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2장 :
"무엇이...!"
지금까지 득도한 고승처럼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고요한 신색으로 묻고 답하던 노승이 은성이의 대답을 듣고 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는 걸음을 멈춘채 새삼스런 눈빛으로 은성이를 바라보더니 잠시 후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노승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시선을 지면으로 향한 채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런 노승의 온몸이 잔잔 이 떨리고 있었다. 일각여나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던 노승이 고개를 들어 은성이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하지만 처음과 같이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소시주, 어제의 노납의 몸이 오늘과 다르고 어제의 노납의 마음 또한 오늘과 다르므로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닐진데 나의 존재가 실존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이 화두(話頭)로 인하여 밤을 지새운 세월이 몇 해던가?
그러나 아직까지도 명백히 풀리지 않아 번민의 세월속에서 해탈의 길을 미뤄 두기까지 한 고통스럽고 잔인한 화두였다. 대각하여 해탈하고자 침식을 잊고 수행에 몰두하던 노승의 앞길을 만장절벽(萬丈絶壁)으로 막아선 후 좀처럼 길을 비키지 않는 이 화두에 대한 노승의 집착과 번민을 대변하듯 은성이에게 질문하는 동안 노승 의 표정은 수 차례 변하고 있었다.
수십년동안 고민한 나도 깨닫지 못한 것을 어린 네가 알 수 있겠는냐는 멸시의 표정과 어차피 나라는 존재가 없으니 이런 질문도 무의미하다는 조소의 표정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화두에 대한 답을 은성이가 말해주기를 저 가슴속 깊숙한 밑바닥에서부터 처절하게 갈구하는 애원의 표정이 가장 강했다. 수십년 동안 진 리각성을 위해 애써 정진한 노승조차도 깨우치지 못한 화두...
그러나 은성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선사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완성을 추구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도 그리고 태 어난 이유도 완성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중에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는 상(像)에 이름이 지어져 있는 것이지요. 옆에 있는 이 바위도, 우리 가 살고 있는 이 대지도 그리고 하늘 위에 떠 있는 일월(日月)과 뭇 별 조차도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변해가 고 있습니다. 선사님의 어제가 오늘과 다르고 오늘과 내일은 다르지만 그 변화하는 모든 것이 바로 선사님인 것입니다."
은성이의 조용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를 듣는 동안 노승의 여윈 몸은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떨리고 있었다.
은성이가 나이어린 속세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수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노승이 떨리는 목소리 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시주님, 한.. 한가지만 더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불존(佛尊)의 말씀중에 나를 잊고 남을 잊고 그 리고 만물을 잊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어떤 가르침인지요? 좀전에 시주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존재 속에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깃들여 있으니 '나'를 깨달으면 천지만물의 대도를 깨달을 수 있 다는 말과는 상충되지는 않는지요?"
은성이에게 가르침을 원하는 노승의 눈빛은 구도의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진지했다.
아마도 노승이 부처님을 직접 만났을 때나 지어 보일 존경스런 표정과 눈빛이었다.
노승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자 발길을 멈추고 노승에게 답하는 은성이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하지만 노승이 질 문하는 내용이 그 동안 명상수련을 하면서 천부경(天符經)속에서 나름대로 깨우친 천지조화의 이치중의 일부 였기 때문에 대답이 막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은성이와 노승의 대화 내용이 너무 현묘한지라 옆에 있는 검후도 둘사이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고 오가는 대화 내용을 한자도 빼먹지 않고 외워 두겠다는 듯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선사님, 상충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진리들이 많지만 무릇 큰 진리는 하나뿐입니다. 그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큰 진리는 너무나 크고 형체가 없으며 자유롭고 쉽게 말로써 설명 할 수 없기 때문에 큰 진리에 접하는 사람마다 큰 진리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큰 진리 의 일면만을 바라보며 생기는 폐단이지요.
하지만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큰 진리는 어느쪽으로 접근해도 정진하면 마침내 관통할 수 있습니다. 나를 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요? 바로 나를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를 알고 남을 알고 그리고 세 상을 알아야만 나를 잊고 남을 잊고 그리고 세상을 잊을 수가 있습니다. 수행의 방법을 알려 준 것이지요. 나 를 알아 나에 대한 궁금증이 없어야만 진정으로 나를 잊을 수 있습니다."
