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54화 (54/152)

■ 제 54절 :

"스승님, 부족한 제자의 소견으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도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불도에서도 여색을 멀리하라 이르고 있는데 스승님께서 저 여시주를 가까이 함은 무슨 연유이신지요?"

달라이라마가 지객원주를 따라 저멀리 사라져가는 검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은성이에게 돌리며 이해할 수 없 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를 가까이 하는 수도승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색욕(色慾)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은 성이가 수도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큰 깨우침을 얻은 현자로써 당연히 여자를 경계해야 한다고 달라이라마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달라이라마를 바라보며 은성이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선사님, 하늘에는 밤 낮이 어우러지고 땅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어우러지듯이 인간도 남자와 여자가 사귀고 어우러지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원해서 순응하는데 도에서 멀어질 리가 있겠는지요?"

"하지만 스승님,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미움도 따르고 집착과 증오까지도 함께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남녀간 의 사랑만큼 큰 업보를 쌓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는 아직까지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자 은성이는 내심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눈빛 을 반짝이었다. 그리고는 생각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였다.

"선사님, 제가 '나'를 알면 천지 자연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하신 말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나의 육체? , 이성? , 감성 ? 맞습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감성은 혼자서 명상만 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로 사 랑으로 맺어진 이성입니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도 각자 깨달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혼자서 진리에 이 른 도인보다는 둘이서 진리에 다가선 도인의 도력이 훨씬 높고 깊습니다. 이처럼 남녀가 어우러지는 것이 천 지 자연의 도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가 어우러지는 시기가 중요하지요. 바로 진실로 서로가 필요로 할 때입니다. 진실로 어우러진 사랑 속에는 미움도, 집착도, 증오도 없습니다."

"아!..."

은성이의 설법을 듣는 동안에 달라이라마는 지금까지 자신이 독선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라는 존재가 그처럼 천하고 요귀처럼 남자들의 심성을 갉아먹는 악마라면 모든 남자들 또한 악마의 자식 이라 불리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도 여자의 음부속에서 태어났지 않았는가?

참으로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존경스런 눈빛으로 어린 스승을 바라보던 달라이라마의 입속에서 저절로 불호가 흘러 나왔다.

'아미타불!'

달라이라마가 자신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였던지 지금까지 진지한 어조로 설법하던 은성이가 입가에 장 난스런 미소를 띄며 달라이라마에게 말했다.

"선사님, 장가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는지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마음에 두신 여시 주님이 계시다면 구혼하십시오."

'아미타불! 아미타불!...'

달라이라마가 듣기 민망했던지 연신 불호를 외웠다. 하지만 어린 스승님의 말처럼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었 던 편견과 아집 때문에 더 이상 도력이 향상되지 않았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달라이라마였다.

"선사님, 그런데 범각 대사님은 무슨 연유로 찾으시는지요?"

서장 포달랍궁에서 이곳 소림사까지는 쉽게 오갈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달라이라마라는 신분으로써 수행승 한명 없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제자에게 피치못할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되는 은성이였다.

"스승님, 너무 부끄러워 말씀드리기가 민망합니다. 실은 못난 이 제자가 예까지 온 것은 호승심 때문이었습니 다. 하지만 스승님을 만나서 큰 세상을 보니 그동안 스스로 제일 잘 났다는 소승의 생각이 망상(妄想)에 지나 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망상이라니요?"

무림에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많다고 하여도 달라이라마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무공으로만 따지면 열손가락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안에 들 수도 있는 최고 고수중의 한명이 바로 달라이라마이기 때문이 다. 그런 달라이라마가 스스로 제일 잘 났다고 생각하였다면 그것을 망상이라고 할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또 그 하늘 위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십년 전에 단기로 저와 포달랍궁 오백여 궁도들을 막아선 큰 용기를 가진 범각대사도 저보다 뛰어난 인물이겠지만 무엇 보다도 스승님을 만난 후 그 동안 저 자신이 너무 오만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은성이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다하며 말을 끝내자 은성이가 온화한 눈빛으로 달라이라마를 바라 보며 말을 받았다.

