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8절 :
애타게 무엇을 갈구하는 듯한 흐느낌이 저음으로 나직이 흘러나오는 석곽이 서서히 정천에게로 날아오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쌍골죽은 원래의 자리로 내려 앉더니 흙속으로 서서히 파고 들어갔다. 처음에 묻혔던 깊이까 지 쌍골죽이 파고들자 쌍골죽 주변으로 기가 회오리치며 흙을 다지고 주변에 흩어진 썩은 대잎들을 몰고와 위 를 덮었다.
정천이 넋이 빠진듯한 표정으로 석곽을 받아들때 쯤 해서는 죽검이 박혀 있는 거대한 쌍골죽은 언제 뽑혀졌었 냐는 듯이 처음의 모습 그대로 바람에 잎새를 부벼대고 있었다.
석곽을 받아든 정천은 석곽의 울림이 심해지자 그의 심장의 박동도 같이 뛰어 오르기 시작함을 느끼었다. 마 치 잃었던 한쪽을 다시 만나는 듯한 가슴벅찬 기대감과 알 수 없는 흥분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폭주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 소림 인연지자 개(少林 因緣之者 開)
석곽위에 쓰여져 있는 전서체(篆書)의 글을 바라보던 정천이 한손을 들어 묵직한 석곽의 뚜껑을 열어 제치자 석곽속에서 흘러 나오는 울림 소리가 고조되어 졌다. 그런데 석곽이 열린 후 정천은 갑자기 망부석이라도 되 었는지 시선을 석곽에 고정시킨채 굳어져 버렸다.
옆에서 정천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던 은성조차도 의아해 할 정도였다. 사실 정천의 눈은 석곽속에 든 한자루 보검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색 창연한 보검옆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황색 표지의 책 한권을 바 라본 후 심장이 멈춰질 것 같던 충격을 받고는 모든 움직임이 멈춰져 버린 것이다.
잠시 후 떨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안정시킨 정천이 손을 뻗어 표지에 써 있는 책 제목을 훓어 내려가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달마 삼검(達磨三劍) -달마(達磨)-'
석곽속에 든 책은 그가 그토록 자부하던 달마 삼검이었다. 그것도 달마 일검이 아니라 달마 삼검이며 달마 대 사님이 직접 작성하신 진본인 것이다.
달마 일검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정천이었다. 달마삼검 이라면 달마 일검 보다도 더 심오하고 개세적인 검 법이 두가지나 더 적혀 있는 것이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달마 대사님이 직접 작성하신 검법서를 쓰다듬던 정 천이 처음보다도 더욱더 애타게 검명을 흘려 대는 검자루를 힘있게 움켜 쥐었다.
정천이 검자루를 움켜쥐는 순간 보검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죽림이 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검명을 흘린 후 서서 히 흐느낌을 멈추어 갔다. 은성은 검명이 크게 떨쳐 울릴때에 보검속에서 흐릿한 금광이 뻗쳐나와 정천의 몸 을 덮어 씌운후 정천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감을 보고는 역시 명검이라며 감탄해 하였다.
"불영검이 이제야 주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스님, 감축 드립니다."
보검의 검자루에는 검의 이름이 불영검임을 뜻하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데 은성이 검을 보지도 않은채 불영검 이라 칭하자 정천은 의아해 하였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었다. 보검의 흐느낌이 멈추어지자 정천은 보검과 검법서가 든 석곽의 뚜껑을 닫고 은성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대협, 석곽안에 소림의 보물이 아니라 소림의 혼이 담겨져 있군요. 달마 대사님이 직접 작성하신 '달마 삼 검' 이라는 검법서와 보검 한자루가 들어 있는데 이 대협의 대의 대덕한 마음을 기리기 위하여 이대협이 칭하 신 대로 보검 이름은 불영검이라 칭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림은 결코 오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정천스님이 감격해 하면서도 엄숙한 목소리로 은성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당연한 일을 하였다는 듯이 은성이 가 겸손해 하며 말을 받았다.
"스님, 그처럼 말씀하시니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검명을 듣는데 좀 밝은 편입니다. 우연히 이곳을 산보하다가 불영검의 검명을 듣고 스님께 알린 것 뿐입니다. 이 모두가 오늘을 예측해 이곳에 안배를 해 두신 달마대사님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때문이지요."