은성이가 대답하는 동안 눈을 감고 은성이의 말을 경청하던 노승은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서서히 안정되 고 진지함으로 가득했던 표정도 화사하게 풀려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은성이의 대답이 끝날 즈음하여 노승 의 표정은 불타와도 같이 성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은성이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말인지 아니면 은성이가 설법한 내용에 대한 감탄인지 불호를 외운 노승이 은성 이를 향해 합장을 한후 허리를 깊이 숙여 뜻 모를 예를 표하였다.
"스승님, 구도자의 대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이가 소용없으며 먼저 깨우친 사람이 스승이라고 알고 있습니 다. 오늘 제가 스승님을 만나 크나큰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억겁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가르침과 은혜를 베푸셨으니 스승님이야말로 제 심중(心中)에 진정한 스승님이십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제자를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노승이 자신을 스승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하자 은성이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만난지 반시진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이가 일갑자나 어린 자기를 스승으로 모시겠다니... 하지만 문제는 노승이 진정으로 제자되 기를 원하고 있다는데 있었다. 한참을 심사숙고 하던 은성이는 마음에 부담은 조금 되지만 노승을 제자로 삼 기로 결심하였다.
노승의 말대로 오늘의 만남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았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노승이 구도에의 의지가 견고하 므로 자신이 천부경을 참오하며 얻게 되는 깨달음을 조금씩 전해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스 승이라고 하여도 말까지 놓을 수는 없었다.
"선사님께서 저를 스승으로 불러 주시겠다니 저의 부족함을 잘 알고있는 저로서는 심히 당황스럽습니다. 하지 만 선사님과의 오늘의 인연이 이미 예정된 숙명인 것 같으니 부족한 제가 선사님께서 마음공부 하는 것에 대 한 사부가 되겠습니다."
은성이가 노승에게 스승이 되겠다는 말을 하자 노승의 입가에 띈 염화시중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조용한 걸음으로 은성이의 앞에 선 노승이 이윽고 은성이를 향해 스승으로 모신다는 의미의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 리기 시작하였다. 구배지례를 올린후 노승은 은성이를 향해 공손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부족하고 늙은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신 은혜에 보답코져 남은 평생을 선행을 쌓고 스승님에게 누가 되는 일은 삼가겠습니다. 제자는 '패륵' 이라 불리우며 서장 포달 랍궁에 거하고 있습니다."
"포달랍궁... 선사님께서 그 유명한 포달랍궁에 있다니 의외로군요. 하지만 포달랍궁은 소림사와 가는 길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유로 소림사에 가시는지요?"
처음으로 얻은 늙은 제자가 저 멀리 서장에 있는 포달랍궁에 거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은성이는 요즈음 검후 와의 인연으로 마교와 좋지 못한 관계에 있는 이유로 괜한 걱정이 앞섰다.
"제자가 그릇된 소견으로 소림사를 방문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잘못을 범하기 전에 스승님을 만나게 된 것이 모두 부처님의 가호인 것 같습니다. 스승님, 심려 놓으십시오. 제자는 소림사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은성이가 소림사에 가는 이유를 물으면서 얼굴에 근심스런 표정을 떠올리자 은성이의 내심을 이해한다는 듯이 노승은 마음을 바꾸어 소림사와 친구가 되기로 결심하였음을 알렸다.
한 점의 내기조차 느껴질 수 없는 노승이 무슨 힘이 있어 소림사를 운운한다는 말인가?
설령 노인이 소림사와 원수가 되겠다고 하여도 이 거대한 천년고찰에서 콧방귀조차 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성이의 제자가 된 노승은 오늘 자기가 은성이에게 깨우침을 얻어 소림사와 친구가 되기로 한 결정이 소림사의 운명을 가름하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선사님, 한 생각만 버리고 세상을 보면 모든 중생들이 부처로 보이고 서방정토가 바로 이곳이지요."