"십년전 포달랍궁의 오백여 고수들의 중원진출을 중도에 좌절시키신 분이 바로 범각대사님 이시다니...선사님 이 소림사에 오신 이유를 대충 알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부족한 저를 범각 대사님과 비교하시는 것은 저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스승님, 너무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소승의 생각으로는 당금 무림에서 스승님같이 깨달음이 깊으신 현인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공으로 비교해도 스승님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신 것으로 알고 있 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자신감에 가득찬 목소리로 은성이를 추켜세워 주었다. 하지만 무공방면으로는 아직도 많이 부족 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은성이였다.

"선사님 , 제 무공은 아직 많이 부족한 편입니다. 선사님과 같이 오시는 길에 선사님이 절세의 무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조차 알아 차리지 못했으니 선사님에 비해서도 한참 부족할 것입니다."

"허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스승님께서 무공을 익히셨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 그것만으로는 판단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내기의 조절이 자유로워져 겉으로는 무공을 익혔는지 알아차릴 수 없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는데 스승님이나 저는 이미 그 경지를 뛰어넘었 기 때문에 서로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육체 적 수련보다는 정신적 깨달음만이 무공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데 스승님같이 깨달음의 도가 높으신 분은 그 성취가 한량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초식의 수련이 전혀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은성이는 태극진기를 완성한 후 내공에 대한 자신은 있었지만 초식에 대해서는 다소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나 권마황과 대결하면서 권마황의 정교하고 변화무쌍한 초식을 보며 그 느낌은 더욱 커졌다.

"초식의 수련이 전혀 무용하다고 할 수는 없겟지요. 하지만 아무리 절세신공을 익혔다고 하더라도 공력이 뒷 받침 되어주지 않고 결전의 경험이 부족하다면 삼류 무공을 익힌 초절정 고수에게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 실입니다. 절세무공도 삼류무사가 익히고 펼치려 하면 삼류 무공이지만 삼류 무공도 초절정 고수가 익히면 초 절정 무공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달라이라마는 무공에 대한 자신감만큼이나 무공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무공이 높아지면 높아 질수록 절말로 초식에 의지하는 바가 적어질까?

그러나 아직까지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지 못한 은성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선사님, 그렇다면 공력과 경험이 비슷하다면 어떻습니까?"

"공력과 경험이 비슷한 두 사람이 대결한다면 익히고 있는 초식과 숙달 정도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겠지요. 하 지만 공력과 경험이 비슷한 사람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공력과 경험이 비슷한 절정고수 두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전심전력으로 내공을 닦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의 성취가 초식과 기교에 만 의지하는 사람에 비해서는 훨씬 빠를 것입니다."

"흠..."

이미 많은 제자들을 기르고 무공에 대해서는 절대종사로 칭해지는 달라이라마의 신념에 찬 열변이었지만 그래 도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은성이가 아직도 초식에 연연해 하는 것 같자 달라이라마가 부연 설명 을 하여 주었다.

"무공이 높아질수록 초식이 단순해 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변화 무쌍함과 허초는 하수들에게나 통할 수 있는 눈속임으로 절세 고수에게는 아니 사용함만 못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초식이 화려하고 변화무 쌍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검강을 운용한채로 이기어검을 펼치면 방비할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요. 호신 강막을 펼친채 능공허보(凌空虛步)를 펼친다면 설령 백만대군이 몰려온다고 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검강과 이기어검 그리고 호신강막과 능공허보는 공력이 약하다면 펼칠 생각조차 할수 없는 무공입니다. 대신 공력만 충분하다면 누구나 펼칠 수 있는 무공이지요. 같은 이기어검이라도 공력이 강한 사람의 검이 속 도나 지속력 그리고 파괴력에서 훨씬 우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공이 높아질수록 초식에 의지하는 바가 적 어 지는 것입니다."

