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53화 (53/152)

■ 제 53절 :

소림사 지객원에 도착한 은성이는 마음까지 깨끗해 지는 것 같았다.

지객원에는 소림사를 방문한 외부 손님들이 거처할 수 있는 객방이 줄지어 있고 한쪽에는 사방이 탁 트인 정 자가 서 있었는데 죽림사이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산새소리 청아하여 속세의 모든 번민이 일시에 날아가 버리 는 것 같았다. 정자 안에는 작은 차상이 놓여 있었으며 예닐곱살 정도의 동자승 한명이 차상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은성이 와 검후 그리고 노승에게 차관을 들어 차를 따라 주고 있었다.

"시주님들, 저희 소림사의 자랑인 죽림향(竹林香)입니다. 이차는 저희 소림사에서만 자생하는 찻잎을 우려낸 것으로 향이 좋고 뒷끝이 감칠맛 난다고 정평이 나 있답니다."

동자승의 순진무구한 얼굴 표정을 보니 세상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버리고 은성이와 단둘이 살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검후가 차 맛을 음 미해 보고는 감탄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스님, 차맛이 정말로 훌륭하군요. '죽림향'이라고 이름이 매우 독특한데 차를 기르는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 으신지요?"

검후가 동자승의 천진 난만해 보이는 눈을 바라보며 묻자 매일같이 산사에 머물어 검후와 같은 선녀같은 시주 를 본적이 없는 동자승이 부끄러워하며 대답하였다.

"저희 지객원의 뒷편에 있는 죽림은 지기(地氣)가 특이하여 속이 꽉찬 쌍골죽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특이 한 지기 때문인지 그 곳에 자생하는 차잎 또한 독특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차 잎으로 만든 차가 죽림향입니다."

"스님, 대나무가 속이 꽉 차 있다니 정말로 특이하군요. 그리고 골이 양쪽으로 나 있다니 그럼 줄기도 양쪽에 나 있습니까?"

동자승이 지객원 뒷편에 쌍골죽이 있다는 소리를 하자 참 특이한 대나무도 있구나 생각한 은성이가 황당한 질 문을 하였다. 대나무의 줄기는 마디마다 엇갈려서 한 개씩만 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줄기도 일반 대나무에 비해서 훨씬 굵고 길지요."

'허'

설마하고 물었는데 정말로 줄기가 양쪽에 나 있다니 놀랄 일이었다. 시간이 나면 지객원 뒷편 죽림에 가 봐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죽림향 이라는 차를 마신 은성이가 차 맛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일행이 차를 마실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후 지객원 소속의 승려들에게 당부할 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지객원주가 정자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타불, 청정아 수고했다. 그만 물러가거라!"

지금까지 일행에게 차 심부름을 해주던 청정이라는 동자승을 물러가게 한 지객원주가 검후 옆에 자리를 잡았 다. 지객원주는 장문인에게 태사조인 범각대사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협박성 발언을 한 달라이라마의 표정을 살펴 보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노하면 소실봉을 뒤엎을 수도 있다는 달라이라마가 평온한 얼굴로 '죽림향' 의 다향을 음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득도한 표정의 노승이 십년전 중원무림을 피로 씻기 위한 혈로를 걸었었다니...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린 지객원주가 차를 마신후 입안에 감도는 그윽한 향기를 음미하고 있는 검후쪽으로 시선을 돌리었다. 비록 포달랍궁의 전설이라는 달라이라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검후라는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객원주였다.

그리고 검후 옆에 있는 해동신룡이라는 젊은이도 그 명성이 검후 못지 않았다. 마교의 십대장로중의 한명인 권마황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구대 문파의 장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방문해도 지객원에 비상이 걸릴 만한데 이들 세명이 무슨 목적으로 동행하여 소림사를 방문 하였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검후의 인품을 보아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이들 세명이 합세하여 소림과 대적 하기라도 하면 대 소림사의 최대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위험하기 이를데 없는 노승과 아직은 정체를 알수 없는 해동신룡이라는 젊은이 보다는 검후에게 직접 묻는 것 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검후님, 혹시 저희 소림사에서 도와 드릴 일이 있으신지요?"

침착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지만 이순간 지객원주의 가슴속은 불안과 초조감으로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검후의 한마디에 소림사의 평화가 지속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아! 대사님이 묻지 않았다면 깜빡 잊을뻔 하였네요. 대사님, 죽림향 맛이 정말 일품입니다... 이분이 아직까 지 소림사에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계시다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면서 검후가 품속에서 봉인된 서신을 꺼내 지객원주에게 전해 주었다.

"휴, 서신 한 장을 전해 주기 위해서 검후가 직접 소림사까지 오다니...

