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57화 (57/152)
  • ■ 제 57절 :

    한시진이나 되었을까?

    명상에서 깨어난 정천 스님은 은성이 정자에서 떠나지 않고 등을 돌리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부좌를 튼 후 명상에 잠긴 은성은 그가 깨어나자 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명상에서 깨어나 며 등을 돌리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스님, 좋은 시간이 되셨는지요?"

    그런 은성을 보며 정천은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도대체 해동신룡이라고 부르는 은성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런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권마황을 이 겼다는 무위는 물론이며 사제인 정백이 몸소 겪었다는 천인지경인 무공을 생각하면 반노환동(反老換童)의 고 수로 보아도 될 정도였다.

    소림 삼신승의 한명이며 불도에 대한 조예가 깊은 공무(空武)사조님에게서 직접적인 무공을 사사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정백이 와서 표현한 은성의 무공은 공무사조 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은성의 몸에서 무공을 익혔다는 흔적을 전혀 발견해 낼수가 없으니 은성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직접적으로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깨달음의 경지는 어떠한가?

    스스로 다른 승려들보다도 깨달음이 깊다고 생각하는 정천이었지만 은성의 깨달음의 경지는 미진한 자신과 불 도가 깊다는 공무사조는 물론이고 장경각에서 불교 경전만을 읽고 평생 수행에만 전념한 노승들 보다도 훨씬 더 지고무상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대협, 덕분에 미망에서 벗어나 서천에 이르는 길을 조금 앞당길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 습니다."

    "아닙니다. 청산 깊은 계곡의 맑은 물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지만 어미 사슴이 먹으면 새끼를 먹여살릴 지 순한 사랑의 젖이 되는 것이지요. 스님의 선업이 깊어 깨달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쨋든 또 다른 경지를 바라보셨다 하니 축하 드립니다."

    겸손하기 이를데 없는 은성을 보며 정천은 한없이 마음이 넓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릇 불도를 닦는 승려로서 행동의 지표로 삼아 두고 싶어지는 은성의 마음가짐 이였다. 마음이 탁 트여서 그 런지 괜히 은성이 남 같지가 않아 보였다. 비록 어리지만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행동의 지표가 될 정도로 크고 위대하게 보이는 은성이 또 다른 스승처럼 보였다. 재주를 견주고 시기할 경쟁자가 아니라 자신보다도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하며 자신을 이끌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스승같은 존재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대협, 실은 요즈음 제가 달마일검(達磨一劍)이라는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는데 그 경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 다. 공무사조님께서도 우연히 발견하신 것이라며 아직 소림에서 익힌 사람이 없어 그 진정한 위력을 알 수는 없지만 공전절후한 위력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만 말씀하시고 굳이 평해주시지를 않아 궁금해 하던 차에 정백 사제에게서 이대협의 무위가 뛰어남을 전해 듣고 감히 비무를 하여 보고자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달마일검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어 얘기한 정천은 달마일검이 천하 무적의 검법이라도 되는 듯이 어조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지만 관조하는 듯한 은성의 눈빛과 마주치더니 겸손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대협을 만나보고 나서야 이대협과 능히 겨룰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소승의 부족함을 알수 있는 기회가 오늘처럼 쉽게 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가르 쳐 주신다고 생각하시고 한수 가르침을 내려 주실수는 없는지요?"

    정천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깃들여 있었다. 가르침을 애원하는데 인색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공수위 를 쉽게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초절정 고수인 정천 스님에게 그의 사조가 마지막으로 내려 주신 검법절기 이 라고 하니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무공은 아닌 것 같았다.

    소림무공은 내공의 강력함과 함께 권·장·지 및 신법이 뛰어나다고 무림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검후에게서 권·장·지 외에도 뛰어남이 널리 알려진 도법이 몇 개 남아 있다고 들었지만 검법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 今時初聞)이었다. 게다가 검법명을 들어보니 소림사에 무공의 초석을 심은 전설적인 절대종사인 달마대사(達 磨大師)가 창안한 검법인 것 같았다.

    은성으로서는 전설적인 무공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 앞 공터로 내려 가시지요."

    정천스님에게 비무를 허락한 은성이 정자 아래로 내려가 공터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 뒤를 정천스님이 조용히 숨을 고르며 뒤따랐다. 그런데 은성의 뒤를 따르는 정천 스님은 앞서가는 은성의 보보속에 하늘과 땅을 울리 는 거세지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들어갔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이 악마와 지옥의 마룡을 제압하실 때 일보 일보에 땅이 숨죽여 호홉을 멈추 고 대지가 두려움에 떨었다는 불경의 구절이 있었지만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정천이었다.

    그런데 부처님도 아니고 한낱 인간의 발걸음 속에 숨쉬기조차 거북한 파천지기(破天之氣)가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몇 발자국을 넘어서자 숨이 막힐 것 같던 기세가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은성이 비무에 최선 을 다하기 위해 조사지공인 '일시무시일' 보법을 잠시 운용하였던 것이다.