은성이가 말한 내용은 노승도 제자들에게 숱하게 설법한 구절이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오늘처럼 가슴 깊이 다가온 적은 없었다. 처음에 소림사에 오르기 전의 마음과 은성이를 만 나 깨우침을 얻고 마음을 돌린 지금의 마음은 지옥과 극락 만큼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노승은 지식과 깨우침을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은성이의 한마디를 속으로 몇번이나 되뇌여 보았다.
소림사의 정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하지만 소림사의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생이 고통받는 일백팔 개의 번뇌를 모두 잊어야만 한다는 의미로 정문앞에 설치된 일백팔개의 돌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돌계단을 오르던 은성이는 노승이 돌계단을 오르느라 힘들 것 같아 옆을 돌아보니 생각 외로 늙은 제자는 힘들어 하는 기색도 없이 돌계단을 잘 올라가고 있었다.
"선사님, 힘들지 않으신지요?"
혹시 자기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노구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지나 않는지 걱정이 된 은성이가 노승에게 물 어 보았다. 대답하는 소리가 숨이라도 차 있다면 올라가는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다.
"아닙니다. 다행히 제자가 양신의 법을 익혀 몸은 젊은 사람 못지 않게 강건합니다."
"..."
노승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어본 은성이는 의아심을 느꼈다. 노승과 처음 만났을 때 노승이 내력을 가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례인줄 알면서도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보았던 은성이었다. 그렇지만 노승에게서는 내공을 익 힌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노승은 스스로 양신의 법을 익혔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노인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라도 숨이 가빠할 일백팔개의 계단을 오르면서 전혀 힘들어 하 는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백팔개의 계단을 오르니 정문 한쪽에 젊은 지객승 한명이 작은 탁자에 문방사우를 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정문을 오가는 향화객(享花客)들이 지객승에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할뿐 매우 따분할 것 같다고 생각 하고 있는데 검후가 지객승 앞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탁자 위에 있는 방문첩에 자기의 이름을 적었다.
'검후 고은하'
그러자 지금까지 정문을 오가는 사람들과 경건하고 공손한 안색으로 반장지례에만 열중하던 지객승이 깜짝 놀 라는 표정으로 검후와 일행들을 바라본 후 급히 일어나 검후에게 예를 표한 후 공손하게 물었다.
"보타문의 검후님이신지요?"
"예, 그렇습니다. 소림사에 볼일이 있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검후의 신분을 확인한 지객승은 급히 탁자옆에 있는 동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작은 동종에서 울려 퍼지는 청아한 종소리가 정문 안쪽으로 퍼져 나갔다. 내부에 중요한 손님이 방문하였음을 알린 지객승은 노승과 은성이에게 한 손을 가슴 앞에 들어 반장의 예를 취한 후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일행분들께서도 방문첩에 이름을 적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지객승은 무림에서 소림사의 장문인과 동일한 배분인 검후와 동행한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 한 듯 매우 공손한 어조로 부탁하였다.
방문첩 쓰는 일이 뭐 어려울까?
은성이가 붓에 먹물을 담뿍 묻혔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이름을 쓰려니 뭐라고 써야할지 난감하였다. 조금 망 설이던 은성이는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 갔다.
'해동신룡 이은성'
목검문의 장문인이 붙여준 명호이지만 왠지 과분하다고 생각하던 명호이었다. 하지만 은성이는 이미 해동신룡(海東神龍)이라는 이름이 강호 무림에 크게 떨쳐져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협께서 바로 목검문에서 마교의 권마황을 물리치셨다는 해동신룡 이 대협 이신지요?"
지객승이 자신을 알고 있자 은성이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검문에서의 일이 있은 후 한달여 시간밖 에 되지 않았는데 안휘성에서 벌어진 일을 어찌 하남성 소림사의 스님까지도 알고 있다는 말인가?
뭐, 자랑할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 은성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쭈삣거리자 검후가 활짝 웃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예, 해동신룡 이은성 대협이십니다."