내심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객원주가 서신의 수인자(受人者)를 살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미 은 거에 들어가신 소림삼신승 중의 한명인 공지대사에게 전해져야 하는 서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림사의 장로회의를 소집한 혜원대사는 십여명의 장로들이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아무리 달라이라마라고 하여도 태사조의 수행을 방해하여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태사조님이 아 니면 오늘의 사태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으니 태사조님에게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한치의 밀림도 없이 대립되 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담한 회의 분위기를 바라보며 장로회의에서는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판단하던 장문인이 회의장 안 으로 지금 막 들어오는 노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객원주인 혜광사제였다.

"장문인, 검후께서 소림사를 방문하신 목적이 이 서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랍니다."

지객원주에게서 봉인된 서신을 받아본 혜원대사가 서신의 수인자와 발인자를 살펴 보고는 깊은 시름에 잠기었 다. 수인자가 이미 은거에 들어가신 소림 삼신승중의 한분이었기 때문이다.

은거는 하셨지만 소림 소신승 이라고 불리우는 지장이라는 제자를 가르치며 반은거 중이신 공무사백이라면 부 담없이 서신을 전해줄 수도 있겠지만 소림 삼신승중 최고의 무승이시며 소림칠십이 절기중 이십여 가지를 익 히시고 새로운 무학을 창조하시겠다며 제자를 기르는 것조차 거부하고 외부와의 일체 연락을 끊고 참선중이신 공지사백에게 속세의 때가 묻은 서신을 전해 주기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보타문의 장문인인 검후가 직접 가지고온 서신을 전해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휘유'

속이 깊고 마음이 넓어서 으뜸가는 지혜를 깨달을 것이라며 그의 사부가 '혜원'이라는 법명을 지어준 장문인 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혜원은 자기에게 장문인의 법통을 물려주신 전대 장문인이 장문지보인 녹옥불 장과 함께 내리신 말씀이 떠올랐다.

'장문인이 된다고 하여서 크게 두려워할 것이 없다. 판단하고 결정하면 번민을 자초하는 것이지만 흐르는 물 처럼 순리에 따르도록 그냥 놓아두면 모두 제갈 길로 올바로 찾아가게 되어있다.'

"아!"

지금껏 의견 조정을 하지 못하는 장로들을 보면서 얼굴을 펴지 못하던 장문인의 인상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 하였다. 만사(萬事)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쉽게 생각하면 더 할 수 없이 간단한 이치였다.

달라이라마와 검후가 각각 가지고온 업보는 태사조님과 공지 사백이 풀어야지 자신과 여기있는 장로들이 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괜히 쉽게 풀 수도 있는 일을 악업인지 선업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서 나섰다가 어렵사리 꼬이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업보를 벗어나기 위해 인연을 멀리하고자 속세를 벗어나고서도 아직도 업보속에서 헤메고 있는 자신과 여러 장로들을 바라보던 장문인이 벌떡 일어나 녹옥 불장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시끄럽던 회의장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여러 장로님들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저희 소림사를 방문한 달라이라마가 누구신지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중원에서는 악불(惡佛)이라고 불리지만 서장에서는 생불(生佛)이라 불리는 분입니다.

생불이라면 태사조님에게 깨달음의 지혜를 나누어 주실 것이지만 악불이라해도 태사조님께서 마겁을 물리치고 해탈의 길로 가실 수 있는 도량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태사조님의 의향을 물어보지도 않고 여기서 결정할 사항이 아니므로 제가 절세곡을 방문하여 태사조님을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평소 지극히 순후한 장문인이 확고한 결심이 섰다는 듯이 녹옥불장을 치켜들고 강경한 어조로 말을 하자 회의 장 내에서는 더 이상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장로가 없었다. 장경각주인 혜지 대사가 회의장을 둘러본 후 장로 들을 대표하여 장문인에게 말을 하였다.

"장문인의 고견이 옳은 것 같습니다. 태사조님의 높은 도력이시라면 아무리 달라이라마가 방문하셨다 하더라 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달라이라마가 왔다는 사실을 태사조인 범각사백에게 통보하는 것을 가장 강력히 반대했던 장경각주가 장문인 의 설법을 듣고 마음을 바꿔 장문인의 의견을 지지하자 지겹던 논쟁은 마침내 끝을 맺었다.

"지객원주! 이 서신은 지객원주께서 공지 사백님께 직접 전해 주시지요."

장문인이 검후가 가져온 서신을 지객원주에게 건네주자 지객원주가 공손히 서신을 받은 후 회의장 밖으로 나 갔다. 역시나 녹옥불장을 들고 회의장 밖으로 나선 혜원은 눈을 들어 파아란 하늘을 응시하였다.

파아란 하늘에는 하얀 조각구름 한 개가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하얀 조각 구름은 이리저리 형상을 바꾸며 소림사의 하늘위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소림사의 승려들중 한명도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막고자 하지 않고 있 었다. 옷깃을 스쳐가는 바람이 소림사 담장을 타고 넘어와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그걸 쫒아내려고 따 라 다니는 제자도 없었다.

