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1장 :
"오라버니! 아..하세요."
보타문의 계율에 따라 육식을 하지 못하는 검후가 오리구이를 먹고 있는 은성이에게 찹쌀에 조와 단팥 등을 섞어 여덣가지 색이 우러나온다는 팔보반을 한 수저 건네 주었다.
"어..그래, 아..."
검후가 한 수저 가득 담아 내민 팔보반을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흘릴까봐 은성이가 입을 크게 벌린 후 받아 먹 자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웠는지 검후가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으며 말을 하였다.
"오라버니, 천천히 드세요. 물도 마시고요."
검후가 청학 두 마리가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문양이 새겨진 물잔을 들어 은성이에게 건네주자 물잔을 받아 반 쯤 마신 후 입속에 든 음식을 모두 넘긴 은성이가 음식맛에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지긋이 검후를 바라보며 말 을 받았다.
"하매가 직접 먹여 주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 맛있는데! 내 생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인 것 같아."
"푸훗! 오라버니도, 참..."
검후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한껏 띄었다.
"그런데 하매, 이곳 중원에서는 어제 목검문에서 발생했던 일처럼 대규모 싸움이 자주 발생하는 거야?"
중원에 온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처절하고 잔인한 싸움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중원 무림의 호전성(好戰性)에 다소 놀라고 있던 은성이였다. 해동에서는 왜구들이나 이민족의 침략시에만 대규모 참살이 벌어지고 있었 다. 이처럼 무림인들이 편을 갈라서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 웠다.
"음...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예요. 이백여년전 무림맹이 창설된 가장 큰 목적이 바 로 마교도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하는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죠. 이백여년 동안 무림맹과 마교의 역사는 한 마디로 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수 있어요."
말을 하던 검후는 갈증이 이는지 물을 한모금 마신 후 재차 설명을 하였다.
"십년전에도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해요. 마교에서는 서장의 포달랍궁을 끌어들였고 무림맹에서는 대리국과 해 동에서까지 지원을 나올 정도로 큰 싸움이 벌어졌었데요."
"해동?"
검후에게서 '해동'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은성이가 검후의 말을 잘랐다. 십여년전에 해동에서 무림맹 을 지원하기 위해 고수들이 파견되었다면 사부님인 자운검이 중원에 간 이유가 대충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왜요, 혹시 오라버니의 사문에서도 무림맹에 사람을 파견하셨나요?"
열변을 토하던 검후가 다시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은성이에게 물어왔다.
"아니, 확실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공교롭게도 사부님이 중원에 간 시기가 맞아 떨어져서 말이야."
"저도 그 당시 해동에서 고수들이 지원 나왔다는 것만 알 수 있을뿐 더 자세히는 모르는데요..."
"음..."
은성이는 신검을 없애고 사부님을 찾기 위해서 중원에 들어왔지만 사부님이 계신 정확한 위치는 물론이고 사 부님의 생사 여부도 아직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부님이 남기신 물건이라도 있으면 오귀부(五鬼符)를 사 용하여 오귀(五鬼)를 부려 사부님의 행적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사부님이 물려주신 청은검조차도 신검과의 대결에서 부숴져 버리고 현재는 사부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할수 없이 무림맹을 찾아가서 사부님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고 무작정 무림맹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검후에게서 십년전에 해동에서 온 고수들이 무림맹을 도와주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사부 님을 쉽게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매, 그때 무림맹을 지원나온 해동의 고수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은성이가 매우 진지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몇 분이 계속 무림맹에 남아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저도 무림맹에는 초행길이라 더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
아직도 해동에서 온 고수들이 무림맹에 남아 있다면 그중에 사부님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동안 소식조차 듣 지 못했던 사부님이지만 무림맹에 도착하면 만날 수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은성이의 가슴이 뛰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지?"
은성이는 사부님을 만나고 신검을 찾기 위해서는 중원 무림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식 사와 함께 나온 청록색 주전자를 들어 검후와 자기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차를 따르던 은성이는 검후의 목부위의 살결이 백옥처럼 하얗다는 것을 새삼스레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싸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승부로 끝났데요. 그런데 어떻게 싸움이 끝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은성이가 건네준 찻잔을 들어 다소곳이 눈을 감은채 차 맛을 음미하는 검후를 보니 다시금 사랑스러운 감정이 물씬 치밀어 오른 은성이는 대답조차 잊고 잔잔한 미소를 띈 채 검후의 옥같은 얼굴을 응시하였다. 한참이 지 나도 은성이의 대답이 없자 살포시 눈을 뜬 검후는 은성이가 뚫어져라 자신의 얼굴만을 쳐다보자 얼굴을 붉히 며 앵두같은 입술을 열었다.
"치, 오라버니도..."
살짝 눈을 흘기는 모습이 또한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데가 없었다. 검후를 바라보는 은성이의 미소가 더 욱 짙어졌다.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데?"