지객승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은성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노승도 방문첩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하지 만 지객승은 정도 무림인들의 우상인 검후와 은성이를 바라보느라 노승이 방문첩에 적어놓은 이름과 신분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지객승이 울린 동종 소리를 들었는지 소림사 내부에서 황색 가사를 입은 중년 스님들이 세명 걸어 나왔다. 황 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정문쪽으로 다가오자 젊은 지객승이 급히 다가가 그들에게 검후와 은성이를 가리키 며 무어라 말을 하자 천천히 걸어오던 중년승 한명이 성급히 절내로 들어가고 남은 두명의 중년승인도 발걸음 을 빨리하여 검후와 은성이에게로 다가왔다.
"아미타불, 검후님과 이대협께서 저희 소림사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황색가사를 입은 중년 스님을 따라 소림사 안으로 들어서던 은성이는 소림사의 광대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사문인 동방파에 비해 규모가 열배는 큰 것 같았다. 몇 아름은 될 것 같은 거대한 나무에 붉은 물감을 입혀서 기둥을 삼았는데 서까래조차도 아이들에게는 한 아름이나 될 듯한 두께였다. 비 바람에 적당히 바래고 퇴색지어진 건물들은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러워서 천년 역사를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었다.
소림사 내부로 들어선지 일다경쯤 되었을때 황색 가사에 붉은 피풍의를 걸친 두명의 노승이 황색 가사만 걸친 스님들과 함께 은성이의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아미타불, 먼길에 고생들 하셨습니다. 저희 소림사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흰수염이 멋지게 난 붉은 피풍의의 노스님이 은성이 일행에게 인사를 하자 지금까지 은성이 일행을 안내한 중 년의 스님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방금 인사한 노스님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저희 장문인 이십니다."
대소림사의 장문인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는 말에 검후와 은성이는 황급히 포권지례를 하고 검후가 답례를 하 였다.
"대 소림사의 장문인께서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소림사 장문인'
무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이보다 높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지고한 위치였다.
무림맹주나 무당파 장문인만이 동일한 위상을 가지고 있을뿐 다른 구대문파의 장문인과 검후에 비해서도 반치 쯤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의 자리였다. 그런 소림사의 장문인이 지객 원주라는 장로가 따로 있는데 도 불구하고 직접 마중을 나왔다는 것만 보아도 검후와 은성이에게는 최상의 대우였다.
그런데 무림맹주와 동일한 위상을 가진 소림사의 장문인이 직접 마중 나와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는데도 고개조차 까딱이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은성이와 검후의 뒷편에 서서 고개를 들어 멀리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는 패륵선사였다. 패륵선사의 안하 무인적인 행동에 장문인의 뒷편에 서 있는 황색 가사를 걸친 스님들중 몇 명은 얼굴까지 붉힐 정도였다.
장문인의 옆에서 은성이와 검후에게 반장 지례를 하며 법명을 밝히던 붉은 피풍의의 노스님도 패륵선사의 행 동에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검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검후님, 함께 오신 스님은 어느 방면에서 오신 고승이신지요?"
소림사의 노승이 자신에 대해 묻자 시선을 내려 소림사의 장문인과 노승을 일별한 패륵선사가 대답할 가치조 차 없다는 듯이 다시 시선을 하늘가로 올리자 검후가 입장이 난처하다는 듯이 은성이를 응시하였다.
노승이 포달랍궁의 스님이며 방금전에 은성이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아는 것도 없는 검후였기 때문이다.
은성이도 자신의 제자인 패륵선사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진즉부터 느끼고는 있 었지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관하고 있었다. 검후와 자기는 소림사의 장문인 이라는 신분을 제쳐 두고라도 무림의 선배로써 예를 다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노승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승이 비록 자기의 제자이지만 아직은 소림사를 방문한 이유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다만 노승이 소림사와 친구가 되겠다고 분명히 약속해 놓고서도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다소 당혹 해 할 뿐이었다.
"혜광 대사, 패륵..."
은성이가 소림사 장문인 옆에 서 있는 지객원주 혜광대사에게 패륵선사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할 때였다.
사내를 행보하는 모든 승인은 물론이고 소림사를 방문한 모든 방문객들이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걷기 때문에 적막함까지 돌던 신성한 사찰내에서 쿵쾅거리며 뛰어오는 승려가 있었다.
