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6절 :
마교 안휘지부
어두움을 밝히는 흐릿한 유등만이 가물거리는 음산하고 칙칙한 지하 동굴이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는 곳...
천연의 석굴에 인공이 가미되어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십여장 깊숙이의 한 석실에서 마교 십대장로중의 한명인 번뇌마승(煩惱魔僧)의 음성이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해동신룡' 이라고?"
부리부리한 왕방울 눈에 턱수염을 길렀으며 유난히 뒤퉁수가 툭 튀어나온 민머리의 노승 이었다.
"그렇습니다. 실종되신 권마황님과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고 하는데 믿을수 없게도 권마황님이 당해 중상을 입 었다고 들었습니다."
마교 안휘지부장인 음산인마 갈중혁도 믿을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소교주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밀찰대 를 보내 재삼 확인을 한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젠장할! 그래, 그 해동신룡 이라는 놈은 어느 문파의 고인이더냐?"
흥분한 듯 번뇌마승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방이 콱 막힌 석실 이어서 그런지 마지막 목소리는 석실 을 울리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만 나이가 약관을 넘기지 않았다 합니다."
"무엇이!"
번뇌마승의 고함소리가 석실안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석실 상부에서 작은 돌가루조차 떨어졌다.
"아니, 안휘 지부장!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권마황이 누구인데 그런 코흘리개에게 당했다는 말이냐?"
번뇌마승은 열이 올랐는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킨채 음산인마 갈중혁을 잡아 먹을 듯이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 뜨며 외쳐댔다.
"장로님, 속하도 믿을 수 없어 재삼 확인을 했는데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소교주님이 친히 목격한 사실입니다."
안휘성 마교 지부를 맡고 있으며 잔인하고 독랄한 성격 탓으로 지부에 속한 모든 마교도들이 눈만 마주쳐도 오금을 저린다는 음산인마가 두려운 눈빛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마교에서도 전설로 내려오는 열양지기를 극 성으로 연마하여서 그런지 성격이 열화 같으며 한 번 속이 뒤집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번뇌마승이었다.
성질이 복받쳐 올라 폭주하면 괜히 자기에게 화풀이 할런지도 몰랐다.
"소교주가? 그래, 소교주는 무사하시고?"
"다행히 소교주님은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중상을 입으시고 지금 밀실에서 내상을 치유중이십니다. 한달전 중 상을 입으시고 도착하신 소교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목가장에서 검후와 청무대주의 협공에 당해 정신을 잃으셨 는데 깨어나 보니 이름 모를 야산의 동굴속이었답니다. 권마황께서 성치않은 몸으로 중상을 입은 소교주를 동 굴속에 숨기신후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펼쳐 추적하는 무림맹의 고수들을 따돌리신 것 같다고 하셨습 니다."
"음..."
멧돼지처럼 콧김을 쌕쌕 내뿜던 번뇌마승이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던지 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벗 어 왼손으로 호두알만한 구슬을 넘기며 침음성을 흘렸다. 뒤로 넘어가는 구슬의 마찰열 때문인지 불꽃을 튕겨 내고 있었지만 전혀 뜨겁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소교주님의 상세는 어떠하시냐?"
염주를 굴린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은 화를 가라앉힌 번뇌마승이 소리를 조금 낮추며 소교주의 안부를 물었다.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고 하여도 권마황같은 초절정 고수가 쉽게 죽을리는 없었다. 아마도 이름 모를 심산에 숨어서 중상을 치유하고 있으리라.
"지하 밀실에서 내상을 치유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후 저를 포함하여 누구도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 셨습니다. 소교주님께서 밀실에서 나오셔서 직접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면 소교주님의 정확한 상세를 알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상구로 들여보내는 음식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상세가 심하지는 않은 것 같습 니다. 내상을 다스릴 자신이 없으셨다면 밀실에 드시기전 본산 만독전의 마의(魔醫)들을 불렀을 테니까요."
음산인마의 말을 듣고 보니 소교주의 상세도 우려할 바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번뇌마승이었다.
그렇지만 권마황과 소교주에 대한 걱정이 조금 덜해지자 권마황과 소교주를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은 해동신룡 과 검후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모락모락 피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해동신룡이라는 놈과 검후라는 년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심화를 조금 가라 앉힌 것 같던 번뇌마승이 다시 싸늘하니 목소리를 높여오자 음산인마는 심장이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끈적끈적한 살기를 담고 있는 번뇌마승의 기분이 지금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동물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말 실수라도 한 번 하면 성질 사납기로 마교에서 첫 번째인 번뇌마승에게 무슨 짓 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손바닥에 땀방울까지 소록소록 돋아났다.