천년 고찰 소림의 전통은 그 모든걸 묵묵히 순응하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 떠 가는 조각 구름이 폭우가 되고 옷깃을 스쳐가는 작은 바람 한줄기가 광풍이 되어 몰아칠 것을 두려워하여 막으려하는 어리석음 은 소림사 그 어느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토록 두렵고 초조함에 가슴 졸이던 혜원 대사의 입가에 작은 미소 한 개가 드리워졌다. 그 미소 한 개를 입 에 문채로 장문인은 절세곡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객원의 뒷편 죽림을 걷던 은성이는 동자승의 말처럼 이곳의 지기(地氣)가 특이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 다.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 죽림에서는 오행진기의 토기(土氣)속에 금기(金氣)가 매우 강하게 흘러 나오고 있 었기 때문이다.

땅속에 철광석이 묻혀 있다고 하여도 이처럼 강한 금기가 흘러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막강한 기세였다. 소림 사에 오르면서 가졌었던 잠시간의 깨달음으로 상단전이 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은성이는 심안이 무의식 과 연결되어져 가고 있었다. 예전처럼 의식을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심안이 운용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 다. 그러기 때문인지는 몰라 도 은성이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죽림속에서 뻗쳐나오는 금기의 정체가 은성이의 영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림속을 유유자적하니 걷던 은성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유난히 쌍골죽이 많이 자라난 곳이었다.

대나무의 줄기조차도 작은 대나무같이 틈실한 쌍골죽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는데 땅 위에 한자나 올 라서까지 대나무의 잔뿌리들이 뻗어 있었다. 은성이와 보조를 맞추어 조용히 죽림속을 걷던 검후는 은성이가 멈추어서자 같이 멈추어 선후 주위에 널린 쌍골죽을 바라 보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은성이와 마음이 통하는 지라 대화가 없어도 분위기가 어색하지 않고 은성이와 같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검후였다. 그런데 발걸음을 멈춘 검후는 허리에 메워둔 빙검 여래혼 이 조금씩 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검후가 검 손잡이를 잡고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자 울리던 빙검이 조금씩 잔잔해지더니 간신히 떨림이 멈추었다.

쌍골죽이 유난히 많은 곳에 멈추어 선채 잠시 명상에 잠긴듯한 은성이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검후도 은성이를 따라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은성이와 검후의 뒤 꽁무니를 따라 다니던 죽풍(竹風)도 죽엽(竹葉)을 흔들며 역시 나 그 자리를 떠나갔다.

죽림을 벗어난 죽풍은 지객원의 정자 위에까지 따라와서 한 바퀴 휘돌고는 다시 죽림속으로 사라져 갔다.

"스승님, 쌍골죽 구경은 잘하셨는지요?"

은성이와 검후가 정분이 있음을 눈치채고는 굳이 정자에 남겠다면서 고독을 즐기던 달라이라마가 어린 스승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예, 쌍골죽 뿐만이 아니라 불영검(佛影劍)까지 구경하고 오는 길입니다."

"불영검도 있는지요?"

"불가의 불도가 깃들여 있으니 불영검이라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좀전에 마신차는 부처님의 영기가 맺혀 있 으니 '죽림향'이 아니라 '여래향(如來香)'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허허! 소림사에 눈은 많지만 진실한 혜안은 없는가 봅니다."

"하하! 설마하니 천년 소림의 전통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욕심이 있는 자는 알지 못하고 깨 우침을 얻은 지혜로운 자는 욕심과 집착이 없어서이겠지요. 덕분에 오늘 여래향을 맛볼 수 있지 않았습니까?"

은성이와 달라이라마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유쾌하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검후에게는 알 것도 같 고 모를 것도 같은 애매모호한 말들 뿐이었다. 하지만 '죽림향'인지 '여래향' 인지는 몰라도 좀전에 마신 차 맛을 둘 다 감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검후가 조용한 목소리로 동자승을 불러 죽림향을 다시 맛 볼 수 있느냐고 묻자 동자승은 다시 한 주전자의 죽 림향을 가져왔다. 정자안에 알싸한 다향이 짙게 풍겨져 갈때쯤 지객원주가 다가왔다.

"검후님, 공지사백님에게로 서신을 전했습니다."

"아니, 공지 대사님이 소림사내에 계셨는지요?..."

지객원주의 말을 들은 검후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하였다. 태사조님이 서신을 보낼 정도면 연세가 많을 것으 로 추정하고 이미 속세를 등졌을 것으로 생각하던 검후였다. 이미 고인이 되신 태사조님의 원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 서신을 가지고 왔지만 설마하니 공지라는 스님이 아직 까지 생존해 있을 줄이야...

"예, 연세는 많으시지만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그런데 공지 사백님께서 검후님을 좀 뵙자고 하십니다."

"저를요?"

까마득한 후배인 자기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서신을 가져온 당사자이니 아니 갈 수도 없는 검후 였다. 확실치는 않지만 태사조님의 근황을 물어보시기 위해서 부르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가실까요?"

검후가 은성이를 바라보며 금방 돌아오겠다는 눈빛을 보인후 지객원주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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