    공터에 도착한 후 정천이 빼어든 검이 흔한 청강검임을 확인한 은성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달마대사가 창안했으리라 판단되는 달마일검과의 비무를 위해서 일시무시일 보법을 펼쳐 하단전의 태극진기를 십성 운용하고 화룡검을 꺼내려고 하였는데 정작 상대방의 검이 너무나 약한 청강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강검이라고 하여도 검기나 검강을 운용시키면 못 베는 것이 없는 무적의 검으로 탈바꿈되어 지겠지만 문제는 자신이 화룡검 외에는 다른 검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화룡검은 진기를 운용시키지 않아도 너무나 단단하고 날카로워 일반 검은 부딪히자 마자 무 베듯 절단되어 버 리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검으로 유명한 무당파나 화산파 그리고 검보나 검각 등의 문파에는 명검이랄수 있는 검을 몇 개씩은 소장하고 있겠지만 검법 자체가 있는지도 모르는 소림사에는 명검은커녕 평범한 검도 발견하 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데 은성의 뇌리속으로 갑자기 지객원 뒤쪽에 위치한 죽림 속의 불영검이 떠올랐다. 어짜피 죽림 깊숙이 묻혀져 있었으니 주인이 있을리 만무하고 오랫동안 땅속에 있었을 터인데도 검기가 죽림 전체로 퍼져 나오고 있으니 평범한 검은 아닐 것이다. 검에서 흘러 나오는 검의에 불도까지도 깊숙이 깃들여 있는 것 같으니 불가 지보(佛家之寶)임에 틀림 없었다. 공터에 내려와서 자신이 빼어 든 검을 본후 은성이 눈쌀을 찌푸리자 기수식 을 펼치려다 만 정천이 은성에게 물었다.

    "이대협,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보다 정천 스님, 잠시 비무를 연기할 수는 없는지요. 아무래도 오늘은 기회가 좋지 않은 것 같 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대협, 그러면 다음에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정천이 너무나 쉽게 응낙해 버리자 오히려 은성이 무안해할 정도였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베인 듯한 정 천의 즉각적인 답변에 은성의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하지만 정천이 기다렸다는 듯이 은성의 요구에 응한 것 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자를 내려오면서 은성이 펼친 일시무시일 보법에서 자신의 한계를 실감했었기 때문이다.

    "정천 스님, 잠시 저와 산보를 하실 수 있는지요?"

    은성의 뜬금없는 말에 정천 스님이 은성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 덕였다. 은성을 따라 지객원의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정천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은성이 갑자 기 비무를 취소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죽림속으로 들어가며 죽림향이라고 불리는 차잎을 톡 톡 두드리던 은성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스님, 소림사에 와서 많은 기억들이 남겠지만 죽림향의 기억은 평생 간직될 듯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죽림향은 소림사의 자랑입니다. 소승도 가끔씩 죽림향의 다향이 그리우면 지객원을 찾는 답니다."

    "거처에는 죽림향이 없는지요?"

    "차맛은 차잎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를 끓이는 물과 차를 끓이는 정성 삼위일체가 되어야 하는데 죽림향은 이곳 지객원의 죽림속을 흐르는 약수로 끓여야만 진미가 우러나오더군요."

    "음..."

    죽림을 걷던 은성이 짧은 탄식을 불어냈다.

    주변에 쌍골죽이 많아진 것이 불영검이 잠든 곳이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심안속으로 불영검이 희미하게 잡혀 오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불영검을 꺼내면 더 이상 쌍골죽이 생겨나지도 않을뿐더러 예전과 같은 죽림향의 맛은 더 이상 맛볼 수가 없을 것이었다.

    과연 자신의 결정이 잘한 것인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영검에 가까워지자 은성은 결심을 굳힐 수가 있었다. 심안에 잡힌 불영검이 세상에 나오고자 하는 짙은 검의를 뿜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천스님! 이곳에 소림의 보물이 잠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나오고자 하는 의지가 깊으니 꺼내어 스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은성이 거대한 쌍골죽 앞에 멈추어 선채 정천 스님에게 뜻 모를 말을 하였지만 정천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죽림만이 펼쳐져 있는 이곳에 무슨 보물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보물에게 의지가 있다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은성이 주시하고 있는 쌍골죽의 굵 은 몸통에 죽검 한자루가 깊숙이 관통되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자 정천의 안광에서 무시 못할 정도로 형형 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금강승인 정백이 말했던 죽검인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틀림 없는 것 같았다. 지객원의 앞 공터에서 죽림속으로 날아갔다는 죽검이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와서 꽂혀 있다는 말인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에 다시금 은성의 능력에 경외지심(敬畏之心)이 든 정천은 방금 은성이 자신에게 한 말도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성이 거대한 쌍골죽의 뿌리부분을 향해 한 손을 뻗자 주변의 흙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하였다. 너무나도 가공한 은성의 격공섭물 신기에 정천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격공섭 물의 절기를 발휘하지 못하는 정천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일장넓이의 흙이 형상을 유지한 채 나무 뿌리가 뽑히 듯이 공중으로 떠오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두자 정도라면 해볼만 하겠지만 말이다. 커다란 쌍골죽을 포함한 거대한 흙덩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 니 흙덩이 둘레로 기가 소용돌이 치며 흙덩이가 가장자리로부터 부서져 흘 구덩이로 쌓여지기 시작하였다.

    일장 넓이의 흙덩이가 네자 정도로 줄어들자 흙덩이 속에 믿지 못할 광경이 드러났다.

    쌍골죽의 대뿌리가 네자 정도 길이에 한자 넓이의 석곽을 촘촘하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성이 어떻게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실타레처럼 얽힌 대뿌리가 하나씩 펼쳐지며 석곽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어 오는 것 같았다.

    '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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