은성이의 다정스런 목소리는 그때의 상황을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을 속삭이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 웠다. 그런 은성이의 행동과 목소리가 싫지는 않은지 검후도 감정에 취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바로 포달랍궁 때문이예요. 처음에 마교를 지원나온 포달랍궁의 고수들은 이십여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생각 보다 그들의 무위가 엄청 강했데요. 무림맹의 숱한 고수들을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마교측의 수뇌부에게도 경 계감이 들게 할 정도로 강했다나 봐요. 무림맹과 마교의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려 가려고 할 때 포달랍궁에서 는 오백여명의 고수들을 중원으로 급파하였데요."
"오백명씩이나? 그렇게 강한 고수들이 오백여명이나 몰려오면 무림맹에서는 대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맞아요. 만약에 포달랍궁의 고수들 오백여명이 마교측에 가세해 무림맹과 맞섰다면 지금의 무림맹은 남아 있 지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공교롭게도 포달랍궁의 오백여 고수들은 중원으로 들어오지 못했어요."
"왜?"
같은 이야기라도 무덤덤하게 설명하는 사람과 흥미진지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흥미진지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재주는 후천적으로도 배울 수 있지만 검후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 같았다.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아요. 천군만마(千軍萬馬)의 기세로 휘몰아쳐오던 포달랍궁의 고수들이 갑자기 발길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마교를 돕던 이십여명의 포달랍궁 고수들 까지도 서장으로 돌아갔는데... 하지만 전혀 추 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예요."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검후의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 든 은성이는 무의식적으로 그 추측되어진다는 것 을 물었다.
"뭔데?"
"첫번째는 마교 측에서 포달랍궁의 고수들이 대거 중원에 몰려오는 것을 거부했을 가능성이예요."
"왜?"
"포달랍궁의 엄청난 무위에 겁을 먹어서겠죠, 중원 무림을 석권하여서 포달랍궁에 갖다 바치기는 싫을 테니까 요."
"흠..맞는 말이네. 그럼 두 번째는?"
"두번째는, 사실 이 추측은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을 막았을 것이라는 추측이예요. 만약 에 어떤 세력이 막았다면 필경 소문이 났을 것인데 전혀 소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 명 혹은 몇 명이 포달랍 궁 수뇌진과 대결하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 마교도들조차 두려워할 정도의 무위를 가진 포달랍궁 오백여 고수들을 한 두사람으로 막아 섰을 수도 있다고?"
은성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추측은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기인이사 들이 넘쳐나는 중 원이니 꼭 불가능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예요..."
검후는 은성이가 빈잔에 다시금 차를 따라 건네주자 찻잔을 받아 차 맛을 음미한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두 번째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요. 포달랍궁도들이 물러가자 마교측에서도 갑자기 지금까지 무림맹과 우세하게 맞서 왔던 고수들을 일제히 후퇴시켜 잠적해 버렸는데 이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나 고수가 나타났을 경우에나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니까요."
실내에는 잠시 적막이 멤돌았다.
포달랍궁 고수들의 가공할 무위와 또 그들을 막았을 수도 있다는 중원무림의 숨은 기인들...
은성이가 끓어 오르는 피를 차분히 식히고 있는 동안에 검후는 험난한 강호에서 제마멸사(製麻滅邪)의 기치를 내건 보타문을 이끌어 가야 할 책임감에 가슴이 다소 무거워져 있었다. 천여년 역사를 가진 보타문의 미래를 자신에게 물려준 전대 검후인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제마멸사'의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설사 죽음이 따를지라도 그 길을 회피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하는 검후였다.
"하매,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호북성으로 가는거야?"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도 다 마신 은성이가 중원 지리에 대해 자신할 수 없다는 투로 검후에게 물었다.
"저.. 오라버니, 여기서 무림맹까지 가는 최단 거리는 호북성을 거쳐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이지만... 사문의 일로 잠시 하남성에 들렀다 가야 될 것 같아요."
은성이가 사부님의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듣고 싶어서 무림맹에 가는 것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지라 하남성에 들렸다 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검후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조금 묻어 있었다.
"하남성? 그러지 뭐, 검후의 일이 나의 일이니 같이 하남성에 갔다가 사천으로 가지."
하지만 은성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남성에 동행해 준다는 말을 하자 검후의 가슴속이 탁 트이고 은성이 에 대한 믿음이 한결 깊어졌다.
"오라버니, 하남성에는 무슨 일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검후가 사슴처럼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글쎄..."
"바로 만괴수살진을 만드신 태사조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서신 때문이예요. 이미 돌아가 신지 삼십여년이나 지난 태사조님이지만 소림사의 공지대사에게 전해주라는 유품이 있길레 가지고 온 것이예 요."
"공지대사..."
"아마, 태사조님 생전에 교분이 있으신 분일 것이니 현재는 입적하셨을 것 같아요."
"하하, 어쨋든 하매 덕분에 중원 무림의 태산 북두라는 소림사 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네. 우리 바로 출발할까?"
은성이는 소림사라는 말을 듣자 왠지 들뜨고 기대감이 차 올랐는지 검후를 채근하였다.
"호호! 알았어요. 오라버니."
검후도 기분이 들뜨기는 마찬가지였다.