은성이 오늘의 공적을 달마대사에게로 전가시키자 정천은 은성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더 강해졌다. 은성의 은 혜는 말로써 다 갚을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한 정천은 언젠가는 반드시 은혜를 보답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은성 에게 반장의 예를 표하였다.
"이대협, 장문인과 사조님에게 이 석곽을 보여 드려야 하므로 오늘은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오늘 이대협과의 만남을 세속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때의 인연 만큼이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저 또한 정천 스님과의 인연을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은성이 포권을 하며 정천의 예에 답하고는 서둘러 죽림속을 빠져 나가는 정천 스님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죽 림 밖으로 나왔다. 당분간은 정천 스님을 볼 수는 없으리라...
오늘 얻은 불영검과 검법서를 익혀 한층 강해질 정천 스님을 생각하자 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호기가 불끈 살 아 났다.
점심을 먹고 신시 초입쯤 되었을 때였다. 방안에서 조용히 명상 수련을 하던 은성은 심안을 통해 지객원주가 다시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은성의 방문을 두드려 은성에게 용무가 있음을 알린 지객원주에게서 은 거중이신 범각 태사조(太師祖)님이 절세곡으로 모셔 오라고 하였다는 말을 들은 은성은 주저없이 절세곡으로 향하였다.
절세곡은 소림사가 위치한 소실봉이 아닌 숭산의 가운데 봉우리인 준극(峻極) 중턱의 험한 계곡속에 위치 해 있었다. 소림사를 나오자 마자 경공을 발휘하여 길을 재촉한 지객원주는 산세가 괴이막측하고 안개가 자욱한 계곡 앞까지 은성을 데려다 주고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소림사로 뒤돌아가 버렸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운용되는 심안에 의해 지객원주가 완전히 떠났음을 알게된 은성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 보다가 서서히 안색이 굳어져 갔다. 계곡 바깥쪽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보지 않아도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조차도 심안에 의해 눈에 보이듯이 선명하게 알 수가 있었으나 계곡 안쪽에 자욱하 니 어린 안개속은 그의 심안으로도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왠지 음습하고 기분나쁜 느낌이 번지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안개속을 말없이 응시하던 은성은 갑자 기 안개속에서 무엇인지 툭 튀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가 버렸다.
안개속에서 나온 것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승이었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수염과 눈썹조차도 하나 없 는 노승은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가득 하였다. 하지만 깊고도 유현한 눈빛 속에는 정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무미(無眉)노승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은성에게 다가오며 은성의 위아래를 훓어 보았다. 그리고는 은성의 내력을 추정해 보려는지 가는 기파를 쏘아 보내고는 의외의 눈빛을 하였다.
"아미타불, 시주님이 해동신룡 이라고 불리우는 이대협 이신가 보군요. 노납은 소림의 범각 이라고 합니다."
노승은 조금도 입술을 벌리지 않았건만 은성의 뇌리에는 노승의 말소리가 바로 옆에서 귀에다 대고 하는 소리 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소림 칠십이절기 중의 하나이며 내공이 삼화취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않았다면 펼칠 수 없다는 혜광심어(慧光心語)가 펼쳐진 것이다.
"무림의 동도들이 과장하여 붙여준 것이라서 사용하기조차 부끄러운 별호입니다. 범각 대사님을 만나뵐 수 있 어 영광입니다."
은성은 심안이 발휘되어 범각 대사가 이미 그 경지를 추측할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무공의 고강함 뿐만이 아니라 이 노승은 소림사 장문인의 태사조라는 높은 배분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달라이라마께서 이 대협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경하고 있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전혀 부끄럽지 않은 별호입 니다. 노납은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조차 드는군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목소리조차도 늙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혜광심어로 말을 하여서 그런지 젊은 사람 의 영롱한 목소리가 은성에게 전달 되어졌다.
"대사님, 달라이라마님은 평안하신지요?"