"두명 모두 하남성으로 향했다는 첩보가 있어서 하남 지부와 긴밀히 협조하여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흔 적이 소림사로 이어졌다는 정보가 있어 진위여부를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소림사?... 두년놈이 몰려 다니고 있다니 어쨋든 수고를 덜게 되었군. 평생 절간에 처박혀 있지는 않을 것이 다. 두 년놈을 철저히 감시하여 소림사를 빠져 나오는 즉시 참살할 만반의 준비를 하라!"
"알겠습니다. 한치의 실수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소림사라는 말에 앞 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리는 번뇌마승 조차도 열화같은 성질을 애써 인내하는 것을 보자 내심 소림사의 저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한 음산인마가 한 고비를 넘겼다는 듯이 속으로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림사만 아니라면 번뇌마승의 성질에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두 년놈을 박살내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달전 목검문과의 싸움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이래로 현재 이곳의 전력은 형편없이 줄어 있었다.
목검문과의 싸움에 참가한 지옥대(地獄隊)가 전멸당하고 칠십명이었던 혈의대(血衣隊)가 현재는 삼십명밖에 남아 있지 못하여 정보 조직인 밀찰대 외에는 모든 무력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나마 권마황이 데리고 왔던 권마대원들 오십여명이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안휘지부가 위치한 천문산(天門山)에 대한 수비조차 변변히 하지 못할뻔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권마황과 실질적으로 이들을 지휘했던 권마대주가 없어져서 그런지 그토록 기강이 엄중했던 권마대원들이 흔 적조차 남기지 않고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곽 경비를 서다가 하나둘 사라져간 권마대원들의 숫자 가 이십여명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진상을 파악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최외각 경비는 아예 혈의대에게 일임시켰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산중턱을 수비하고 있는 권마대원들만이 흔적 조차 남기지 않고 계속해서 사라져 갔다. 게다가 마교 본산에 지원요청한 마교 무사들은 온다는 소식조차 없 는데 지옥의 나찰보다도 더 상대하기 어려운 번뇌마승만이 찾아와 까맣게 타들어가는 음산인마 갈중혁의 가슴 을 콩알만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허공을 가득 메운 어둠이 무겁게 대지를 억누르며 숨통을 죄어오는 이밤, 북두성은 축시(丑時)가 지나고 있음 을 알리고자 꼬리를 맞은편 산허리 쪽으로 틀어가고 있었다.
마교 교주 보다도 더 지엄한 존재인 권마황에게서 절대무공인 파황신권을 이초식이나 물려 받을수 있었던 권 마대 소속인 악종수는 천마산 중턱 은밀하게 은폐된 바위틈에 숨어 가파르게 경사진 계곡을 주시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동료가 계곡 좌측의 숲속을 담당하고 자신은 계곡 우측의 울퉁불퉁한 바위 투성이인 석림을 맡아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심중에는 별의별 생각들이 오고 갔다.
권마대주가 죽고 권마황이 실종되어 한달 가량이나 소식이 없자 권마대의 사기가 저하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 지만 실종된 권마황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에 한치의 의심이라도 하고 있는 권마대원은 맹세컨데 단 한명도 없었다.
마교 안휘성의 지부장인 음산인마를 비롯하여 재수 없는 혈의대 놈들이 권마대원들이 비겁하게 도망쳐 사라지 고 있다는 듯한 조소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억울해하고 분통해 하는 악종수였다. 반드시 권마 대원들이 실종되는 이유를 찾아서 잃었던 권마대의 명예를 되찾아야 겠다며 부릅뜬 눈을 더욱 치켜 떠 가던 악종수는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었다.
그런데 뒤쪽으로 돌아가던 고개가 채 돌아기도 전에 마혈이 뜨끔해져 왔다. 순간 그토록 담대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악종수는 엄청난 공포감이 전신을 덮어오며 소름조차도 돋아났다. 오늘밤의 희생양은 그 자신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전신에 확산되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뒤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이상 행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서는 옆의 동료도 당한 것 같았다.
어떻게 뒤쪽에서 암습을 당할 수 있을까 의아해 하던 악종수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올라 뒤쪽으로 날아가자 놀 라움과 두려움에 오줌조차 지려 버렸다. 잠시 후 머리에 닿는 이물질이 상대방이 손바닥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는 이까지도 덜덜덜 떨리어 오기 시작하였다. 마혈이 제압되어졌다고 감각까지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별빛이 빛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몸은 암습자의 손바닥에 붙은채로 공중에 붕 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고 지금까지 실종된 이십여 권마대원들의 행적에 대한 실마리를 쥐고 있는 암습자는 육중한 자신의 신체를 격공섭물로 가벼운 공기돌인양 다루고 있는 것이다.