"선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가슴속이 다 후련해지는군요. 이제서야 초식에서 조금 자유로워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사님은 이미 초식을 벗어나셨는지요?"

"아닙니다. 제자는 아직도 초식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번에 소림사를 방문한 이유도 십년전 범각의 금 강부동신법과 우열을 가리지 못했던 본궁의 비전 절기인 보리패엽공에 조그마한 성취가 있어서 다시한번 우열 을 가려 보고자 하는 미련한 호승지심 때문이었습니다. "

달라이라마가 조그마한 성취라고 말했으나 서장에서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큰 성취가 있었을 것이 분명 하 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초식에 연연하지 않아야 된다고 열변을 토한 달라이라마에게 보리패엽공이라는 초식을 견식하자고 할 수도 없었다.

달라이라마가 말한 내용을 잠깐 생각해 보던 은성이는 소림사의 장문인을 포함한 몇 명이 지객원 근처로 다가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으며 귀로 들리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운용되는 심안에 의해 미리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심안은 사물의 형체와 움직임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물이 내포하고 발산하는 기의 종류와 세기는 물 론이고 특유의 분위기까지 알려 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소림사의 장문인과 지객원주 등과 마주침이 있었던 은성이는 심안을 통해 지금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중의 제일 앞선 사람이 소림사의 장문인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달라이라마님, 범각 사백님께서 모시고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소승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자 가까이 다가온 소림 장문인은 달라이라마의 지위를 고려하여 직접 모시고 가고자 하는 것 같았다. 혜원 대사의 말이 끝나자 달라이라마가 은성이에게 합장을 하며 전음입밀로 말하였다.

"스승님, 이미 말씀드렸듯이 제자 호승지심을 버리고 소림사와는 친구가 되기로 하였으니 심려 놓으시기 바랍 니다. 그리고 스승님이 제자의 스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스승님이 행동하시기에 불편하실 것 같아 이렇게 전음입밀로만 인사를 하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전음입밀을 마친 달라이라마는 정자에서 몸을 날려 소림 장문인의 앞에 내려섰다. 그런데 정자에서 몸을 날리 는 달라이라마의 동작은 유연하고 부드럽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게다가 공중에서 땅에 내려설 때에는 구름 이 산중턱에 내려앉듯 그리고 선녀가 하강하듯 매우 느리고 고요하게 내려섰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렸건만 먼지 한점 일지 않았다. 단 한수에 불과 하였지만 소림 장문인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스치어 갔다. 그리고는 더욱더 공손한 자세로 달라이라마를 모시고 지객원을 떠나갔다.

"이대협님, 머무르실 수 있는 객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장문인을 따라왔던 지객원주가 장문인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 은성이에게 방 안내를 하자 혼자 남은 은성이는 지객원주를 따라갔다. 지객원주가 지정해준 방에 들어간 은성이는 생각보다는 방이 넓다는 생각을 하였다.

방한쪽에 작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문방사우만이 갖추어져 있는 매우 검소하고 소박한 방이었지만 지객원에 있는 객방중 가장 규모가 큰 방 같았다.

이곳에서 한시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하루를 머무를 것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방안에 들어서자 산사의 고적한 내음이 물씬 풍겨져 왔다. 지객원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은성이는 창문을 열고 창문밖의 세상을 구경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달라이라마와 대화한 내용을 음미해보며 명상에 잠기려는 것이다.

눈을 감은 은성이는 곧바로 깊고 깊은 고요지심에 이르러 갔다. 반시진 정도 명상에 잠기었던 은성이의 눈이 살포시 뜨여졌다. 지객원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일곱명이었는데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을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좌선을 풀고 방문 밖으로 나선 은성이는 이십대 중반의 젊은 승려들 일곱명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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