은성의 어조에서 달라이라마에 대한 진한 관심을 발견한 범각 대사는 이미 높은 경지에 오른 달라이라마가 약 관도 안된 어린 스승을 모시게 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이 사실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고 하여도 달라이라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앙할 정도로 소년의 깨우침 정도가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공 경지는 달라이라마의 말처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미 반박귀진(返撲歸眞)에 삼화 취정( 三華聚頂)의 단계를 넘어선 자신으로서도 앞에 있는 소년이 무공을 익혔다는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곡 안쪽에 설치된 불수복마진(佛手伏魔陣)내에서 이 대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 되어 달라이라마와 상의하다가 능력이 미진하여 고민하던중 이 대협을 추천하여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부탁드 린 것입니다."
이미 세수 백여세를 넘긴 범각대사이건만 은성을 대하는 태도는 조심스럽기 이를데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은성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무림에서 자신과 비슷한 위치인 달라이라마의 스승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 다가 달라이라마의 말대로라면 무공과 깨달음 또한 절대로 자신들의 아래가 아니었다.
나이로 보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새카만 말학 후배이지만 그 능력면에서 은성은 말학 후배가 아니라 자신들 수준의, 아니 자신들 보다도 더 높을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페륵 선사께서 저를 추천하였다 하니 소생 능력이 닿는 데로 힘써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사님! 안쪽 에 설치된 불수복마진에 어떤 내력이 있는지요?"
은성의 물음에 범각 대사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화 되었다. 무림에 전해지고 있는 진법은 그 위력의 차이가 매 우 심했다. 어떠한 진법은 그 진세를 이루고 있는 원리를 정확히 모른다 하여도 약간의 무공만 지니고 있으면 진세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 같은 진법은 팔궤(八軌)의 원리를 모르면 평생 빠져 나올 수 없지만 팔궤의 원리는 음양·사상(陰陽 四象)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만 있어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므로 중하위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음양에 오행이 중복되고 육합(六合)에 구궁(九穹)이 깃들여 지는 등 진법속에 진법이 곁들여 지고 진 세속에 진세가 중첩되면 아무리 진법의 대가라고 하여도 쉽사리 그 진법을 풀 수가 없는 것이다. 계곡 안쪽에 설치된 불수복마진은 소림 일천년 역사속에서 몇몇 천재적이고 광기어린 승려들이 만들어 낸 애환 과 고난의 역작이었다. 아무리 진법의 대가라고 하여도 장담할 수 없는 상위 수준의 진법인 것이다.
게다가 이 진법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설령 진법의 파해도가 만들어졌다고 하여도 소림의 무공 을 대성한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진세를 넘나들 수가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진법의 무서움은 진세 안에 빠져 들지 않는한 정확한 위력을 알 수 없다는데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매우 위력적으로 보여도 막상 진세 안쪽에 들어선후 몇 개 중추적인 진세의 축만을 부수어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진법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진세가 설치된 범위도 좁고 위력이 없는 것처럼 보 이지만 막상 안쪽으로 들어서면 또 하나의 우주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만 하는 진법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수복마진의 내력을 묻는 은성은 이미 이 진법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림의 제일 금지인 절세곡이므로 대단한 진법이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으로 하는 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범각 대사가 은성에게 혜광심어를 보내었다.
"이 대협, 진세 안쪽으로 들어가서 상세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진법의 이름처럼 지옥의 마귀조차 가둘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위험하오니 노납의 호신강기 안쪽으로 들어오셔서 노납의 발걸음을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대사님! 그런데 저도 호신강기를 일으킬수 있는데 대사님의 뒤를 따르며 발자취만 일치시키는게 어떠한지요?"
무공을 측량할 길 없는 범각대사였지만 괜히 노구에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 은성이가 다른 대안 을 내놓자 범각대사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 대협, 이 대협의 무위를 얕보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 진법은 소림사의 독문내공을 익힌 사람만 이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소림에서 자랑하는 금강보리신공(金剛菩리神功)을 십성 이상 익히지 않으면 들어갈 생각조차 말아야 합니다."
범각 대사의 혜광심어에 은성은 할말을 잊고 범각 대사를 중심으로 일장 넓이로 퍼지고 있는 금광(金光) 속으 로 걸어 들어갔다. 금강보리신공으로 펼쳐진 호신강기 내부는 아늑하고 평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범각 대사의 호신강기 속으로 들어서면서 은성은 소림사에 대해서 또 한 번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소림의 저력은 어디까지 일까?
진법을 넘나드는 기운까지 감별하고 대처 하도록 만들었다니 소림의 위대함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