누구일까?
권마대에서 이처럼 막강한 공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권마황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권마황조차도 이보 다는 약할 것 같았다. 자신의 목숨이 바람앞의 촛불 같다는 생각을 하던 악종수는 백회혈을 통하여 전신의 내 력이 급속도록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지력조차도 서서히 고갈되어져 갔다. 일각도 되기전에 악종수와 그의 권마대 동료의 몸은 뼈다구에 인피를 덮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위로 무슨 가루같은 것이 흩뿌려지자 시체들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시작하였 다. 옷이 녹아들고 살가죽이 녹아들며 뼈까지도 녹아드는가 싶더니 잠시후 시체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시체 썩 는 고약한 악취만이 떠돌았다.
그것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자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악종수와 그의 동료가 허무하게 사라져 버 린 것이다. 그들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암습자 조차도 어둠의 일부인양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자 사방은 적막한 고요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지객원에 도착한 검후는 은성이 지객원의 입구까지 마중 나와 있자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훈훈해져 왔다.
잔잔한 감동이 조용히 물결쳐 온몸을 환희에 젖어 들도록 만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은성에게 다가가 은성의 손을 잡으려던 검후는 이곳이 소림사이고 바로 옆에 지객원주까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에 홍조를 띄며 손을 오무렸다.
그런데 그런 검후의 손목을 은성이 꼬옥 잡아주자 수줍음에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면서도 검후는 손목을 빼 지 않았다. 부끄럽고 난처하지만 더할 수 없이 행복해져 왔다. 그 누구의 시선과 그 어떤 제약도 자신들의 사 랑을 가로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중원인이 흉을 보고 손 가락질을 하여도 은성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은 검후였다. 다행히 불도가 깊은 지객원주는 은성과 검후의 행동을 나무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은성의 방 옆에 검후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낮에 차 심부름을 해주던 청정이라는 동자승이 차려온 저녁 공양은 채식 반찬에 간소하게 차려져 있었지만 산 사의 맑은 공기속에서 검후와 함께 하여서 그런지 유난히 맛이 있었다. 서쪽 하늘에 은하수가 보석처럼 빛을 뿌려대는 것을 은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채 말없이 바라보던 검후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러자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아 한쪽 손으로 검후의 어깨를 감싸 안은채 행복함에 취해있던 은성이 역시나 조 용히 대답하였다.
"응"
은하수 별빛을 바라보던 검후가 시선을 돌려 은성을 바라보자 은성도 시선을 돌려 검후를 바라보았다. 은성의 눈빛을 바라보던 검후는 순간 은성의 눈빛이 별빛 보다도 더 맑고 찬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성의 맑고 깊 은 눈동자 속에 빠져 들고픈 생각마저 들었다. 한참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검후와 은성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것 같았다.
"오라버니, 저 소림사에서 석달 정도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공지 대사님에게서 본문의 무공중 일부를 가르 침 받기로 했거든요. 오라버니... 기다려 주실거죠?"
검후의 난초잎처럼 우아하고도 긴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에는 기대와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 소림사에 떼를 써서라도 기다릴께."
은성의 대답을 들은 검후는 기쁨에 겨운 듯 은성에게 바짝 안기며 은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검후를 은성은 꼬옥 껴안아 주었다.
"오라버니, 무공을 배우는 석달 동안에는 무공에만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오라버니를 찾아 뵙지 못할 것 같아 요... 그리고 좀전에 공지 대사님을 만나고 오는 길에 지객 원주에게 부탁했는데 오라버니가 아무 불편없이 머무를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신다고 했어요."
은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검후가 은성의 허리를 사뿐히 껴안으며 말을 하였다. 밤바람에 대나무 잎새 들도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아마도 검후와 은성의 사랑의 속삭임을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검후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몇번이나 은성을 돌아보며 지객원주를 따라나선 후 은성은 허 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혼자서 죽림을 산책하였다. 오늘따라 바람에 일렁이며 '쏴'하고 울어대던 대잎들의 부딪힘 소리가 슬프게만 들리어 오자 은성은 산책을 중단하고 지객원의 정자쪽으로 발걸음을 돌리었다.
동자승 청정에게 부탁하여 쓸쓸하게나마 죽림향의 차맛을 음미해 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지객원의 정자에는 낮선 스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십여세 정도의 훤칠하고 시원스럽게 생긴 승려였다.
다행히 스님은 다향이 물씬 풍기는 차상앞에 앉아 있었다. 정자에 오른 은성이 차상앞에 앉자 스님이 은성에 게 말없이 차를 따라 주었다.
