암호가 그려진 종이를 전서구의 발목에 메달린 작은 동통속에 말아 넣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짓쳐 들어왔기 때문이다. 뒤를 확인해볼 엄두도 없이 몸을 양 옆 으로 흔들며 양손으로 바위를 누르고 힘껏 바위위로 솟아 올랐다. 손안에 있던 전서구는 갑작스런 행동에 바 위에 으깨어져 죽었지만 이를 상관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바위 밖으로 몸을 빼내느냐 못 빼느냐에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공평한가 보았다. 죄없는 비둘기를 죽인 댓가를 치르게 하려는지 밀찰대원의 목숨도 거둬가 버린 것이다. 첫 번째 공격을 운좋 게 피한 후 몸을 흔들며 분신의 술법을 펼치려던 밀찰대원은 양쪽에서 날아오는 강한 권경을 하나도 피하지 못하였다.

'퍼..퍽.'

살점이 뭉그러지고 허공으로 터져나가 버리며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는 비둘기의 하얀 깃털과 함께 뒤섞이어 버렸다. 계곡에서 은신하며 추적자가 최종 세명이라는 것을 확인한 뇌충과 두명의 권마대원은 경공을 발휘해 앞으로 달려가다 남은 두명의 추적자들이 입으로 어둠보다도 더 검은 핏덩어리를 뿜어대며 뒤로 날아가는 모 습을 볼 수 있었다.

형상을 보건데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비참한의 지시로 일행은 최고속도로 경공을 발휘하여 밤길을 재 촉하기 시작하였다. 네시진 정도를 더 달린 후 은신할 만한 장소가 나타나자 일행은 걸음을 멈춘후 마른 건포 로 요기를 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축시를 넘어서고 있었는데 밤벌레 조차도 모두 잠이 들었는지 사방은 고요속에 잠겨져 있었다. 조금더 달린 후 은신할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추적자가 있 을리 없겠지만 '만사불여튼튼' 이라고 비참한의 의견을 좆아 세명씩 삼조를 짜서 한조는 경계를 서기로 하였 다.

재수가 없게 첫 번째 경계조에 뽑힌 비참한의 의견대로 비참한과 다른 동료 한명은 그들이 달려온 방향을 집 중적으로 경계를 서기로 하였다. 나머지 동료 한명은 좌우로 깎아지른 낭떨어지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앞쪽을 바라보며 경계를 섰다. 한시진 동안은 꼼짝없이 신경을 돋구워야만 하는 것이다.

'제길'

경계를 서던 비참한은 한심스럽고도 억울함에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있었다.

마교 일통에 목숨을 걸고 권마황의 권마대에 명예를 맡긴지 이십여년... 어느새 나이는 사십여세에 접어들고 있었다. 피나는 수련과 삶보다는 죽음과 가까운 혈로를 헤쳐 나왔건만 남은 것은 배신과 한치 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덫 뿐이었다. 자신들에게 추적자가 붙었다는 것은, 그것도 같은 교도이며 어제까지 얼굴을 맞대던 안 휘지부의 밀찰대원들 이 추적자라면 사건의 전모는 명백하다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안휘 지부에서 그동안 권마대원들을 하나둘 참살시킨 것이 분명하였다. 오십 여명의 권마대원중 사십여명이나 죽인 것도 모자라 남은 아홉명까지도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지부의 동부에서 죽이면 될 것이지 무엇 때문에 도망치도록 풀어준 후 추적자까지 붙이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리저리 사건의 전황을 살펴보면 실마리가 풀리듯 차츰 명백해져만 갔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아둔한 돌머리를 한 대 쥐어 갈기기라도 하고 싶은 비참한이었다. 안휘 지부의 인원들과 권마대만 있는 동부에서 권마대원들이 하나둘 사라진다면, 그것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 진다면...

'퍽...퍽.'

'윽...'

급기야 자신의 머리통을 두어대 쥐어박던 비참한은 자신의 머리통을 쥐어 갈기는 소리 속에서 나직하게 무슨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바람 소리로 치부하고는 눈을 들어 전방을 노려 보았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 전체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갑자기 밀려드는 불 안감에 비참한이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주시해 본 후 역시나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은신한 동료에게로 시선을 옮기었다.