바로 소림사 정문에서 방문첩을 관리하던 젊은 승려였다. 그러자 지객원주인 혜광대사의 눈쌀이 잔뜩 찌푸려 졌다. 사내(寺內)에서는 무술 수련시를 제외하고는 뛰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인내(忍耐)와 자중(自重)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야 하는 승인이 경망되게 뛰어 오다니 ...
하지만 중요한 외부 손님들이 와 있으니 여기서 직접 나무랄 수도 없었다.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도 지객원 의 규율을 좀더 엄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던 혜광은 젊은 지객승의 손에 방문첩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고 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문에 비치되어 있어야 하는 방문첩을 들고 예까지 뛰 어 오다니...
"정허, 무슨 일이냐?"
지객원주가 경망되이 뛰어온 정허스님을 나무라는 듯이 조금 높은 목소리로 묻자 정허는 대답을 회피한 후 들 고 있던 방문첩을 펴서 공손하게 지객원주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정허스님에게서 방문첩을 받아서 훓어 본 지 객원주의 얼굴이 하얗게 변화되었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기 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성이와 함께 온 노승을 바라보더니 떨리는 손길로 방문첩을 장문인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자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수행이 깊어 보이던 대 소림사의 장문인조차 방문첩을 바라본 후 안색이 변화되었다.
"아미타불, 포달랍궁의 달라이라마께서 저희 소림사를 방문해 주시다니...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모시는데 실 례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림 장문인의 말을 듣고서야 은성이는 노승이 한 행동과 지객원주와 장문인의 안색이 변한 이유를 알수 있었 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포달랍궁의 일개 궁도려니 생각한 노제자가 포달랍궁의 살아 있는 신으로 불리우는 달라이라마라니...
"내 격식을 차리려고 마음먹었으면 혼자 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본래는 소림사 정문을 밟고 들어올 생각이었 지만 스승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용히 범각만 만나고자 하니 안내해 주시오."
노승의 한마디 한마디는 실로 무시무시하기 이를데 없었다.
소림 장문인 혜원대사의 이마에 땀방울까지 돋아나게 할 정도였다. 소림사의 정문을 밟고 올 생각이었다니 누 가 들으면 우스워할 말이었다. 하지만 혜원대사의 귀에는 결코 우습게 들리지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늙은 스 님이 포달랍궁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달라이라마가 맞다면 소림사는 오늘 일대 겁난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였다고 알려진 달라이라마의 스승이 살아 있다니..휴! 생각만으로도 등뒤에 식은 땀이 돋아났다.
'범각대사'
무림에서는 이미 성불하였다고 알려졌으며 소림사의 장로들만이 생존 사실을 알고 있는 혜원의 태사조였다.
소림사의 조사동(祖師洞) 옆에 있는 절세곡(絶世谷)에 은거하신지 이미 삼십년이나 지났으며 몇 년전부터는 아예 곡기조차 끊어서 자신도 일년에 한 번씩 문안 인사차 들리는 소림 삼신승을 통해서 생존 사실만 간신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명망있는 사람이 만나기를 희망한다고 하여도 절대로 태사조님의 청정지처를 어지럽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포달랍궁의 달라이라마라니...
소림 장문인의 이마에 깊은 내천 자가 그리어졌다.
"일단 지객원에 들려서 선차나 한잔씩 하시지요. 그리고 달라이라마님은 소승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시기를 바 랍니다. 아미타불!"
"알겠소, 하지만 장문인께서는 노납이 서장에서 이곳 소림사까지 범각대사를 만나기 위해 왔다는 것을 명심해 주기 바라오."
패륵선사가 소림장문인에게 다소 엄포성 부탁을 한후 은성이와 검후와 함께 지객원주를 따라 가는 것을 바라 보는 혜원대사의 얼굴에 조급함이 어리어졌다. 오늘은 자기가 장문인으로 취임한 이래로 소림사의 운명을 가 름할수도 있는 가장 위급한 상황이었다.
곧바로 장로회의를 열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혜원대사가 총총히 자리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