죽림향 이었다. 혼자서 마시면 신묘하지만 둘이서 마시면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다음(茶飮)이었다. 다례에 따 라 죽림향을 마신후 조용히 다향을 음미한 은성은 차관을 들어 역시 찻잔을 비운 승려의 잔과 자신의 빈 잔에 죽림향을 따랐다.
차 향기가 지객원의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는 만큼이나 시간은 느리게 흘러 갔지만 어느새 차관은 비워 져 버렸다. 은성이가 차를 따른후 젊은 스님이 차를 따를 순서가 되었는데도 스님은 차관을 잡지 않았다.
이전에 차를 따르면서 차관에 든 죽림향의 량을 가늠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대협, 어제 사제인 정백이 찾아 왔었습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었는데 미진함이 많은지 마음이 일더 군요. 마음가는데로 발길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법호는 어떻게 되시는지요?"
왠지 탈속해 보이는 젊은 승려에게 호감을 느낀 은성이 물었다.
"정천(正天)이라고 합니다. 파아란 하늘같이 맑고 바른 삶을 살으라고 지어주셨는데 아직은 검은 구름에 가리 어져 혼미할 뿐입니다. 아미타불!"
정천 스님이 자신에게 법호를 지어준 분에게 죄송스럽다는 듯이 불호를 외웠다.
"스님, 마음을 비우셨다고 하시면서 어찌 또 혼미하다고 하시는지요?"
은성이 보기에 정천 스님은 여지껏 소림사에 와서 본 스님들중 무공과 불도를 포함하여 가장 성취가 깊어 보 였다. 어제 본 금강승들보다는 몇 단계나 무공이 높아 보였으며 소림사의 장문인과 비교해도 뒤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불도에 대한 깨달음 또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 같았는데 혼미하다고 하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불자로서 오욕 칠정을 잊어 버리기 위해 마음을 비우고는 있지만 한쪽 가슴으로는 계속 채우려드니 혼미할 수 밖에요. 눈앞에 있는 불법을 쫒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 영육(靈肉)이 가벼워야 하는데 비웠을 것이라 는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잡념이 솟아 나오니 아직은 수행이 일천한가 봅니다."
잡념이 많다고 하였지만 은성이 보기에 정천 스님의 맑고 진중한 눈빛은 결코 잡념이 많거나 흔들림이 심한 눈빛이 아니었다. 법호인 정천(正天)에 담긴 의미처럼 맑고 정직하며 심지가 곧은 눈빛 이었다.
"스님, 부처님은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스님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어이하여 스님의 마음속에 깃들인 부처 님을 내몰으시려고 애쓰시는지요?"
은성이 선문답 적인 말을 하자 정천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한 번 은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눈빛이 침잠해 드는가 싶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기쁜 표정으로 은성을 응시하며 말을 하였다.
"아미타불! 이대협의 고견은 생각해 볼수록 신묘하고 깊은 뜻이 담기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수행이 부족 하여 아직은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먹구름 속에 한줄기 햇살이 비추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일에 달관한 듯 온화한 표정만을 짓고 있던 정천 스님이 기쁨에 겨운듯한 환한 표정을 짓자 보고있던 은 성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자신이 명상 수련을 하며 천부경 속의 구절을 고심하다가 깨달음을 얻었 을 때 느껴지던 희열이 지금 다시 솟아올라 왔다.
"스님, 깨달음의 길은 높고도 깊어 큰 뜻을 품은 자는 쉴틈이 없어야 한다지만 진운(眞運)이 트이면 한걸음에 도달할 수 있고 빠르면 찰나지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은 깨달 았다고 깨달아 지는 것이 아니지요."
은성이 불가의 용어를 사용하며 정천스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친근한 친구에게 말하는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 지만 듣고 있는 정천 스님은 은성의 한마디 한마디가 뇌성 벽력 소리보다도 더 크게 머리 속을 파고들고 있었 다.
특히나 '깨달았다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머리가 백치가 된 듯 멍해져 버렸다.
그동안 이루어 놓았던 공든탑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아련히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토록 검은 먹구름처럼 혼미해져 있던 머리 속에 서서히 광명이 비추이고 있었다. 편하게 앉아 있던 정천 스님 이 갑자기 가부좌를 튼 후 명상에 잠기었다. 지금처럼 영대(靈臺)가 맑아지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 다.
애벌레의 흉갑을 벗고 파랗고 맑은 하늘로 힘차게 날아 오를 수도 있는 절대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정천 이 깨달음의 도를 이루어가는 동안에 은성은 몸을 옮겨 난간 밖의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흰구름 두 개가 나란히 떠 가고 있었다. 문득 검후 생각이 났다. 헤어진지 일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그리움이 사무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은 하얀 구름이 되어 말없이 하늘 저편으로 흘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