흐릿하니 형체만 보이고 있는 동료는 처음에 은신할 때와 똑 같은 자세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아무런 일도 없는데 혼자서 안절부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수치심이 든 비참한은 동료를 본 받아 눈앞을 세심히 살펴 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반각도 안되어 좀이 쑤셔오기 시작 하였다. 흘낏 옆을 보니 동료는 아직도 처음과 같은 자세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료를 바라보자 다시금 가슴속으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처음에 느꼈던 불 안감보다 더욱 더 큰 불안감이었다.

'뭐지? 뭐지?'

고개를 흔들던 비참한은 왠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동료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그런데 대답은커녕 아무런 반 응조차 없었다. 그러자 비참한의 불안감은 증폭되어져 갔다.

경계 근무중 가장 금기시 되는 행동이지만 소리내어 불러 볼까, 말까 주저하던 비참한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 지 은신처에서 나와 동료에게로 신속하게 이동하였다. 뱀이 물속을 이동하듯 온몸을 뱀처럼 땅바닥에 바짝 붙 인후 이리저리 갈짓자로 몸을 날리는 사행보(蛇行步)를 펼친 것이다.

사행보의 가장 큰 특징인 은밀하면서도 아무런 소음하나 없이 동료에게로 온 비참한은 속으로 만족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왔는데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동료를 보자 심장조차도 두근거려 왔다.

경계중 졸거나 잠을 잘 권마대원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잠을 잤다고 하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사행보를 펼쳐 다가왔어도 이만한 기척은 자면서도 감지할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련되어진 권마대 였다. 불안감에 떨리는 손끝으로 동료의 부릅뜬 눈앞에 대고 몇 번 흔들어본 비참한이 놀라움에 잠겨 고함을 질렀다.

"습격이다! 대비해라!"

경계 근무중 위험에 처했을 시의 대처 요령이 있었지만 모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반각전에 희미하게 들려 왔던 소리에 생각이 미친 비참한은 적이 최소한 반각 이전에 이곳을 통과했었다는 판 단이 들었다. 그런데 동 료들이 있는 방향에서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면 사태의 심각성은 생각보다도 훨씬 큰 것이다.

아니! 큰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잠시 딴 생각을 하였다지만 자신의 눈을 속이고 동료의 혈도를 눌러 움직이지도 못하게 한 후 반각전에 이 곳을 통과했다면...

갑자기 안색을 창백하게 변화시킨 비참한이 도주하기 위해 앞쪽으로 몸을 날리려다 흠찟 몸을 굳혔다. 혈도가 짚여졌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 달싹 하지 않던 동료가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헛것을 본 것일까?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이 동료를 뒤에서 붙잡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검은 복면인이 동료를 부축하고 서 있지 않다는데 있었다. 동료의 백회혈 위에 장심을 댄채로 서 있었다.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던 비참한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였다.

무공으로 치면 어디를 가던지 큰 목소리를 낼만한 비참한이었지만 경공을 펼쳐 도망갈 생각조차 못하고 무한 한 공포에 잠긴 안색으로 뒷걸음질을 치더니 돌부리에 걸린 듯 뒤로 넘어져 버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채로 일어설 줄도 모르는 듯 한손을 들어 숨 몇 번 쉴 사이에 쭈그렁 껍질만을 남긴채 축 늘어져 가는 동료를 가리키는 비참한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어리더니 툭 터져 나갔다.

흑의 복면인이 껍질만 남은 동료를 버리고 자신에게 걸어오는데도 목구멍이 콱 막혔는지 한 마디 비명조차 울 려 나오지 않자 공포심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돼 가던 비참한은 고개를 뒤로 젖힌채 기절해 버렸다.

세명의 권마대원들이 경계를 서기위해 빠져 나가자 잠시 잠이 든 척하던 뇌충은 살며시 눈을 뜨고 주변의 지 형 지물을 샅샅이 살펴 보았다.

그리고는 오른쪽의 절벽을 타고 십장여나 내려왔다.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었지만 이만하면 더 이상 내려가 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행히 암벽이 툭 튀어나온 부근의 밑부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어 몸을 웅크린 채로 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천리향을 사용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집착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만에 하나도 자신들이 살아날 가망성은 없 을 것 같았다. 기껏 추적자 세명을 죽였다고 천리향 냄새가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추적자들에게서 소식이 끊기면 더 많은 인원이 더 집요하게 추적을 해 올 것이고 그렇다면 오늘밤이 최대 고비였다. 다행히 자신은 천리향의 냄새를 지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천리향의 냄새를 지우 고 혼자서 탈출할 자신도 있었다.

'멍청한 놈들'

그래도 조금 정이 들었었는지 위에 있는 권마대원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에 목숨만 빼면 모든 것을 다 걸 수도 있엇다. 귀식대법을 최대 한 펼치며 숨소리조차 멎은채 은신해 있는 뇌충의 귀에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경계 경보의 기본 수칙조차 모 르는 놈이라고 생각하던 뇌충은 고함 소리의 주인이 비참한 이라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절대로 저런 무모한 고함을 지를리 없는 비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함소리가 울리었는데도 불구하고 위에서 아무런 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자 머릿속이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일각 이각 시간이 지나고 한시진 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어 오지 않자 이때서야 뇌충은 귀식 대법을 멈추고 고개를 뻗어 밖을 바 라 보았다.

여명이 밝아 오려는지 동녘 하늘에 붉은 기운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은신처 위에 툭 튀어나온 암벽위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자 조용 히 몸을 날려 암벽위로 올라섰 다. 그리고는 절벽에 귀를 대고 한참동안 지청술을 시전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하였 다.

십장 높이의 절벽이지만 숨 두 번 쉴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권마대원들은 흔적조차 발 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방을 쓱 훓어보고는 지금껏 도망쳐 오던 방향을 향해 몸을 날리었다. 천리향은 천리향속에 숨겨야 하는 법. 지금껏 지나쳐 온 길 중에서 이미 은신처를 콕 찝어 두었던 뇌충이었다.

하지만 두발자국이나 달렸을까?

일보에 삼장여를 내딛던 뇌충의 신형이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갑자기 앞으로 픽 꼬꾸라졌다. 혈도라도 찔렸 는지 신형을 가누지 못하던 뇌충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사방을 쓸어 보았다. 일장도 떨어지지 않은 큰 바위옆 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흑의 복면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하하! 대단한 심기요. 지금껏 나를 기다렸던게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뇌충이었지만 가슴속에는 이상스럽게도 공포심이나 불안감이 들지 않고 있었다.

"쥐새끼를 잡는 방법이지 . 호기심 많은 쥐새끼는 쌀알인지 쥐약인지 먹어 본다더니만 역시 맞는 말이구만."

"쥐새끼라... 음산인마가 보내서 왔소?"

뇌충은 호기심 많은 쥐새끼로 비유돼도 별로 할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삼사일 귀식대법이나 펼치고 있다가 나왔으면 될 것을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인내력을 발휘하지 못했으 니 스스로 명줄을 단축한 셈이다. 하지만 앞의 복면인은 예상했던 숫자도 그리고 무공 수준도 아니었다.

뭔지 흑막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호기심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도 다 죽어가면서도 또 다른 호기심이라 니.. 참 못 말릴 성질 이라고 자책하면서도 입가에 헛웃음이 실실 세어 나왔다.

"머리 굴리는 것을 보니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텐테 무엇 때문에 묻나? 어짜피 죽으면 잊혀질 것 그냥 조용히 가게."

역시나 예상대로 냉정한 흑의 복면인 이었다.

"흐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한마디만 물읍시다. 권마황은 죽었소?"

".. 권마대에서 썩을 사람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그것이 너의 운명이니 어쩌겠나. 맞네. 권마황은 죽었네."

검은 복면인이 한손을 들어 대답하는 것을 보니 그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것을 눈치챈 뇌충은 그 손에서 붉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혈도가 짚였지만 뇌충의 사고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허공을 날아 상대방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 을 보고는 그 놀랄만한 내공에 권마황이 진짜로 이자에게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백회혈에 상대방의 손이 닿은 후 자신의 내공(內功)은 물론 정(情)까지도 가뭄에 비 스며들 듯 빠져 나가자 지금까지 고심해왔던 모든 의문이 일시에 다 풀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하필 권마대원들만이 죽어가는지?

그리고 진정한 흉수가 누구인지?

급속도로 내기와 정이 빠져나가 쭈글탱이가 되어가는 뇌충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띠어지고 있었다. 하지 만 정기가 빠져나가 희미한 뇌충의 눈빛속에는 원독에 찬 살기가 어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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